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기이한 혼례
"동주님이 오셨다. 모두들 길을 비켜라!"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우차 위의 계집들은 또다시 일제히 피리를 불어대기 시작했다. 잠잠히 가라앉은 위로 가뜩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지니 아예 놋그룻을 박박 긁어대는 것마냥 저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계집들은 자기들 피리 소리에 스스로 도취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불어댔다.
한 계집애가 풍막차의 문발을 들치며 한껏 아양을 떨었다.
"아이, 동주님, 이젠 내리셔야죠."
그러자 열대여섯 살 난 여리여리한 계집애 둘이 쓱 얼굴을 내밀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내려와 섰다. 그들은 나지막한 걸상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차 문발까지 층층이 포개 올려 놓고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동주님, 이젠 내리세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단지흥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일국의 황제인 그도 저런 호사는 마다하는데, 볼수록 기가 막힐 노룻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저런 것만 보더라도 이 구구십팔동에서 충피의 위풍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헛기침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풍막차 안에서 작달막하니 땅에 달라붙은 듯한 사내가 하나 뜨직뜨직 굼뜨게 내려왔다. 키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얼굴도 지지리 못나고 음탕한 빛이 질질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충피였다.
그는 짐짓 근엄한 기색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단지흥 일행에게 눈길이 멈추자 싸늘히 냉소를 지었다.
"호오, 황제께서 예까지 친히 행차하셨군! 그래 여기 와서 느낀소감이 어떠신지? 대리면 다 대린 줄 알았겠지만 여긴 내 구구십팔동이오. 여기선 내가 황제요, 내가!"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일순 얼굴에 놀라는 빛이 어리며, 나직이 술렁임이 일었다.
단지흥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기만 할 뿐 대꾸를 안했다. 충피 같은 소인배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어떻게 전횡을 부리고 있는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게 누구 없느냐!"
충피는 불현듯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우차 뒤에서 새 다리 사내가 냉큼 뛰쳐나오더니 허리를 낮추 꺾고 굽실거렸다.
"동주님, 저자들입지요. 저자들이 바로 동주님의 희비 고르는 일을 훼방논 자들입니다요."
충피는 그 말에 작은 배를 톡톡 치며 깔깔 웃었다.
"이 멍청한 놈아, 저 어르신이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냐? 저분은 바로 대리국의 황제 폐하시다. 이 놈아, 저런 높으신 분이 이 누추한 구구십팔동까지 몸소 찾아 주시니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한데 네 놈은 무엄하게도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어? 이런 몹쓸 놈!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렷!"
새 다리 사내는 난데없는 불벼락에 어리둥절해져서 눈동자를 굴리다가는 황급히 우차 뒤로 꽁무니를 빼 버렸다.
둘러선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쳐다보았다.
충피는 단지흥을 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폐하, 정말 잘 생각하셨소. 이렇게 해독약을 가지러 오지 않았으면 며칠 내로 천룡사 고승들이 뭐가 되겠소?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켁 뒈져 버리지 않겠소?"
단지홍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도 운남 사람 아닌가? 천룡사는 대리국에 큰 공덕을 베푼 호국사요, 여러 번이나 대리 사직을 안정시킨 바 있네. 자네도 운남 사람이라 천룡사에서 은혜 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곳 스님들을 헤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충피는 히히 웃으며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단황 나으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소리요? 날 찾아 왔으면 두말 말고 어서 일양지 비본이나 내놓으시오. 그러기만 하면 내 약속대로 해독약은 내주지. 중들을 살리고 싶다면 어서 내놓아요! 그저 한 닷새만 지나 보시오, 어떻게 되나. 먼저 온몸에 두꺼비 관등처럼 두들두들 두드러기가 날 거요. 두드러기 안에선 벌레들이 꼬물꼬물 살을 파먹을 거고. 그래도 그 정돈 괜찮소. 이레가 넘어도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천룡사 중들은 모두 끝장이오, 끝장! 살
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이번엔 몸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먼저 간을 파먹고 또 염통에 기어 들어가 염통을 파먹고……. 그때가 되면…… 헤헤…… 그때……."
충피의 말에 누군가 기겁을 하며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나 그말이 너무도 끔찍하여 그 소리마저도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새삼 좀 독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천룡사 중들이 좀 독에 중독됐다니, 그 광경을 떠올리곤 너나없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충피와 맞닥뜨리기 전에는 단지흥도 어떻게 그를 설득해 해독약을 얻어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 보았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대하고 보니 예상대로 모두 헛수고가 될 게 틀림없었다. 말로 설득을 해서 될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놈과 싸우자니 그 역시 간단치가 않았다. 싸워 놈을 죽여 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인다고 해독약이 나오겠는가? 생포한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을 쓰는 놈을 잡기도 어렵거니와 꼼짝없이 잡는대도 무슨 수로 해독약을 얻어낸단 말인가? 실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단지흥이 아무 말도 없자 충피는 안달이 나서 다시 또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먼데서 온 귀한 손님이니 손님 대접을 안 할 수야 없지. 자, 우리 구구십팔동에서는 귀빈 대접을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시오. 야, 새 다리! 너 이리 좀 와 봐. 어서 가서 그 계집년을 좀 데리고 와. 어떻게 생겼는지 우선 인물부터 좀 보자."
