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시집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에 대한 출판사 소개
김광희 시인의 시는 오늘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갖는 무미건조함과 비생명성을 신화적 세계의 소환으로 치유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통해 신명과 화해의 공존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그 대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시적 대응으로 그 가치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때문에 김광희 시 역시 당대의 현실에 빛나는 독특한 시적 위엄을 지닌다고 말 할 수 있다.
-김경복의 작품해설에서
시인의 말
미련이 많아서인지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군둥내 나고 촌스러운 물건이나 추억들,
투박한 사투리로 삶의 바닥에서 일어나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 혹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주술의 힘에 손을 빌기도 하는, 약하고
힘없는 이웃들의 애환, 물러터지고 무뚝뚝한 것들, 남의 탓이라고 돌려버리고 싶은 나의 흉허물들이
어설픈 나를 있게 한 것들이라서
다시 들춰보는 이 그리운 것들을 나누어 드립니다.
목차
1부 바람이 부는 대로
바람 들어 좋은 날
엉털씨의 새벽
어일장 1
어일장 2
소설小說 혹은 소설小雪
맨발로 가는 먼 집
봄바람 한 드름
즐거운 붕어
칼베개
여웃골 이야기
애장엔 진달래 만발
키 클 때
서울로 간 향림이
살구殺狗나무의 계절
창업
2부 꿀맛 같은 단잠
바탕골 여름밤
장국밥 이야기
되새김경전
그 날
고래
분황사 할머니
보악각시 집
손마담네 식구들
도마뱀은 스스로 꼬리를 자른다
우리 마을에서는 짐도 임이라 부른다
쇠뜨기
3부 햇살과의 내통
늑대 소년*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
대장내시경 양귀비꽃밭 습격사건
배추흰나비는 배추밭 건너
엄마를 다운 시키려 해
라일락을 드릴 게요
장미와 호박
진짜 영화는 그때부터 시작 된 기라
일몰
누가 그를 훔쳐 갔나
깃털의 가벼움으로
아줌마 차 위에!
빙고
4부 한 점 빛의 섬으로
소래꽃집 살해 사건
도시로 온 세랭게티 사자
평화의원
자네 좀 들어보게!
바나나킥!
독사가 물고 늘어진 열대야
종기가 터지는 날
옵빠아가 간다
손 꽃
재수 좋은 날
코끼리는 죽을 때 고향으로 돌아간다
김광희
경주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5년 월명문학상 수상
200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 시 당선
2013년 경주문학상 수상
2015년 경북문예진흥기금 수혜
동일성의 고향으로 치닫는 신화적 상상력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오늘날 시의 위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예전에는 주로 시인의 치열한 삶의 반영이나 깊은 철학적 인식의 태도에서 온다고 생각하였다. 위엄이라는 말이 존경할 만한 위세와 엄숙함을 가리킨다면 스스로 자신을 꾸미거나 드높인다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으로서 시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가령 이육사나 윤동주, 최근으로 와서 김지하나 김남주 등의 시를 읽어보면 시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또 현실적 고난이나 삶의 의미를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그 의미를 궁리했던 시들, 가령 한용운의 불교사상이나 유치환의 생명사상, 김현승과 고진하의 기독교적 사상 등의 시들 또한 찬란한 광휘를 둘러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시단에 이러한 시적 위엄이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시적 위엄과 광휘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언급했던 시인들은 주로 일본제국주의 시대나 해방 후의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대를 질러오면서 문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용감하게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시도 자연스레 빛이 나서 독자들에게 사랑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 시대는 과거와 같은 그런 식민 사회나 독재 사회가 아니다. 억압적 현실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사안에 따른 진성성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인간의 일들이 분편화되고 사물화되어 생명적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생각하면 오늘의 시적 위엄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계의 생명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생태계의 안정과 화해,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는 시들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김광희의 시를 해설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는 것은 그녀의 시가 오늘의 현실을 깊은 문제의식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것을 종전의 시인들이 의식할 수 없는 방법과 태도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에 낯선, 아니 어쩌면 새로운 시적 위엄을 선보이는 작품의 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처지지만, 김광희 시인은 늦깎이로 시단에 등단하여 경주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시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시를 발표하여 이번에 첫 시집을 묶어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집은 상당히 낯설고 독특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시들이 경상도 사투리로 뒤범벅된 데다 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분답스럽고도 옛스러운 삶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독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칫 난장판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데, 꼼꼼히 다시 읽어보면 그 누구 시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과 향취가 흠뻑 묻어나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라져가는 서민들의 애환에 주목하는 그녀의 시가 문득 환한 빛으로 오늘의 현실 속에 서 있는 우리의 자리가 어디쯤인가를 확인하게끔 비추어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변환기에 서 있는 존재에 대한 자의식과 의미부여, 그것으로 김광희의 시는 실로 색다른 위엄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와 시인은 각자 자기 몫이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에게 정치적 투쟁에 따른 진정성을 요구할 수 없고, 종교적 구원의 문제를 바랄 수도 없다. 현실 속의 자기만의 문제를 당대적 삶의 전형으로 이끌어내어 그것에 인류적 비전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시의 진정한 위의(威儀)가 아닐까 한다. 김광희의 이번 시집에는 그것이 깃들여 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우리는 그녀가 잣고 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사물에 대한 주시와 서민의 애환
김광희의 시세계로 발을 떼 맨 처음 부닥치는 것은 도시 생활에 젖어 있는 우리들로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시골 장터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말투와 어휘도 낯선 데다 그들의 삶의 형태도 낯설다 못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색적이다. 아직 이런 곳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반쯤은 전설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시의 현장을 보게 된다. 마치 일본 만화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어둔 터널을 지나고 난 뒤 만나는 신비한 세계를 보게 된 것처럼 말이다. 김광희의 그 시는 우선 이렇게 시작된다.
