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나의 목자 -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21P)
- 하나님의 인도하심 -
시편 23:1-6절
(1)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시니 내가 부족(不足)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草場)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引導)하시는도다.
(3)내 영혼(靈魂)을 소생(蘇生)시키시고, 자기(自己) 이름을 위(爲)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引導)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死亡)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主)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主)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5)주(主)께서 내 원수(怨讐)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盞)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平生)에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이 정녕(丁寧)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永遠)히 거(居)하리로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은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도 인도하신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인도하신다. 일상생활 중에도 인도하신다.
‘목자’ 찬송:
복음성가 2503장, 2504장, 2887장, 2409장
찬 송 가 341장, 453장, 493장
공동번역 성경을 보면 시편 23편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의 집에 거하리이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의 집에 거하리이다.”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지치고 피곤한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내 잔이 넘치옵니다.”
찬송-“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다 감당치 못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행복에 겨워, 기쁨에 겨워, 은총과 복에 겨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흥사 연수원에 가서 강의를 듣는데, 갑자기 “나는 아무 부족함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 행복해졌다. 정말 나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왜? 돈이 생겨서...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정말 아니다.
지난 2일 간 부흥회를 하고 와서, 사례를 200만원 받았다. 하루에 100만원씩 벌은 것이다. 이 얼마나 고소득자란 말인가?
두둑한 사례를 받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부흥회를 인도한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과 인사하고 교회 밖으로 나왔는데, 밤 11시 경의 기온이 무려 영하 10도였다. 성도들 하나 하나 일일이 기도해 주느라 땀으로 속옷이 흥건이 젖은 내 몸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호텔로 돌아 오면서 스스로 물어 보았다.
“너 행복하지?”
“응!”
“왜?”
“돈 때문에?”
바로 답이 나왔다.
“아니!”
“그럼 왜?”
“하나님이 나를 쓰시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써 주시고 계시니까! 나 같은 이 죄인, 이 미천한 인간을...”
그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 어린 눈으로 캄캄한 밤하늘을 우러러 보며 감사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과거 너무나 가난할 때, 나는 날마다 신음처럼 기도했다.
“아버지! 제가 결코 낭비하지 않겠사오니, 공과금이나 핸드폰 요금 같은 것 신경 쓰지 않고, 제 통장에 돈이 항상 여유 있게 들어 있어서, 누구 대접하고 싶을 때 신용카드 신경 쓰지 않고 긁고, 무슨 물건 살 때 계산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돈 때문에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드디어 써 주시는 이 사실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행복하고, 감사하고, 충만하고, 뿌듯하다.
과거 내 인생이 3억원의 부도를 맞고 절대 절망 강산으로 내려 앉았을 때에, 깊이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인생의 행복과 충만함, 감사, 기쁨, 평안이 결코 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요10:14절 이하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선한 목자”는 우리 주님, 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 1.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요하되, 매우 부요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부자인가 하면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부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 없으리로다.
따라 하시라.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아마 이 세상에 사는 어떤 부자라 할지라도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부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진실로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 가는 사람은 날마나 이 풍요로운 부요함을 만끽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을 얻기 위하여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을 가져도 채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돈을 어느 정도 만큼만 벌면 만족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로또복권을 사려고 기다리는 재미로 일주일을 산다고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가 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모르겠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사 입어도, 아무리 좋은 물건을 사 모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쾌락과 정욕을 아무리 좇아도 인간의 욕구는 근본적으로 채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인생은 갈증에 허덕이는 존재입니다.
서울 강남의 고급빌라에는 벽은 온통 대리석이요 목욕탕의 수도꼭지는 금으로 된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행복할까요?
마음의 공허를 화려한 금, 은, 보석으로 채워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은 무엇을 얻어서 오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것에는 별로 욕심이 없는데, 책에는 상당한 욕심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책을 사 모읍니다. 지금 집에 한 5,000권 가량의 책이 있는데, 아직도 서점에 가 보면 사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책이 많아지니까 처치가 곤란해서 어디 둘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이제는 정말 책을 그만 사야지!”하다가도 또 자신도 모르게 책을 사게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공허함과 무의미함으로 인해 늘 허덕이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만족할 만한 직장과 명예가 있어도, 모든 사람에게는 채워질 수 없는 정신적, 영적 공간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요즈음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 36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환경적, 물질적, 정신적, 영적 공허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은 이러한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모든 것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찬송-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에 영적 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거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충만함, 행복감, 단순함, 믿음의 확신, 은혜를 누림, 신뢰감, 기도함, 성령 충만함...”등이 있습니다.
