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구제금융 앞둔 아르헨
아르헨티나에서 경제 불안 심리가 확산되고 자본 유출이 본격화하면서 페소화 가치가 하루 새 8%나 급락했다. 페소화 급락을 막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정책금리를 40%까지 끌어올리고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달러(약 32조원)의 구제금융을 요청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각종 포퓰리즘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국가부채와 외채가 급속히 늘어나 경제가 몰락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IMF는 14일 성명을 통해 "오는 18일 비공식 이사회를 열고 아르헨티나의 긴급 금융지원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미국 뉴욕 외환시장에서 페소화 가치는 달러 대비 8%가량 떨어져 5월 들어 무려 18% 급락했다. 1년 전 달러당 15페소 선에서 거래됐던 페소화는 IMF와 구제금융 논의를 시작한 지난 8일 달러당 23페소까지 하락했고 14일 달러당 25페소까지 밀리면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페소화 가치 급락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아르헨티나 경제를 패닉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 자국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수입품에 대한 물가가 올라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물가상승률은 24.8%를 기록했고 올 3월에는 25.4%에 달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올해 물가 목표치를 종전 10±2%에서 15%로 상향 조정했지만 이미 크게 넘어섰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고삐 풀린 물가를 잡기 위해 10일 만에 정책금리를 무려 세 차례 인상했고 이를 통해 27.25%였던 금리를 40%까지 끌어올렸다. 페소화 급락을 저지하려고 지난 4월 외환시장에 개입해 수십억 달러 규모 외환보유액를 소진하는 강수도 서슴지 않았다.
외신과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부채에 의존한 경제의 몰락`으로 진단하고 있다. 부채의 시작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이 2015년 정권을 잡기 전까지 지난 12년간 이어진 좌파 정권의 `페론주의` 포퓰리즘에서 비롯됐다. 페론주의는 1940년대 중반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과 1970년대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이 내세웠던 포퓰리즘 정치로 식량, 주택, 교육 등에서 국가보조금을 지원하는 대중영합정책이다. 2003년 페르난데스 부부가 차례로 대통령이 되면서 소위 페론주의 포퓰리즘이 되살아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취약성을 노출했다.
BBC는 "페르난데스 정부는 공공 지출을 무리하게 늘리고 국영기업을 키우는 등 다양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다"며 "또한 환율을 통제하면서 달러 암시장이 생기고 달러 가격이 크게 왜곡되는 등 실질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일자리를 늘린다면서 공공 부문 인력을 대거 충원했지만 상당수가 할 일이 없어 월급만 축내는 유휴 인력에 가까웠다. 서민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에너지·교통요금을 동결하다 보니 공공 부문에서 경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6.1%까지 늘어났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부는 대규모 국채 발행에 매달렸고 이는 정부 부채를 한층 키우는 부메랑이 됐다. 영국 가디언은 북반구에 그리스가 있다면 남반구에는 아르헨티나가 있다고 비꼬았다.
2015년 마크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공공 지출을 억제하고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등 시장을 돌려놓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채를 늘려가며 재정을 운영한 점이 문제가 됐다.
IMF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대외 부채는 2015년 1789억달러(약 192조2280억원)에서 2018년 2029억달러(약 218조566억원)로 크게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경제학자는 아르헨티나가 외채를 늘리는 것에 대해 우려해왔으며 이로 인한 이자 지급 증가도 문제"라고 언급했다.
마크리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제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고금리 단기채권(Lebac)을 발행했다.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달러를 빌려 페소로 바꾸고 35일 만에 만기가 되는 단기채권에 투자해 연 29% 수준의 높은 이자율을 얻은 뒤 달러로 되바꿨다. 하지만 미국발 금리 인상 신호에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겹치자 캐리트레이드를 즐기던 투자자들은 아르헨티나를 떠나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WP)의 로버트 새뮤얼슨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는 "아르헨티나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다른 나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터키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리라화 급락을 막기 위한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금리 인상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경제 펀더멘털이 취약한 신흥국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총 네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미 금리 인상 속도가 한층 빨라지면서 신흥국들에 긴축 발작의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