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항상 박정희가 1위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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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을 맞아 한국갤럽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이란 설문을 내걸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재미있다.
응답자의 44%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그 뒤는 노무현 전 대통령 24%, 그 다음은
김대중 전 대통령 14%, 이승만·전두환 각 3% 순으로 돼 있다.
전국 성인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했다는데,
박정희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심심하다 싶으면 등장하는 이런 류의 ‘인기도’
조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이라는 설문 내용 자체가 성립 가능한지부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희화적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잘 이끈’이라면 비교 가능한 대상자들이
있다는 게 전제돼야 성립되는 설문이다.
그런데 광복 이후 70년 세월동안 과연
박정희를 빼고 그와 비교 가능한 대통령이 애초에 존재하기나 했던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은 비교대상자들과 박정희를 나란히 놓고 누가 ‘가장’ 잘
했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정말 뻔뻔한 짓 아닌가.
나라는 1948년에 만들어졌고, 1960년
4·19 민중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날 때까지는 이승만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었다.
1961년에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뒤
무려 18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른 사람이 박정희고, 그 또한 1979년 민중봉기에 놀란 측근의 모반으로 제거된 뒤에도 그가 키웠던 ‘하나회’
멤버 군인들의 폭압적 집권이 1992년까지 이어졌다.
그 뒤의 김영삼 정권조차 1997년 이른바
‘IMF사태’(외환위기) 때까지 이어진 공화당 창당 이래의 군인 정당 장기 일당지배체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박정희와 그들’의 집권은 짧게
잡아도 30년이 넘고, 길게 잡으면 무려 40년에 가깝다.
70년에 40년!
그 세월 동안 ‘박정희와 그들’은 정치적
경쟁자의 존재 자체를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다.
1971년 4월 대선을 끝으로 그 다음해
‘유신헌법’ 선포, 민간의 정치활동 금지, 대통령 직선제 폐지…, 이런 조처에 대한 반대나 불만 표시 자체를 고문, 납치, 처형,
살해(의혹)까지 불사하며 중형으로 ‘다스린’ 세월.
최근 재심에서 무더기 무죄 판결을 받은
민청련이나 긴급조치, 인혁당 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 희생자들의 예가 보여주듯 박정희는 정적이 될만한 개인이나 세력, 정치적 반대자들을
원천적으로 말살해버렸기 때문에 국민들에겐 그와 다른 누구를 비교대상으로 놓고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다.
박정희 외에 어떤 다른 대안 가능성도 허용되지
않았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조봉암 등의
정치적 경쟁자나 반대자들이 무더기로 암살·처형당한 이승만 시절까지 계산에 넣으면, 70년에 60년! 광복 70년 세월에 국민들이 그들 외에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는 선택지가 도대체 몇이나 됐나?
박정희 방식의 근대화, 박정희 방식의 정치,
박정희 방식의 경제건설, 박정희 방식의 안보와 군사·외교 외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거기에 반대하거나 불평하면 모조리 반정부
종북·친북이 되고 공산주의자, 빨갱이, 간첩이 돼야 했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세월이 태반이다. 비교
가능한 다른 어떤 선택지도 자유도 정치체험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던 그 세월에 ‘누가 가장 나라를 잘 이끌었느냐’고 묻는 건, 그 물음 자체가
사기 아닌가?
그럼에도 5년 단임의 노무현, 김대중을 꼽은
이들이 각각 24%, 14%씩이나 됐다는 게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1970년대에 제발로 조국을 찾아왔다가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사형수가 되거나 장기수가 됐다가 수십년이 지난 최근에야 재심에서 무더기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
그 피해자들의 기막힌 사연과 사건 진상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국이 버린 사람들>(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서평에 대한 일본 인터넷 사이트의 재일동포들 반응 중에 ‘박정희 1위’라는 이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언급하면서 남긴 인상적인
멘트가 있었다.
“동족으로서 부끄럽다.”
그 동포가 정권안보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유린한 사람을 여전히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는 조국의 동족을 부끄러워했는지, 그런 사람이 1위라는 정답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세상을
끌어가고 있는 세력을 부끄러워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그 정도밖에 안되는 조국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박정희가 항상 ‘가장 나라를 잘
이끈 지도자 1위’로 나오는 여론조사가 무의미해 보이면서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대목에 있을지 모른다. 이 조사 결과 자체는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그 무의미를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자들의 숨겨진 정치적 의도의 유의미성, 그 부끄러운 짓.