진실한 신앙, 진실한 하나님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왕이 자기의 여러 왕비들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시험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왕비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상을 내리고 싶다. 이 나라의 주권을 제외하고,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터이니, 한 가지 씩만 말해 보아라.”
그랬더니 왕비들이 다투어서 금, 은, 보석, 옷, 기타 좋은 것들을 다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무엇을 구하지 않는가?”
“폐하! 저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폐하만 제 곁에 계시면 만족합니다.”
왕이 너무나 그 왕비가 사랑스럽고 기뻐서, 그녀를 제일의 왕후로 삼고, 일평생 동안 끔찍히 사랑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슨 물건이나 요구 조건 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때 그 때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우유가 아닙니다. 엄마입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며 살다가,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이 사실 하나 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는 삶이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건강하나 질병에 걸리거나, 살거나 죽거나 간에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아니합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동행합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성숙한 믿음을 다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날마나 풍요로운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2.“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날마나 영혼의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 힘이 필요합니다. 험한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곤한 그의 영혼은 주님을 바라 봄으로 언제나 새롭게 소생함을 입습니다. 영어 성경은 해당 본문을 “He restores my soul”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 분이 나의 영혼에 다시 생기를 주셔서, 살아 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지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입니다.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의식주의 모든 문제, 돈, 정신적인 공허감, 대인관계, 실패, 소외, 불안, 질병... 정말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잠자리에 눕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해 보려 하나,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이 세상의 죄악과 유혹이 우리를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단 한 순간도 의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내 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의로운 삶의 의지는 한 번도 실천에 지속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나는 의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위선자 말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곤고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내 영혼의 목자 되시는 주님은 날마나 놀라운 새로운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셔서 힘차게 앞을 향하여 달려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0:3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 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35여년 전의, 지난 까마득한 옛날 일입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제 아내의 친구 딸 중에 유진이란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6살이던 제 딸과 친해서 자주 저희 집에 놀러 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길을 건너려고 서 있다가 가스통을 실은 오토바이에 그만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소식을 듣고 부산 백병원에 찾아 갔더니, 한쪽 이마의 1/3이 날아 가 버린 채 혼수상태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제같이 우리 집에서 제 딸 같이 놀던 아이가 저렇게 된 모습을 볼 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유진이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데, 그 어머니가 막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제게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이 남예호랭교를 믿는 이야기, 남편이 불신앙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 처녀 때 교회에 다녔으나 결혼 후 불순종한 자신의 믿음 생활...
정말 우상숭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 결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로부터 6개월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유진이는 여전히 병상에서 하루 하루 앙상한 뼈만 남은 모습으로 변해 갔습니다. 간호하는 엄마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 다른 놀라운 변화가 동시에 일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아빠, 엄마가 하나 같이 교회에 나가며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진이 엄마는 매일 매일 병상에서 간호하는 틈틈이 병원 기도실에 가 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훗날 다시 방문했을 때, 유진이 어머니의 입에서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 유진이를 데려 갈 것 같아요. 그러나 이제는 괜찮아요. 하나님께 다 맡겼어요. 유진이가 가더라도 이제는 정말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 보며 살겠어요. 이제는 정말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며 살겠어요.”
체념과 슬픔과 깊은 비애와 세상의 탐욕을 다 초월한 유진이 어머니의 그 성결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친지 6개월 후에 유진이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유진이가 천국 가기 전에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한 환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유진이 엄마가 유진이를 갑자기 집에 데려 오고 싶어서 집에 데려 왔습니다. 환자복을 벗기고, 예쁜 옷을 입혔습니다. 밤마다 엄마, 아빠 사이에 뉘어 재웠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정오 경에 할머니가 미몽사몽 간에 보니, 흰 옷을 입은 웬 사람이 유진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 가더니 유진이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유진이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진이 어머니! 그 분이 예수님이셨군요. 예수님이 유진이를 안고 가신 겁니다.”
이 얼마나 슬프면서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세상에서의 아픔과 슬픔, 상실과 고통을 통해 우리 영혼을 살리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우리를 단련 하십니다. 영혼을 새롭게,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 하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새 힘을 주십니다.
