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짧은 인연으로 송설 교정을 머물고 갔다. 야구의 시절은 너무도 짧았다. 1962년에서 1968년 정도에 이르는
시간에 송설 유니폼의 야구팀이 우리들 곁에 있었다. 시절이 너무 짧았기에, 야구의 추억은 아쉽다. 피울 듯 져버린
꽃송이 같은 추억이다. 그 추억은 어둠 속 섬광에 드러나는 슬픈 애인의 얼굴처럼 애잔하고 선명하다. 1960년대에
송설 문하(門下)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각별 그러하다.
김세영 재단이사장이 대한연식야구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1963년부터 전국연식야구대회를 여러 해 송설 교정에
유치했다. 이 대회의 부침(浮沈)과 더불어 우리 야구부의 모습도 기복을 드러낸다. 출발부터 여건 미흡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전국대회를 송설 운동장에서 개최하면서 야구부 발전의 기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의욕을 가졌었다.
당시 중학생 야구는 연식야구(軟式野球)이었다. 연식야구(軟式野球)란 글자 뜻 그대로 부드러운 방식의 야구라는
말이다. 사용하는 공이 덜 딱딱하다는 데서 연식야구라 했다. 연식이란 주로 야구공의 딱딱한 정도, 즉 공 소재의
밀도가 약하다는 데서 연유한다. 연식야구 공은 실로 박지 않아서 공 표면에 실밥이 없다. 또 공의 고무 재료
자체를 연한 것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을 연출하게 하였다.
당시 야구 명문 중학들, 이를테면 선린중학교, 배문중학교, 인천 동산중학교, 경상중학교 등에 비하면, 우리 야구부는 실로 어려운 처지이었다.
기본 장비조차도 구하기 어려웠다. 최고의 선진 팀이었던 재일교포 야구팀이 모국 방문 순회 경기를 마치고, 1962년 8월 20일 야구기구
품목 55점을 송설 야구부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우리 야구부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협회장인 김세영 이사장의 영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야구부는 이덕수선생님이 맡으셨다. 왕년에 야구 경력이 있으셨단다. 수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특이한
억양으로 ‘고로!’라는 말을 자주 하셔서, 우리는 선생님께 ‘고로!’라는 별명을 붙여 드렸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은빛 테의 반짝이는 안경을 끼고, 손에 쥔 공을 배트로 쳐 날리며 선수들에게 수비 훈련을 시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내는 시선이 강렬하셨다. 생각하면 선생님인들 얼마나 애로가 많으셨을까.
1963년 봄에 운동장 북서쪽 코너에 백네트를 마련하였다. 김천 바닥에서 전국을 상대할만한 선수를 고르기란
참으로 어렵다. 선수층이 두터워야 무얼 한다지만 선수층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초등학교 때 야구 재능을 보였던 친구들은 학교와 선생님께 순종하여 참여하였다. 선수 모으는 형편이 궁색하던 시절이었다.
마땅한 선수가 없으면, 학년과 나이를 바꾸어 억지춘향 격으로 팀을 구성해야만 했던 시절이다.
선수 친구들이 있음으로 해서 야구의 추억은 빛난다. 축구 풀백으로 공로가 많았던 이장현군은 원래 야구 쪽에서
포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아마도 부친의 재능과 인품을 물려받은 듯하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학생 시절 일본
야구의 명성을 상징하는 고라꾸엥(甲子園) 출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기량과 매너가 훌륭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종명군은 센터로서 활약하였는데 몸이 빠른 만큼 판단력이 빠르고 시야를 인정받았다. 파이팅이 넘치면서도 원칙에 충실하고 무엇에나 열심이었다.
그가 사는 모습도 그러하다. 왼손잡이 투수로 활약하던 박창효군 또한 우리가 잊지 못할 선수이다. 큰 키와 체력 체격 조건이 뛰어났던 그는
늘 ‘미완의 대기’로 주목을 받았다. 너그러운 호인형의 마인드(mind)를 지닌 그가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겪은 선택과 배제의 시련들은
그의 인생에 약이 되었을까 짐이 되었을까.
선배들의 활약상도 추억의 한 대목을 이룬다. 송설 30회의 인상적인 투수 박행남 피처, 변화구의 위력을 처음
내 눈으로 보게 했던 선수이다. 전국의 야구 강호들을 맞아, 큰 스코어 차이로 밀릴 때도, 안경알 너머 무표정하게
그 무거운 분위기를 감내해내던 모습은 승패를 넘어서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는다.
손문석 포수는 축구에서는 수문장 활동을 하고 야구에서는 포수를 했다. 에러가 많은 중·고교 야구에서 포수는 전체를 리드하는 분위기 메이커이다.
