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덕수궁 복원정비 |
고종은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경복궁 건청궁에 일본보다 2년 앞선 1887년에 동양 최초로 미국 에디슨전등 회사를 통해 발전기를 도입하여 전기를 생산하여 전등을 밝혔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다 광무 1년(1897) 경운궁으로 환원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외국 사신과의 교류를 위해 돈덕전(惇德殿)을 집무공간으로 석조전(石造殿)을 서양식 건축물 양식으로 지었고 건물 전면에는 평면기하학식의 서양식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석조전의 서쪽에 서관(李王家美術館)을 건립하면서 분수가 설치되는 등 형태적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에 따라 고건물의 대대적인 훼철과 일본식 조경으로 조성되었다. 해방 이후 도로 확장 등으로 경역이 축소되었고, 무분별한 외래수목이 식재되어 공원으로 관리되고 이용되었다. 1980년대 창경궁, 경복궁 등 궁궐 복원에 맞춰 덕수궁에 훼철된 고건물인 함녕전 행각 등의 복원이 부분적으로 시행되었고 덕수궁 전통조경도 훼손이 심한 연못 등의 정비를 별도의 계획을 마련하여 진행되었다. 덕수궁에 선원전지(옛 경기여고 자리)에 미 대사관 사택 건립을 하는 계획이 마련되어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유구가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면서 문화재청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덕수궁 신원전지 복원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다른 부지와 교환하여 돌려받을 수 있었다. 선원전지와 함께 덕수궁 전체에 대한 종합계획을 위한 2005년 연구용역을 실시하여 계획을 마련되었으나 단순히 고건물 복원에 그치고 말았다. 석조전앞 서양식 정원이 일부 철거되고 1906년 건립한 중화전 회랑 복원, 함녕전, 석어당 등 건물을 연결하는 행각 등의 복원과 같이 덕수궁의 축소된 경역에 많은 고건물를 복원될 경우 화재등으로 관람객 안전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덕수궁의 역사성 복원이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대한제국, 근대화・현대화 과정의 복합적인 공간을 보존하는 것이 정체성을 찾는 방안이 아닌가는 문제점이 2014년 부터 제기되어 이러한 역사의 과정까지 담아낼 수 있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건물복원은 꼭 필요한 선원전 복원 등으로 축소하고 덕수궁의 조경도 석조전 앞 서양식 조경공간을 보존하고, 선원전 후원의 상림원을 건물복원보다 앞서 시행토록 하였다. |
가 | 대한문(大漢門)권역 |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경운궁의 동문인 대안문(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0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섬처럼 남아 있다가 16m 서쪽으로 이전 건립되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禁川橋)는 대한문으로 차량 출입 등을 위해 매립되어 훼손되었다. 1986년에 발굴을 통해 복원되었으나 작은 연못과 같이 일부만 정비되어 금천교와 어구로서의 기능과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한문 북쪽의 연못 방향과 남쪽 담장방향으로 어구를 연계하여 복원(재현)이 필요하다. 금천교와 어구가 갖추어지면 다른 궁궐과 같이 현재의 교목류는 제거하고 화목류를 식재하여 대한문 입구의 경관을 개선하여야 한다. 궁궐 정문의 월대는 임금과 백성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소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창덕궁의 월대 복원을 완료하였고, 현재 광화문 광장 조성과 함께 경복궁의 월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덕수궁 대한문 월대는 태평로 확장 이전에 찍은 사진에는 잘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 도로 확・포장 공사로 인해 훼손되고 말았다. 대한문 월대는 원래 위치( 도로 중앙)를 발굴을 통해 복원정비가 불가능하여 현재의 대안문에 제현하기 위해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대한문에서 중화문까지 관람로 주변은 향나무, 왕벚나무 등 부적합한 수목이 식재되어 이를 정비하는 사업을 그 당시 문화재 관리국 민경현 조경전문위원회의 계획과 설계를 통해 시행되었다. 관람로 오른쪽 주변은 마운딩 처리하여 관람로 좌우에 잣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을 식재하여 현재는 봄 꽃, 가을 단풍 명소가 되었다. 다만 궁궐경역에 마운딩 처리하여 수목을 식재하는 것은 전통조경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 이를 없애고 평탄화하여 관목과 야생 초화류 등을 보안 식재하여 정비하였다. | |
나 | 중화전(中和殿)권역 |
중화전은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덩(卽阼堂)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中和殿)을 지었다. 본래는 2층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그 해에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면서 정문인 중화문(中和門)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원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중화전권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벚나무, 향나무, 등가대 등이 조정의 박석을 걷어낸 자리에 식재되고 설치하였다. 해방 후에는 수목과 등가대 등을 설치하고 잔디를 식재하여 관리해 왔으나, 1984년 궁궐 복원정비에 맞춰 중화전 앞 잔디도 걷어내고 박석으로 복원 정비 하였다. 1983년 석조전 분수대와 중화전 사이에 열식으로 식재에 놓은 크게 자란 은행나무를 굴취하여 동쪽의 연못 담장 주변으로 이식하였다. 이는 서울시청 방향의 빌딩들의 불량한 경관을 차폐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중화전 전면의 외래 수목을 제거하고 전통수목(단풍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을 식재하여 관람객들의 휴게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 |