“동족으로서 부끄럽다”고 했던 그 동포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일본이란 나라도 한심하기로 치면 조금도 덜하지 않은 듯하다.
‘과거사 사죄’ 여부가 저토록 주요 이슈가
되도록 만든 것부터가 과거사로 사죄할 이유 없다고 큰소리쳐 온 아베 신조 총리 자신의 일종의 자가발전 결과였다.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그는 2천만 이상의
아시아인들을 살륙한 일본의 과거 침략과 전쟁범죄는 일본이 세계공황과 그에 따른 서구 제국의 블록화 와중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정당방위였으며, 일본인들은 오히려 전쟁 피해자였고, 러일전쟁은 아시아 민족해방전쟁의 자랑스런 선구였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태연히
되풀이했다.
A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태평양전쟁 주범 도조
히데키 전쟁내각의 각료(상공대신, 그 뒤에 군수성 차관)였고 일제 괴뢰국가 만주국의 설계자로 일제 관동군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으며, 역시 A급
전범이었으나 살아남아 미국의 지원 속에 자민당 장기집권체제인 1955년 보수합동체제를 성사시키고 총리가 돼 ‘전후 일본’의 얼개를 만든 기시
노부스케, 그를 외조부로 둔 사람답다고 해야 할까.
중국인과 일본군 포로가 된 서방병사들의 고난과
그들의 관용은 읊조리면서 무자비한 식민지 약탈과 살육, 수치와 정신파괴를 강요당한 최대 희생자 조선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어떤 직접적인 언급도
회피하면서 우월자로 착각하는 듯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이 오히려
억울하다며 거들먹거리는 오만.
전쟁국가로의 개헌을 공언하면서도 부전(不戰)과
평화를 외치는 이 자가당착적 아베 담화에 대해 일본인들 절반 이상이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건 그냥 한심한 것이 아니라 슬프고 또 몹시
위험하다. 그야말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주요국 거의 모두가 이 한심하고도 매우 위험한
아베 담화에 대해 비판하거나 실망·유감을 표명했으나 유독 미국 정부만은 이를 환영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이는 백악관 논평은
더 위험하다.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UCLA) 문리대
이남희 부교수(아시아학)가 쓴 <민중 만들기>.
이 책을 바로 이들
‘위험’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재규명이자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해 갈 것인지를 고민한 책으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은이의 집필 의도와는 다소 어긋날지도
모르겠지만, 책은 그 위험에 대한 대처(대항) 방법과 대항주체 형성 문제 등을 1970~80년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과 및
한계·과오를 현재적 관점에서 문화사적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는 방식으로 재점검하고 재평가하는 것으로 읽었다.
2007년에 먼저 영문으로 출간된 이 책의
한글판(2015년) 서문에서 이 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이 한글로 출판되는 시점은 한국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는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이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터 벤야민에
관한 이야기로 대신한다.
“벤야민에게 과거를 역사적으로 진술한다는
것은, 랑케의 방식대로 ‘정말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이 승리한다면 죽은 자조차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역사학자만이 과거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선물을
갖게 될 것이다.’ 벤야민에게 위험의 순간은 진정한 역사적 모습genuine historical image-또는 역사 전복의 기억-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한 “민중운동을
역사화하는 것”의 의미를 ‘위험의 순간’에 대한 브라질 출신 프랑스 사회학자 미카엘 뢰위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덧붙여 음미해 보자고 권한다.
