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伽倻山)
높이 :1,430m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경상북도 성주군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과 수륜면에 걸쳐 있는 산.
주봉인 상왕봉(象王峯, 1,430m)과 두리봉(1,133m)·남산(南山, 1,113m)·단지봉(1,028m)·남산 제1봉(1,010m)·매화산
(梅花山, 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 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가 있는 치인리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이룬다.
그리고 동남방으로 흘러 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을 만드는 산맥을 보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덕유산(1,614m)에 이르러 원줄기는 남쪽의 지리산으로 향한다.
한편, 하나의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대덕산(大德山, 1,290m)·수도산(修道山, 1,316m)과 단지봉(丹芝峯, 1,327m)을 거
쳐 가야산에 이르러 크게 산세를 이룬다.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 본류와 황강(黃江)을 굽어본다.
가야산 상왕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덕유산이,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멀리 보인다.
가야산 일대의 지질은 화강편마암 및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인사와 신촌락(新村落)이 있는 치인리골과 홍류동
계곡은 화강암침식곡이다.
《택리지》에서 우리 나라 산을 돌산과 토산으로 구분하고, 가야산을 예찬한 부분을 볼 수 있다.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골 입구에
홍류동과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라고 한 것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의 봉우리와 골과 천석(泉石)을
예찬한 것이다.
가야산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어, 기온의 연교차·일교차가 매우 크다.
또, 해인사 일대는 고도가 높기 때문에 겨울에는 합천군의 1월 평균 평지기온 ·1.1℃보다 5℃ 이상 낮다.
강수량은 여름철 지형성 강우로 연강수량 1,100㎜ 이상이며, 하계집중현상 또한 높다. 홍류동 계곡과 해인사 일대 등 높
이 1천m까지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주종으로 한 3백 여종의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초본식물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상 부근에 있는 매발톱나무·수수꽃다리·둥근정향나무·백리향의 군락은 특기할 식물이다.
동물상은 부엉이·꾀꼬리·꿩·산까치 등 1백 여종의 조류와, 멧돼지·너구리·산토끼 등의 포유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비단
개구리 등 희귀 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는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연봉과 능선은 동남방의 홍류동 계곡 쪽 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급사면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으로 마령(馬嶺)을 넘어 거창으로 가는 소로가 있으나 예로부터 주요 교통로가 동남방으로 홍류동
계곡을 끼고 내려와 합천군 야로면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이유로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라 일컫을 만하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설산(雪山)·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기달산(怾怛山) 등 여섯 가지
가 있었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 : 旱災·水災·兵禍)가 들지 않
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
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
한 것이다.
가야산을 논할 때 해인사와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지명에서부터 말하여 준다.
첫째, 가야산은 그 지명과 산신 전설에서 옛 가야 지방을 대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이 있는데, 가야산신은 정견모주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感應)되어 대가야왕 뇌질주
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뇌질
청예는 금관국(혹은 本伽倻라고도 함)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
김수로왕의 건국 전설에는 가야의 북동 경계를 가야산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이른바 오가야 가야연맹의 맹주는 지금 가야산이 있는 고령군·합천군 일대의 대가야와 김해를 중심한 금관가야
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 시대에 가야산은 낙동강 중하류 일대 가야 연맹의 성산(聖山)으로 산악 신앙의 대상
이며,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 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 경내에 있었다는 정견천왕사는 가야산신의 사당이다.
또한 가야산 정상에서 근래까지 지내온 산신제는 옛 가야 지방의 신이 산악 신앙 형태로 잔존한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상징된다.
《택리지》에 가야산을 비롯한 열두 명산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하고, 또
“옛 말에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 하는데, 우리 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으므로 무릇 이 열두 명산
을 모두 절이 차지하는 바 되었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거찰(巨刹)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에 둠으로써 더욱 명산·영산의
이름을 얻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
다.”라는 옛 기록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사찰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수차의 중흥이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었다.
애장왕의 보은 창건, 고려태조의 귀의(歸依), 조선태조의 발원(發願),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 유산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6백년 가까이 고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法寶宗刹)의 명성
을 누리고 더욱 민족과 국가의 아낌을 받았다.