다 | 침전권역(함녕전, 덕흥전, 정관헌 등) |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건립하여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어 1905년 8월에 중건했다. 이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장소이다. 덕홍전(德弘殿)은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주로 고종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일제는 이곳 마당에 모란밭을 조성하여 일본식 중정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이를 원래의 기능에 맞도록 마당공간으로 복원시켰다. 함녕전・덕홍전 뒤편 화계지역은 원래 경효전(景孝殿)의 북 행각과 별도의 건물이 있던 곳이나 1904년 화재 이후 화계로 조성 되었으나 일제는 이곳 화계에 모란을 식재했다. 화계지역의 모란밭은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도 화가, 학생들의 그림그리기, 관람객들의 사진촬영 등의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모란은 낙엽이 진 가을에는 겨울철 삭막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모란을 이식하고 침전은 후정을 송림 경관으로 1985년 정비하였다. 이때 하층에는 철쭉, 진달래 등도 함께 식재했다. 식재 당시 2~3m 정도의 작은 소나무가 현재 크게 자라서 화계의 장대석을 밀어내고 있고 정관헌(靜觀軒)의 앞면을 차폐하고 있어서 크게 자란 소나무는 뽑아내고 화계의 특성에 맞도록 화목류(매화나무, 진달래, 철쭉 등)와 다행송(多行松) 등으로 교체 식재가 바람직하다. 화계 북쪽 높은 언덕에는 전통목조건축(팔작지붕 등)과 서양적 건축요소가 함께 있는 정관헌(靜觀軒)을 건립(1900년 건립 추정) 했다. 초기에는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다가 이를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으로 이전되고 고종의 연회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차폐하고 있는 앞면의 송림과 동쪽의 향나무 등을 정비하여 조망경관의 회복이 필요하다.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다.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되었다가 1930년대에 석조전 서관 남쪽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보루각(報漏閣) 자격루와 흥천사(興天寺) 동종 등을 전시하는 보호각으로 사용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광명문, 행각 등의 건물 철거지역은 서양식 조경(평면기하학식)을 조성해 놓은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궁궐에 맞지 않는 서양식 조경공간을 없애고, 건물 지역임을 감안한 수목식재는 가급적 지양하고 잔디를 식재하여 유구층을 보존해오다가 광명문 내 자격루 등의 유물을 고궁 박물관으로 이관한 후 함명전 앞 원래의 자리를 발굴하여 2019년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66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서울 각 지역에 선열의 동상을 세우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면서 1968년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다. 1980년 이후 궁궐의 복원이 시작되면서 덕수궁 세종대왕동상 이전이 꾸준히 개진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2012년에서야 이를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을 이전하고, 동상이 있던 주변의 향나무 등 불량한 수목을 제거하여 정비하였다. | |
라 | 편전권역(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등) |
즉조당(卽阼堂)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1897년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다. 준명당(浚眀堂)은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咸寧殿)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석어당(昔御堂)은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가 환도한 후 거처 하셨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白骨)집’으로 중층에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즉조당・준명당・ 석어당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소실되었으나 그 해에 건물을 다시 지었다. 중명당과 즉조당 앞은 넓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고 잔디밭에는 괴석(怪石)이 설치되어 있다. 이는 궁궐의 전통조경 공간 배치에 맞지 않으므로 함녕전 뒤편 화계 등으로 이전하는 방향을 검토해 정비하여야 한다. 또한 석어당과 인접한 살구나무는 봄 개화시기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어 석어당도 개화시기에 맞춰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석어당 건물과 어우러진 살구나무 1그루를 통해 역사적 복원 정비의 시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건물위주 정비 기준에서 탈피하여 나무 한 그릇 식재가 전통경관 연출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인식하였으면 한다. 침전권역과 편전권역을 담으로 구역을 나누면서 각각 다른 형태의 4개의 문인 창신문(彰信門), 유현문(惟賢門), 용덕문(龍德門), 석류문(錫類門)을 설치하였다. 