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니 오페라 <청교도>와 영국 청교도 혁명
오페라 청교도는 영국 청교도 혁명(영국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빈센초 벨리니 Vincenzo Bellini 작곡이고 카를로 페폴리 Carlo Pepoli가 대본을 썼다. 원래는 앙슬롯 Ancelot과 상틴 Santine의 희곡 ‘원두당과 기사들(Têtes Rondes et Cavaliers)’에 기초를 두고 있다. 원두당과 기사들이란 바로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 의회파와 왕당파의 별칭이었다. 1835편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 Théâtre-Italien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 속의 왕당파와 의회파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등장 인물 그리고 왕비의 구출에 대한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청교도 혁명은 영국 시민혁명의 제1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보다 중립적인 표현으로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이라 얘기된다. 청교도 혁명의 결과 군주인 찰스 1세가 처형되고 10여 년 동안 호국경 크롬웰의 공화국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1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역사적 배경
영국 청교도 혁명의 연원은 튜더 왕조의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튜더 왕조 종교 개혁은 헨리 8세의 수장령(Act of Supremacy), 즉 교황의 지배권을 부정하며 영국 국교회(The Anglican Church)를 수립한 데에서 시작한다.
영국 국교회는 안팎의 도전에 직면한다. 하나는 국내외 가톨릭 세력의 공세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한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청교도들의 도전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여왕)는 그 양 세력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의회와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며 영국 국교회를 정립해 나갔다. 한편 가톨릭 진영은 마침 잉글랜드에 피신해 온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고자 하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 교도로서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였다. 수차례 내란 음모에 연루되면서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당한다(참고로 도니제티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이를 배경으로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사가 없었고, 결국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의 국왕을 겸한다(잉글랜드 제임스 1세). 이로써 튜더왕조가 끝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으며 청교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원의 다수를 구성한 퓨리턴 세력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갈등은 증폭되었다. 찰스 1세는 프랑스의 왕녀 가톨릭 교도 마리아 Henrietta Maria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잉글랜드 왕실에 로마 교황청 사절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으며 국교회는 가톨릭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고교회파(High Church)’쪽으로 이행해 갔다.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왕의 수석 자문관인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는 교회 안에서의 청교도들의 설교를 억압하였으며 성찬식에서 평신도에서 무릎을 꿇게 하는 등 가톨릭 복귀의 의심을 샀다(나종일송규범, 영국의 역사(상), 한울 아카데미, 2005, 360쪽).
또한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입각하여 의회를 무시하였다.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 없이 통치하고자 하였다. 사문화된 법조문을 뒤져 새로운 왕의 대권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선박세(ship money)의 부과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아가 찰스 1세는 국교회를 자신의 또 하나의 왕국인 스코틀랜드에도 강요하였다. 장로교가 확립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에 저항하였다. 스코틀랜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에 서명하고 교회를 지키는 데에 생명과 재산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1638)(나종일‧송규범, 앞의 책, 362쪽). 찰스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한 재정이 필요했다. 국왕은 불가불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왕과 대결을 준비하였다. 국왕의 재상 스트래포드와 주교 윌리엄 로드를 처형하고, 선박특별세를 없애고, 왕의 특권법정(성실청:Star Chamber)을 폐지하였다.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이 고조되는 중 아일랜드에서 가톨릭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학살되었다. 왕과 의회는 아일랜드 정벌에는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문제는 군대의 지휘권이었다. 의회의 청교도들은 아일랜드의 가톨릭 반란군과 찰스 1세가 연합할 것을 우려하였다. 찰스 1세도 군대의 지휘권을 의회에 넘겨줄 수 없었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왕은 호위대를 이끌고 의회에 진입,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로써 영국 내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였다.
영국 전역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허세부리는 군 장교라는 의미에서 ‘기사당(Cavaliers)’으로, 의회파는 가발을 쓰지 않는 맨 머리의 평민이라는 의미에서 ‘원두당(Roundheads)’으로 불리었다(나종일송규범, 앞의 책, 368쪽). 처음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지만, 의회파의 올리버 크롬웰이 신형군(New Model Army)을 조직하고 전세를 바꾸어 놓았다. 크롬웰과 그 부대는 청교도의 사명감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1646년 왕의 항복으로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승리한 의회파 내에서의 분열이 생겼다. 다수(장로파)는 장로교를 영국에도 도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왕의 복위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크롬웰 중심의 군대세력은 그에 반대하였다. 장로교나 국교회가 아니라 정교 분리, 즉 모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독립파)하였다. 의회파의 분열을 틈타, 찰스 1세가 1648년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내전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왕당파를 제압하였고 찰스 1세는 포로로 잡혔다. 왕의 신병 처리를 둘러싸고 의회 내에 논란이 지속되자 크롬웰의 군대는 장로파 의원을 배제하고(‘프라이드 숙청’) 100명의 독립파 의원들로만 의회를 구성하였다(둔부 의회:Rump Parliament). 이들은 특별법정을 설치하고 찰스 1세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찰스 1세의 처형과 함께 왕위는 폐지되고 의회의 귀족원도 철폐되었다(1649). 영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공화국의 경험이었다.