욥기 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말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 가운데 계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참 이상합니다. 남이 겪지 않은 슬픔, 아픔, 역경, 시련을 이긴 사람의 영혼은 정말 강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신앙은 정말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새 힘을 공급 받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어린 자녀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하루 하루 무사하게, 평안히 넘어 가는 이 나날들을 두고 진정으로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집안에서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소리치고, 뛰어 놀기도 하고, 어디로 숨기도 하고, 손뼉을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지칠 줄 모르고, 놀고 떠들다가 천진난만하게 잠이 듭니다.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재잘 재잘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갓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얼굴을 경이에 찬 눈으로 들여다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 자그만 손이 내 머리칼이 희어졌을 때, 내 머리를 어루만져 주겠지.
내가 아파 누우면 이 조그만 발로 막 뛰어 가 의사를 불러 올 거야!
내가 죽으면 이 아름다운 눈으로 눈물을 흘리겠지.”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일입니다. 은혜로운 가슴으로 살 일입니다.
가정에 밝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음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저 아름답고 밝은 어린 자녀들을 강압하지 말고, 윽박 지르지 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린 아이의 침대와 다시는 갖고 놀지 못할 장남감을 앞에 놓고 눈물 짓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 당하는 내 이웃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강추위에 따뜻한 불 옆에 있을 수 있음을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지쳐 무기력하게 쓰러지면 아니됩니다. 지쳐 쓰러진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고통 받는 이웃이 너무 많습니다.
저의 고백 찬양, 제 “하늘의 비파” 중의 하나가 <신앙고백>이란 찬송입니다.
1.신앙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온 생을 주께 바치기로 했을 때
그 전엔 아무렇지 않던 사소한 일들이 무겁게 가슴에 와 닿네.
양심을 뜻을 따라 행하고, 사랑의 법을 지키게 하시어
내 생활이 편할 때도 고통 받는 이웃 있음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 모든 결점과 내 모든 나약함을 주의 은혜로 채우시고
여호와 능력의 이름으로 내게 기름을 부으시어
나로 생명의 복음에 합당한 일군으로 쓰시어
주님의 뜻 이루어지이다.
2.연약한 제게 힘을 주시고 발걸음 마다 인도하여 주시며
굳건한 믿음으로 이 길 가도록 하심도 참으로 여호와 이레라.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고, 맘 편히 나의 길을 가고 싶지만
어느 새 당신은 나의 중심을 붙드시어 이 길을 가라 명하시네.
내 마음과 생각과 내 인생의 계획을 주의 뜻대로 이끄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내게 기름을 부으시어
나로 생명의 복음의 합당한 일군으로 쓰시어
주님의 뜻 이루어지이다.
내가 지금 어떠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으로 주저 앉아 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져 가고,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 가도 날마나 나에게 힘 주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을 바라 보며 담대하게 내일을 향하여 달려 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평안을 누립니다. 그는 죽음의 음산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그렇습니다. 인생에 平康(평강)이 최고의 재산입니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다”,“안전하다”하는 것은 자기 망상이나 무지의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안전하고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 데려 가시면 그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기고만장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찌 생사여탈권을 쥔 하나님 앞에서 까불며 살겠습니까?
북한 강변의 도로 중앙에, 최고급의 멋진 오토바이를 타다가 죽어 넘어져 있는, 가죽 옷을 입은 한 중년 남자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의정부교도소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 가다가 고속버스에 부딪쳐, 죽어 가며 피를 동이로 토해 내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면목동에서 배달하던 아이가 도로 중앙에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자인 우리에게도 시험과 고독과 슬픔과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아니합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평안합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우리에게 짧은 인생의 한 여정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친히 나를 호위해 주시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뢰란 삶의 기어를 중립에 놓는 것”입니다. 생사와 화복을 다 주님께 맡기고 믿음에서 오는 평안을 깊이 깊이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형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힘은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건강은 내가 관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질병 상태는 나의 잘못 산 과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은 것은 나의 잘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 힘든 사람을 만드는 것은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해지는 것은 나의 잘못 산 삶 때문입니다.
지위와 명예를 얻는 것은 나의 탁월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지위와 명예를 잃는 것은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행복한 것은 나의 계획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그늘지고 불행한 것은 나의 오류 때문입니다.
내 신앙과 충성이 탁월한 것은 나의 잘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과 충성이 형편 없음은 나의 게으럼과 안일함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은 나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너지는 가정은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내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 것입니다.
주석가 매클래런은 시편 23편의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글을 남겼습니다.
