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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논단] 문화의 게토-문화의 매트릭스 / 조재룡 | ||||||
- 시라는 영감과 잠재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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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나는 있을 수 있는
언어의 힘, 언어의 놀이
그런데 이렇게 차분히 설명을 마치고 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게 다가 아니었다. 메시지가 메시지 자체를 향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염려한 그는 마침내, 인간의 소통은 거개가 이 다섯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이걸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도 있다며 이를 ‘시적 기능’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항간에 알려진, 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눈여겨보았을 시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유음중첩현상(paronomase)’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시적 기능에 관해 야콥슨은 “I Like Ike”를 예로 들었는데, 이는 아이젠하워가 선거에서 내걸었던, 미국의 대선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얻어내었던 최고의 슬로건이기도 하였다. “선택의 축을 결합의 축으로 동시에 투사하는 원칙”이라고 야콥슨이 설명한 이 유음중첩현상은, 시가 가장 잘(했던)하는 것, 시가 가장 즐겨(했던)하는 것이기도 하며, “먼지의 방이었다, 먼 지방이었다.”(기형도), “선생은 생선이 되고”(이성복),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김민정)처럼, 시에서 부분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거나 아예, 개별 주제로 부각되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말놀이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고 시도한 작품을 하나 인용한다.
역사적으로, 산문시나 자유시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는, 거개가 유음중첩현상의 작동에 힘입어 만개하였고 제 절정을 펼쳐내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라임의 조화는 물론, 음절의 정확한 규칙성에 맞추어, 자음이나 모음이 중첩될 때 발생하는 특이한 효과를 궁리하는 작업을 우리는 시작법(versification)이라고 불렀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궁정에서 시를 낭독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아하고 조화로운 말놀이는 당신에게 필수였을 것이다. 고상한 수사법 역시 반드시 시에 녹아 있어야만 할 것이다. 유음중첩이라는 말놀이는 이때,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조차 흔히 즐기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음성적 조화를 최대한 자아내고 음절적 규칙성을 통해 절제된 균형미를 선보이며, 궁정의 권위와 자연의 아름다움, 기독교 정신의 숭고함을 고취시켜야 하는 장인의 작업이었다. 청중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킬 웅장한 발화를 고안하는 일은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데 시가 반드시 필요로 했던, 그러니까 시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여타의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가 오로지 저 자신을 향하는 언어활동이라고 야콥슨이 지적했던 유음중첩현상, 한때 시에서 최대의 수혜를 누리기도 했던 언어 조작의 화려한 테크닉, 어느 시기에는 시 고유의 특권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던, 기발한 표현이나 음성적 조화를 바탕으로 한 이 국지적 말놀이를 오늘날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바로 광고 카피일 것이다. 기발한 광고 카피는 대부분, 언어의 국지적 현상과 음성적 조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음절이 지나치게 길면 압축적인 효과를 낼 수 없는 광고 카피의 한계는, 과거에 시가 음절 수를 제한했던 이유와 근본적으로 상통한다. 주야장천 길어지는 광고 카피를 한없이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낭송에서 시는 일정한 길이가 정해진 간결한 시구의 조합이라야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통사의 구성 역시, 한 행마다 정확히 제 의미의 단위로 구분되어야만 했는데, 이 역시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호흡의 단일성과 간결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1〉의 두 광고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 2〉의 왼쪽처럼 révolution(혁명)과 air(에어)를 붙여 프랑스어 형용사 ‘révolutionnaire(혁명적인)’와 동일한 발음을 유도할 때 생긴 모종의 효과로 새로 출범한 소규모 비행기 회사의 혁신적인 특성(가격, 편리함 등)을 암시하거나, 〈그림 2〉의 오른쪽처럼 ‘좋은 사람들(Gens Bons)’의 발음 ‘장봉’과, ‘나쁜 친구들(Sales Amis)’의 그것이 ‘살라미’와 똑같다는 데서 착안하여,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과 나쁜 친구들이 있다’라는 속담 식의 경구로 카피를 만든 경우 모두, 야콥슨이 제시한 시적 기능에서 제 아이디어를 착안한 것들이다. 광고의 저 기발한 착상과 효과는, 언젠가 시가 한 번쯤 몰두했던 것, 시가 특권으로 누렸던 것, 시가 가장 잘했던(잘하는) 것, 시가 뿜어냈던 고유한 특성이었던 것이다. 시의 블루스, 시에 의한 블루스 시는 비단 언어의 이와 같은 국지적 현상뿐만 아니라, 예술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활용하며, 예술 역시 시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시도한다. 시와 음악의 상호 교류에 관한 관심은 그간 주로, 시를 노래 가사로 차용하고 나아가 시의 정서를 멜로디에 담아내는 작업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작품은 이와는 좀 다른 차원에서,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음악과 시, 시와 음악의 밀접성에 대해 사유할 길을 열어준다.
