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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12월 29일, 새해를 2일 남기고 장학량이 동북역치를 선언함으로서,
손문이 끝내 해내지 못하고 눈을 감은지 3년 8개월만에 장개석에 의해 중국 전토는 통일을 달성합니다.
물론 1930년 펑위샹(馮玉祥·풍옥상), 광시 군벌 리쭝런(李宗仁·이종인) , 산시 군벌 옌시산(閻錫山·염석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장개석에 도전하는 중원대전이 발발하지만 동북의 장쉐량이 장개석을 지지하자 진압됩니다.
장기간 군벌들이 벌인 내전 과정에서 중국군은 머릿수만 잔뜩 늘어나
북벌 직후인 29년을 기준으로 4개 집단군과 장학량의 동북군, 사천, 청해 등의 지방군벌군까지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총 84개군 272개 사단, 18개 독립여단, 21개 독립단(연대)에 달했고
이로 인한 연간 유지비용만 5억 4,600만원에 달하여 중국 전체의 1년 세수인 5억원을 훨씬 상회하였습니다.
국민당 정부로서는 요구하는 군비의 일부밖에 지불할 수 없었고, 군대의 월급은 당연히 몇달씩 체불되었다.
여기다 지휘계통은 물론 편제와 정원도 제각각인데다 단대호만 있을뿐 유령부대도 태반이고, 무기, 훈련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머릿수만 세계 최대일뿐, 군대로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갖출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북벌 직후부터 군에 대한 구조조정과 여기서 나오는 실업자들을 산업노동자로 돌릴 것을 제안하는 등 나름대로 군의 근대화를 추진해 나갑니다.
여기에 극렬 저항하는 신군벌들과 지방세력들과의 여러차례 반장전쟁을 거치는 등 많은 애로가 있었으나
30년대 전반에 걸친 장개석의 노력은 중국군의 근대화에 상당한 성과를 이룩하여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어서 항일전쟁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1932년 3월 1일 지휘계통의 일원화와 중앙으로의 집중을 위해 국민정부 산하 군사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이 군사위원회는 모든 군정과 군령을 통합한 군사최고기관으로서,
우리로 치면 유사시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죠.
군사위원장은 장개석이었고 염석산, 이종인, 풍옥상, 장학량 등 주요 군지휘관 7명을 위원으로 임명합니다.
이 군사위원회의 권한과 조직은 지속 확대되어 37년 7월 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군사업무외에 각 정부부처를 비롯한 행정분야까지 망라하게 되며 사실상 중국군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32년 5월 12일 군사위원회 명의로 "육군師 신편제"라는 이름의 군 개편안을 통과합니다.
주요내용은 전군을 48개군 96개 사단으로 재편성하고 사단을 2개여단 4개 연대체제(4각편제)로 개편하며,
군 사령관이 사단장을 겸임치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동시기 일본식 편제를 따라한 것으로, 서구에서 1차대전을 거치며 "3각 편제"라 하여
1개 사단을 3개 보병연대, 1개 포병연대로 개편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재정 여건상 대규모 포병 확충이 어려운지라 일종의 과도기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군에는 심지어 6개 연대 이상의 규모로 구성된 사단도 여럿 있었습니다.
오만 잡동사니의 집합체였던 군대에 대해서도, 당시 중국을 방문한 젝트 장군의 제안에 따라 육군의 일대개혁을 추진합니다.
북벌이 끝난 직후인 28년 11월 막스바이어대령을 시작으로 독일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중-독간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접근시킵니다.
베르사유조약으로 망가진 독일군에 대해 재무장의 기초를 닦음으로서 "독일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폰 젝트대장은 34년 5월에 중국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장개석에게 300개 사단에 달하는 비대한 중국군을 60개 사단으로 축소하는 대신 내실과 현대화를 꾀하고 먼저 우선 1개 교도사단의 창설을 건의했으며,
중국이 자체적인 무기생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독일과 무역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합니다.
34년 1월 24일 "공업산품상무공사"가 설립되어 독일과의 무역을 총괄하고,
34년 8월에는 중독 양국간 상호 교류조약을 체결해 중국은 독일에게 텡스텐 등 각종 광물을 제공하는 대신, 군수물자를 받게 됩니다.
젝트 다음으로 온 폰 팔켄하우젠대장은 중국군의 개혁과 근대화, 병력이동을 위한 철도, 도로 등 수송로 정비, 공군 강화를 주장합니다.
특히 장강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장강 연안에 철도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여 독일에 자재와 차관을 요청하여 공사를 진행합니다.
팔켄하우젠은 공산당 토벌에 대해서도 제4차와 제5차 초공전에서 선무활동과 토치카전술을 제안하여
결국 모택동 일당들이 영토를 버리고 대장정에 나서도록 만듭니다.
독일군사고문단은 최대 100명까지 늘어날만큼 그들의 역할은 당시 신생 국민정부군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장개석은 이들을 통해 독일로부터 각종 최신 장비를 도입할 수 있었고 총 20개 사단을 독일식으로 무장, 훈련시킵니다.
시간상 모든 군대를 현대화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노력 덕분에 대일전쟁에서 그나마 중국군이 분전할 수 있었습니다.
서안사변 직전 장개석은 그의 일기에 "5년에서 7년의 시간만 있다면 일본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라고 적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34년 12월 장개석이 "중앙군 60개사 정군계획"을 수립합니다.