그가 한마디 소리치자 아까의 그 새 다리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와 굽실 절을 하더니 다시 헐레헐레 뛰어가 대자리 집 처녀를 끌고 충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팍 내질러 충피 앞에 무릎을 꿇렸다. 처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꾼을 자기 남편이라고 하며 자못 의연하더니 충피 앞에 끌려 오자 그만 질겁을 하여 몸을 벌벌 떨어댔다. 충피는 건들건들 그녀 앞으로 걸어오더니 음탕한 눈길로 아래위를 훌어보았다.
"쓸 만하구먼. 지금 있는 것들보단 그래도 예쁜 축이야. 자, 상을 내줘라."
그는 뒤를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우차 한 귀퉁이에 앉은 여인이 새 다리 사내에게 쇠가죽으로 만든 작은 술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고맙습니다요. 헤헤, 고맙습니다요."
새 다리 사내는 입이 헤 벌어져서 술병을 그러안고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 사이 처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무꾼이나 그 일행이나 충피의 적수는 못 될 것 같았다. 이들이 충피를 대적해 내지 못하면 충피의 독약에 온 마을 사람들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충피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흉포한 자였다.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비칠 몸을 일으키며 충피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가 순순히 자기한테로 걸어오자 충피는 으쓱해져서 연신 입이 벙싯벙싯 벌어졌다. 그는 뱀 가죽같이 징그러운 작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슬쩍 쓸어 보며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파미(巴美)예요."
"파미? 파미? 거 좋은 이름이로군!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야."
충피는 연신 음탕한 웃음을 흩뿌리며 파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가 워낙 작아서 손이 머리에 닿지 못했다.
"자자, 파미! 머리를 숙여야지, 허리도 굽히고. 내 손이 닿아야 쓸어 주지. 내 색시가 되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어 줄 기색이면 넌 눈치 빠르게 머리를 내 손 밑으로 밀어 넣고, 허리를 만져 볼 기색이면 내 손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야 한단 말이야. 그러지 않았다간 내 심사가 뒤틀려 재미 없는 일이 생긴다니까……."
파미는 그 말에 치가 떨렸다.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녀는 나무꾼을 한 번 바라보고 싶었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칫 나무꾼 일행이 큰소리라도 내는 날이면 충피가 악에 받쳐 독약을 뿌릴지도 모르고 그럼 다섯 모두 꼼짝없이 죽게 된다.
'저이들을 구해야 해. 난 저이를 사랑해. 내가 충피에게 잡혀 가 유린을 당할지언정 저이는 구해야 해, 이 구구십팔동 처녀들치고 이 징그러운 놈의 마수를 벗어나기란 어차피 틀린 일인걸.'
그녀는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지만 애써 나무꾼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이는 정말 재간이 뛰어나. 저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데 대한 감미로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진정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그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징그럽고 음충스럽기 짝이 없는 충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라지만 나보다도 못하지 않소? 난 겨우 구구십팔동 동주일 뿐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 넘쳐 귀찮을 지경이거든. 내가 어느 계집이 좋다고 한마디만 하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렇게 갖다 바치잖소? 그럼 난 몇 밤 데리고 놀고는 아랫놈들에게 하사해 주는데 그거 싫다는 놈은 한 놈도 없는 거요. 히히……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도 나 충피처럼 즐겁게 살 수는 없지."
단지홍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충피가 떠벌리는 걸 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대 시위 중 선비는 그들 넷이 함께 달려들면 충피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생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놈을 생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지홍은 충피가 중구난방으로 낄낄거리며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선비에게 급급히 눈짓을 보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면 오히려 큰 낭패만 볼 뿐이었다.
더욱이 생포한다 해도 뾰족한 수도 없는 터, 단지홍은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먼데서 온 손님들한테 우리 고장 혼사 구경까지 시켜 줘야 예의지."
충피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새 다리 사내를 불렀다.
"야, 새 다리, 여기다 화톳불을 지펴라. 난 오늘 밤 여기서 저 계집과 혼례를 치러야겠다."
그러자 새 다리 사내는 별안간 환성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둘씩 입을 벙긋거리며 환성을 올리는 척했다.
뒤미처 우차 위에서 계집애 몇이 우르르 내려와 파미를 에워싸고는 냇가로 끌고 갔다. 그와 동시에 대자리 집 영감과 젊은이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계집애들은 파미를 냇가로 데려가더니 그녀의 머리를 마구 풀어 헤치고는 다시 자기들 식으로 빗어 주었다. 파미는 넋을 놓은 채 그저 계집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둘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피와 그 밤에 지독한 일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나무꾼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충만한 채 그만을 생각하려고 애를썼다.
어느새 달이 떠올랐다.
교교한 달빛이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을 내리비췄다.