“때는 정오이다. 황야는 가공할 열기 속에서 구워지고 있다. 유대의 언덕 위에 있는 돌맹이는 그것을 밟는 발을 뜨겁게 지진다. 그러나 이 숨 막힐 듯한 시간에 여기에 한 작은 푸른 골짜기가 있다. 거기에는 작은 시내가 조용히 흐르고, 그 물줄기를 따라서 촉촉한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있어서, 그 밑에서 자라는 이슬 맺힌 풀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곳으로 목자는 자기의 양떼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달콤한 정적이 흐른다. 목자가 다시 불러 낼 때까지 양들은 풀을 뜯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고, 또 시원한 굴속에 눕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평온하고 안락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찰라지간에 사라지는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절)
소중한 여러분!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냥 이 시간에 바로, 주님의 은혜로 심령이 평안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이 놀라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평안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4.마지막으로,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모신 사람은 영원한 승리를 기대하며 삽니다.
그는 패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물러 서는 법이 없고, 낙심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실수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결코 패배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 가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선도 악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절)
여러분 모두에게 합력선의 신앙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다윗은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태양을 향하고 걷는 자에게는 그림자가 따르듯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확신하며 살아 가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워 하거나, 낙담하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확신과 희망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바라 보며 담대하게 살아 갑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영어 성경은 이 확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Surely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me, of my life; all the days...”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이 나의 사는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를 것입니다.”(복창)
이 얼마나 강한 표현입니까?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사가 휴일을 즐기기 위하여 시골로 갔다가, 양떼를 돌보는 한 조그만 소년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얘! 너 시편 23편을 아니?”
소년이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래? 내가 가르쳐 주지.”
신사는 손가락을 짚으며 한 단어, 한 단어를 외우게 했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신사가 넷째 손가락을 꼭 쥐어 주면서 말했다.
“얘야! 하나님은 바로 너의 목자란다.”
그 해 겨울에 눈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눈이 내린 어느 날, 양떼를 데리고 나간 소년이 양떼와 함께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수색을 하다가 깊은 눈구덩이에서 소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파묻혀 죽은 양떼를 한참 파내다 보니, 소년의 시체가 왔습니다. 그런데 죽은 소년은 오른손으로, 왼손 넷째 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얼어 죽어 가면서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살아 가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언제나 승리자로 살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집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1>.언제나 부족함 없이,
2>.항상 새로운 힘을 얻으며,
3>.마음 속에 차고 넘치는 평안을 누리며,
4>.날마다 승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런 초장 위에 나의 몸 뉘이시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8P)
- 참된 만족과 쉼 -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인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까뮈가 그린 ‘시지프스 신화’라는 그림입니다.
시지프스 신화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시지프스는 제우스 신의 저주를 받아 그의 평생 정상을 향해 큰 돌덩이를 굴려 올려야만 했습니다.
이 돌을 힘들게 굴려 올리면 금방 밑으로 굴러 내려 가 버리고, 또 다시 올리면 금방 아래로 굴러 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는 계속해서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알베르 까뮈는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여기엔 쉼도 없고 목적도 없고 보람과 완성도 없습니다. 끝 없는 좌절과 고통만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통 속에 살아 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인생이라는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백팔번뇌의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을 표현하는 정반대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난 풍경입니다. 앞에는 넓디 넓은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옆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 가고 있습니다. 실컷 풀을 뜯어 먹은 양들이 배가 불러 옹기 종기 모여 앉아 편히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목자가 허리에 물 맷돌을 차고 한 손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양떼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나 평온한 모습입니까?
참으로 여기엔 평화가 있습니다. 참된 만족이 있고 진정한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이 상반된 두 개의 그림 가운데 오늘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의 삶이 시지프스의 삶이 될 것이요,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고,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 사는 삶일 것입니다.
♥ 1.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된다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 나는 그의 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목양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목자가 언제나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항상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양은 대단히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합니다.
①위험한 곳이 있어도 피해 갈 줄을 모릅니다.
원래 양의 시력은 근시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몇 m앞에 있는 것도 잘 못 몹니다. 그러니 바로 코앞에 낭떠리지가 있어도 못 보고 갑니다. 바로 앞에 맹수가 노려 보고 있어도 모르고 갑니다.
얼마나 멍청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다 양 같은 존재입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꼭 어리석기 그지없는 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각기 제 길"이란 말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멸망의 길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어리석어서, 각기 제 갈 길을 잘 갑니다. 멸망의 길, 위태로운 길, 사망의 음침한 길을 잘 갑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합니다. 이 길이 망할 길인지, 복 받을 길인지 정말 앞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고 우둔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ex)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또한 항상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해 주시며,
좋은 곳, 선한 곳,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언제나 복된 길, 승리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는 자는...