중앙군과 동북군을 우선으로 3~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4각 편제로 개편하여 전군으로 확대해 나가며,
우선 공산군 토벌에 투입되지 않은 부대들을 대상으로 무한과 남창에서 재편 및 훈련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따라 참모본부에서는 장개석이 수립한 방침에 따라 세부계획을 작성하여 35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뒤죽박죽이던 육군 사단 편제를 "갑", "을" 2개종으로 통일토록 하였는데
"갑"종사단은 상비사단에 해당하고 "을"종사단은 향토사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개석은 중앙군 60개사단, 지방군 60개사단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300개가 넘는 사단을 축소하여 해산되어 남는 인원을 다른 부대에 넣어 정수를 최대한 맞추도록 합니다.
어떤 사단은 1만이 넘고 어떤 사단은 연대급도 안되는 2천미만도 있으니 이런 식으로 편성을 충실히 하려는 것이죠.
포병, 기병, 공병 등 특수병종들을 중앙으로 일괄 귀속시키고
각 부대에 흩어져 있던 포병전력을 사단 직속 포병대대로 집중시키고
박격포는 각 보병대대에 별도의 박격포 소대로 분할 배속하여 사단 화력을 증강시킵니다.
하지만 37년까지도 이 편제대로 정원을 제대로 채운 부대는 하나도 없었고
중앙직계군조차도 1개사단 인원은 많아야 8천에서 1만정도 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사고문단 팔켄하우젠 대장의 주도로 육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이에 필요한 독일제 장비 도착이 지연되자 기존 보유한 장비와 무기로 개편하고 나중에 장비가 도입되는대로 보충키로 합니다.
팔켄하우젠이 키워낸 독일식 사단은 독일로부터 수입한 M35년형 철모를 쓰고 있습니다.
이 철모를 독일로부터 총 35만개를 수입하여 중앙군에게 보급하였는데, 중일전쟁을 거쳐 국공내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것을 노획한 공산군은 50년대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36년 말까지 총 20개사단이 "개편사"로 재편되었고 37년 7월 노구교사변까지 추가로 10개 사단이 재편됩니다.
그러나 대일개전까지 계획대로 독일식 최신 장비를 갖출 수 있었던 부대는
8개 사단(제1, 제3, 제6, 제9, 제14, 제36, 제87, 제88)에 불과했습니다.
포병전력은 당초계획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연대였지만 실제로는 1개 대대(산포 16문)를 갖추는 것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이조차도 갖추지 못합니다.
30년대 초중반까지 서로 꽤나 우호적인 관계였던 중독 양국은
일본과 독일의 방공협정(1936년11월25일, 이탈리아는 37년 서명)이 맺은 이후 독일이 친일로 돌아섭니다.
여기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 대한 군수물자 판매를 금지시킵니다.
이것은 중국군 근대화 계획에 그야말로 치명타였습니다.
38년말까지 적어도 20개 사단분량의 장비를 홍콩을 통해 수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무산됩니다.
이 부족분은 이후 소련의 강력한 원조로 한동안 메우게 됩니다.
총 30개 개편사중 8개 사단을 제외하고는 22개 사단이 재편성과 독일식 훈련을 마친 상태에서
장비 교체는 완료 하지 못한채 부족분에 대해 다른 부대에서 회수한 장비들로 숫자만 채웁니다.
그나마 지방군벌부대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독일식 8개사단을 비롯해 이 중앙군 30개 사단이 대일전쟁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공병과 기갑병, 통신병, 치중병(수송병) 등 특수병과를 창설하여
중앙군 직속으로 1개 철도공병단, 1개 차량병단, 2개 통신병단, 2개 공병단을 편성합니다.
37년 5월에 그동안 해외에서 도입한 잡다한 기갑차량(3개 대대 규모)에다
독일에서 수입한 대전차포대대, 오토바이 중대, 장갑차 대대, 고사포 대대 등을 모아서
독일 기계화 부대를 모방한 육군 장갑병단(단장 : 두율명)을 창설하였고 이후 전략예비대인 제5군 산하 제200사단로 개편됩니다
대일 항전을 대비해 근대공업의 건설과 자체 군수산업 확충 역시 추진됩니다.
당시 주요 근대공업은 주로 북경-천진과 상해, 남경 등 동남연안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대일 개전시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군령부 주도로 군수산업의 중심을 내지로 옮기는 "병공창 재배치" 계획이 수립됩니다.
군수 공장을 전시에 대비해 호남북, 사천, 귀주 등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35년 6월부터 추진되지만 노구교사변의 발발로 계획의 일부만이 시행되죠.
서안, 남창, 금릉 등의 군수공장과 화약공장의 생산규모를 확충하여 무기, 탄약 생산을 증대합니다.
독일제 소총(Gew98, Kar98k), 24형 맥심중기관총, 체코 ZB26 경기관총 등을 복제하여 자체 생산합니다.
방독면, 장갑차량, 박격포 등도 자체 생산하고 향후 이를 확대해 장갑열차, 중포, 통신장비, 차량 등에 대한 생산공장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본과의 개전으로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의 군수 능력은 단지 박격포와 기관총, 소총 등 경화기와 탄약을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것도 기껏해야 중국군의 수요의 일부를 충족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