화톳불 주변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쭉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충피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파미를 끼고는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키가 어찌나 작은지, 신랑이라고 차려
입긴 했으나 신랑이 아니라 자그마한 어린애가 파미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술판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울적하게 앉아 있었지만 술을 두어 잔 걸치자 거나해져 충피에게 저당 잡혀 있다시피 한 자신들의 신세가 한탄스럽고 뭐고 점점 무감각해져 갔
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취기가 올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살뜰한 정이 담긴 사랑가였다.
산 위에 바위는 나
그대는 나를 껴안은 파초일
바람이 크게 일어도
그대, 가만있어요
나를 꼭 껴안고 가만있어요
나는 계곡에 흐르는 벽계수
그대는 그 물에서 노니는 선녀
내 품에 숨어서
그대 , 가만 있어요
동주님 눈길이 찾고 있어요.
충피는 흥에 겨워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게슴츠레 단지흥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단황 나으리는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이 충피는 어쩌지 못하오. 나한테 조금만 함부로 굴어도 천룡사 늙은 중이고 젊은 중이고 모두 구더기 밥이 될 텐데……."
그리고는 충피는 또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어젖히고는 음탕한 눈빛을 반짝 빛내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황제는 후궁에 희비들이 얼마나 있소?"
단지홍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때껏 살면서 이런 음탕한 짓거리를 대하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그는 입을 딱 닫아 붙인 채 함구 무언 말이 없었다. 그러자 충피는 또 낄낄 웃으며 빈정거렸다.
"기실 우리들은 모두 속세 인간들인데 계집을 싫어할리야 있겠소? 거기도 계집들이 수두룩하겠지만 내게도 내 계집이 허다하다오. 그쪽 계집들도 단황 나으리 말을 잘 듣겠지만 내 계집들도 내 말이라면 설설 긴다오. 그래, 내 위세가 대단하지 않소? 과연 황제와 맞먹지 않느냐 말이오?"
단지홍은 듣기가 거북해 마지못해 한마디 내뱉었다.
"글쎄,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쳇, 내 말을 믿지 않는 게로군! 그럼 믿게끔 해 주지."
아무리 해독약을 얻으러 온 처지라지만, 그리하여 저 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뭇 조심하고 있는 터이지만 황제가 저토록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사대 시위는 너나없이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졌다.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저런 미친놈! 저따위 놈하고 무예를 겨뤄야 하다니, 한심한 일이로다. 완전히 고주망태가 돼서 정신이 가 버리면 저 놈을 잡아 엎어 놓고 해독약을 뺏어 내야겠다.'
사대 시위는 눈을 부릅뜨고 충피를 쏘아보며 기회를 노렸다.
"자, 이리들 오너라!"
충피는 거들먹거리며 제 계집들을 불렀다. 계집 여럿이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산간 벽지에서 나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렇게 여러 계집에게 시중을 받으며 즐기기 때문 아니겠소? 내 이 계집들 좀 보시오. 얼마나 예쁜가. 이 구구십팔동 것들
도 있고, 타고장 것들도 있지만 모두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능이라도 한다오."
충피는 득의양양하게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한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러자 계집들은 충피를 사뿐 안아다가 한 우차 위에 올려 놓고 파미도 그 곁으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는 우차 두 개를 서로 끌어다 붙이고는 바삐 손을 놀리더니 금세 평평한 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이어 네 귀퉁이에 빙 둘러 팔뚝 같은 횃불을 열여섯 자루나 켜 놓았다. 횃불은 피지직피지직 타오르며 침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자, 이제 됐다. 모두들 가까이 오너라!"
충피는 호기롭게 호령을 했다.
단지홍은 이 산간 벽지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이곳 사람들 사이엔 타지와 다른 기괴한 일들이 많음에 놀랄 만큼 놀랐고 충피의 음탕함에도 신물이 날 정도가 되었으나 지금 이 난쟁이가 또 무엇을 하려는 수작인지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충피의 한마디에 계집들은 두말없이 다가들었다.
그녀들은 충피 곁으로 가더니 차례차례로 허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속치마가 다 드러났다. 봉곳한 젖가슴, 탱탱한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교교한 달빛, 이글거리는 횃불 밑에서 그녀들의 모습은 적이 고혹적이었다. 충피는 한 어린 계집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계집은 엉덩이를 흔들어 가며 충피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충피는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받쳐 올리더니 물었다.
"이 동주님이 너와 몇 번을 즐겼느냐?"
그 계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일곱 번밖에 안 되옵니다."
"그래, 그래. 내 몇 번은 더 부르지."
충피는 그녀를 물리며 낄낄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계집이 허리를 비비꼬며 충피에게 달려들었다.
"동주님은 저하고는 벌써 열다섯 번이나……."
충피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열다섯 번? 그렇게나 많이? 으, 질린다, 질려! …… 어떻소, 단황 나으리! 이만하면 신물이 나지 않겠소? 이 계집이 좀 아깥긴 하지만 이제는 새 계집으로 갈아야겠소! 거기 새 다리, 너 이리 좀 오너라."