위 작품은 8마디나 12마디 코드로 진행되는 블루스의 리듬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것이다. 시인은 베란다에서 기타를 치려 한다. 그러니까 1-2행은 기타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조라 하겠다. “빗속의 여인? blues for nothing?”(3행)이라는 자문은, 블루스 연주가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가 이에 따라 변주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 시는 제4행 “나는 소박해서”부터가 연주에 해당하는 것이다. 각각의 시구를 악보의 한 마디에 해당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이 시가 4마디+4마디+4마디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페이지 〈그림 3〉의 블루스 코드에 맞추어 시의 구성을 살펴보자. 블루스는 한 차례, 8마디나 12마디를 단위로 하며, 이 각각이 끝날 때마다, 마지막 두 마디에 ‘턴어라운드(turn around)’라 불리는 변주를 넣어, 또 하나의 8마디나 12마디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그러니까 연주가 끝나지 않음을 반드시 알리는 구조를 취한다. ‘턴어라운드’는 이처럼 ‘끝을 맺으면서 다시 연결되는 느낌’을 갖게 하는 블루스 특유의 장치이며 지금까지의 연주로 이 곡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인이기도 하다. 시는 이러한 블루스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제 고유한 어조를 고안하려 시도한다. 7행의 마지막 “~쳐다보는 사람이 없지”는 블루스의 4마디(4-5-6-7행)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이어지는 4마디(8-9-10-11행) 역시 11행의 마지막 “~지어야지”가 통사적·의미론적 차원에서 단위를 마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에 비해 다음 4마디(12-13-14-15행)를 마감하는 마지막 두 행 “백 년을 어루만져 한 사람을 부리고/ 그의 가슴을 껴안아”를 읽는 순간, 우리는 마무리는커녕 무언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데, 그 까닭은 이 마지막 두 행이 블루스의 ‘턴어라운드’ 효과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임곤택은 새로운 멜로디를 연주하기보다 정해진 테마의 변주를 통해 연주를 진행하는 블루스 음악의 단순성을 제 작품 전반에서 차용하여, 독창적인 방식으로 허무를 담아낼 방법으로 승화시키는 시적 변주를 감행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작품 전반을 다시 읽을 때, 결국 우리는 이 작품이 각 행의 길이를 조절하는 데 있어서조차, 블루스의 마디가 그러한 것처럼 ‘잡았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에서 비교적 규칙적으로 각 행의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드는 것은 블루스 곡의 악보가 통상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반복과 조화를 통해 고유의 리듬감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제 시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고유한 시적 리듬을 창출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곤택의 시는, 음악과 시와 관련되어 그간 자주 언급되어온, 가사의 시적 변주나 반복된 템포의 차용이라는 단순한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와 삶의 쓸쓸함에 대한 깊은 사유를, 블루스 특유의 구성과 멜로디의 변주에 기대어 표현해내면서, 매우 새로운 방식의 감정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했다는 점에서,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시적 실험을 실천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시집 《지상의 하루》(2012)는 거개가 이 블루스의 리듬에 의해 변주된다. 특히 “우리가 무엇을/ 맘껏 변하게 한다면”(〈한나절의 생각〉)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부스러뜨리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어둡고 넓어서〉)처럼, 마무리를 짓지 않고 마치 다시 반복될 것처럼 개방해 놓는 마지막 두 행은 블루스의 ‘턴어라운드’를 제 고유한 화법으로 활용한 것으로, 시집 전반에서 주제 의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 시는 이처럼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언어적 치환과 변환을 통해, 음악(그러니까 여기서는 블루스)의 시적
실현이라는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도 몰두한다. 되돌아오는 삶의 리듬, 자그만 변화로 반복되는 블루스의 리듬이 고유한 언어의 리듬으로 살아나,
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음악과 시, 시와 음악에 대한 비평, 시의 음악적 변주, 음악의 시적 변주에 대한 비평은 이렇게 새로운 곳에
당도한 것은 아닐까. 시는 여타의 예술을 통해 자기 고유의 예술성을 확장시키는 일에도 늘 집중하고, 시시각각 몰두하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의 종착점이 아니며 그 출발점도 아니다. 시는 시시각각 이미지를 뿜어내고 우리를 낯선 곳으로 초대하지만, 이미지가 하고자 했던 것, 시각 예술이 시도했던 일을 앞서 실험하지 않은 적은 없다. 영화가 한 것을, 회화가 한 것을, 영화의 앵글이 보고자 했던 세계를, 이미지가 표상하는 세계를, 시가 보려고 하지 않고 도달하지 않으려고 한 적은 없다. 랭보의 시 한 편을 읽는다.