어일장 귀퉁이 플라타너스, 칠십년을 퍼 올린 그늘 여남은 평 세 놓는데요 가지 많은 나무 내림대 잡고 흔드는 바람, 매미호객군 ‘여름여름여름 사가’ 띠르르르 오늘도 어지럽습니다
매미소리 반경 안으로 세든 갓집아재 그늘세 엄청 내려나 봅니다 밑둥치에 한 전판 널찍하게 바람 잡는데요 ‘자,~ 양동어른 헛기침 소리 높은 갓집 사세이' 나뭇가지도 팔뚝에 갓집 걸치고 거듭니다, '삿갓 둥구미 팝니다 맷돌에 콩이나 잘 불은 그늘 한 죄기 넣어 들들 갈면 그늘 한 맷방석 늘고요, 나무신 뒤축 같이 뭉텅한 칼 갈아드립니더, 고래 심줄 같이 질기고 헝클어진 실타래 악연쯤 연한 배 자르기요, 톱 칼 가위 갑니다, 허구한 날 노름질 바람질에 도망간 마누라쟁이 고쟁이도 팔고요, 얼기미 됫박 금간 단지 테 메우소,' 빵꾸 난 처자 테는 못 메워도 찢어진 청춘 테 메워 이 풍진 세상 한 번 잘 살아보자 너스레 마구마구 퍼 널어 질펀하고요, 바소쿠리에 달이며 들녘지고 다녔던 지게에 골무며바늘쌈지실팻꾸리자배기싸리소쿠리채이채반띠자리대통발곰방대장죽화로호롱바디북집서답돌꼴망태오줄봉태기너럭덕시기죽부인퇴침혼집에다 신장들 불러 앉히듯이 잊혀진 이름이나 한 물간 추억들 다 불러다 앉히는데,
'희안하데이 내 그치 시새도 없는 구닥다릴 누가 사노' 버려진 질매가지로 구부러진 할망구손님 초장부터 초쳐 오늘 해 딴에는 뭐 하나 갈아 질려나 쉰내 나는 근심이 모락모락
-「어일장 1」 전문
시를 읽는 것이 조금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경상도 사투리와 농경사회의 사물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무슨 말인지 모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애정을 가지고 차분히 따라가면 지금은 사라져가는 시골 장터의 애잔한 장면이 떠오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적 삶과 사물에 대해 그윽한 눈빛으로 시선을 줌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의미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함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물과 풍속을 우선 살펴보면 대부분 전통적 삶에 쓰이던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갓 또는 삿갓을 파는 풍경을 보여주고, 그 다음 칼 가는 장면, 고쟁이(속옷) 파는 모습, 물동이 등의 테 메우는 장수의 사설 등을 보여준 뒤, 시장 전체를 아우른 듯 “골무며바늘쌈지실팻꾸리자배기싸리소쿠리채이채반띠자리대통발곰방대장죽화로호롱바디북집서답돌꼴망태오줄봉태기너럭덕시기죽부인” 등의 사물들이 난장으로 널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보여주는 사물들은 모두 지금은 사라져가는 농경적 사회에 필요했던 사물들이거나 삶의 방식들이다. 아직 경주 지역의 오일장에는 그것들의 풍경이 희미하게 남아있음을 시인은 기꺼워하며 그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라져가는 사물은 바로 우리 존재의 뿌리이자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뿌리를 갖지 않은 나무는 없다. 조상의 고난을 기억하지 못하는 후손은 조상이 만들어 놓은 현재의 복락을 누릴 자격이 없다. 이러한 말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본적 정체성으로서의 조상들의 삶의 방식, 거기에 딸린 신산(辛酸)함이나 흥(興)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우회적 전언일 것이다.