"예예,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새 다리 사내는 냉큼 뛰어가 충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오늘 밤 내게 새 각시를 골라 바쳤으니 그 상으로 이 계집을 내주마. 네 놈한테는 과분하지만…… 어쨌든 저 애는 네가 가져라!"
그 말에 계집은 눈이 휘등그래졌다. 충피도 싫었지만 이 새 다리 사내는 더 싫었다. 충피에게 몸을 버린 것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집에 있는 부모 형제의 안위가 걱정되어 온갖 애교를 다 부리며 꼭두각시처럼 충피가 하라는 대로 몸을 굴렸는데 이제는 이 천하의 추물 새 다리 사내한테까지 유린을 당해야 하다니, 그녀는 자기의 신세가 처량하여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기분이 상한 충피가 벌컥 성을 냈다.
"이 년아, 울긴 왜 울어? 날 떠나기 섭섭해서 우는 거냐? 섭섭 해도 할 수 없다. 난 네 년에게 진저리가 났단 말이다. 넌 오늘 밤 저 새 다리와 자야 돼, 알겠어? 오늘 밤으로 저 새 다리한테 시집을 가야 한다구!"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 다리 사내는 우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 계집의 손목을 와락 거머쥐고 밑으로 끌어내려 숲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통곡 한 번 못하고 가녀리게 어깨를 들썩이며 애원 어린 눈길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그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할 뿐이었다. 단지흥 일행 역시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마저 점점 멀어져 갔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충피가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단황 나으리,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내 계집들 중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단지흥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경멸 어린 미소를 흘릴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는 충피같이 황음무치한 자와는 무슨 말이고 간에 주고받기가 싫었다.
"단황 나으리는 먼데서 온 귀빈이 아니오? 그러니 내 계집들 중에서 마음대로 하나 골라잡으시오. 한결같이 예쁘고 곱살스러운데, 손님 대접이 그게 아니니 오늘 밤 수청을 들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계집들은 모두 이마를 다소곳이 숙이고 단지흥이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기원하며 가슴을 졸였다.
'아, 황제가 나를 골라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난 황제의 여인이 되고 이 지옥 같은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시는 악마같은 충피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런 행운이 내게 떨어진 다면! ……'
그녀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모두 머리를 들라!"
충피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간절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지홍은 그녀들이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일순 한 여자라도 구해 내는 게 도리가 아닐까 마음 이 약해졌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 먹었다.
'내가 이 구구십팔동까지 온 건 오직 해독약을 얻으려 함이었다. 해독약을 얻어내야만 천룡사 스님들을 구할 수 있다. 충피가 그 어떤 강짜를 부린다 해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 저 놈의 얕은 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단지홍은 여전히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충피, 내게도 여인들은 많다네……."
"아니, 계집 하나를 선사한대도 마다 한다면 이 충피를 하찮게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내가 그렇게 하찮게 보인다면 다른 말은 더 맙시다. 나도 그 잘난 일양지 소린 다신 안 할 테니까 거기서도 해독약 얘긴 꺼내지도 말라구요."
충피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해독약 소리가 나오자 단지홍은 놓칠세라 말꼬리를 잡았다.
"내가 천리를 마다 않고 예까지 온 것이 바로 그 해독약 때문이거늘 어찌 그 얘길 안 할 수 있겠나. 제발 그 약을 좀 주게. 여자는 놔두고 천룡사 여러 대사들 목숨이나 좀 살려 주게."
"그래도 일국의 황제라 이 충피가 미인까지 내드리며 환대를 하는데도 이 구실 저 구실 들이대며 고깝게 받아들이니,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둘이 같이 즐겁게 밤을 지내자는 게 뭐 잘 못되었소? 우리 사이가 이렇게 뻣뻣하고 동고동락을 못하는데 해독약은 무슨 해독약……."
충피는 깐죽깐죽 여간 얄밉게 구는 게 아니었다. 단지홍은 속이 탔다. 저자가 자기 계집을 억지로 떠안기며 자기를 휘어잡으려 하니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켠에 서 있던 선비가 대뜸 끼여들었다.
"동주께서 정말 그렇게 선심을 쓰려 한다면, 좋소이다. 기왕이면 파미를 내주시오."
그 말에 충피는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단지흥에게 물었다.
"뭐라구? 그렇담 정말 황제는 내 새 각시가 마음에 든단 말이오?"
단지홍은 언뜻 선비를 돌아보았다. 선비의 뜻은 분명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 난쟁이 괴물의 손에서 구해 내자는 것이요, 기왕이면 아직 몸을 더럽히지 않은 학미를 구해 내자는 것이었다. 단지홍
은 선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단황 나으리도 참 어지간하구려. 새 각시를 옷도 못 벗겨 보고 그쪽에 넘기란 말이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어떻게 새 계집을 맛도 못 보고 남에게 내준단 말이오?"
충피는 손까지 내저으며 안 된다는 시늉을 했다. 선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받았다.
