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중순께 가족 카톡방
해외 근무중인 큰아들이 낭보를 올렸다
우수 사원 선정에 덤으로 가족 해외여행까지
유난히 추운 올겨울 남쪽으로 간다는 것만으로 좋은데
베트남의 다낭,후에,호이안 마을까지 3박4일 가족여행을...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 출발전날까지 준비하는데 있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 부터 옷가지며 가벼운 반찬까지 소소한 준비들이
가슴 설레고 미지에 대한 동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환상까지
해외우수사원 선정이 되었다고 큰아들의 카톡이 가족단체방에 뜨자
집사람과 작은아들 모두 아우성이다 덤으로 가족여행까지 있으니
작년1월에 두바이 여행 12월에 일본 샌다이에 나갔다 왔지만
가족 넷이 함께 하지는 못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맞추니
작은아들이 동계훈련기간이라 해외 나가기 힘들다고 한다
두바이 여행때는 입사한지 얼마 안되서 그랬고,
사람의 마음은 늘 만족하지 못하는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권도 만들어 놓은 작은아들 해외여행은 뒤로 미루고
연말기분도 온통 생각은 베트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하와이, 핫한 도시, 베트남 4번째 도시 등등 수식어도 많은 다낭시
인구 140만을 넘는 베트남 중부도시, 개발의 손길로 도시전체가 활기가 넘쳤다
작은 비행장이지만 하루 5000여명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니 시내 호텔만 500여개
그래도 모자란단다 삼성과 LG 간판이 자주 눈에 띄고 현대 기아차가 거리를 달린다
식민지에서 해방후 남북분단에 전쟁을 치루었고
우리나라가 참전했던 엇비슷한 역사의 한덩어리로
베트남은 우리와 쉽게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로에서 빌딩, 마트, 식당까지 구석구석 한글 표시가 선명하고
3박4일 동안 머무르면서 현지식은 두번정도 나머지는 한식당에서 할 정도로
우리의 모습은 베트남에 잘 녹아 들고 있어 보였다
사회주의국가의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여행 첫날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고 한시간여 준비
인천제1여객터미널 3층 미팅은 5시30분, 잠을 설칠 수 밖에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혹한의 겨울여행을 떠난다
케리어 2개를 수화물로 보내고 좌석티켓을 받으니 한시간여 시간이 남고
보안 검색대를 지나 탑승게이트로 이동하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라
늘 먹는게 먼저다 빵과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하고 면세점을 기웃거린다
혹시나 쌈박한 외제나 국산이라도 싼맛에 살 수 있으려니 기대하면서
덥석 담배 세보루를 산다 한보루에 2만5천원, 아직도 선물 1순위
나머지는 귀국때 살 요랑으로,
다낭까지 4시간 30분을 날았다 시속 800키로로
2시간 늦은 시차에 15분 지연 출발로 현지 도착시간은 11시가 넘는다
공항앞 표지판을 따라 가이드 안내를 받으며 관광버스 3호차에 오른다
우수사원 가족 모두 합하니 80여명, 어린이 부터 부모님까지 말 그대로 회사 가족이다
첫 식사는 현지식이다 파인애플밥이 새롭고 튀김 야채 보쌈이 먹을만 하다 향은 좀 있지만
페키지 여행은 가이드가 대장이고 선생님이다 잘 따라야
다낭에서 후에라는 도시까지 약 2시간 반을 가야 하는데 이동중에 식사 후
중국 자금성 축소판인 황궁을 관람하고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격인 스님의 사당 관람까지 예정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2월에서 2월까지 우기인 날씨가 제법 많은 비에 바람까지 마중한다
우의는 군 판초의처럼 생겼는데 오토바이 탈 때 제격이며 그래서 디자인이 비슷하다고
베트남 마지막 왕조 응우엔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라는 도시는
1993년에 베트남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이곳은 사연이 많은 내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와 보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건 가랑비 때문만은 아니겠지
미리 준비해 준 비옷을 걸치고
현지인 가이드의 달달한 해설을 들으며 궁성을 돌아 본다
성질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득하지 못하는게 단점이고 장점이다
수학여행 온것도 아닌데 비를 맞아가며 구석구석까지 다 돌아야 하나