이 점은 이 시에서 전통적 삶의 모습이나 사물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삶의 현장성이 그대로 녹아나는 경상도 사투리와 어조를 살리는 것에서도 간취할 수 있다. “갓집 사세이”, “뭉텅한 칼 갈아드립니더”로 표기된 사투리의 표현은 표준어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이질적인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그 지역 현장에 사는 사람들에겐 존재의 동류의식이나 귀속의식 등을 분명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표준어로 획일화되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근원적인 모어(母語)로서 지역어가 있었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라져가는 사물과 방언은 그런 점에서 어쩌면 문명화되고, 획일화되어 가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제 뿌리에 대한 실존적 감각을 일깨워줌으로써 제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광희 시인은 이 시에서 더 나아가 판소리 사설 가락으로 여러 사물들을 주워섬김으로써 우리의 전통적 삶이 결코 누추하거나 비루한 것이 아님을 흥과 신선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잊혀져가는 사물에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존재했음의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자 우리의 몸과 정신 속에 판소리 사설에 깃들여 있는 흥처럼 이러한 사물들과 세태에 대해 애정을 갖고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걸쭉하고 신명난 시적 태도는 김광희 시의 여타 시에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는 특성이다. 그 신명 속에 사라져 가는 우리들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 시를 통해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상구씨 사십구 잿날 태어난 아이
엄지 옆에 개 발톱 닮은 손가락 하나 더 달고 있었다
부정 탄 살구나무 아래에 누렁이 발가락 그림 사르며
열 번 스무 번이고 손 모은 고부姑婦 절을 하고 또 한다
‘객귀야 물렀거라’ 칼춤이 휘돌아 나가고
부정 가시는 연기 흠향하다 눈이 신 살구나무
빼족이 내미는 강아지 발톱눈 붉게 뜬다
-「살구殺狗의 계절」 부분
한사코 쥐어주는 심부름 값 받아들고 고탄력 그물스타킹
호랑나비 머리핀 사다주며 ‘옵빠아가 이있다’
한 푼 부족하면 어떠냐 누이들에겐 오빠가 최고지
저녁이면 모란 백합 장미꽃으로 피어나던 누이들
시나브로 떠나가고 홍도야아도 들리지 않고
오빠 안부 들려오지 않아도 아무도 그립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아는지 모르는지 쪽샘 동네 철거중인 포크레인, ‘세사앙은 구름이요’
‘홍도오는 다알비잋’에 엎어지는 기왓장
-「옵빠아가 간다」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김광희 시인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살구殺狗의 계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통적 삶의 방식의 하나였던 무속적 세계가 신비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모습이다. 시의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유복자로 태어나는 아이가 “엄지 옆에 개 발톱 닮은 손가락 하나 더 달고” 나옴에 따라 부정 탄 것으로 보고 이에 악귀를 물리치는 주술, 즉 “‘객귀야 물렀거라’ 칼춤이 휘돌아나가”는 무속적 치유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거기에 연관된 살구나무마저 이들의 샤머니즘적 세계에 동참하여 있는 듯 “부정 가시는 연기 흠향하다 눈이 신 살구나무/ 빼족이 내미는 강아지 발톱눈 붉게 뜬다”고 마법적 원환(圓環)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 세계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여기서는 객귀)이 동질적 차원에서 모두 감응하여 분리와 소외가 없는, 그야말로 신명(神明)이 환하게 밝혀진 세계다. 비록 죽음과 부정 등의 아픔이 있지만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부정 탄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사람들과 자연적 사물에게 무당이 치르는 굿 한 판은 흥과 신성함을 불러들여 삶의 활기와 의미를 재충전해주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김광희 시인은 굿이라는 사라져가는 민속적 소재를 가져와 우리 내면에 사라져가는 신명과 삶의 활기를 불러내고자 이런 시를 썼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옵빠아가 간다」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대중가요의 애잔한 노랫말을 소재로 쓰고 있는 이 시는 경주지역의 유곽을 시적 배경으로 하여 지금은 사라져가는 소외된 서민들의 삶의 형태를 그려 보여주고 있다. “쪽샘 동네”로 불리던 그곳은 “저녁이면 모란 백합 장미꽃으로 피어나던 누이들”이 있던 곳이어서 보통의 사내들이 그곳으로 가 술추렴에 사랑을 노래하던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홍도’로 간주되던 누이들도 “시나브로 떠나가고”, “쪽샘 동네(는) 철거중”인 것으로 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어서 시적 화자는 “‘세사앙은 구름이요’/ ‘홍도오는 다알비잋’에 엎어지는 기왓장”의 무상함과 안쓰러움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김광희 시인의 내면 속에 비록 그곳이 여인들의 한이 서린 공간이었다 할지라도 경주 사람들에겐 삶의 위로가 되고 고난을 함께 나누던 장소로 정신적 가치가 큰 곳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질적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가난하고 비루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마구 사라져가야 할 것은 아니라는 쓸쓸한 소회가 이 시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거기에 정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인정과 신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희 시인의 시적 인식은 사라져가는 사물과 삶의 형태가 서민, 즉 민중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적 세계관에 놓여있다. 주위의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에 예민하게 그 촉수를 드리우고 거기에 음영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애잔하다. 이러한 시들을 읽어보면 김광희의 시적 인식과 형상화 능력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 시들이 그런 경우다.