“아마도 바로 그 순간 역사는 쉬지 않고
‘진보’한다는 안이한 생각이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패배로 생긴 위험은 앞으로 일어날 패배에 더욱 민감하게 만들고, 패배자들의
투쟁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책의 집필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교수는 한글판 서문을 쓴 현시점을 다름아닌
한국사회가 죽은 자조차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것임을 예감케 하는 ‘위험에 처한 순간’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역사학자로서
진정한 역사가 출현했던 ‘역사 전복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야 할 때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하다.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그 역사 전복의 기억이란 바로 ‘1987년
체제’를 낳은 저 유월항쟁 때 정점에 도달했던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의 ‘기적’과 그 기적에 이르는 피땀어린 고투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 절박감은 이 책의 ‘결론-역사로서의
민중운동’ 마지막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1980년대의 이상과 전망은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을 뿐이고, 민중운동의 경험은 점점 더 ‘노스탤지어나 혼성 모방의 목적을 위한’ 이미지와 파편이 되어가고 있다. 역사는 한낱 ‘신화와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과거의 견고함에 대한 우리감각은 녹아’버린다. 이렇게 표피화된 감각 속에서 자기성찰의 장으로서의 역사는
부정된다. 이 책은 민중운동을 ‘구출’하고자 한다. 민중운동은 마땅히 역사적으로 다뤄져야 할 주체로서, 민중운동이 역사적·정치적 세력으로서
부상하게 된 배경은 역사화되어야 한다. 이는 곧 역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민중운동권) 영웅을 살려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공히 권한을 갖고 참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재개념화하는데 역사가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함이다.”
영문판이 나온 2007년에 이미 한국사회
민중운동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론·실천·정치에 대한 1980년대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1990년대 이후 “감수성·순발력·소비에 대한 찬양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세계화·신자유주의화와 함께 거대서사가 불신받고 과거지사가 된 탈민중의 ‘포스트모던’ 시대. 권력은 ‘뉴라이트 노선’을 선언한
보수우파세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8년이 더 지나 한글판 서문을 쓴
2015년, 광복70년 역사에서 예외적이었던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은 이미 한참 전에 막을 내렸다. 친일파-독립운동세력 대립축의 광복70년을
반공-종북(친북)이라는 허구적 대립구도로 대체함으로써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안겨주려는 ‘건국67년’이란 뉴라이트 담론이 대세 탈환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 전복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야 할 절박감은 훨씬 더 커졌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한국의 민중운동을
“세계사적 흐름 안에서, 특히 세계의 역대 변혁운동사의 흐름 안에서 거론되어야 마땅한 커다란 사건”으로도 평가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긴 시간
동안, 각 세대별로 각각 특징을 지니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이 사회운동은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엄혹한 억압 속에서도 그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행위를 전개함으로써, 세계 어느 변혁운동 못지않은 풍부하고
소중한 사상사적, 정치적, 문화적, 운동사적 자산을 남겼다. 특히 그 중에서도 1980년대 당시 운동권이 학생 또는 인텔리 신분에서 공장노동자로
정체성의 급변을 감행했던 행보는-물론 한국의 정치, 노동 현장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됐고, 세계적으로 선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
규모나 당대 사회에 끼친 영향 면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바로 이것이 이 책 내용의 기본줄기다. 지은이는 그 사건들과 개념의 형성과정을 문화사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의미와 문제를 짚어낸다.
그리하여 지식인과 대학생이 주도했던 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이야기’를 제대로 남기는 것, 특히 이를 ‘영어권 학계와 영어권 독자들에게 알려 한국 역사를 보편적 시각의 틀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 <민중 만들기>(The Making of Minjung: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의 직접적인 집필 의도였다.
30년 가까이 장기간 지속됐고, 사회변혁의
범위도 광범위했으며,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의회민주주의로 한국사회를 전환시키는 동력이었던 민중운동=민주화운동은 “동유럽 여러 국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와 같이 국제적으로 좀 더 널리 알려진 민주화운동에 필적”한다고 지은이는 얘기한다.
이는 곧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이 국제적으로
제대로 알려지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로
읽힐 수 있다. 이런 저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연구나
평가가 나오지 않고 있는 한국 내부 사정 탓도 있다.
“이 책 집필 당시 (…)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국내에서 좀 더 역량 있는 학자들이 이 주제를 다룰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대를 거쳐 온 당사자들의 격렬한 몸부림에
걸맞은, 그 많은 인자(因子)들의 시대적 꿈, 고민, 아픔을 제대로 표현해 낸 저작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저작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무모하게나마 한국어판을 내보자고 시도한 것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 세계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한국 민중운동은 한국 내에서 아직 포괄적으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고,
그 자신의 활동 주무대인 영어권에서도 학생운동이나 민중미술 등 부문적, 단편적으로만 다뤄질 뿐 보편사적 맥락에서의 ‘역사화 작업’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민중 만들기>는 다음 3가지를
골격으로 삼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실패한 역사이며, 민중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역사 주체성의 위기’가 만연했던 운동권의
문제의식(1부),
국가가 정한 공공의제에 이의를 제기하며 한국의
사회·정치 담론의 틀을 새로 짠 운동권의 대항담론 공론장 형성(2부),
지식인이 민중을 대신해서 말하거나 작품 들을
통해 형상화할 때 발생하는 여러 이론적·실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재현의 정치학’(3부).