랭보가 열여섯 살이 되던 1870년의 10월, 그러니까 보불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옆구리에 총탄 두 발을 맞아 골짜기 아래에 쓰려져 있는 병사를 우연히 보았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는 이 장면을 〈그림 4〉의 두 샷으로 담아낸다. 〈그림 4〉의 왼쪽은 신체 일부를 클로우즈 업으로 처리한 샷으로, 죽은 병사의 군복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병사의 국적이 프러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오른쪽은 랭보가 그를 발견하고서 그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며, 뿌리 뽑힌 나무가 전쟁의 상실감을 상징하는 가운데, 개울과 녹지가 하나로 어울린 자연을 배경으로 삼아, 두 피사체의 전신을 앵글에 담았다. 랭보의 시 〈골짜기에 잠든 자〉는 영화에서 단지 네 개의 샷으로 반영되는 데 그쳤지만, 영화 전반에서 랭보의 삶과 죽음을 총체적으로 은유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랭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장면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이 〈골짜기에 잠든 자〉에서 착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숨에 겨워 헐떡거리며 임종을 맞이한 랭보의 의식 속으로 마지막에 떠오른 것으로 표현된 〈그림 5〉 왼쪽의 장면은 이내 점점 흐려지며 결국에는 오른쪽처럼 차츰 소거되어 버린다. 페이드 아웃이라는 기법이 영화도 랭보도 끝을 맞이하는 데 헌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시가 제시하고 있는 시선과 이미지를 따라가 보자. 첫 행의 “초록의 구멍”은 랭보가 아직 이 병사를 발견하기 전, 그러니까 풀밭 위에서 저 멀리 골짜기를 전경으로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영화 용어를 빌리자면 ‘익스트림 롱샷’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먼 곳을 주시하던 그의 시선은 천천히 가까운 곳으로 옮겨와 “은빛 누더기를 미친 듯이 풀 대궁에 걸어 놓”은 “개울”로 향한다. 이때 “개울”은 이 단일한 시선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골짜기 위로 고스란히 포개어지며(“햇살로 거품을 이는 작은 골짜기”), 햇빛을 받아 펼쳐지는 복합적인 시선 안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둘 이상의 화면을 겹쳐 놓는 ‘이중 노출’과도 같은 정경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고 해도 좋겠다. 이 외에 어떤 시선이 더 있을까? 2연의 첫 행 “어린 병사”를 피사체라고 하자. 이 피사체가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초록 침대 속”에 놓였다는 것은, 정적인 배경 화면(“초록 침대”로 표현된 녹지의 자연)을 마치 카메라가 노출되어 잠시 눈이 부시게 된 것과 같은(“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그러니까 영화용어로는 ‘역광 효과’로 표현해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우리는 피사체를 빛을 뿜어내는 동적인 전체적인 화면 속의 정적인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후 시의 시각은 차츰 피사체를 향해 다가오며 좁혀지며, 그런 만큼 화면도 점차 커질 것이다. 이렇게 시는 “햇빛 속에, 고요한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어 있는 저 “코끝”도 “움찔거리지 않는” 전신, 그러니까 ‘풀샷’에 가까운 시선을 선보이고, 그렇게 한 바로 다음 “붉은 구멍 두 개”로 향하는, 그러니까 ‘익스트림 클로즈업’이라고 해야 할 앵글 속에서 마무리된다. 시의 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골짜기에 진입했을 때의 느낌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첫 행의 “초록의 구멍” 그러니까 위대한 자연이, “붉은 구멍” 그러니까 죽음을 그 안에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며, 그렇게 비극의 순간을 맛보게 될 것이다. 랭보의 시는 일반적으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시선 그 이상의 다양한 시선을 압축적으로 실현해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가 작품을 따라 읽으며 떠올리고 헤아릴 수 있는 샷(shot)과 신(scène) 역시 영화가 실현해왔고 실현하고 있는 중인 샷이나 신을 포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는 그 이상의 장면을 연출한다. 시가 실현하는 이미지는 영화가 했던 모든 이미지들, 영화가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며, 영화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또한 복합적인, 시각의 가능성의 최대치 실현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사(題詞)에 인용한 것처럼, 어린 랭보가 “오래전부터, 나는 있을 수 있는 모든 풍경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자부했으며, 현대회화와 현대시의 명성을 가소로운 것으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 광고, 회화, 영화, 이미지들이 시를 세상으로 불러내고, 시에서 언어의 고안에 의해, 언어의 고안 속에서,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불려 나오고 우리를 기이한 체험의 세계로 안내한다. 시는 문화라 불리는 인간의 활동이 제 가능성을 세계에 뿜어낼 게토이자, 가능성을
끊임없이 고안해 나갈 매트릭스이며, 가능성을 한껏 머금고 있는 잠재성이자 무의식이다.
조재룡 rythme@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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