오늘 맑음 일기예보, 예감이 좋다 북천내 고수부지 인력시장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폐목 불빛이 검게 그을린 사내들 얼굴 둥둥 띄운다 입에서 허연 김 뿜어 올린다 불 앞에 내민 손 비비며 툭툭 드럼통 건드려 본다 길거리에서 푸성귀 안고 쫓겨 다니다 뺑소니차에 치어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이며 관절염으로 저녁마다 반창고 칭칭 동이는 어머니 손가락 눈앞에 부풀어 오른다
저 승합차 문 닫히기 전에 타야하는데, 비비는 손이 빨라진다 김씨, 이씨, 지명이 지나갈 때마다 발이 더 시려 동동 구른다 마지막으로 불려지는 내 이름, 어둑한 허공에서 지워져가고 있던 꽁초의 불빛 신호로 길게 한 모금 꽃으로 타오른다 드럼통의 불이 꺼지고 여명 속으로 밀린 급식비 달라던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재수 좋은 날」 전문
지문 뭉그러지도록 쉬지 않고 조개 고동 까다
길바닥도 쉬어야 할 시간, 저녁답이 이불자락 끌고 내려오면
돌고 돌아 고동 속 골목 목 빠지도록 문고리만 쳐다볼 숙이 찾아가지
욱신욱신 눈에 밟히는 달그림자 자국자국 따라가지
끄적문 집을 지고 그녀의 꿈길로 드나들지
-「맨발로 가는 먼 집」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고난에 처한 하층 서민들의 한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 「재수 좋은 날」은 “북천내 고수부지 인력시장”에 나온 한 사내 가장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마음의 자락들이 “길거리에서 푸성귀 안고 쫓겨 다니다 뺑소니차에 치어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이며 관절염으로 저녁마다 반창고 칭칭 동이는 어머니 손가락 눈앞에 부풀어 오르”는 것으로 볼 때 신산하고 절박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의 일자리를 얻게 되는 순간 “어둑한 허공에서 지워져가고 있던 꽁초의 불빛 신호로 길게 한 모금 꽃으로 타오르”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드럼통의 불이 꺼지고 여명 속으로 밀린 급식비 달라던 아이 얼굴이 떠오르”는 것으로 잠시 삶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가난하다고 모든 것이 불행일 수 없다는 것이 시인 김광희의 생각인 모양이다. 오히려 가난하니 ‘꽁초의 불빛도 한 모금 꽃으로 피는’ 신비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역설이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신명(神明)에 눈뜨는 순간일 뿐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맨발로 가는 먼 집」이다. 시적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숙이 엄마는 지독히 불행한 운명에 놓여 있다. 의처증 영감에다 다운증후군 딸을 먹여 살리는 일을 그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지문 뭉그러지도록 쉬지 않고 조개 고동 까”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가난해 보인다. 그렇기에 이 여인은 자신의 등 뒤로 무겁기 한량없는 “끄적문 집을 지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고동 속(같은) 골목” 길을 “돌고 돌아” “목 빠지도록 문고리만 쳐다볼 (딸) 숙이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참으로 신비스럽고도 처연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점은 이 여인이 이 길로 가는 것을 “그녀의 꿈길로 드나들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길이 비록 제목에서 암시되어 있듯 ‘맨발로 가는’ 험하고 힘든 길일지언정 자신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열려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현실적 고난과 신산은 감수하고 갈 수 있음을, 즉 꿈을 계속 꾸고 꾸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 속에 숙이 엄마가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역설적 삶의 형태다. 이는 결국 김광희 시인의 인식일 터인데, 민중의 한이 이렇게 신비하고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나올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 이 시들의 특장은 민중의 한이 우리의 가슴을 울려주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실제 김광희의 시는 서민들의 애환을 다루는 데에서 신명과 함께 처연한 슬픔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러한 시들에 심금이 울렸을 때 참으로 발을 떼지 못하고 여러 날을 우리 또한 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특히 자신의 삶과 관련된 다음의 시는 내게 그와 같은 깊은 마음의 현을 울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는 이렇다.
칠순 어머니께 왜 나는 여동생이 없냐고,
없기는, 한살 터울 너보단 훨씬 이뻤제!
두 돌도 안 지났는데 온몸에 벌건 열꽃 피더라,
밤낮으로 긁었제 그 가시내는, 염천도 멀었는데
'엄마 물, 엄마 물' 날은 가문데 빈 젖 물고 늘어져서
에미 품보다 더 밋밋한 산자락 양달
봉오리도 안 맺은 뿌리
이 악물고 캐내어 가시낼 덮어 심었지
아지랑이는 뭐 하러 젖비린내 피어 올리는지
동네 아이들 재갈재갈 골목에 웃음꽃 피우면
허청허청 헤맨 들길, 빈 안개 속이더라
온산에 벌겋게 뒤집어 쓴 참꽃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가렵기만 해서
퍼렇게 멍울 져 꽃물 지는,
-「애장엔 참꽃 만발」 전문
가난도 서럽지만 가난으로 인해 자식이나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해야 하는 처지는 더욱 서러웠을 것이다. 「애장엔 참꽃 만발」은 칠순 어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으로서,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머니의 관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칠순 어머니가 젊었을 적에 겪었을 상처와 인내를 생각해보면 마음 애잔하기 짝이 없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김광희 시인이 자식을 가진 어머니의 심정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내용을 이 정도로 애절하고 형상성 있게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은 시인 본인의 경험과 감성적 자질에 기인할 것이다. 시가 그려 보여주는 마음 처연한 형상성, 즉 “'엄마 물, 엄마 물' 날은 가문데 빈 젖 물고 늘어지”는 상태라든지, “아지랑이는 뭐 하러 젖비린내 피어 올리는지”, 그리고 죽은 아이가 환생해 돌아온 듯이 표현되는 “온산에 벌겋게 뒤집어 쓴 참꽃/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가렵기만 해서/ 퍼렇게 멍울 져 꽃물 지는,”의 구절들은 실감나다 못해 귀기가 서리고 사람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드는 절창이다. 이것들은 어머니의 말씀으로 전해진 것들도 있겠지만 김광희 시인이 살아오면서 보았던 애잔함의 여러 영상들이 극적으로 결합되어 이러한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한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한이 깊어지고 깊어져 아름다움으로 숙성되면 그것이 현재의 삶을 처연하게 받아들여 모든 욕망으로부터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놀라운 역설이지만, 김광희 시인에겐 이를 여러 서민들 삶의 애환에서 발견하고 체득한 데 따른 것으로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아름답고 절절한 형상성으로 재구성하여 그것의 심미적 가치를 이렇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은 시인의 시적 재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야기가 있는 삶터, 그 동일성의 고향을 찾아가는 신화적 상상력
사라져가는 사물과 삶의 형태는 곧 민중의 삶이 그 대상이 된다는 소리다. 민중의 삶은 삶의 조건과 과정이 문제되는 만큼 시인의 인상적 감회로만 풀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김광희 시에서 이야기, 즉 서사성은 시적 형상화 방법론으로 주요하게 등장한다. 이야기는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독자로 하여금 체험의 직접성을 매개해준다. 민중의 애환과 지역적 삶의 사실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적 이야기 방식의 채택은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김광희 시에서 이야기는 바로 질펀한 사설 한 마당, 즉 판소리 한 대목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시가 바로 그러한 예의 전형이다.