이구동성이다 그저그런 옛성인데, 지루한게 역사다 알고 보면 넘 재미있는데
비행기 4시간 30분에 버스로 2시간 반, 지친대다 비바람까지
관광이 아니다 고행이다, 사당 관람은 추후로 미루고 숙소로 이동
숙소 도착전에 한식당에서 속을 채운다 역시 한식이 최고 삼겹살이 무한리필
숙소는 4성급 호텔인데 여독을 푸는데 뭐 가릴게 있으랴
드러누우니 코 고는 소리가 크다
둘째 날 아침 8시 10분 미팅
어제 못가본 사당을 둘러보고 황제릉 두곳을 돌아 본 후 다낭시로 이동예정
후에 강이 앞에 흐르는 공원에 스님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분이라 한다
외세의 지배속에서 베트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소신공양 (燒身供養) 하신 분으로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아 그 뜻을 기리는 명소로 사당 앞 큰 강줄기가 시원하다
글자 하나 건축물 문양까지 역사가 베어있지만 바쁜 일정은 늘 겉 핥기다
어느나라 어느지역을 가드래도 그 곳의 문화와 역사의 손때는 남아 있다
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쉽게 나오지 않으며 나름 댓가를 치러야 하는데
여기에 모신 스님은 동료스님 20여명이 보는 가운데 몸에 기름을 붓고
베트남의 장래를 생각하며 스스로 몸을 태우셨다니 존경 받음이 마땅하다
좀 더 깊은 사연를 듣고 싶고 시간을 머무르고 싶었는데
혼자만의 생각일까 뭔가 짠하고 나타나는 구경거리를 보고 싶어한다 관광객들은
우리나라에도 전국 곳곳에 훌륭하신 분의 뜻을 기리고 보존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작년 까지도 틈틈이 전국을 돌면서 보고 듣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욕심 처럼 잘 되지 않는다 언제쯤 시간에서 자유로워질런지
사당에 합장하고 향불을 피운 후 생각을 묻어 둔다
어제 보다 날씨가 좋다
사당이 있는 공원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뜨득 황제릉인데 초보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고스란히
시골길을 한바퀴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다음 일정이 빠듯해지긴 했지만
뜨득 황제릉은 1867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연인원 3000명이 투입해 지어진 제4대 황제릉
궁으로도 사용 되었으며 반달 모양의 연못이 있고, 황제의 무덤은 실제로 이곳에 묻히지 않았으며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장소에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황제가 어릴때 천연두 후유증으로
100여명이 넘는 후궁이 있었으나 자식이 한명도 없는 비운의 황제라고 한다
사후에 후계자가 능을 만드는데 후계자가 없는 뜨득 황제는 생전에 스스로 무덤을 짓고
그림이나 시를 쓰는 일에 몰두 했으며 향락 생활을 했다고 한다
연꽃잎에 밤새 맺힌 이슬을 모아 차를 마시며...
능원전체를 사후 궁전을 대비해 거대한 규모로 짓고
응우엔 황제 일곱분 중 가장 호화롭고 풍경이 좋다는
이 궁을 걷고 있는 내 자신도 기분이 묘하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스쳐 지나간다
어쨌거나 왕노릇 한번 해봤으면,
세번째 방문한 황릉은 카이딘 능이다
1931년에 완성된 서구적인 콘크리트 건축물인 이 능은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유럽식 건축 양식이 특징인데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계성전에는 황제의 동신상이 있으며
황제의 유골은 동상아래 지하 18m 깊이에 있다고 한다
1926년까지 통치한 카이딘 황제는 프랑스 식민통치를 받으며
황릉을 짓기 위해 무리한 세금을 걷는가 하면
건축양식도 중국보다 프랑스 양식이 많이 가미했으며
또한 현존하는 응우엔 왕조 황릉중 가장 화려하다고 한다
누구나 시대의 흐름은 막을수 없는 듯
카이딘 왕도 제역활을 못했다고 세평은 전하고 있다
계성전의 천정과 벽 단상의 화려함은 살아 생전 그의 호사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식민지의 서글픔을 그렇게 달랬는지 속임수 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전의 호사스런 자기를 모두 깨뜨려서 장식을 했다는 것으로 봐서
나름 서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거라 애둘러 짚어 본다
그렇게 베트남의 왕조시대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니
우리의 구 한말의 한 단면을 보든듯 하여 왠지 씁쓸하다
부국강병 좋은 말 아닌가 밥그릇 싸움은 그 결말이 뻔하다
사발이 깨 지는거지...
