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마산동 마을의600년 이야기
2004년 8월
지난주에 내린 비 때문인지 물이 가득 찬 대청호를 따라 간다.
효평동을 지나 모래재 내리막길 중간인 말미마을에서
왼편으로 들어간다.
어릴 적 고향집 닮은 곳 넓디넓은 대청호를 마당 삼아 고즈넉이
앉아 있는 미륵원지를 찾았다.
미륵원은 동구 마산동 (전 대덕군 동명 마산리)에 회덕 지방의 유력한
성씨였던 회덕황씨 중시조 황윤보로부토 3대에 걸쳐 110여 년
동안 지나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사회구호와
봉사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건립 연도는 분명하지 않지만 1332년 (고려 충숙왕)에
황연기(황윤보의 아들) 가 미륵원을 고쳐 지었다하니
이미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연기가 임종하면서 미륵원을 수리하고 자신의 뜻을 어기지
말고 이어주기를 바란다 는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황수는
1381(고려 우왕) 미륵원을 중수하고 그 남쪽에 누를 건립
하였으니이름하여 남루 이다.
남루를 건립한 뒤 중앙정계의 인물들에게 기문을 청하였으니
우리가 익히 교과서에서 보아온 목은 이색 조선 개국공심
하륜,조박 이직, 변계량.안순,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 등으로부토 미륵원 남루기 를 받았다.
여기에 하륜이 읊은 남루기를 옮겨 보면
회덕 황씨가 미륵원을 경영하여 새롭게 하였고
자손들이 계승하여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힘썼으니
한집에서 덕을 쌓으면 글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며
천릿길을 가면 모두다 회덕 황씨의 어짊을 노래하였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게 한 것을 마음마다 서로
칭송하고 저녁에 와서 아침에 가니
그 이어지는 발자취가 서로 선을 대듯 이어졌도다.
꿈속에서 찬 샘물에서 솟아나는 물을 얻음과 같이 회덕 황씨이
도움을 얻기 바라며 어둠 속에서도 도움을 얻으니
회덕 황씨는 그 도움 주는 신령함이 있도다 라고 칭송하고 있다.
미륵원지를 지키고 계신 황경식님의 선조들의 미륵원 경영의 뜻을
자손만대 이어가길 바라지만 앞으로는 이 터마저 어찌 될른지?
미륵원지가 문화제로 지정되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 내
비치시는 모습을 뒤로하고는 황유의 사위이자
송명의의 며느님이신 고흥류씨의 부인의 묘역인 관동묘려로 발길을 돌렸다.
관동묘려는 송명의가 살던 곳으로 송명의의 유허비와 그의 아들
송극기의 신단 (묘소 대신에 세우는 제단)과 고흥류씨의 묘소
재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모셔진 류시 부인은 진사 송극기와 결혼하였으니
22세에 사별하고 아들 (송유) 과 개성이 친정에 머물고
있었는데 친정부모가 가엾게 여겨 재혼(당시엔 청상이 재혼하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었다 함) 시키려하자 어린 아들을 업고
시댁이 있는 회덕 백달촌(중리동) 으로 내려와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을 교육하여 조선 세종조의 훌륭한 학자
(쌍청당 송유)로 길러냈다.
송유는 중앙정계에서 활약하다가 어머니가 계신 백달촌에
낙향하여 쌍청당을 짓고 인근의 유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가문을 번성시켜 은진 송씨의 중시조가 되고 회덕의 송촌이
생기게 된 근간이 되었다.
재실의 오른족 송명의 유허비 옆으로 난 우거진 소나무 숲길로
적당히 오르면 고흥유씨의 묘소가 나타난다.
이처럼 대청호반에서 지나는 길손들을 위해 3대를 이어 봉사한
정신과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스며있음으로
그 정신은 오늘도 대전의 복지만두레 활동으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고지순~더할 나위 없이 높고 순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