"이봐요, 동주님! 동주님도 황제 폐하는 멀리서 온 귀빈이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이왕에 환대를 하겠다면 가장 아끼는 물건을 내놔야 도리가 아니겠소? 그래야 더욱 칭송도 받을 거고."
그러자 충피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두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파미와 단지흥을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내뱉었다.
"좋아, 좋아. 그 귀한 일양지 비본을 얻으려면 그 정도 대접은 해야겠지. 이 넓은 구구십팔동에 파미말고도 미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좋소! 자, 파미를 황제 폐하께 내드려라!"
충피는 호령을 내지르고는 단지흥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내 파미는 순순히 내드리지! 단, 단황 나으리,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나으리 역시 이 고장 법도를 따라야 하오! 이 고장에선 화톳불을 켜 놓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혼례를 해야
하오! 황제는 오늘 밤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파미와 성혼을 해야하오. 알겠소?"
단지흥이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충피는 한바탕 운고 나서 덧붙였다.
"우리 구구십팔동 사람들은 성안 사람들처럼 깨이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법도는 갖고 있다오. 즉 각시를 얻었으면 웃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해야 한다 이 말이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다 보는 데서 발가벗고 뒹굴어야 한다는 것이오. 그걸 보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어떻게 믿겠소?"
거창하게 드러내 놓고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게 이 지방법도이긴 했으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따위의 법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충피는 지금 단지흥을 호되게 곯려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애를 태우면서도 아무 소리도 못했다.
단지홍은 아연해져서 사대 시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선비가 나섰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 파미를 내달라고 한 건 순전히 내 동생을 위한 것이었소. 우리 동생과 파미는 이미 약혼한 사이요. 그러니 두 사람이 성혼하도록 해 주시오."
그 말에 파미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충피는 원래 이러니저러니 말만 늘어놓는 덴 딱 질색이라 귀찮다는 듯 소리쳤다.
"참 말도 많군. 좋소, 좋아! 멀리서 온 귀빈이니 뜻대로 해주지. 하지만 꼭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하오."
그리고는 파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우차를 뛰어내려서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나무꾼을 바라보며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침내 나무꾼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깊은 눈길을 좇았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녀는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고 나무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입술을 꼭 맞추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설야의 고행 속에서 모닥불이나 만난 듯 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충피는 심사가 뒤틀려 이죽거렸다.
"저자가 황제의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 밤에는 반드시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파미가 저자의 각시가 됐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 파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가랑이가 찢겨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단지홍은 충피가 허풍을 떠는 건지, 진짜로 이 고장에 이런 법도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충피가 자못 완강하게 나오는 걸로 봐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그는 난감한 눈빛으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대자리 점포에서 나무꾼은 이미 파미의 애잔한 눈길을 느꼈으나 모르는 척 딴청을 했었다. 둘은 어제 처음 만나 그저 하룻밤 한지붕 아래서 따로따로 묵은 일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성혼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충피, 결혼이라는 것이 머디 아이들 놀음인가? 자고로 혼사라함은 인륜지대사이거늘 우리 대리의 풍속을 따라 집 안에서 성혼을 치름이 어떤가?"
단지홍은 격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큰 우차를 왜 몰고 왔겠소? 이 많은 사람들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줄 아시오? 이 사람들은 오늘 밤 각시가 이 우차로 만든 널찍한 침대 위에서 성혼 하는 걸 보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뭘 알기나 알고 하는 말이오?"
충피는 도리질을 해 가며 지껄여댔다.
그러나 파미는 그의 말은 귓전으로 흘리며 나무꾼의 품안에 살포시 기대고는 소곤거렸다.
"나를 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토록 좋은데. 당신이 만일 나를 좋아하신다면 사람들 눈이 뭐 대수예요? 볼 테면 보라지……. 만약 저 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늘 밤 저 놈은 날 죽이고 말거예요……."
파미는 나무꾼에게 꼭 붙어서서 두려운 듯 충피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충피는 그 음탕한 눈빛을 번쩍이며 이 두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남정네들도 자못 흥미롭게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실 파미는 이 구구십팔동에서는 손꼽히는 절색으로 그녀와 단 하룻밤이라도 자고 싶어 남모래 속을 끓인 사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제에 자신들은 원을 못 풀더라도 이 여인이 밤일을 할 땐 어떻게 하는지 적이 호기심이 동해 저마다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단지흥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비도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대리국에서는 명색이 이품(二品) 벼슬을 하는 고관대작인데 이따위 짓거리에 놀아나야 하다니…… 나무꾼은 속만 탔다. 그 역시 방책이 서지 않아 황제와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량하기만 하던 이 마을 사람들도 점점 이성을 잃고 빨리 혼례를 치르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두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을 한시 바삐 보고 싶어 야단이었다.
그쯤 되자 단지홍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무꾼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피 말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꾼은 잠시 주춤하더니 한 순간 결심을 내린 듯 파미의 손을 홱 거머쥐고는 천천히 우차 위로 올라 갔다.
충피는 나무꾼과 파미가 우차로 만든 침대로 올라오는 것을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그들의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다.