이러한 해인사의 흥창과 명성은 뛰어난 형승과 따를 수 없는 지덕을 가지고, 또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영기(靈氣) 서린
가야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위란(危亂)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신라 말에서부터 시작된 해인사 승군(僧軍)의 전통은 희랑(希郎)이 군을 일으켜 고려 건국을 도운 것, 임진왜란에 승군
의병을 지휘한 유정(惟政)이 만년을 가야산에서 지내다 입적한 사적으로 이어진다.
또, 민족 항일기에 해인사는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운동과 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셋째, 가야산은 최치원(崔致遠)의 은둔 이후 역대 문인들의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택리지》에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生理)가 박한 곳이 많다.
……한낱 산수만 취하여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 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곳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생각이 날 때는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 하고 산수를 유람하는 뜻을 정리하였다.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듯, 가야산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가야산의 수려한 석봉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사계절에 변화하는 주위 수목과 어우러져 선인들을 풍류에 도취하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우리 선현들이 산을 유람하는 뜻이 단순히 풍류에서만 그치지 않았음이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문〉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
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고 읊었다.
최치원의 입산 이래 천 년 동안 수많은 선현들이 가야산을 유람하여, 혹은 바위에 새겨지고 혹은 문집에 남겨 전하는
시와 문장들에 의하면, 경승지를 유람하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산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생활사를 통하여 고대 가야국의 산신이 있는 명산으로서, 법보종찰인 해인사를 품안에
안은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유람처로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1)해인사가야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지 않았으나 해인사는 임진왜란 후에 7차의 대화재를 겪어, 50여 동의 해인사
건물들은 대부분 2백 년 이내에 중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다.
이 절은 화엄10찰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이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도량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애장왕의 지원을 받아 창건하였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기 伽倻山海印寺古籍記〉에 의하면, 순응과 이정은 중국에 가서 보지공(寶誌公)
문하에 불법을 구하였더니, 문도가 지공의 답산기(踏山記)를 주고 아울러 임종시의 말을 전하였다.
두 사람이 지공의 묘소를 찾아가 법을 청하니 수일 후 지공이 나와 설법을 하고 의발(衣鉢)을 전하며 간곡히 이르되, “너
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가 환국하여 절을 창립하라.”하는 말을 들었다.
두 스님이 귀국하여 우두산의 동북쪽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 골에 이르러 보니, 합당한 곳이 있었으므로 풀을 깔고
앉아 수도하였다.
그 때 애장왕후의 등창병을 고쳐주자, 애장왕이 이에 크게 감사하여 먼저 봉서사(鳳棲寺 : 지금의 願堂庵을 말한다 함.)
를 세웠다.
그리고 법당과 승료(僧寮) 40여 소를 짓고 전지(田地) 2천 5백 결을 하사하였다.
개산일(開山日)은 그 해 8월 16일(고적기에는 10월 16일)로 전한다.
화엄종의 개산조인 의상(義湘)의 법통을 이은 순응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인용하여 해인사로
명명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진성여왕이 죽은 애인을 위하여 해인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자신도 왕위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서
지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태조는 후백제와 싸우다 해인사에 들어와 주지 희랑에게 구원을 청하니 희랑이 군을 일으켜 태조를 도와 후
백제를 격파하였으므로, 태조가 전답 5백 결을 내려 절을 확장하도록 하였다.
조선태조는 1398년 강화도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한양에 잠시 옮겼다가 뒤에 해인사에 봉안하고 세조는 대장
경판각을 확장, 보수하였다.
1488년에는 왕명을 받은 학조(學祖)가 대적광전(大寂光殿)·대장경판각 등을 비롯하여 160여 칸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후 모두 7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며, 그 때마다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특히, 1817년의 대화재 때는 대장경판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뒤 제월(霽月)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건물로는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명부전·삼성각·응진전(應眞殿)·조사전(祖師殿)·퇴설당(堆雪堂)·응향각(凝香閣)·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
光樓)·경학원·명월당(明月堂)·사운당(四雲堂)·해탈문·국사단(局司壇)·봉황문·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가야산 내의 부속 사찰과 암자로는 청량사(淸凉寺)·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원당암(願堂庵)·삼선암(三仙
庵)·금선암(金仙庵)·국일암(國一庵)·희랑대(希郎臺)·용탑선원(龍塔禪院)·길상암(吉祥庵)·지족암(知足庵)·보현암(普賢庵)
등 13개 사암(寺庵)이 있다.
또 해인사는 서부 경상남도 지역 합천·거창·산청·함양·진주 등 5개 군의 65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는
여러 국보,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국보 제 32호인 해인사대장경판과 국보 제52호인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이 있다.