새벽 성동시장
생비린내 한 짐 부려 놓은 트럭 숨 몰아쉰다
누가 더 가져가네, 누군 안 주네 틈에 끼어 혀 짧은 엉靈자털鐵자 어르신
뭉툭한 몸피가 고등어 갈치 상자 호기浩氣 좋게 싣고 내닫는다
어둑한 내리막 칠순의 굽은 허릴 당길 때
비키비키, 어, 어, 막아서면
한평생 제대로 잡히지 않던 부레키가 잡힙니까
오늘을 주체할 수 없는 속도가
한 전판 잘 차린 길가 줄줄이 널어놓은 따발총아지매들 덮친다
납작해진강낭콩소쿠리천지사방기어가는미꾸라지팔팔뛰는버들피리힘껏달아나는뱀장어누가빨리달리나흰감자붉은감자굴러가는밥사발엎질러진국사발
그의 내리막이 한 번 더 리어카 잡아당겨
널브러진 시장바닥
밭 되고 강 되고 푸른 고등어 떼 헤엄치는 바다가 되고
장보러 온 동천댁 일미식당할매도 놀라 달아나
한 바퀴 구른 어수선이 멈추어버린 속도 짚고 더듬더듬 일어설 때
흐린 한쪽 눈으로 들어왔다
실명인 다른 쪽 눈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길 끌고 내려가는
엉털씨 이마 계면쩍은 주름 한 겹 더 그려 넣는다
자, 짜째요 눈알 빠진 부짠釜山 앞 빠다가 턴千 원
옆꾸리 터진 째주濟州 옆 바다가 이 턴 원
절름거리는 먼동 빛이 낡은 수레를 밀고 간다
-「엉털씨의 새벽」 전문
참으로 재미있고, 기발하며, 서민들의 삶을 이렇게 진솔하게 그려내는 것도 없지 싶다. 김광희 시인은 장터를 중심으로 한 우리 서민들의 소외된 삶을 진정성과 핍진성 있게 보여준다. 이 시는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으로 호명된 한 누추한 생선장수의 하루 일과의 시작 부분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김광희 시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시인데, 우선 앞에서 보았던 경상도 사투리와 지역적 지명이나 인명을 그대로 씀으로 해서 발생하는 현장성과 진솔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적 대상인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의 우스꽝스럽고, 그러면서 신산하기 짝이 없는 하루 일과의 시작을 통해 우린 서민의 삶이 갖는 애환을 이야기 형식에 담아 보여줌으로써 실감과 공감의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이 시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이 벌이는 사건과 그 해소의과정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자주 목도할 수밖에 없는 범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눈여겨 볼 것은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의 삶이 고단하고 신산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따뜻한 시선에서 발생하는 훈훈한 온기다.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의 행동이 시장판에서 난장을 만들고 있지만 그 실수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질로 받아들여 따뜻하게 감싸안아주고 있는 시선은 삶의 긍정적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것은 삶의 불행과 슬픔에 대해서도 보다 큰 차원에서 포용해 들어가는 삶의 태도, 즉 해학적이고도 달관된 삶의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이 시의 표현방식에서 이야기와 함께 걸쭉한 사설 한 마당으로 표현된 판소리체 문체, 가령 “비키비키, 어, 어, 막아서면/ 한평생 제대로 잡히지 않던 부레키가 잡힙니까/ 오늘을 주체할 수 없는 속도가/ 한 전판 잘 차린 길가 줄줄이 널어놓은 따발총아지매들 덮친다/ 납작해진강낭콩소쿠리천지사방기어가는미꾸라지팔팔뛰는버들피리힘껏달아나는뱀장어누가빨리달리나흰감자붉은감자굴러가는밥사발엎질러진국사발/ 그의 내리막이 한 번 더 리어카 잡아당겨/ 널브러진 시장바닥”의 표현은 실수가 흥이고, 슬픔이 신명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우리 전통적 삶의 방식과 인식을 전형적으로 잘 살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학은 신명과 한이 버무려져 보다 더 큰 차원에서 삶의 활기를 찾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움, 가령 “혀(가) 짧”아 “엉靈자털鐵자 어르신”으로 불려지는 이름에서 볼 수 있는 언어유희(영철로 발음될 것을 엉털로 발음함으로써 삶 그 자체가 엉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 드러낸다)나, “한평생 제대로 잡히지 않던 부레키가 잡힙니까”의 표현에서 짐짓 시침을 떼고 개입하는 시적 화자의 너스레나, 시장 길바닥을 수레바퀴의 고장으로 난장판이 되게끔 형상화하는 반복적 열거 등은 익살과 신명으로 모든 것을 한 바탕 축제의 상태로 만들어간다. 바흐친이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축제, 즉 카니발적 상태와 그러한 것을 상상하는 것은 일상의 무미건조함과 무기력함을 깨뜨리고,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신성한 것을 경험하는, 즉 신명의 상태로의 돌입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신명난 것이 바로 신명(神明)의 현현이다. 신명은 신령한 기운의 접신 없이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 시 「엉털씨의 새벽」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속됨 속에 신명이 깃들어있고, 어떤 계기에 의해 그 신명에 접신되는 순간 우리 역시 놀랍게도 물질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삶의 여유와 달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현대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통적 삶이 가지는 중요한 가치의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김광희 시의 위엄은 이런 시에 와 빛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김광희 시에서 이런 이야기 방식의 시적 진술은 “전장에 부역 갔다 곰방대로 돌아와 묻힌 입천할배묘 돌아가는 길 부엉인 이슥토록 울지 첩첩산중 하늘우물 속 어시미 등천하는지 머리도 꼬리도 안 보이는 어둠 허릴 감고 돌아 제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간 콩알만 한데 외할머니 씌워주는 덮저고리에 담아가는 장국밥 냄새, 식은 땀 흐르는 등 뜨뜻하게 덥혀지고”(「장국밥 이야기」)의 부분에서는 서민적 음식의 전래를 통해 훈훈한 인정과 그것이 어떻게 민중적 삶의 바탕이 