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에 로마에 도착하여 로마는 아직 본격적으로 구경하지도 못 했지만, 오늘은 잠시 로마를 벗어나, 남부 이태리에 속하는 나폴리와 폼페이를 다녀 오기로 한 날이다.
교통편 - 로마와 나폴리 (역명 : Napoli centnale) 왕복은 한 달 전쯤에 italo 열차를 예매했었다. (왕복 44유로) 돌아오는 열차는 1등칸 (prima) 이었는데, 예매 당시에 2등칸과 거의 같은 가격으로 오퍼를 하고 있어서 얼른 예매를 했었다. 나폴리와 폼페이 열차표는 타기 전에 현장에서 구매했다. (편도 2.8유로) 이딸로는 우리나라의 KTX와 같은 고속열차이고 폼페이 구간은 사철인데, 전세계에서 몰려 온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교통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의 6~70년대 기차가 연상되는 전체적으로 노후화되고 낙후된 시설이였다. 거의 폐차 지경인 폼페이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의 외관
1. 역사의 박제가 된 폼페이
베스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할 당시 폼페이의 인구는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재앙의 희생자는 대략 2천 명. 주민의 90%는 이미 대피를 했다는 이야기다. 남들이 다 대피하는 동안 머뭇거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자초한 10% 사람들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거동이 불편해서? 자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설마하다가 당했을까? 식구 중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있어 혼자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떠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도 있었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생생하게 남겨진 2000년 전 삶의 터전을 보며 깊은 감회에 젖지만, 온통 새까만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쏟아진 화산재와 낙하물과 유독 가스에 묻혀버린 다른 유물들처럼 그날의 아비규환의 비명 역시 이 폼페이 어딘가에 묻혀 화석이 되어 남아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관광객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대참사가 남긴 역사의 현장 위에 서 있으면서도 폼페이의 역사를 그저 막연히 전해 내려오는 전설처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폼페이 비극의 근원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었지만, 재앙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람의 방향이었다. 그 날 바람의 방향이 조금만 틀어졌었어도, 폼페이는 이 큰 재앙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폼페이가 하필이면 바람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가 엄청난 재앙을 당했던 것이다. 역사는 이처럼 사소한 우연이 큰 흐름을 결정하곤 했다.
그렇게도 끔찍한 일을 일으켰디고 하기엔 너무나도 순둥이처럼 생긴 베수비오산 (달리는 열차 안에서)
미술사학자들에게 폼페이는 회화에 있어서 귀한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조각이나 건축물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산이 풍부한 편이지만, 회화는 그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폼페이 유적에는 벽면을 장식한 회화들이 많이 있었다. 벽면에 남겨진 그림들이 장인의 걸작이라기보다는, 비교적 서툴고 거친 그림들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회화의 흐름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한다. 폼페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처럼 된 것이 신음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희생자의 마지막 모습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있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 때 나온 유물이 아니다. 동물이나 사람들이 뜨거운 화산재를 비롯한 분출물에 묻히게 되면 육신은 녹아내리거나, 부패하여 먼지가 되어, 몸체를 둘러쌌던 분출물만은 굳어서 속이 빈 거푸집처럼 되었는데, 19세기 때 발굴팀이 이 공간에 석고를 넣고 굳혀서 재현한 조형물이다.
벽면에 그린 회화-이렇게 벽에 그림으로 치장하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현관 입구에 타일 모자이크로 징식한 개 그림. 그 앞의 글자는 "사나운 개조심" ㅎㅎㅎ (유리로 막아놔서 빛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