그리고 보물로는 해인사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해인사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石燈, 보물 제518호) 등 3점이 잇다.
이 밖에 여러 사보(寺寶)들도 있다.
상탑향로(象塔香爐)·옥제가화(玉製假花)·희랑조사자조목상(希郎祖師自彫木像)·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봉황촛대·일영의
(日影儀)·순은향로·옥등잔·숙종어필병풍(肅宗御筆屛風)·오채병풍(五彩屛風)·무공수정(無孔水晶) 등 2백 여점이 그것이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성주군과 거창군의 일부를 포함한 총면적 57.8k㎡가 1972년가야산국립공원으
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주요 관광 자원은 홍류동을 비롯한 계곡과 해인사 일대, 그리고 가야산연봉·능선의 자연 경관으로 나누어진다.
자연 경관과 문화적·역사적 경관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었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치인리 신촌락에 집중되어 있다.
신촌락 집단 시설지는 여관을 비롯한 숙박 업소와 식당 및 기타 위락 시설과 기념품 상가가 밀집하여 있으며, 산채요리·
버섯 요리가 일미이다.
우체국(국제전화 취급)·농업협동조합(외국환 취급)·경찰지서·주차장(7천㎡) 등 공공 시설물도 갖추어져 있다.
교통은 서울·부산·대구·마산·진주·합천간에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특히 대구와는 88올림픽고속도로 건설
이후 1시간으로 단축되어, 대구 시민의 일일 휴양지로 되었다.
1972년에 건립한 전망대가 있어 가야산 정상과 해인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추풍령을 넘어 김천시 증산면·성주군 수륜면·홍류동으로 들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맑은 계곡을 끼고
있으며, 〈무흘구곡 武屹九曲〉으로 유명한 절경이 펼쳐진 길이다.
또한, 청암사·수도암에도 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륜면의 회연서원일대의 절경도 일품이다.
등산길로는 사하촌인 여관촌에서 해인사·용탑선원·정상의 왕복 코스(편도 약 6㎞)와 마애불 갈림길 능선·대피소·정상으
로 오르는 길과, 해인사·마애불·정상 등의 길이 있고, 성주 쪽에서는 창천·만귀정·정상의 길이 있다.
상왕봉 정상에 서면, 두리봉·단지봉·수로산·대덕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는 서쪽의 대능선이 장쾌하다. 또한, 정상에는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우비정(牛鼻井)이 있으며, 성주군이 동북쪽으로 내려다 보이고, 백련암과 가산(加
山, 692m) 쪽으로 뻗은 남북 능선과 남산제일봉 바위 능선의 기암 절벽이 또한 절경을 이룬다.
가야면과 인접 야로면은 예로부터 백토(白土)와 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으며, 가야면의 고려도기회사(高麗陶器會社)
등의 도자기는 합천군의 주요 공산품이다.
가야면과 인접한 고령군 쪽의 가야산 산록에도 고령토광산이 많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에는 함벽루(涵碧樓)·연호사
(烟湖寺)·대가야 성터·황계폭포(黃溪瀑布) 등 많은 고적·관광지가 있다.
2017년10월19일 셋째주(목) 요일 경남 합천 가야산 단풍산행합니다.
산행지 : 경남 합천 가야산(해인사)
산행일 : 2017년10월19일
중 식 : 각자 지참
출발시간 : 07시
출발지 : 수지신협 본점 사무실앞
이상기후로 폭우 또는 혹한이 올수 있으므로 대비할수 있는 등산 장비를 필히 지참 해주시기 바랍니다.
필 우의 보온성 좋은 바람막이 간단한 행동식 등을 지참 하시기 바랍니다.
산행 문외는 본조합 산행간사에 게 하시면 됩니다.
문외전화 : 031-263-4456
▣ 산행시 유의사항
1. 산행대장의 리딩에 따라 주시고, 개별행동을 금하셔야 합니다.
2. 산행시 개별행동을 할 시에는 사전에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3. 불의의 사고 및 안전을 위해 산행대장 및 총무의 전화번호를 꼭 입력하여 두시고, 통화가 안될시 문자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4. 산행시 사망, 부상 및 기물파손등의 손해 발생시 사고자의 책임으로 하고 수지신협 본점산악회에서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5. 산행중 사고등에 대비하여 보험으로 대처하며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