나무꾼은 엉거주춤하니 파미를 끌어안았다. 나무꾼의 품에 안겨 파미는 얼굴이 발개져서 속살거렸다.
"어서 하세요, 어서……. 한 번도 사내를 타지 않은 깨끗한 몸이에요. 거기가 가지세요……."
나무꾼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열여섯 자루 팔뚝 같은 횃불이 우차를 대낮처럼 환히 비추는데 어찌 그리도 남부끄러운 짓을 한단 말인가. 그 역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선뜻 결단이 서지 않아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미는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누르지 못해 한 순간 거칠게 나무꾼을 옥죄더니 그를 끌어안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당신 손이 그처럼 재간이 있듯, 난 그 마음도 그처럼 백설같이 선하리라고 믿어요……."
파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나무꾼은 좀체로 파미처럼 열렬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차 주위로 몰려들어 손에 땀을 쥐며 그들을 지켜 보았다. 파미의 아버지는 진작에 돌아갔고 그녀의 오빠만이 두 주먹을 부르쥔 채 충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무꾼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엉거주춤하니 허리춤을 풀어 반나마 및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흘러서야 주춤주춤 파미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그러자 파미는 한껏 달아올라 온몸을 나무꾼에게 찰싹 갖다 붙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파미의 눈빛은 더욱 열정적으로 불타 올랐다.
충피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정색을하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단지홍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이들 두 남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단황 나으리, 어떻소? 또 한 번 단단히 속으셨구려!"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단지홍은 고개를 홱 쳐들며 외쳤다.
"속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네 졸개는 또 내게 중독되었다 이 말씀이오. 풍독(瘟毒)이라는 건데, 저 둘은 한치도 떨어지지 못하고 마냥 저대로 붙어 있어야 한다구요, 히히히…… 한치라도 떨어지면 금세 독이 퍼져 죽고 말아, 으하하하……."
단지홍은 두 눈이 휘등그래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충피는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며 죽겠다고 웃어젖혔다. 단지흥을 또 한 번 골탕 먹였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요절복통할 일이 아닌가! 이제야말로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으니, 구구십팔동은 물론이요 대리와 중원(中原) 천하까지 손아귀에 틀어쥐게 되었지 않은가……. 충피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웃음을 토해냈다.
아니나다를까, 나무꾼은 불현듯 온몸에 오한이 나며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아, 큰일이다. 이거 야단났는데……."
나무꾼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어찌나 떨리는지 이빨이 떡떡 마주치고 눈은 점점 흐릿해 졌으며 동공은 바늘귀처럼 작아졌다.
정신도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파미는 속으로 겁이 덜컥 났으나 조금이라도 위로해 볼 요량으로 나무꾼을 그러안고 애절하게 말했다.
"너무 염려 말아요. 다 괜찮아요. 동주 말을 들었지요? 내가 그냥 당신을 끌어안고만 있으면 죽지는 않는대요."
단지흥과 시위 세 사람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볼 뿐, 누구 하나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날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파미와 나무꾼을 지켜 보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개중에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몸이 후끈 달아올라 서로 짝을 지어 으슥한 골짜기로 달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거개는 좀전의 자기를 질책하며 근심스런 기색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충피는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단지흥을 기분 좋게 쳐다보며 으르댔다.
"단황 나으리, 이제 순순히 일양지 비본을 내 놓으시지. 해독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룡사 중들을 고치는 약뿐 아니라, 당신의 저 시위를 해독시키는 약도 당장 내놓겠어! 그래, 일양지 비본 은 어딨지?"
단지홍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무꾼이 저대로 날마다 파미를 끌어안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일양지 비본을 내주고라도 나무꾼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이마에는 골 깊게 내천자가 그려졌다.
"단지흥, 일국의 황제 주제에 제 시위 하나 못 살려내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는가? 자, 어서 일양지 비본을 척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도 모두 저 꼴이 돼."
충피는 사뭇 득의양양했다.
"폐하…… 저 놈의 허튼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저와 이 여인이 죽을지언정…… 일양지 비본을 저 놈한테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비본을 얻으면 저 놈은 더욱 흉악해져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천하를 제 맘대로 주무를 것입니다……."
나무꾼은 더듬거리면서도 성마르게 외쳐댔다. 그러자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이 앞뒤 분간도 못하는 놈아, 당장 죽게 된 놈이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으냐! 너희 두 년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으나 잠시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그 당장 죽는다, 죽 어!"
세 시위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제각각 선비는 검, 농부는 쇠갈퀴, 어부는 쇠로 만든 노를 들고 미친 듯이 휘둘러댔 다. 그러나 충피는 여간 날쌘 게 아니었다. 놈은 소리를 지르며 획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피하더니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는 땅에 사뿐 내려섰다.
"나 같은 것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대리국의 황제라고? 히히히…… 그 이름이 무색하구나."
충피는 지들거리더니 낯색을 굳히며 짧게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러자 우간 밑에서 난데없이 독충과 독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만큼 큰 전갈, 두 자는 됨직한 긴 독사, 그외에 이름 도 모르는 독충들이 새까맣게 땅을 뒤덮고 충피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네 사람을 포위해 들어왔다.