특히 눈길을 끄는 문은 유현문이다. 좌우로 꽃담이 이어지고 벽돌로 아치형 문을 만들면서 다양한 전통과 근대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덕수궁의 꽃담과 문양은 경복궁, 창덕궁 등과 다르게 전통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설치한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침전권역의 후면에는 복(福)자 문양을 넣어 만든 아름다운 굴뚝 2개가 있는데 주변에 크게 자란 수목으로 인해 굴뚝이 조망되지 않으므로 가지치기나 이식 등을 통해 경관을 개선하고, 현 후원과 건물 사이의 곡선형 자연석 경계석을 직선형장대석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 또한 후원에 지면보다 낮게 절토 후 자연석을 경계선으로 쌓아 만든 관람로도 원래의 지형으로 복구하여 정비가 필요하다 현 후원의 회화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 오래된 거목(巨木)은 덕수궁의 역사성을 말해주고 있으므로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철저히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 |
마 | 돈덕전권역 |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예식을 위해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으며,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 장소나 외국 사신 접견 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를한 곳이다. 그러나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때 경역의 전각과 함께 훼철되었다. 이곳에 소형 분수, 놀이시설(미끄럼틀 ,그네 등)과 소형 동물원 등을 갖춘 아동 유원지로 1933년 조성하여 운영하였다. 그 후 1965년경 놀이시설 일부는 철거하였고, 소형동물원으로 운영되다가 1985년 덕수궁 복원을 위해 철거가 되면서 지형을 회복해 후원영역과 같이 회화나무를 식재하였다. 이후 이 공간은 가건물을 설치하여 덕수궁관리사무소 등의 용도로 임시 사용되었다.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회화나무가 돈덕전의 계단에 근접해 건물에 피해를 준다는 사유로 이식이 결정되고 뿌리돌림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회화나무는 돈덕전 건립시에도 거목으로 보존되어 역사성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오래된 나무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며 더욱이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면 새롭게 건립하는 돈덕전보다도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원 위치에 보존되면서 돈덕전이 건립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돈덕전은 2022년 완료할 예정으로 건립이 진행되고 있다. 건립이 완료되면 즉조당, 석조전 후원과 수림이 연결될 수 있도록 회화나무 등의 수목을 식재하여 정비할 필요가 있다. | |
바 | 석조전권역 |
석조전(石造殿)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 준공한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축물이다. 고종은 조선을 자주 근대국가로 만들기 위해 황제국을 선포한 후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석조전을 건립하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에는 접견실과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추었다. 서양식 정원도 석조전 건립과 함께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전 회랑을 철거하고 정원을 넓혀 ‘대정원’이라 표현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조각상(독수리)을 설치하여 조성했다가 이후 철거되고 중앙이 높은 기식화단(寄植花壇)으로 변경되었다. 석조전 서관(이왕가미술관)이 건립되기 이전에도 수반형태의 방형 연못을 만들고 중앙에 거북이 조각상을 배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몇 번의 변화를 가졌다. 석조전 서관(이왕가미술관)이 1938년 4월 개관한 이후 9월에 지표면보다 낮게 지형을 만들고 중앙에는 분수를 배치한 후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침상정원(침상정원, 정원을 꾸밀 때 주변보다 아래로 내려간 지형에 만든 정원)을 완성하였다. 분수와 함께 대칭으로 식재한 나무로는 금송, 반송, 주목 등이 있다. 남쪽에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등가대( 기둥은 콘크리트, 상부는 목재)를 좌우에 대칭으로 설치 되었다. 이 등가대는 현재도 원형으로 보존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등가대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원래 분수대 재질은 청동이었으나 일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단(砲壇) 등의 재료로 활용하기 위해 뜯어가고, 콘크리트로 분수대와 조각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를 1984년 원래의 재질인 청동으로 새롭게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석조전앞 정원과 창경궁 온실 앞 정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정원문화가 우리의 궁궐안에 만들어진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만들어진 형태에서 변형된 석조물(석조 등)과 수양벚나무 등 고사되어 대층이 깨져 있는 수목 등은 원형을 찾아 설치하고 식재하여 복원 정비해 나가야 한다. 또한 석조전 서쪽 출입문 앞에 크게 자란 침엽수 2그루가 현존하고 있다. 이 나무는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의하면 “5종류의 외래수목을 도입하여 식재했는데 2종류만이 살았다는 기록”을 유추 해보면 이때 식재한 수목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사되지 않도록 유지관리와 함께 사릉양묘장에서 후계목도 양성해 놓아야 한다. | |