굴하지 않고 파이팅을 외치던 눈이 부리부리하던 손문석선수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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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德洙 선생님 |
유격수를 보던 정성기 동문의 모습도 떠오른다. 포지션이 포지션이니만큼 어쩌다가 억울하게 놓치는 에러의 순간을 간절하게 아쉬워하던 표정은
인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70년대 한국 축구의 포스트 김재한 선수도 김천중학시절에는 야구선수이었다. 키가 큰 그는 일루수를 맡았는데, 다른 내야수가 악송구로 보내오는
볼을 긴 다리를 활짝 벌려 가까스로 잡아내며 만장의 박수를 받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놓치거나 빠트릴 때의 야유들도 아슴푸레 기억에 떠오른다.
그밖에 여기서 다 올리지 못하는 그 무렵 선수들의 추억들은 독자 여러분이 댓글로 올려주기 바란다.
이기고 진 무수한 게임들이 있겠지만, 그 무렵 우리 야구부는 시련의 승부들이 많았다. 1963년 5월 24일 송설 운동장에서 벌어진 전국대회(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길다. 제6회 문교부장관 배 쟁탈 대회 및 중학야구단 일본원정 선발대회)에서 김천중학은 배문중학과 첫 경기에서 붙었는데,
1:9로 패했다. 1964년 10월 23일 경북경식야구대회 도내 고등학교 야구대회에서 김천고등학교는 대구상고와 붙어서 3:5로 패하고,
이어 대구공고와 붙어서 3:9로 패했다. ‘졌지만 장래가 기대되는 팀’이라는 언론의 평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는 말이 있다. 제 삼자가 하기로는 쉬운 말이지만, 패배를 겪는 선수들은 그 냉혹함이 뼈에 저미어 든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오늘은 따뜻한 위안과 인간적 공감을 전하자. 그래 그때 당신들이 있어 송설 모교의 깃발이 어딘가 어느 하늘 아래 날릴 수 있었구나!
끝으로 이종명군의 회고담 한 가지를 소개한다. 1964년 우리가 중3일 때, 대구지역 체전에서인가 김천중학
야구부는 대구 경상중과 붙어서 3:7로 진 적이 있다. 비록 스코어는 밀렸지만 경기 내용은 상당히 잘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와 싸웠던 이 경상중학교 야구선수들의 상당수가 뒷날 경북고등학교의 야구부 선수로 스카웃
된다.
잘 알다시피 경북고등학교는 1967년 이후 전국의 모든 고교야구를 여러 해 제패하는 이른바 무적 경북고 야구를 만들어 낸다. 이덕수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그 야구 경기에 대한 아쉬움을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토로했다는 이야기는 가슴에 울리게 남는다. 그 시대 우리의 고귀한
열정을 전설처럼 전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정성기선배는 자식(정진원;배명고-단국대-한화 ,포지션/유격수, 봉황대기 최다타점상)도 야구룰 하여 배명고 야구 학부형 회장도 역임하여 동대문운동장에서 자주 만났다.자기자신의 선수생활에 대해서는 입이 무거웠다.속초상고도 야구하는 판에 우리학교가 교세가 부족하여 야구부창단못하는건지 모르겠다.야구팀이 학교를 알리는데는 최고의 종목인데...지금이라도 검토해보면 어떨까...
박 박사님의 글은 정말 그메모리 대단합니다, 그때 김천에서 전국중학야구대회 대단했지요. 손문석 선배님은 지금도 저가 교류하고 있음다.가끔 그때 이야기 한답니다. 그당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갈때 딴데가지말고 계속 김고에 있어라고 장학금 줄태니 체육선생 두분이 와서 그래서 대구쪽에서 스카웃이 와도 안가고 김고에 말뚝박앗데요.................