이 3가지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한국 민중운동의 여러 측면들을 전혀 다르게 상상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만큼 책은 많은 문헌자료와 증언, 담론들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역사 주체성의 위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민중을 일관적이고 단일화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하고 부각시키는 프로젝트였던 민중운동은 전형적인 한국의 포스트식민주의적 현상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탈식민화 궤적은 많은
지식인에게 한국사는 실패한 역사라는 인식을 초래했다. 이 책에서 필자는 이것을 역사 주체성의 위기라 명명한다. 민중담론은 바로 이런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민중운동의 지적 기반은 바로 민중운동 담론이었다.”
책은 그 민중운동과 민중해방서사를 촉발시킨 ‘역사
주체성의 위기’를 시발점으로, 학생운동·마당극·지식인-노동자 연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던 1970~80년대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의
‘대항 공론장 형성’ 과정과 양상, 노-학연대를 골간으로 한 지식인 주역들의 ‘재현의 정치학’ 등을 차례차례 살피면서 성과와 한계를 짚어가는
얼개로 돼 있다.
지은이가 ‘실패한 역사’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항목으로 꼽은 것은, 첫째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한 것, 둘째 해방 직후 친일파와 부패한 정치·사회 지도자를 전면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과 대학생 운동권의 포스트식민주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이로 인한 “압도적 패배 의식”이었으며, 이는 광범한 집단적 불만과 좌절감으로 연결됐다. 이것이 바로 지은이가
말하는 역사 주체성의 위기다.
이 실패한 역사의 결과물이자 역사를 실패로
몰아간 주역이기도 한 존재들이 군사독재와 재벌, 외세다.
그것은 친일파와 미국, 반공주의, 개발독재 등 또 다른 이름으로 바꿔부를 수도 있다.
민중담론은 민중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
이들 군사독재·재벌·외세를 타자화하고 끊임없이 대항 이미지를 강화했다. 민중은 엘리트나 지도층, 나아가 교육받은 사람 또는 교양인이 아닌
일반대중을 지칭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존의 사회·정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사람이지만 억압에 저항해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민중은 이런 맥락에서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민중을 국가의 단순한 자원이 아닌,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이라는 거대 서사에 저항하고 맞서는 정치적·문화적
프로젝트의 주역으로 재구성했다.”
이렇듯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운동권은
국가의 기본적이고 규범적인 이념적 토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재평가했다. 예컨대 “반공주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영구화, 미국과의 불평등 관계, 분배정의를 무시한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그에 따르는 노동의 종속, 전통을 통치수단으로 끌어들이거나 재발명하는
정치논리” 등이 그 대상이 됐다.
따지고 보면
이것들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로 엮여져 있다.
한반도 근현대 역사의 누적적 실패는,
지은이도 주목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봉건을 넘어 자주적 근대를 열어갈 잠재력을
지녔던 동학혁명은 외세인 일본과 그들을 끌어들여 결국 그들과 한패가 된 조선 말기 퇴락한 지배세력의 야합으로 좌절당했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가
미완의 근대혁명을 완수할 또 한번의 기회가 일제 패망으로 찾아왔으나, 그것 또한 또다른 외세인 미국에 의해 좌절당했다.
미국은 자국 세계전략의 목적과 편의를 위해
한반도를 마음대로 분단했고, 친일파들을 재등용했다. 식민지 시절 내내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독립운동세력은 ‘빨갱이’ ‘비적’
‘테러리스트’로 매도당하고 매장당했고, 분단과 함께 나라의 역사도 반토막이 났다.
이는 미 점령군이 공직에서 추방했던 기시
노부스케와 같은 전범들을 광범위하게 재기용해 친미적 전후 일본의 골격을 짜게 만든 것의 복사판이다.
일제 괴리국 만주의 총무청 차장으로 만주국을
자신의 구상대로 만들었고, 그 스스로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했던 기시 노부스케가 전후 일본의 주역이 된 것처럼, 그 기시가 만든 만주국
군관학교에 자진 입교하고 일본 육사까지 나온 뒤 일제 대륙침략의 첨병이었던 관동군 지배하의 만주군 장교로 독립운동세력과 적대했던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주역이 됐다.