됨을 밝히고 있고, 「소설小說 혹은 소설小雪」에서는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삶이 어떻게 파란만장할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실의에 빠지지 않고 용기를 내 살아감으로써 어떻게 삶의 진정성을 회득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와 서민들의 삶의 형태에서 해학이 얼마나 삶의 활기와 신성을 불어넣는지, 가령 “무논에서 오셨나 허벅지까지 누런 장화에 꽂힌 황씨아재 한 마리 점찍는 순간 달구새끼 꽥꽥 새벽잠 훼방 놓던 모가지 비틀어 도마 위에 눕히자 무쇠 칼이 휙, 목 없는 달구새끼 몸뚱이 저승사자 손아귀보다 더 빠르게 날아올라 피바람 휘날리며 그늘 상가 밖으로 냅다 달리는데 아따 액막이가 따로 없네요,”(「어일장 2」)에서 볼 수 있듯이 목 잘린 닭이 날아오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런 장면을 통해 심지어 죽음도 하나의 웃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삶의 여유와 관조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김광희의 민중적 삶에 대한 체험의 깊이가 보통이 아니란 사실과 그 체험을 통해 당대적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광희 시인에게 이런 민중적 삶의 훈훈한 이야기는 그녀의 생애적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와 행위들은 모두 그녀의 성장과 현재적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장면과 행위들은 그녀 삶의 근원적 정체성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보다 더 안정되고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꿈꾸는 것은 그녀의 시적 지향으로 볼 때 당연하다. 다음에 보이는 시가 이번 시집에서 아마 김광희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전형이 아닐까.
메밀꽃 몇 만평 은하수로 핀 여름밤인데요
꽤쨋불 연기 온 마당 모기파리 몰아내고
바지랑대 호야불 그네 태워놓으면요
밀짚 끄직대기 감자 쑹쑹 느렁국 한 너리기 내오는데요
소깝단 만한 아배도 한 양푼이이 싸리빗자루 만한 나도 한 양푼이
배꼽 툭 불거진 배 툭툭,
짜구난 강새이 푹 퍼진 수지기 되고요
마답 누렁이 뱃구리 가득 찬 꼴 되씹고 또 되씹지요
금년 농사 풍년이다, 부헝! 외고 댕기고요
소쩍새도 어디서 한 솥 거드는지 쭉쭉
대청마루 어매는 삼년만 삼 안 삼으모 속세이로 앞 가루는 기라
외무 같은 물팍 굳은살 백이도록 비비고 또 비비고요
아배가 이바구 퇘퇘 발라 꼬는 새끼
세발네발 길어질수록 밤은 점점 토깨이꼬랑지 만치 짧아지제요
칡넝쿨 뜯게덤불 전설로 덮어가는 바탕골
느렁국이 얼마나 구수한지 아는 사람 다 알고요
할매 할배가 생전처럼 일군 메밀꽃밭 수만 평
쳐다보기만 해도 온 동네 배가 부르지요
-「바탕골 여름밤」 전문
참으로 아름답고 안온하며, 풍요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세계는 시적 화자의 유년의 기억으로 펼쳐져 있다. 우선 ‘바탕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메밀꽃 몇 만평 은하수로 핀 여름밤”을 갖고 있다. 하늘에 은하수로 걸려있는 별과 지상에 그 별에 대응한 메밀꽃의 만개는 하늘과 땅이 모두 환한 빛으로 싸여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 속에는 근심 걱정, 특히 굶주림에 대한 걱정은 없다. 그런 점에서 “밀짚 끄직대기 감자 쑹쑹 느렁국 한 너리기 내오는” 장면에서 배부름의 이미지로서 풍요로운 마을의 전형적 모습이 나온다. 마치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 심상의 출현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새끼 꼬는 일과 삼 삼는 일은 가족의 입성을 위한 것이므로 노동으로부터 소외가 없고, 고통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일거리로 제시된다. 시적 화자는 이런 아버지와 엄마에 보호되어 있고, 마을이 주는 아름다움과 하늘이 주는 신성함에 흠뻑 젖어 “쳐다보기만 해도 (온 동네) 배가 부르”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것을 두고 게오르그 루카치는 ‘원환적 세계’라 부르고 에른스트 블로흐는 ‘동일성의 고향’이라 불렀다. 세계와 자아가 분리되지 않고, 모든 것이 동질적 속성으로 이어져 있어 소외가 없는 세계, 그것이 비록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와 같은 성격을 띠지만, 김광희 시적 세계에 등장하는 이런 장면은 루카치의 원환적 세계나 블로흐의 동일성의 고향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속도경쟁을 통해 성과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세태에서 이런 장면은 참으로 구원의 이미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쩌면 어렸을 적에 경험하였을 법한 저와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비단 김광희 시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의 초기로 알려진 에덴동산의 낙원이 그러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시대나 아르카디아, 그리고 도연명의 무릉도원 역시 우리가 가 닿고 싶은 이상적 삶의 형태를 그려 보여준다. 결핍과 갈등이 본질적인 삶의 형태로 주어진 오늘의 현실에서 김광희 시인이 꿈꾸는 동일성의 고향은 우리 모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적 표현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단순한 과거지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퇴영적 존재가 되게 한다. 과거에 보였던 이 아름다운 장면이 갖는 기능은 지금의 여기의 현실에 무엇이 결핍되고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우리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그 기능에 있다. 그 점에서 동일성의 고향은 결코 과거의 한낱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결핍을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을 극복할 하나의 대안적 영상으로 우리의 심중에 자리잡는다. 그것은 미래지향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작동한다.
