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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최흥종은 우리 탐진최씨를 빛낸 현대의 호남 인물입니다. 그의 발자취에 관한 아래 글은 위키백과에서 옮겨왔으며 이해를 쉽도록 돕기 위해서 일부 편집을 하였습니다.jgc
최흥종(崔興琮, 1880년 5월 4일~1966년 5월 14일)은 기독교 목회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한센병환자 구호사업가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오방(五放)이다. 출생지는 광주광역시다.
[최흥종의 청년시절]
최흥종은 1880년 5월 4일 전라남도 광주읍 불로동에서 최학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흥종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열리게 된다. 기독교에 입교하여 광주선교부의 최초의 신자가 된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1904년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 부부, 吳元(Clement Owen) 선교사, 윌슨(Wilson) 선교사, 포사이트(Forsythe) 선교사 등이 광주군 양림리에 ‘광주선교부’(광주교회)를 세우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06년 봄에 광주읍 북문 안(北門內/현재 광주시 충장로 파출소 옆)에 광주의 'ㄱ' 자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북문안교회’(현,광주제일교회)라 하였다.
1907년 최흥종은 김윤수 집사의 소개로 순검(巡檢)으로 취직하였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1905년 11월 17일)이 체결되었고 외교권을 박탈당했었다. 을사보호조약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1908년 보성지역의 의병장 안계홍(安桂洪)의 부하 12명을 화순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의병 12명을 풀어주었다. 그 뒤 몇 달이 지나 또 순창에서 총살 직전의 의병 6명을 밤에 몰래 유치장 문을 열어 도망치게 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부터 빌린 국채가 1907년 당시 1,300만원에 도달했다. 이 차관의 이자 상환 때문에 대한제국 조정이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자, 독립을 위해서는 국가의 빛을 갚자는 민간운동 즉 국채보상운동이 대구를 중심으로 1907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때 광주에서도 최성기 등이 주동이 되어 이 국채보상운동을 벌렸다. 광주에서 1만원이 모아졌다. 두 번의 의병 탈출사건으로 최흥종을 의심하던 일본 경무고문은 광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의 주모자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최흥종에게 내렸다. 최흥종은 곧 사직서를 내고 1907년 경찰을 떠났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 등의 헌신적인 삶에서 예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느꼈다. 1909년 4월 장흥지역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오원 선교사가 급성폐렴이 걸려 광주 제중원으로 이송 중일 때 목포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선교사 포사이트에게 광주로 오라는 전보가 가게 되고, 최흥종은 유진 벨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효천까지 포사이트를 마중 나갔다.
효천에서 포사이트선교사를 만나서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 그들은 산비탈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나병(한센병)환자를 만났다. 이때 포사이트선교사가 그 나병환자를 자신이 타고 왔던 나귀 위에 태우고, 자신의 털외투를 벗어 입히었다. 그리고는 포사이트는 나귀의 고삐를 이끌고 광주로 들어왔다. 이때 이 광경을 체험한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그의 일생의 신앙생활의 나침판이 되었다.
이후 그는 윌슨선교사와 함께 나환자 치료에 헌신하게 되며 1912년에는 방림리의 땅 1200평을 기증하여 광주나병원과 나병원교회를 설립한다.
1908년부터 '윌슨'선교사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 제중원(濟衆院.1905년 11월 20일에 창설. 현 광주기독병원)에서 조수겸 나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제중원은 1909년 4월 이후부터 나환자(한센병환자)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지금은 나환자가 많지 않지만 1900년대-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나환자가 무척 많았다. 전국의 나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려고 몰려들어 광주군 방림리에는 나환자 부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1912년 나병원으로 발전하였고, 1926년 여수로 옮겨 애양원이 되었다.
[목회활동(나환자의 아버지)과 항일운동]
1912년 최흥종은 자신을 전도한 김윤수 집사와 함께 유진벨 선교사가 세운 ‘북문안(北門內)교회’(현,광주제일교회)의 초대장로가 된다.