2. 오페라의 줄거리
이 오페라는 영국 청교도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연인들의 사랑 그리고 기사도의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왕비의 체포와 구출 등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다. 찰스 1세의 왕비 마리아는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 이미 네덜란드로 거처를 옮겼고, 후에는 친정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의회파에게 체포될 일은 없는 것이다.
의회파 발톤 경은 딸 엘비라의 남편으로 같은 의회파 리카르도를 생각하였지만, 엘비라는 왕당파 아르투로를 사랑한다. 결국 발톤 경은 엘비라와 아르투로와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엘비라를 흠모하던 리카르도는 상심하였지만, 모두 행복한 결혼식을 기대한다. 발톤 경은 중요한 여죄수를 호송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그 여죄수는 바로 찰스 1세의 왕비 마리아였다. 왕당파 아르투로는 충성심으로 결혼식을 미루고 왕비를 구출하여 성을 빠져 나간다. 리카르도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탈출할 수 있게 방관한다.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그리던 엘비라는 아르투로가 다른 여자와 사라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실성한다. 의회는 아르투로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리카르도는 엘비라가 마음을 돌릴 것을 기대하였으나 엘비라는 일편단심 아르투로에 대한 사랑뿐이다. 아르투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돌아와 엘비라와 재회한다. 아르투로는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엘비라는 오해가 풀리며 환희에 가득찬다. 아르투로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린다. 그러나 마침내 크롬웰에 의한 사면 소식이 전해진다.
여기서는 제1막 아르투로와 엘비라의 결혼식 준비 장면에서 아르투로가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를 소개한다. 가사는 아르투로 노래 부분만 옮겨본다.
https://youtu.be/MaLJXYQ1jxE
대본과 영어 번역은 아리아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https://www.aria-database.com/search.php?individualAria=835
이태리어 가사 | 영어 번역 | 한글 번역(정태욱) |
A te, o cara, amor talora Mi guidò furtivo e in pianto; Or mi guida a te d'accanto Tra la gioia e l'esultar.
Al brillar di sì bell'ora, Se rammento il mio tormento Si raddoppia il mio contento, M'è più caro il palpitar. | To you, oh dear one, love at times lead me furtively and in tears; now it guides me to your side in joy and exhultation.
At the radiance of such a beautiful hour if I renew my torment, it redoubles my happiness, 'tis more dear the (heart's) beating | 사랑은 나를 그대에게 비밀스럽게 그리고 눈물로써 인도해 주었소. 이제 나를 그대 곁으로 안내하고 있소. 기쁨과 환희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의 광휘 속에 내 고통을 상기하는 것은 행복을 배로 늘려줄 뿐이오. 아 내 심장은 더욱 소중하게 박동하고 있소. |
3. 이후의 전개과정
크롬웰 사후 의회는 왕정 복고를 결정하고,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를 불러왔다. 모후인 헨리에타 마리아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다 1669년 프랑스에서 생을 마친다.
찰스 2세는 의회에 의해 왕위가 회복되었음에도 의회를 무시하는 왕의 대권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찰스 2세는 가톨릭에 경도되었다. 당시 유럽 대륙의 패권자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찰스 2세 이후 왕위 계승이 문제되었다. 찰스 2세는 적자(嫡子)가 없었고, 그 동생 요크 공(후에 제임스 2세)이 왕위 계승권자였다. 요크 공은 공개적인 가톨릭 신도였다.
의회의 급진파 ‘휘그당’은 가톨릭 신도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배제법안(Exclusion Bill)’을 제출하였으나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였다. 의회의 온건파 토리당은 왕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제임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 역시 의회를 무시하며 친 가톨릭 정책을 지속하였다. 특히 제임스 2세가 가톨릭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생산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제 잉글랜드는 가톨릭 왕조가 될 판이었다.
잉글랜드 의회 휘그당과 토리당은 연합하여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에게 거병을 요청하였다. 오렌지 공의 부인은 메리(Mary)는 제임스 2세의 첫 번 째 부인 소생으로 개신교도였다. 스튜어트 왕조의 왕위 계승권자이면서 영국 국교회 개신교도였다. 제임스 2세는 단결한 의회와 오렌지 공의 출정에 대적하지 못하고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유혈이 없는 혁명이었다고 하여 이를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한다. 의회는 메리 여왕과 오렌지 공을 공동 군주로 하고,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선포하여 가톨릭 신도(배우자의 경우 포함)의 왕위계승을 금지하였다.
프랑스로 도피해간 제임스 2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왕위 복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그 아들과 손자들 역시 계속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내란을 시도한다. 이를 자코바이트(the Jacobites) 반란이라고 부른다. 자코바이트 반란 부분은 후에 다시 살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