이 점은 김광희 시인도 분명히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바탕골 여름밤」에서 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장면을 즐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메밀꽃을 비롯하여 “마답 누렁이 뱃구리 가득 찬 꼴 되씹고 또 되씹지요/ 금년 농사 풍년이다, 부헝! 외고 댕기고요/ 소쩍새도 어디서 한 솥 거드는지 쭉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렁이, 부엉이, 소쩍새 등도 이와 같은 평화와 삶의 활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동질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와 같은 상태를 동일성을 달성한 상태라 부를 수 있고, 이와 같은 장소를 블로흐는 동일성의 고향이라 불렀던 것이다. 김광희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바탕골 여름밤」을 오늘의 현실에 되살리는 작업을 감행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적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말함이다. 즉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거나 되살리는 것이 일차적으로 거기에 부응하는 일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문화적 변동기에 쉬이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님을 시인도 알고 독자인 우리도 안다.
그럼 무엇으로 이러한 상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바탕골 여름밤」을 잘 음미해보면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계와 자아가 모두 하나의 정조 속에 녹아들어가 분리나 소외가 없다는 사실에 그 길은 놓여 있다. 다시 말해 하늘의 별이나 메밀꽃, 누렁이, 부엉이, 소쩍새 등 지상의 모든 사물에 사람의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소외나 고독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겨내는 일이다. 사물에 정령을 부여하여 이 천지가 신성의 기운으로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인 김광희가 꿈꾸는 「바탕골 여름밤」의 미래지향적 내용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김광희 시에서 사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보는 의인관적, 즉 물활론적(物活論的) 상상력은 그녀의 시적 특징으로 단순히 수사적 차원에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적 차원으로 승화되어 발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가 그런 전형일 것이다.
자네도 이제 다 됐능가베
이십 년 넘게 잘 댕기던 집 앞 길도 못 올라가서
아재를 메다꽂아 깔아뭉갤 기 뭐고,
…<중략>…
넘들은 다 트렉턴데 아재니까 자넬 데불고 있제
정이라는 게 별건가, 오래 부대끼면 저절로 식구제
뻘밭 같은 가슴에 자네 발자국 시커멓게 박힌 아재가
사흘 만에 깨어났는데 자네한테 치인 줄 모르더라
아이다 인정 안할라카더라
자전거 타다 넘어졌다 안 하나, 몸도 성찮음시러
빨리 집에 오겠다는 거 보이 자네 걱정하는 눈치더라
그 맘 알그덩 딸국질 그만하고 퍼뜩 일나그라
-「자네 좀 들어보게! -판식아재 경운기」 부분
이 시의 시적 화자는 판식아재 경운기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다그치고 있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경운기는 산 지 오래돼 기능이 떨어져 “이십 년 넘게 잘 댕기던 집 앞 길도 못 올라가서/ 아재를 메다꽂아 깔아뭉개”는 사고를 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판식아재는 “넘들은 다 트렉터”를 사는 판인데도 이 경운기를 버리지 않고, “오래 부대끼면 저절로 식구제”에서 볼 수 있듯 식구처럼 데리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판식이 아재를 생각해서라도 어디가 고장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맘 알그덩 딸국질 그만하고 퍼뜩 일나그라”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시적 화자는 경운기를 마치 오래된 식구의 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이는 기계마저 감정을 소통하고 지속할 수 있는 정령적 존재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활론적 상상력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근대산업사회의 인식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나 중세의 농경 사회에서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 정령숭배의 사상, 즉 범신론적 사상의 표출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를 보면 세계는 신화적 공간과 장소가 된다. 알다시피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지만 인간의 원형을 묘파해주는 것으로 인간의 추구해야할 근원적 정체성을 담고 있다. 즉 존재의 뿌리에 대한 오랜 인류의 지혜가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김광희 시적 지향은 결국 오늘의 산업자본주의 현실이 주는 결핍과 결락에 대응하여 미래적 삶의 기획으로서 신화적 삶의 소환이 절실하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무당의 입장(원래 무당이 원시시대에서는 시인의 역할을 했다)에서 신들을 불러내는 것처럼 신화적 세계를 소환하는 주술을 시로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그녀의 시 대부분은 신화적 세계를 지향하는 물활론적 상상력, 즉 신화적 상상력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구들장 밑 심해에 고래가 산다 날마다 먹여주는 불을 받아먹고 산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솔솔 먹여주는 솔잎갈비불이나 아궁이 앞에서 도란도란 먹이는 이야기불 정도론 골 깊은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나무 속살 허연 장작 아궁이 미어질 정도는 먹여야 꽃불 후루룩 들이켜 고래 속 확 트이는 거라 뜨끈한 열기로 뱃속 든든해지고 더운 피가 기둥을 타고 올라 집이 한 마리 고래가 된다 포만감으로 트림하듯 숨 한번 크게 내쉴 때마다 푸푸 입김을 솟아낸다”(「고래」)의 집과 구들장을 고래로 보거나, “외양간에 누런 스님, 그래도 덩그렁!/ 뱃속에 가득 쌓은 경전/ 쉬엄쉬엄 꺼내 읽으시네”(「돼새김경전」)에서의 누렁소를 스님으로 치환해 보는 것은 모두 다 이런 신화적 상상력의 발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신화적 상상력의 발동은 결국 김광희 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에도 개입하여 영적 초월을 이루게끔 하기도 한다. 그녀의 시가 종국에 도달할 지점도 바로 이와 같은 물질적이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깨뜨리고 영적이고 소외와 분리가 없는 원환적 세계, 즉 동일성의 고향을 지금 여기의 현실에 실현하는 것일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와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남사아안 계란!