1919년 2월 김필수(金弼秀)목사가 3.1독립운동 준비의 밀명을 받고, 광주에 내려와 기독교 지도자들인 최흥종장로와 김철(金鐵/독립운동가)을 만났다. 밀명을 수락한 최흥종과 김철은 즉시 상경하여 담양출신인 일본 유학생출신 국기열(鞠琦烈)과 김범수(金範洙)등 광주/전남출신의 젊은이들을 만나 협의하였다. 광주의 거사일은 3월 10일 하오 2시로 정해졌는데, 서울 시위상황을 살펴본 후 오려다가 최흥종은 서울시위에 직접 참여하게 되어 종로경찰서에 피검되고, 광주지역의 시위운동의 책임자라는 것이 밝혀져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주시위는 김철의 주도로 ‘북문안 교회’(현,광주제일교회)의 교인들과 항일 비밀조직이었던 ‘삼합(三合)양조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등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대구 형무소 출감 후 Bell 선교사는 최흥종에게 평양으로 가서 평양신학교에 들어 갈 것을 권유했다. 최흥종은 1921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문밖 교회’(현,광주중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광주 ‘북문밖교회’ 청년회원들의 주동으로 광주의 YMCA가 조직되고, 그 후 최흥종은 광주 YMCA의 제3대(1924년-30년), 제5대(1932년), 8대(1945년), 10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광주의 목회활동 중 걸인들과 나환자들을 집중하여 돌보고 목회하여 광주/전남지역에서는 "걸인,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그는 전남 나주에도 호혜원(互惠院)을 창설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업을 계속 확장하였다.
1922년 겨울 최흥종목사는 자원하여 시베리아지역의 선교사로 떠나게 된다. 당시 시베리아에서는 한국독립군 700여명이 소련 공산군부대에 귀속하라는 권유를 거절하자 참살당하는 '흑하(黑河)사건'이 발생하여 분위기가 흉흉할 때였다. 그는 '니콜리스크(현,우수리스크)'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소련당국에 의해 1년 만에 추방당하고, 1924년 광주금정교회에서 양림교회가 분립되자 9월 30일부터 1925년 11월 28일까지 광주의 모교회이자 초대장로(당시 북문안교회)가 되었던 광주금정교회(현,광주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27년 2월 서울에서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권동진(權東鎭)등의 주도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통합한 민족 유일당 ‘신간회’가 창립되자, 광주에서도 ‘신간회’ 광주지회가 1927년 10월 결성되었는데 ‘신간회’에 참여한 좌우익 모든 정파로 부터 최흥종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정치활동은 그가 뜻한 바가 아니어서 2년 후 1929년 정수태에게 ‘신간회’ 광주지회장 자리를 넘기고, 제중병원(원장 Wilson 의사)에 찾아오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제중병원을 찾아 온 나환자들로 광주시는 마치 나환자촌 같은 인상을 풍길 정도로 길거리에 나환자들이 많았다. 최흥종은 전국적인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이 필요함을 총독부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최흥종은 곧 서울로 올라와 윤치호(尹致昊), 김병로(金炳魯), 송진우(宋鎭禹), 안재홍, 김성수(金性洙), 조병옥(趙炳玉), 이인(李仁), 서정희(徐廷禧), 최원순(崔元淳)등을 찾아 취지를 설명하였다. 모두들 최흥종의 제안에 찬동을 표하여, 회장 윤치호, 총무 최흥종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1932년초 "전국구라(救癩)협회"를 조직하였다. 총독부에 보내는 제안서는 안재홍이 집필하였다.
이 제안서에 대해 총독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1932년 봄 최흥종은 광주에서 나환자 150여명을 모아 서울 총독부로 향하는 '나환자 시위행진'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나환자 400여명이 총독부에 몰려들었다. 시위대가 총독부 뜰에 진입하자 당시 우가끼(宇垣)총독은 최흥종목사를 총독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결국 총독은 최흥종목사의 요구조건인 '소록도의 나병환자 수용시설을 대폭확충하고,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갱생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을 수락하였다.
마침 우가끼 총독이 광주지방을 순시한다고 하자, 전남 도지사는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광주의 큰장터(현재의 양동시장) 주변의 걸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빈민촌을 철거해 버렸다. 도지사에게 여러 번 철거민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도지사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별 수 없이 최흥종목사는 당시 광주지역의 갑부였던 최선진(崔善鎭/현 유은학원 창업자), 최명구, 지응현(池應鉉/속칭 지참봉), 현준호(玄俊鎬/호남은행의 창업자/현대그룹 현정은회장의 조부)등의 지원을 받아, 중앙교회에서 매일 점심때마다 걸인, 철거민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행하였다. 또한 당시 농지였던 경양방죽(구 광주시청 자리)가에 짚다발로 움막집을 짓고 걸인 수백 명을 수용했다.