단지흥 일행은 즉각 몸을 피하려 했으나 때를 놓치고 말았다. 우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사방으로 튀었다.
"야단났다. 동주가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과 독사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었다.
선비는 검을 들어 서슬 푸른 검기(劍氣)를 내뿜었다. 빗발치는 검기가 무지개를 이루며 독충들의 접근을 막아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독충들은 물불 안 가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농부는 돌개바람이 일 정도로 쇠갈퀴를 세차게 휘둘러댔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리 오래 견딜 수는 없었다. 무거운 쇠갈퀴를 정신없이 휘둘러대니 숨이 가쁘고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손을 놓으면 황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에 농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쇠갈퀴를 휘둘러댔다.
어부도 쇠로 만든 노를 바람이 씽씽 일 정도로 힘차게 휘두르며 독충들을 내리쳤다. 어부의 쇠로 만든 노는 농부의 쇠갈퀴보다는 쓰기가 한결 가뿐했지만 몰려드는 독사와 독충들을 다 막아내기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독충들은 지독하게 악취를 내뿜어 속이 메슥거리고 골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래도 어부는 분을 못이기며 눈을 질끈 감고 닥치는 대로 마구 내리쳤다. 대가리가 터져 납작하게 된 독충과 독사들이 바닥에 확 깔리기 시작했다.
가운데 선 단지흥은 잠시 망설였다. 자기 혼자만이 라면 내공으로 이 벌레들을 일시 막을 수는 있으련만 시간을 오래 끌수록 사대 시위의 신상은 위태해지고 만다. 단지홍은 일순 마음을 굳히고 일양지공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지풍이 팍팍 소리를 내며 뿜어 나가자 과연 독충과 독사들은 배때기가 터지며 연신 죽어 나자빠졌다.
팍팍팍, 그는 일양지공을 번개같이 사방으로 내질렀다. 순식간에 독충과 독사들이 죽어 널브러져 새까맣게 땅을 뒤덮었다.
단지흥 일행은 향을 세 대 피울 시간 동안이나 독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으로는 조수마냥 끝없이 밀려드는 이 독충과 독사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게다가 충피의 계집들은 무슨 발광이 났는지 충피 뒤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계속 독충과 독사들을 부리고 있었다. 구구십팔동 그 많은 산과 골골의 독충과 독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불러 다 단지흥 일행을 물어뜯게 할 참인 것 같았다. 단지홍은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이젠 다 글렀구나, 해독약을 구해 천룡사 중들을 살려 보자 했더니 해독약은 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문제가 아니나 대리의 호국사가 나에 이르러 파멸당하게되니 죽어도 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폐하, 저희 셋이 막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농부가 소리쳤다.
"지존께서 이렇게 수난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어서 여기를 피하십시오, 어서!"
선비도 애가 달아 소리쳤다.
"폐하, 어서 가십시오. 차후 저 독충 같은 놈을 잡거든 저희들의 원수나 꼭 갚아 주십시오."
어부도 숨을 바투 쉬며 외쳤다.
단지흥은 비록 자기 목숨이라도 자기 멋대로 함부로 여길 수 없는 황제의 신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위 넷을 사지에 버려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군신간이라 해도 정은 수족 같고 형제나 다름없거늘, 어떻게 저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피하겠는가. 단지홍은 장탄식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은 그만두게.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수리 개에게 뜯기기를 자원하셨거늘, 나도 내 몸을 저 독충들에게 뜯기게 할지언정 자네들을 버려 둘 수는 없네."
그 말에 선비, 농부, 어부 세 사람은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네 사람은 아무 방비도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제 처연히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자지러지는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순간 싱글벙글 입이 헤벌어졌던 충피도 우거지상이 되어 버렸다.
뒤미처 단지흥 일행 앞에 출연히 여인들 몇이 나타나 떡 버티고 섰다.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몸매로 보아 여자들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아무 말도 없이 충피를 노려봤다. 이윽고 충피가 어깨를 몇 번 으쓱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니, 여긴 왜 왔습니까? 난 무당할미의 규례를 위반하는 짓은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여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단지홍은 충피가 이 여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들이 나타나자 충피는 더는 독사들을 몰아대지 못하고 그녀들의 눈치만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대관절 이 여인들은 누구인가. 어떤 여인들이기에 저 기세등등하던 충피마저 저 모양 저 꼴로 꼼짝못하는 것일까, 이 여인들이 그 어떤 신기(神技)라도 갖고 있는 걸까.'
단지홍은 자못 궁금하였다. 그 여자들이 단지흥 일행을 막아 선채 묵묵부답으로 입을 닫아 붙이고 있자 충피는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외쳐댔다.
"아이고 답답해라. 무슨 분부가 있는지 말씀을 하십시오. 내 분부대로 다 해 드리리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개중 한 여인이 느직느직 입을 열었다.
"이봐 충피, 무당 할머니께선 어서 이분들을 놓아주라는 분부시다."