자랑스런 장현, 종명, 창효 친구의 옛 모습이 보이는 듯 하군요. 옛날의 그 끈기로 지금도 사회에서 앞서가는 삶을 영위하니 자랑스럽군요.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박창효가 해야 하는데 ... 컴맹이니 할수없이 내가 해야 겠다 50후반60년대초에 김천에는 초등학교 야구시합이 치열했었다 그중 라이벌이 서부초등과 김천초등이였는데 서부의 언드스로 괴물투수가 박문규(박행남으로 개명) 김초의 정통 왼손잡이 김득용으로 툭정지어져 재미를 더한 시절이 있었다 이 학년의 선수들이 김천의 야구명맥을 이어갔던 선수층이였다 서초에는 박행남,손문석,하태경.김재한 등 였고 김초는 김득용, 한석봉,김맹추. 이고 중앙은 김갑수, 여수정,김정태, 등이 있었지 김초선수들은 성의중으로 진학해서 축구선수로 많이 변신했고 서초와 중초 선수들은 김중으로 진학해 지금의
야구 이야기의 중심 인물들이 되였지 ... 중2년 때 연식야구면맹 회장기 쟁탈 전국대회가 열렸었지 김천야구는 아마추어도 초보라 실력이 일천하여 다른 중학의 실력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고1학년이 였던 박행남 김재한,하태경 여수정 등선배들과 중3선수의 최진수 김해천 김광석 그리고 박창효 본인(후보)등이 출전선수로 구성되어 서울의 경서중학과 시합을 가졌는데 다 이겨 마지막 런러 3루 투아웃 상황에서 3루앞 땅볼을 당시 3루 베이스맨 김광석의 폭투로 경기를 놓졌다 그후 선생들의 질책으로 자괴감에 빠진 김광석선배는 김고로 진학하지 않고 농고로 진학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1964. 10. 23.경북 경식야구대회는 고등학교 선수가 모자라 중3선수인 창효와 내가 출전했지 창효는 투수로 (이때 부터 전적으로 투수로 연습시작) 난 외야수로 출전했다 가을시즌의 2학년이하로 구성된 대구의 팀들은 우리와 수준이 비숫했다 그러나 동계훈련이 끝나고 나면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린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야 하니 새씨즌이 시작되면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 시합에서 대구공고와의 시합에서 센터앞 빨래줄 히트를 야수 실책으로 그라운드 홈런을 친 기억이 난다 이시합이후로 김고의 야구는 사실상 해채와 같이 유명무실해 진다 제일문제가 경비 선수수급 및 코치수급 등 여러 문제가 있다
박교수 그리고 김주인장 수고가 많았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중학교 부터는 야구공이 준경식 경식으로 기억이 되고, 우리 동기중엔 사진이 실린 이장현 이종명 박창효 선수는 소질도 상당했다고 기억되나 당시 김천은 축구나 야구나 다른 종목도옳은 지도자를 돈이없어 모시질 못했습니다. 운동을 해본 사람으로서 옳은 지도자 없이 함부로 교기를 정하는 것은 선수들의 장래를 망치는 일 입니다. 운동은 어릴때 기본기가 평생으로 이어 지니까요.
이장현 선수!. 박행남 투수는 오른팔 over throw 투수가 아닌가요?. in curve 가 좋았으나 투수로는 체력이 부족 했다고 기억이 되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시지요?.
초등학교에서는 오른손 싸이드 스로라고 할까 언드스로 가까이 던졌고 중에 와서 투구를 고쳐더라 고쳐도 정통 오버스로 는 아니고 낙차큰 커브가 일품이 였지 체력때문에 완투는 무리였고 투수가 없어 완투를 많이 했지 중앙초 출신 댓빵(이름을 잊었네 ) 있었지 이분이 강속구에다 힘있는 투수였지 나중에 픽업해서 둘이 갯투(이어던지기)했었지
정승기선배님은 현재 김천시 야구협회장과 육상경기연맹회장을 동시에 맡으시며 지역스포츠 발전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시고 계십니다. 고31회 김태섭
시골서 김천유학에 생전처음 야구경기 기억납니다.야구규칙을 몰라서 그냥 지나친 바보짓 했지요.글,사진 잘 봤습니다.
놓치고 빠뜨린 야구의 추억이나 감회들은 친구들이 댓글로 더 많이 풍성하게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혹시 정승기 선배 연락처라도 올릴수있나요? 후사하겠습니다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초등학교 시절 교기가 야구 였는데 학반별 야구부가 있을정도로 방과후에 시합을 했었다 경상중학교에 진학을하여 실장을 했는데 교기가 야구여서 선수 선발을 체육시간에 할때 일조했었다. 타격좋은 선수를 후보로 뽑는다는 것이었는데 난 파울 볼을 쳐서 아웃되었지만 우리반에서는 잘 치는 편이었다 야구 선수들 대부분이 대구초등 출신들이 많았고 경상중 우리 동기들이 후에 전국을 석권한 뉴스가 있었다 지금도 야구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어 야구를 한 친구를 좋아하고 TV 중계를 꼭 본다
야구는 신앙에서 출발? HOME-BASE는 SWEET HOME이고...1루...2루...3루...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게임....HOME-RUN......가정은 정말 아름다운 안식처요, 가족사랑이요, HOME의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훈련? ....저의 목사님 설교에서...
정승기연락처는011-9376-2900번이구요 구름님께서는 그당시 일들을 아주 잘알고 계시는듯하군요 그당시 문교부장관배전국연식 야구대회는 김천을 떠들석하게 하였지요참전한 선수들은 2년선배인 박행남 손문석 김재한여수정 그리고1년선배인댔빵이라고 하는 최성오 그리고 김해천이아니고 최해천 김광석 나영배 하춘탁등이었지요 그다음 이장현 박창효 이종명등 아무턴 감개무량합니다
polly님 구름님이 바로 이장현님 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