최흥종목사는 제중병원 Wilson 원장/선교사의 지원과 안재홍, 최원순, 손창식(孫昌植), 중앙교회 신도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광주 봉선리에 나병환자 수용소를 지어 500여명을 수용하고, 치료했다. 봉선리 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최흥종목사는 광주 양림동 미국인 선교사 묘지 옆에 제2의 수용소인 양림동 수용소를 지었다. 최흥종목사 자신도 남자 나환자 수용소 안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남여 나환자들은 최흥종목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1935년에 최흥종목사는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망통고서를 돌렸다. 즉 죽은 사람으로 행세했다. 오방(五放)이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어버린다는 뜻이었다. 그 놓아버린 5가지는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의미했다. 그는 "지상의 일에서 떠나 오직 하나님 속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했다.
[해방 후의 정치활동과 교육활동]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1945년 8월 17일 광주에서 좌우익을 망라하여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에서 위원장으로 좌우익 모두로부터 추대되었다. 그만큼 그는 광주지역에서 좌우익 모두로부터 추앙받고 있었다. 서울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과 중간파만의 조직이었고, 우익이 전연 배제된데 비해, 최초의 전남 건준은 좌우익 모두가 참여한 순수한 건국 준비체이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6일 중앙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완전히 좌익의 손아래 들어가자, 광주에서도 9월 20일을 기하여 우익들은 건국 준비위원회에서 배제되고, 좌익만의 인민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최흥종목사는 1945년 9월 20일 건준 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당시 9월 10일 미군정청 군대(책임자 Gilbert 소령)가 광주에 진주하자, Gilbert 소령은 최흥종목사를 가장 신뢰할 만한 도정 협의자(道政 協議者)로 여겨 그를 도정 고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미군은 도지사에는 최흥종목사의 동생이고, 미국 유학생출신의 의사 최영욱(崔泳旭. 초대 민선 도지사)을 임명했다. 이렇게 하여 전남지역의 미군정은 지역의 신망 받는 인사들을 행정책임자로 선정하였다.
또 광주 YMCA가 해방이후에 재건되자 최흥종목사가 광주 YMCA의 회장을 맡았다. 군정기간중 이승만(李承晩)박사나, 김구(金九)주석, 함석헌(咸錫憲)이 광주에 내려오면 꼭 최흥종목사를 만났다. 이승만박사는 그의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에 감동되어 대통령 재임 중에도 전남인사를 만나면 최흥종목사의 안부를 꼭 물었다. 김구는 최흥종목사가 정치를 떠난 것을 몹씨 아쉬어 했으며, 함석헌은 그를 '무등산의 은자(隱者)'라고 불렀다. 그는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에는 적산재산(敵産財産)이었던 호남신문의 회장(사장은 이은상, 편집국장은 최인식)을 맡기도 했다.
1948년 최흥종목사는 전남 나주(羅州)에 '음성 나환자'(한센병을 앓았다가 치유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인 호혜원(互惠院)을 설립하였다. 1951년에는 그의 나환자들을 돕는 사업이 전국적인 인정을 받아 '전국사회사업협회' 회장의 책임을 맡았다. 1955년에는 최흥종목사는 의제(毅齊) 허백련(許百鍊)화백과 함께 '청년들에게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三愛/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였다. 최흥종목사가 교장을 맡고, 허백련화백이 부교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그 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8년에는 6.25이후 갑자기 많이 늘어난 폐결핵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무등산 자락 원효사부근에 만들고 '송등원(松燈院)'을 만들고 이를 운영하였다. 이 송등원 옆에 무등원(無等院)교회를 세웠다. 여기서 그는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만을 읽었다.
1966년 2월 전국 교회에 보내는 경고문을 보낸 후 절필(絶筆)하였다. 이 경고문에서 실제의 삶에서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며, 명목만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 일로 전국 기독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는 1966년 2월 10일부터 34일간 금식을 하자 광주 YMCA등 광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강제로 최흥종목사를 무등산 칩거에서 광주 시내의 아들 집으로 데려왔다. 1966년 5월 14일 87세로 별세하였다. 광주 지역사회는 사회장(社會葬)을 결정하고 명예위원장에 이갑성(李甲成/광복회 회장), 위원장에 허백련, 부위원장에 최상채(崔相彩/전남대총장), 백영흠(白永欽/광주중앙교회목사), 양명순(梁明順/광주YWCA 회장)이 선정되었다.
장례가 치러진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는 200여명이 넘는 음성 나환자들과 수십 명의 걸인들이 몰려들어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기고 가십니까?"라고 통곡하여 장례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전남매일신문, 1976년 7월-8월 "전남에 개화의 횃불을 밝힌 선각자들--오방 최흥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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