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남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시인(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겨울 강
겨울 강 얼음 풀리며 토해 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 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있는 얼음장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 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기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