②양은 한번 무리를 이탈하거나 길을 잃어 버리면, 절대로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눈도 안 좋고, 멍청하니까!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음매 음매"하고 울기만 합니다.
ex) 길 눈 어두운 사람
길 눈이 어두우니까, 정말 답답합니다.
등산할 때, 운전할 때, 길을 잃을 때가 많음.
양은 사람 보다 길 눈이 더 어둡습니다. 한번 길을 잃어 버리면 한 치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음매 음매" 하고 울고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울음소리를 듣고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우리 안으로 데려 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100마리의 양 중에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온 산을 두루 찾아 헤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시는 그 인자한 목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까딱 하면 각기 제 길로 잘 갑니다. 그 길이 망할 길인지도 모르고, 그 길이 위태로운 길인지도 모르고, 그 길로 갑니다. 우리는 복된 길, 생명의 길을 잃어 버리고 세상에서 방황, 영적으로 방황합니다.
그 때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찾으러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물가에서 쉬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③양은 철저히 의존적인 동물입니다.
양은 자위 수단,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살아 갈 수 없는 무력한 동물입니다. 마치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목자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맹수의 밥이 되거나,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굶어 죽게 됩니다. 그러나 목자가 인도, 보호해 줍니다.
이렇게 양은 어리석은 동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목자의 인도를 필요로 하는 동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도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하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인생을 단 한 치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로 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지켜 줍니다. 양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동물학자에 의하면 양에겐 이런 연약성이 있다고 합니다.
①양은 모든 동물 중에서 제일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겁쟁이가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맹수가 접근해 오면 잡힐 때 잡히더라도 죽어라 도망을 갑니다. ex)사슴, 토끼...
그러나 양은 맹수가 앞에 오는 걸 알아 차리면, 너무나 겁이 많아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 거리고 앞에 오면, 그 자리에 서서 오줌만 찔끔 찔끔 싸면서 "음매 음매" 하고 울기만 합니다.
그에겐 뿔이 있나요? 발톱이 있나요? 날카로운 잇빨이 있나요?
그러니 "음매 음매" 하고 울다가, 그대로 잡혀 먹습니다.
바로 그 때, 목자가 양을 보호합니다.
ex) 물맷돌(투석기) - 100m, 200m... 멀리 있을 때,
지팡이 - 가까이 있을 때...
그러니까 이런 겁쟁이 양에겐 목자가 없으면 안되지요. 목자가 반드시 지켜 주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맹수가 접근해 오지를 못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양처럼 너무나 겁이 많은 존재입니다. 얼마나 인간에게 두려움이 많고 불안의 공포가 많습니까?
무슨 일이 조금만 생겨도, 금방 두려워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염려하고 불안해 하고 공포스러워 합니다. 죽을 일도 아닌데, 완전히 망할 일도 아닌데,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고 난리입니다.
담대하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일수록, 보세요!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교통사고를 한번 당해 보세요.
다들 정신이 없습니다.
ex) 잠깐 동안 아이를 잃어 버려도, 난리임,
조금만 병이 몸에 침범해도, 난리임,
경기가 좀 안좋아진다고 해도, 난리임.
한 때 전쟁이 일어 난다고, 라면 사재기를 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 만큼 우리 인생은 두려움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생에겐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이 두려움으로부터 지켜 주셔야 합니다.
②양은 배 고프면, 분별력이 없습니다.
양은 배 고프면, 아무거나 먹어 버립니다.
꼭 먹어서는 안될 독초도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죽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항상 독초를 못 먹도록 지켜 봐야 합니다.
③양에겐 기생충과 해충이 많이 있습니다.
양에겐 털이 많기 때문에, 무수한 해충이 서식합니다.
진드기나 벌레가 서식하면, 양들은 털이 다 뽑히고 살점이 터지기까지 몸을 나무에 비벼댑니다. 그러다가 병들거나 쇠약하여 죽습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이런 곳까지라도 양을 잘 돌보고 건강 관리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도 양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두려움도 많고, 분별력도 없고, 질병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건강한 육체도 영적인 황충, 기생충, 해충 등이 우리 몸에 틈만 나면 스며 들어, 치명적인 병이 들게 되고, 바싹 말라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러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지켜 주십니다. 질병에서 고쳐 주시고, 병마와 재앙에서도 지켜 주십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자상하게 지켜 주고 든든하게 지켜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말입니까?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는 자에게 말입니다.