철저한 친일파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미군이
점령한 한국에서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로 변신함으로써 ‘친일파라는 저주’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가 한때 자신이 핵심간부로 몸담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을 배신하고 살아남은 역사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얘기하는 ‘역사 주체성의 위기’의
핵심이 바로 ‘친일파’ 문제일 수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그들에 동조하고 빌붙어
자민족 대다수를 희생제물로 삼아 자기 일족의 영화와 특권을 누려온 친일세력은 청산되거나, 적어도 해방된 나라의 주역 자리에서 추방당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민족 반역자’였던 그들은 다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주인이 되고 민족주의자·애국자가 돼 세력을
확대재생산했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마법의 열쇠가 바로 빨갱이요 종북(친북)이라는 주문, 즉 반공주의였다. 그리고
그 모든것을 보장해 준 것이 반공주의를 앞세운 냉전체제의 한쪽 당사자 미국이었다.
좀 단순화해서, 한국의 민중운동권이 문제를
제기하고 거부했던 “반공주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영구화, 미국과의 불평등 관계, 분배정의를 무시한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그에 따르는 노동의
종속, 전통을 통치수단으로 끌어들이거나 재발명하는 정치논리” 등 오도된 대한민국 국가이념이 모두 이 하나의 근본문제에서 파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친일파 문제와 개입 외세로서의 미국의 역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좀더 집요하게 천착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분단과 남북대립의 지속조차도 그것과 밀접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일본 지배층이 과거사와 관련해
저열한 역사관을 함부로 내뱉고 한반도의 두 분단국가를 얕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분단상태에서 서로 소모적인 대결을 벌이도록 세팅돼 있는 구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사를 은폐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 구조의 지속을 내심 바랄 것이다.
그런 일본을 자신들의 헤게모니 아래 계속
붙잡아 두고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동아시아 개입 명분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미국도, 그런 미국과 손잡고 특권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국내 동조세력도 비슷할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반미주의’와 관련해, 책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저항하는 시민 쪽이 아니라 진압자 편을 든 광주민중항쟁이 1980년대 이후 ‘선한 미국’ ‘은혜의 나라 미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환상을
깨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386세대’를 비롯한 해방 이후 세대에게. 하지만, 한국 민중운동권의 ‘역사 주체성
위기’를 부른 미국 문제는, 지은이도 지적했듯이 저 멀리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뿌리가
무척 깊다. 일본을 대체한 또 다른 외세로서의 미국에 대한 민중운동권의 인식이 광주항쟁이라는 충격파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긴 하지만 해방과 분단,
전쟁의 비극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그것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역시 그 자신이
친일파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허약한 정치기반을 채우기 위해, 일본 패전 뒤
치명적인 친일행적을 은폐하며 기사회생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일파를 대거
기용했고, 그것은 미국 이익에도 부합했다. 4·19혁명 뒤의 짧은 기간 역사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 5·16쿠데타로 좌절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친미 반공(반북)노선을 이어받았으며, 미국 주도하의 미일동맹은 경제개발 지원으로
친미적 반공 분단 군사정권의 전체주의적 통치체제의 정당성 확보를 도왔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이 그려온 궤적은
기본적으로 닮은 꼴이다. 기시와 그의 친동생으로 전후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 사토 에이사쿠(기시는 원래 사토 집안이었으나 양자로 갔다),
병사한 자민당 실력자 아베 신타로를 거쳐 그의 아들 아베 신조로 이어진 일본 주류 가계(한국은 이런 패턴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가
상징하는 일본 지배그룹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긍정하고 동경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19~20세기
제국 일본의 재건이 21세기 일본의 살 길이라고 맹신하는 듯하다. 전후 장기간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일본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심리적 불안에 빠진 다수 일본인들이 보수우익 주류의 그런 꿈에 동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게 정말 위험해뵌다.
동학혁명과 일제 패망, 그리고 4·19혁명이
연 기회들이 오히려 좌절로 귀결되면서 외세와 그 내부 동조세력의 번성은 ‘불변의 공식’이 됐다.