다낭에 있는 바나산으로 가기전 점심으로 현지식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았는데 맛깔은 그랬다
집사람과 나는 그져 주는대로 배불리 먹는다
잘먹는것도 여행의 멋이다
바나산은 바나나가 많이 나서 바나산이라 부른다는
가이드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5km가 넘는 최장거리 곤도라로 20분을 간다
곤도라 아래로 펼쳐지는 밀림의 원시 모습은 입이 그냥 벌어지고
사연인즉 바나나산 정상에는 약 300가구가 있었는데
해방이 되면서 베트남의 피와 땀 그리고 약자의 서글픈 흔적을
마구 마구 부셔버려서 지금은 보수가 한창인 프랑스마을로 관광수입이 짭짤하단다
프랑스 식민지때 프랑스인들이 산아래 더위를 피해 1500고지가 넘는 산정상에
휴양지로 세운 마을인데 모든 인력은 베트남인들로 했다니 오죽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는 쉽게 깨지지 않을 듯
어쨌거나 베트남속의 프랑스풍 마을을 구경한다
마을 중앙 광장에는 썬월드라는 조형물이 있고 프랑스인들의 이벤트 쇼가 있다
골목마다 먹거리가 있고 작은성당 정원이며 전통 프랑스 냄새가 난다
산 정상에는 종각이 있는데 종 아래테두리에 끈을 매어 각국의 지폐를 걸고 소원을 빈다
가정행복 운수대통 무병장수 가족견강, 어디가나 기복의 마음은 비슷한듯
바나산 프랑스마을을 다 돌아보기에는 하루도 모자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길 곤도라에서 또 한번 원시림의 환상에 빠진다
한마디로 킹콩이 살것만 같은 풍부한 밀림이 우거져있다
거의 다 내려온 지점에서 보이는 폭포도 장관
어둑어둑 해지는 해변의 가로등이 켜지고
해풍이 옷깃을 여밀정도로 세게 불어 오는 해변가
작은언덕에 우뚝 서있는 베트남 최대의 해수관음상
높이가 68m 상상을 초월하듯 거대하게 세우다 보니 조형미는 좀 덜하다
야간 조명을 받으며 수많은 보트피플의 원혼을 달래고 있는 관음상
한가지 소원은 들어 준다는 말에 향불에 불 붙이고 합장한다
올 한해도 많은 일들을 지혜롭게 잘 해낼수 있게 해 달라고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목슴을 걸고 올랐던 보트피플
죽은 자들의 시신이 가장 많이 밀려 왔다는 해변을 바라 보며 서 있는 해수관음상은
어렵게 탈출에 성공한 소수의 월남인들이 미국 등에 가서 성공하여 다낭으로 다시 돌아와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새워다고 한다
해수관음상이 세워진 이후 바다의 사고는 거의 없다고 하니...
둘째날 일정도 빡세게 돌았다 수학여행처럼
용다리를 건너 리버사이드 호텔 숙소로 돌아 오니 늘어진다
여행 마지막날 아침 미팅은 11시
저녁에 야간 자유시간도 좋지만 쉼이 먼저다
이틀간의 여행과 피로는 코골이 따로 없다
그래도 첫날보다 날씨가 좋아 눈호강을 했다
느즈막이 아침을 먹고 다낭시내에 있는 대성당을 찾았다
성당 외벽은 옅은 핑크색으로 칠했는데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건물은 크지 않아도 대성당이라 불리는 것은 큰신부님이 계셔서라고 한다
다낭 방문 인증샷 1호로 선정될 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대성당과 비교 되는 다종교 예베당을 찾았다
기도는 방식만 다를뿐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건물 내부 전면 벽에는 지구의 원형에 큰 눈 하나가 그려져 있다
반대편에는 향불제단이 있는데 그림도 동양적이고 세계가 하나된 종교건물이다
속된말로 각각 제잘난멋에 산다는 말이 어울리려나...