스피커 소리 알 낳고 홰를 치고 날아오른다
계림에서 흰 닭이 날아오른 이후
월성이 달을 품고 날아올랐다 어느 날
바다가 된 남산 용장사탑 옥개석 가오리로 날아올라
기단이 된 남산이 둥실 떠오르고
서라벌이 날아올랐다
‘시잉 싱한 남산계란’
금방 낳은 듯 시잉싱 대문 앞에서 날아오르고
그 소리 받아 동네 개들 난생卵生을 하려는지 아우우,
서악 동네가 날아오르고
햇살 그림자 벗어 두고 감나무며 오동나무잎 날아오르고
장독대가 과꽃 봉숭아, 향내가 날아오르고
어항 속 파닥거리는 물고기 은비늘 빛이 날아오른다
장 길 골목길 갈수록 남산계란장수 생, 무거워도
골목마다 가볍게 날려 올리는 목소리
실직의 어두운 터널 속 달팽이관 돌아 우렁우렁
귓바퀴 돌아 무거운 나를 들어 올린다
지갑에 한 장 남은 오천 원이 내 손 끌고 현관 밖으로 날아오른다
이 동네 저 동네 안부,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계란 위에 날아오르고
끓는 물속에서 뒤꿈치 들썩 도움닫기하는 남산계란
라이트 형제가 처음 하늘 날아간 후
한 번도 날아오르지 못한 날 가볍게 날려 올리려는 걸까 난
시지프스의 시간으로 내리 눌렸던 날갯죽지 움찔움찔
견딜 수 없는 모든 무거움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 꿈이라서
무겁게 주저앉았던 마음 뒤꿈치 들썩 날아오른다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 전문
이 시는 일상이 어떻게 신화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재 시인이 살고 있는 경주가 “남사아안 계란!/ 스피커 소리 알 낳고 홰를 치고 날아오르”는 것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연동되어 “서악 동네가 날아오르고/ 햇살 그림자 벗어 두고 감나무며 오동나무잎 날아오르고/ 장독대가 과꽃 봉숭아, 향내가 날아오르고/ 어항 속 파닥거리는 물고기 은비늘 빛이 날아오른다” 등의 신성 출현의 체험을 갖게 된다. 계기는 남산 계란 사라는 소리와 거기에서 연상된 알을 깨는 이미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 관계로 이어져 있고, 심리적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 이 잠들어 있는, 혹은 물질주의에 포박되어 있는 경주가 생명의 싱싱한 활기로 깨어나 날아오르게 되었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바로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일상이 잠들어 있음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겨 있음을, 그래서 삶의 활기와 신명이 죽어있음을 폭로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정신적 기투로서 신화적 상상력을 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였을 때 경주는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동일성을 획득하여, “계림에서 흰 닭이 날아오른 이후/ 월성이 달을 품고 날아올랐다 어느 날/ 바다가 된 남산 용장사탑 옥개석 가오리로 날아올라/ 기단이 된 남산이 둥실 떠오르고/ 서라벌이 날아올랐다”의 신화적 공간이 현실적 공간으로 접맥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시적 화자의 변신이다. 즉 시적 화자도 “견딜 수 없는 모든 무거움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 꿈이라서/ 무겁게 주저앉았던 마음 뒤꿈치 들썩 날아오른다”로 느껴 이 신비하고 풍요로운, 그러면서 평화로운 세계에 동참하는 한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점에서 김광희 시인의 시는 오늘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갖는 무미건조함과 비생명성을 신화적 세계의 소환으로 치유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통해 신명과 화해의 공존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그 대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시적 대응으로 그 가치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때문에 김광희 시 역시 당대의 현실에 빛나는 독특한 시적 위엄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의 건투를 빈다.
첫댓글 을미적거리다 을미년이 갑니다. 뭐든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되고 말고요.
감사, 새해에 또 다정한 얼굴로 봅시다
이령시인 감사합니다
굉장합니다.
당대의 빛나는 시적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감사드립니다.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 (이노미 입니다)
시집 발간 축하합니다.
발뒤꿈치를 잘 관리하다 보면 나도 날개를 달까나
늘 수고하시는 사무국장님
의 발 뒤꿈치는 언제나 날개처럼 사뿐사뿐
그러니 탁구도 그렇게 잘 치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