그 공식이 유지되는 한 분단 해소도,
‘일천만’에 달한다고 했던 이산가족 비극(미국은 이 한 가지 비극만으로도, 그 인류사적 범죄의 원인제공자로서 또 비극의 방조·유지자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의 해결도, 역사의 온전한 복원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인들에 대한 일본 주류 지배세력의 오만과 무례, 경멸은
바로 이 분단상태 유지와 남북의 대립구조, 이 구조에 기생하면서 그 기생구조를 끝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친미·친일 우파 내부 동조세력이 건재하기에
가능하다.
이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큰 버팀목 중의
하나가 미일동맹, 한미동맹을 이끌면서 지금 이 부당하고 불평등하고 부도덕한 구조의 유지·확대를 전제로 한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은 1세기 전부터 시작된 한일의 불평등하고 부도덕한 관계와 분단 한민족의 불행을 확장하고 영속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미국에 한국은 전시작전통제권까지 맡겨 놓고
있다.
한국의 민중운동이 남아공이나 동유럽 체제를
바꾼 대중운동만큼 알려지지도 평가받지도 못한 데에는 바로 이런 구조 탓도 있을
것이다.
동유럽 민주화운동(화평연변 和平演邊)이
국제적인 주목과 평가를 받은 데는, 물론 냉전체제 해체로 이어진 그것 자체의 중요성 덕이기도 하껬지만, 그것을 지원하고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던
냉전체제의 한 당사자인 헤게모니 국가 미국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남아공의 경우도 흑인 차별과 노예사업에 대한 백인의 원죄의식에다 남아공 핵개발 저지, 아프리카 공략
거점으로서의 남아공의 지정학적 가치 등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중국 5·4운동의 선구였으나 거기에 가려져버린 감이 있는
3·1운동의 의미 축소에는 대국 중국의 힘 외에, 식민종주국으로 그 사건을 그야말로 죽여야 했던 일본과 당시 식민지 쟁탈에 함께
광분했던 일본의 서방 동료 제국주의국가들의 이심전심이 작용했듯이.
광주민중 항쟁 때 진압자들 편에 섰고 그
때문에 잇따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 홍역을 치렀던, 운동권을 ‘들쥐’니 ‘버릇없는 자식들’이라 경멸했던, 그리고 70년이 되도록 자국군을 한국과
오키나와에 대거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한때 미국적 이상주의를 동경하면서 한반도 주변의 기존질서를 흔든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몹시
당혹스러워 했을 법하다. 베트남이나 이란, 중남미 등에 대한 미국의 개입 역사를 보더라도, 미국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은 내심 이를 환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혁명은 언어와 함께 번식한다”면서 언어의 “새로운 세상을 빚어내는 수행적 힘”을 얘기한 린 헌트를 인용한다.
“혁명적 언어는 혁명적 변화와 갈등의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스스로 정치적·사회적 변혁의 도구로 변신했다. 정치적 언어는 단순히 제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 이념적인 입장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을,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결정했다. (…)요컨대
그것은 설득의 수단이자 사회적·정치적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재현의 정치학’에서
분석 도구로 활용한 노동문학들을 ‘혁명적 언어’로 읽자고 제안한다.
1894~5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외세 및 그들과 손잡은 이땅의 동조세력이 고착시킨 구조는 그런 시도를 거북해 할 것이다.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 주역들이 절감한 ‘실패한 역사’와 ‘역사 주체성의 위기’의 발원지인 구조.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바로 이 구조
바꾸기가 아닐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실패한 역사’를 바로
세우려던 민중운동의 열망 속에 흔들리며 한때 해체조짐을 보이던 이 구조는, 기본적인 의회민주주의 절차를 쟁취해낸 ‘87년체제’라는 민중운동의
성과와 함께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정작 해체된 것은 이 구조가 아니라 이 구조를
깨려던 민중운동이요 민중해방서사였다. 벤야민의 ‘위기에 처한 순간’을 떠올릴
만큼 그 상황은 위태롭다.
한국 민중운동을 혁명적 언어로 재개념화하는 것, 그것은 위기에
처한 한국 민중운동을 ‘구출’하고, 국제적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한국 민중운동의 인류 보편사적 의미를 재평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남희 교수의 집필의도를 이렇게 바꿔놓을 수도 있겠다.
***이 글은, <민중 만들기-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재현의 정치학>(이남희 지음, 후마니타스, 2015년)에
대한 서평으로, <녹색평론> 2015년 9-10월(144호)에 기고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