3)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악마의 세력에서 건져 주십니다.
정상적인 목자라면 양이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더라도 구출해 줍니다. 양을 사랑해서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양을 구조해 줍니다.
ex)맹수의 발톱과 입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도...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양을 구해 오는 모습!
그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양을 위해 생명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영원한 선한 목자이셨기에, 그랬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우리의 진정한 목자로 삼을 때,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를 사탄의 세력에서 구해 주시고, 죄악의 세력에서 구해 주시며, 세상 유혹에서 구해 주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사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천국 가는 그 날까지, 항상 지켜 주옵소서.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목양 관계가 생깁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반드시 지켜 주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사탄 마귀 귀신의 유혹의 세력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 2.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는 자는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진정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 다윗은 이렇게 자신만만 하고, 넉넉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 보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인도하고 지키고, 끝까지 사랑하고, 구원해 준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한,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로 삼고 사는 한, 그에겐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은 온갖 고난과 고통과 쓰라린 눈물로 얼룩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어 주셨을 때, 아무런 부족이 없었습니다.
정적 장인 어른인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그 아슬 아슬한 순간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그 서러운 시절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군대들에게 쫓겨 다닐 역경의 때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어 배 고프고, 수 많은 오해와 악성 루머에 시달리는 억울함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 분 안에는 모든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모든 풍성함으로 다윗의 모든 부족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목자로 삼았을 때,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이었고, 모든 것이 만족이었으며, 모든 것이 넘쳐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ex) 진정한 목사의 만족함 : 부러움이 없음, 부족함이 없음...
“남이 집을 샀다 해도,
누가 학교에서 1등을 했다 해도...”
①예수 잘 믿고,
②목회 잘 하는 소원 밖에 없음.
여러분! 무엇이 부족하십니까?
무엇을 부러워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곤핍함을 느끼십니까?
무엇이 부족하여 목말라 하고 갈급해 하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그리하면 그 분의 진정한 풍성함. 풍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렐루야!
2) 참된 안식과 쉼의 삶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새벽에 양을 깨웁니다. 이른 아침부터 풀을 뜯깁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 11시가 되면 날씨가 더워집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늘진 곳에서 혹은 쉴 만한 물가에서 서로 뒹굴며, 되새김질을 하다가, 물을 마시다가 하며, 편히 쉽니다.
참으로 평온한 시간입니다.
양들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평화스런 안식의 순간입니다.
양들에겐 무슨 걱정,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쉼의 삶을 너무나 많이 경험 하였습니다. 물론 그에겐 무수한 역경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무수한 세력들이 그를 뒤쫓았지만,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 분 안에서 매일 매일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 분 안에서 참된 평화, 안식, 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육신은 쫓겼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목자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렸습니다. 참된 쉼을 누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의 고백을 아름다운 선율과 시로 노래를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7:1-3절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시4:7-8절,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요, 확신에 찬 고백입니까?
다윗은 언제나 이런 쉼과 이런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는 참된 쉼이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 놓고,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 가에서 편히 쉬는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ex)랠프 바톤
랠프 바톤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했던 만화가였습니다. 엄청난 돈, 명예, 인기도 가졌습니다.
세계 도처의 명승지에 별장을 마련하고, 그 곳마다 현지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60회 회갑 날 친구들에게 고백 하기를, "난 60년 동안 살면서 내 마음의 피로가 하루도 풀린 적이 없었다. 내 인생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젊은 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호색함과 방탕함이 그의 모든 쾌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참회록에서 고백합니다.
"오 주여! 내가 당신의 품 안에서 쉴 때까지는 나에게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품에서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엎드린 영혼...
그는 여호와를 그의 목자로 삼았을 때, 비로소 이런 참된 풍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한 풍랑과 거센 바람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장이 되어 주시면,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살다 보면 몸이 병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이 나의 의사가 되어 주신다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타고 가던 비행기가 아무리 흔들려도,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그 위대하신 손길로 이 우주를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맹수가 우리를 넘보아도, 그것들은 우리의 목자 옆으로만 스쳐 갈 뿐이지, 우리를 절대로 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목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만 생각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 분 안에서 참된 평온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 목자 되신 그 분이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가 그 분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는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계속해서 부족함이 많으십니까?
아직도 계속해서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참된 풍성함과 만족함, 그리고 참된 쉼과 안식이 여러분의 삶을 덮고 또 덮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