충피는 화가 벌컥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더니 꼭 그 짝이 아닌가. 하지만 눈알을 팽그르르 굴리며 아무리 궁리해 봤자 별 뾰족한 수가 없자 그는 퉁퉁 부어 올라 볼멘소리로 외쳤다.
"무당 할미 분부라면 놔줘야지 딴 도리가 없지만서도 내 명도 없이 다시 한 번 더 우리 구구십팔동에 발을 들여왔단 봐라. 그땐 절대 용서 없어!"
"그래 무당 할머니 칙명에 불만이란 말이냐?"
한 여인이 힐책했다. 그러자 충피는 속이 뜨금하여 억지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이고, 그런 게 아닙니다요. 언감생심 무당 할미의 칙명을 어기다니요. 그저 찢어진 입이라 말이 나가다 보니 그만……."
충피는 말꼬리를 흐리며 여인들 너머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아직도 살기가 등등했다. 이번에 단지흥을 놔주면 앞으로 일양지 비본을 뺏을 이런 호기는 영영 못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놓아주지 않았다가는 무당 할미한테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충피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요, 내 저것들을 놔주면 그만 아니오!"
그래도 여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것들을 놔준다는데도 왜 또 이래요? 무슨 분부가 또 있다는 말이오?"
"저 우차 위에 있는 남자도 놔줘야지. 어서 바지를 입혀."
한 여인이 엄하게 말했다. 충피 킥킥 웃었다.
"무당 할미도 아랫도리를 벗고 있는 사내를 좋아할 텐데 귀찮게 시리 옷을 입힐 거 뭐 있소? 옳아, 알았다! 이젠 사내도 귀찮다 그거겠지. 거 참 아쉬운데. 이 세상에 저 녀석처럼 힘센 놈도 드문데……. 그런데 참, 당신네들도 무당 할미처럼 아랫도리를 벗어 던진 사내가 귀찮소? 그렇다면 정말 아깝게 됐는걸, 저런 황소 같은 놈이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니……."
충피는 음탕하게 킬킬거렸다. 그러나 여인들은 충피가 지껄이건말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충피는 입으로는 추잡한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감히 여인들의 명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계집들을 시켜 나무꾼에게 해독약 한 알을 먹이게 했다. 그러자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그때껏 정신을 잃고 있던 나무꾼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와 희멀거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가 아직도 파미와 한 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급히 아랫도
리를 가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충피의 계집들은 나무꾼에게 다가가 그를 파미에게서 떼놓고는 옷을 입혔다. 나무꾼은 영문을 몰라 그녀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 버려두었다. 그녀들은 이어서 파미를 부축해 일으켰다. 파미도 혼이 난 터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애절한 눈길로 나무꾼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가면을 쓴 여인들은 다시 충피에게 명했다.
"저 우차에 제대로 풍막을 올려라. 우리가 써야겠다."
충피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별수가 없었다. 그는 계집들에게 우차에다 풍막을 올리게 해서는 그 우차를 여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어 독충과 독사들을 한켠으로 몰아내 단지흥 일행이 우차에 오르도록 길을 터주었다.
"충피는 듣거라, 여기 이분은 대리 황제로 먼데서 온 귀객인데 너는 지금껏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 그래도 다행히 큰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일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무당 할머니가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의 호통에 충피는 그저 머리만 긁적거렸다. 좀전의 그 위풍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는 간다!"
한 여인이 채찍을 휘투르며 소리쳤다. 우차는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타. 충피는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파미는 첫사랑을 나눈 이 믿음직한 사내를 향한 애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언제까지나 우차를 바라보았다.
얼마를 갔을까? 단지흥 일행 다섯은 마냥 우차 안에 갇혀 있자니 갑갑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큰 병을 앓고 난 뒤처럼 기진맥진해 있는데다가 그 무당 할미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자기들을 불러오라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글저 우차안에 가만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당 할미는 적일 수도 있었다. 그들 다섯은 좌정한 채 잡념을 떨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내력을 모았다.
굼뜨게 굴러가던 우차는 마침내 한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이제야 오네요. 할머니께선 금방도 근심이 돼서, 일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던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풍막 안으로 들려 왔다.
"그래 할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할머니한테 찾아가 아뢰어야 할 게 아니냐?"
이쪽 여인이 묻자 상대방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님은 지금 연공(練功)을 하고 계시는데 방해했다가는 큰일 나게요?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노여움을 사면 잡아먹으라고 거기를 사내아이에게 줘 버리면 어떡해요."
"그럼 좀 있다가 올라가 아뢰게. 우리 일은 뜻대로 되어 사내 몇놈도 붙잡아 왔다고 말야."
"알았어요!"
상대방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이어 발자국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풍막 안에 갇힌 채 단지흥 일행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밖으로 나가야지, 여기서 이렇게 틀어박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지홍은 마음을 굳히고 벌떡 일어나 문발을 들치고 우차에서 뛰어내렸다. 시위 네 사람도 잇달아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들 다섯은 눈앞의 광경에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