더 내려놓음
이용규
p92
우리 주변에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하기보다 자신의 선함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슈바이처 박사처럼 선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사람의 의로 이룬 일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과 주님의 의는 다르다. 내가 선해서 하는 일을 주께서 기억하지 않으실 수 있다. 주님으로부터 난 것만이 선하다.
p104
우리가 특정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모습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 자신이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을 지적하면 그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거나 분노하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어지기 전까지, 우리의 이런 약한 부분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스스로 자신이 없고 만족스럽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p111
당신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공격하는 말에 분노한다면 당신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반증이다.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과 당신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자아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어떤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정작 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상대의 말이 맞는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원인이다.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세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세상의 평가에 묶여 산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나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급급해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보고 평가하지 않는다. 네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내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너를 보는 기준이다."
p112
만일 우리가 이렇게 남과 비교하거나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자유케 함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을 늘 의식하며 사는 삶에 자유는 없다. 그 경우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p120
우리 주변에는 정의감에 불타는 의의 화신들이 있다. 처음에는 이들이 옳아 보이고 그들의 정의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비판의식에 투철한 이 의의 화신들에게는 영혼의 메마름과 내적 분노 그리고 관계의 단절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p120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 상처를 가진 상처받은 우리가 죄를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부분이 상처로 남는 이유는 자신의 자아 안에 특별히 취약한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연민과 집착 그리고 자기 의가 어우러져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고 미워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며 결국 관계가 깨어진다. 따라서 상처받은 일로 힘들어하며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는 데 머무른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상처받게 된 자기 속의 문제, 자기연민과 자기 의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성령님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린 큰아들로 남게 될 것이다.
p127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셨다. 나의 나되기까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오래 참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는 대상의 현재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신다. 나는 그의 미래의 변화된 모습을 알지 못한다. 또 나의 미래의 모습도 알지 못한다. 변화되지 못했던 나의 예전 모습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자라 보여도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내다보며 기대를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의 지혜이다.
p139
하나님께서는 왜 특정 상황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은 하나님은 세심하게 우리의 상황을 살피시고 최선의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p154
샤머니즘의 환경 가운데 있는 몽골에서 초신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다. 믿음 후에 오는 연단과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난 직후에 오는 축복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나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축복을 주시기 보다 많은 경우 믿음의 연단부터 주신다. 이로써 옥석을 가리신다. 하나님을 믿는 동기를 살피시고 또 그들의 믿음의 순도를 점검하신다. 우리가 환경과 상황을 보고 나서 잘 풀려야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환경을 믿는 셈이 된다.
p160
내가 몽골에서 경험한 바로는, 위기와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주님은 때로는 침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고통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기쁨을 얻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마 하나님을 뵙고서야 우리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마저 감사하게 될 것이다.
p183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 맡겨라. 미래의 계획, 꿈꾸고 있는 비전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겨 드려라.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구분하라.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과 섞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인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때마다 내 계획이나 경험에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은혜 받았던 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 '하나님은 원래 이렇게 역사하시는 분이야!' 라는 고정관념만 고집하는 자신의 틀이 깨져야 한다. 우리의 것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덧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p18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한 발을 디디고 한 발을 하나님께 디디면 근본적으로 세상을 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 발을 걸친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따라가는 법은 없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
p189
하나님 주시는 비전은 무엇이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있다. 즉 교수, 의사, 사업가 등 어떤 직업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
떤 삶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가가 우리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p201
우리의 관심은 늘 성공에 맞춰져 있다. 우리의 관심이 성공에 맞춰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성공이 하나님의 사역의 일환으로서 성공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한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이 되어야 한다.
p223
내가 받은 사명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것으로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내 영광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 일이 망했다고 느낄 때이다. 자신이 실패하고 또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순간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서운하다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패에 직면하는 반응을 보면 내가 정말 무엇을 위해 사명을 추구해왔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