사 | 연못권역(궐내각사 권역) |
현재 연못이 있는 곳은 경운궁의 궐내각사가 위치해 있던 지역으로 태평로 확장, 공원화 등으로 훼철되었다. 연못조성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 등에 스케이트 장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볼 때 1933~1936년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연못은 곡지형태로 호안을 자연석 들여쌓기 등 일본식 연못으로 조성하였고, 해방 이후 도로 개설 등으로 연못이 1/2 정도 축소되면서 연못의 중앙에 섬을 조성하였다. 1983년 연못 호안서축 훼손과 지하철 공사등으로 인한 누수 등이 발생하여 연못 바닥을 방수처리하고 호안과 섬의 석축을 자연석을 이용한 바른층쌓기로 정비하였다. 섬 내에는 소나무, 산철쭉, 연못 주변의 외래수목 등 불량한 수목을 제거한 후 단풍나무, 느티나무 등을 식재하여 경관을 개선하였다. 그러나 임시 방편적인 정비에 그쳐, 앞으로 궁궐의 연못 형태인 방지원도용 등을 검토하여 제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차량출입 등을 위해 북쪽에는 새롭게 출입문을 크게 만들고 내부 진입도로를 개설하였다. 이를 철거한 후 서울시청방향의 도로 소음과 주변의 높은 건물의 불량한 경관을 차폐하기 위해 중화전 동쪽에 크게 자란 은행나무 등을 이곳 담장 주변으로 이식하였다. 현 시점에서 연못지역 건물을 복원하는 것은 훼손과 주변 여건 등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람객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보안식재와 함께 궁궐에 맞는 편의시설 조성이 필요하다. | |
아 | 선원전권역 |
선원전(璿源殿)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불타게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복원되었다. 그러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여고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양도되었다.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가 확인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되어 2011년 우리나라에 다시 소유권이 넘어왔다. 이후 교환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이 설치되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이 복원하여 개방되었다. 선원전 권역에 선원전(璿源殿), 흥덕전(興德殿), 흥복전(興福殿)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은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할 계획이다. 선원전 배후림인 상림원을 복원하는 사업이 중요하다. 통상적으로는 고건물의 복원공사를 먼저 시행한 후 조경 공사가 마무리 공사성격으로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상림원은 앞부분에 고건물이 먼저 복원되면, 후면의 상림원 복원에 필요한 수목, 괴석 등의 반입문제 등이 예상되었고, 그와 함께 수목과 야생 초화류를 먼저 식재하여 복원해 놓으면 고건물 복원 완료시 멋진 전통 경관이 연출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위해 2020년 상림원 복원 정비 기본계획 및 설계를 연구 용역으로 발주하여 2021년부터 시행해 나가도록 하였다. 선원전은 제래공간의 성격에 맞게 전통유실수(밤나무, 배나무, 감나무 등)를 일정구역에 식재하고, 후면에는 높은 빌딩 등을 가릴 수 있도록 담장 주변에 소나무림을, 후면 배후림에는 회화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을 식재하여 종묘의 배후림 경관과 같은 수종을 식재하는 방향으로 설계가 이루어졌다. 앞으로 전통조경 복원정비 사업은 고건물 복원과 함께 가야할 부분도 있겠지만 선원전의 상림원과 같이 선제적으로 시행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4 | 앞으로의 과제 |
덕수궁의 외곽 경역의 축소, 건물의 훼손과 더불어 중요한 내부의 전통조경 공간이 공원화 과정을 통해 궁궐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어 1980년대 이후 일부 공간에 대하여는 복원 정비를 추진하고 있으나 덕수궁의 다양한 역사성을 감안하여 다른 궁궐과 차별화될 수 있도록 권역별로 융통성 있는 정비(재현 등)가 필요하다. 또한 건축물 위주의 복원해서 전통조경공간도 함께 복원하는 계획으로 2016년 변경하였으므로 필요할 경우 선원전 상림원과 같이 건물복원에 앞서 선제적으로 전통조경의 복원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덕수궁은 조선, 대한제국,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가 함께한 조경 공간으로,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등이 절충되어 재해석된 공간으로, 전통조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전통조경인들이 전통조경공간을 똑같이 모방해서 전국 각지에 만들어 놓고 있는 공간에 대한 시각을 덕수궁의 공간적 변화를 통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조경 공간을 만들어가는 미래 지향적인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덕수궁 전통조경 주요 공사 내용
년 도 | 제 목 | 비 고 |
1981 년 | 조경계획 보고 | |
1983 년 | 연못 정비공사 | |
1984 년 | 정비(조경)공사 | |
1986 년 | 조경공사 | |
1989 년 | 연못 섬 정비 | |
1990 년 | 석조전 뒤 조경공사 | |
1992 년 | 유물전시관 주변 조경정비 계획 | |
유물전시관 주변 조경공사 | ||
대한문 주변 조경정비 계획 | ||
1993 년 | 대한문 주변 조경공사 | |
2004 년 | 대한문 주변 연못 정비공사 | |
2005 년 |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 |
2014 년 | 선원전 복원정비 기본계획 | |
2020 년 | 선원전 조경정비 기본설계 연구용역 | |
대한문 월대 재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