점심은 한식당에서 맛나게 속을 채우고
오행산을 들러서 마을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호이안 마을로 향한다
오행산은 말그대로 다섯개의 산이 모여있어서 화수목금토의 오행을 이룬다고 하여
오행산이라 하는데 작은 동굴입구에 지옥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고 내부는 습하며
동굴 중심부에 아름다운 불상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위로 올라가면 볼거리가
더 많다는데 다음으로 미루고 가장 베트남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호이안으로,
호이안 가는 선착장 가기전에 도자기마을을 구경한다
강가에 좋은 흙이 많아 자연스럽게 도자기가 성해졌다고
동네 전체가 도자기로 생계를 꾸린다고 한다. 도자기 무형문화제 한분이 계셨는데
거동이 불편하신지 방에 누워계시고 전시품은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 마을의 작은 이벤트지만
도자기를 작접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12지간의 자기 띠에 해당하는 동물 도자기를 무료로 선물해 준다
토기에 구멍을 뚫어 불면 소리가 나니 어린이들은 마냥 좋아할 수 밖에
선착장에서 호이안마을 중심부까지 배로 약 20여분
옛부터 무역항으로 다국적 상인들이 우글거렸다는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특히 일본과 중국 상인들이 많아서 건물이나 거리 조형물 상품들도 외색이나 중화풍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300년이 지난 지금도 부분 보수로 잘 보존되고 있다 하니 볼거리다
홍수때 물이 차오른 흔적을 기둥에다 표시해 놓았고 그림사진도 벽에 걸어 놓았다
당시에 가장 갑부 였다는 사람이 지은집으로 목조색은 검은색으로 변색이 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이 행상을 나가고 들어 올때 모인 장소라는 광조회관은 호화롭다
거상답게 건물도 크고 조형물의 화려한 색상,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의 벽화가 선명하다
중국까지 다녀오는데 약45일 걸린다하여 45일향을 만들어 피웠다니
자연에 대한 거스름보다 순응해 가는 동양적 사고를 였볼수 있었다
조그만 야시장도 있어 이것저것 아주 싸게 사먹으며 웃는다
우리도 70년대에는 코흘리며 500원 동전이면 살거리가 있었는데
원 달러 잘 통하지 않으면 천원 천원 하는 말이 어느새 익숙해져 간다
씨클링이라 하여 자전거 앞에 1인용 좌석을 만들어 태우고 마을 구경을 해준다
20여분에 우리나라 돈 5천원정도, 큰 골목을 두루두루 볼 수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신도시 북쪽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호이안 마을은
가장 베트남 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네스 북에 오를만 하다
우리는 깍고 자르고 덮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선수가 되어가는데
이렿게 옛것을 보존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나
고향의 개발 그림을 보며 고개가 저절로 돌아 간다
옛것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는 어떤모양으로든 이어져 내려가니까...
3박4일에 다낭, 후예, 호이안 마을까지 다 본다는 건 무리다
그래도 현지식을 먹어 보고 원주민들을 직접 보려고 노력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 140년의 역사가 많이 남아 있는 후에
베트남 개발의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다낭
베트남 옛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호이안 마을
회사 차원에서 잘 기획하고 노력한 덕분에 짧은 역사공부를 하고 왔다
집사람 그리고 언제나 듬직한 큰아들과 함께
작은아들이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여행은 쭉 진행형이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늦은 저녁은
시내 외곽에 있는 전통 한식 레스토랑인데
야외 식탁에서 오붓한 한국인 가족식으로 마무리 후
샛강에 소원등을 띄우는 세심한 이벤트 까지 빈틈이 없다
살아있는 동안 늘 건강하고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