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률 90%의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박종인의 땅의 歷史]
344. 공화국 대한민국③ 까막눈 조선인이 문화를 창조하기까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5.24. 03:00
업데이트 2023.05.24. 06:14
언문 즉 한글을 멸시하고 한문에 집착한 지식인들 탓에 조선 백성은 500년 내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다. 10명 중 9명은 까막눈이었던 조선은 식민시대 종료 후 문맹률 80%에 이르는 문맹국으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치러진 선거는 까막눈을 위해 이름과 함께 ‘작대기’로 입후보자 이름을 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을 세우고 5년 동안 민관합동으로 성인 한글교육을 실시했다. 1958년 말 대한민국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교육은 문화적 각성을 촉발시켰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문화(文化)를 찾는 문화 강국이 됐다. 사진은 202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BTS 공연 장면. /연합뉴스
* 유튜브 https://youtu.be/IzKbisjredg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맹에서 문화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1000년 문맹(文盲)에서 해방됐다. 금속활자와 훈민정음의 나라 백성이 비로소 글을 깨치고 이를 통해 각성(覺醒)을 했다. 미몽과 주술에서 깨어난 것이다. 각성한 대한민국은 이후 문화 강국이 됐다. 한국을 알기 위해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글을 공부하는 시대가 왔다. 문화 강국 대한민국 시대다. 그 시대가 오기까지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근대 한국인 서재필과 윤치호, 미국인 호머 헐버트 그리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다.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며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위키피디아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며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위키피디아
첫 신문을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
1882년 음력 11월 27일 오후 2시 넉 달 전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 박영효가 제물포로 귀국했다. 동행한 일본인이 일곱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박영효, ‘사화기략’, 1882년 11월 27일) 한 달 뒤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한성판윤 박영효가 한 첫 번째 작업은 박문국(博文局) 설립이었다. 박문국은 납활자 인쇄기를 이용한 출판 기관이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 설립을 책임질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화파와 교류하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제자였다.
1883년 음력 7월 15일 조선 정부 내에 박문국이 설립됐다. 그해 10월 1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다.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공식적인 첫 번째 근대 신문이다. 박문국 사무실은 저동(苧洞)에 있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사는 서울 집이다.(경성부, 국역 ‘경성부사1′(1934), 서울역사편찬원, 2012, p538) 인쇄기도 이 집에 있었다. 조선 첫 신문은 그렇게 일본인 집에서, 일본인 손으로 발행됐다.
우편으로 신문을 받아본 후쿠자와가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의 가나문자(한글)로 쉬운 이학(理學), 의학의 도리를 알리면 좋다. 아무튼 빨리 한글을 쓰게 되기 바란다.’(1883년 12월 15일 후쿠자와의 편지. 박천홍, ‘활자와 근대’, 너머북스, 2018, p262, 재인용) 답장을 받은 이노우에는 개화파 지식인 강위(姜瑋)를 개인 교사로 모시고 언문을 연구했다. 그 결과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1886년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순한문과 순한글도 병기됐다. 그 이노우에가 1885년 박문국을 관리하던 김윤식에게 편지를 썼다. ‘혼용체를 써서 오늘날 국가 영원의 토대를 세우고 세종대왕이 정음을 제정한 성의를 받들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노우에 가쿠고로, ‘후쿠자와 선생의 조선경영과 현대조선 문화에 관하여’. 박천홍, 앞 책, p340)
1886년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서 출간된 서적들은 모두 국한문혼용체였다. 1894년 국한문혼용체는 갑오개혁정부에 의해 왕명을 비롯한 공문서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
한문을 버리고 한글 사용을 주장한 미국인 헐버트.
한문을 버리고 한글 사용을 주장한 미국인 헐버트.
문맹률 90%의 나라와 헐버트
외국 지식인이 마주친 조선은 문맹국이었다. 조선이 문맹인 원인은 달리 있지 않았다. 원인은 문자였다. 세종이 창제한 과학적이고 쉬운 문자는 외면받고, 지식인은 고급 지식을 한문으로 습득하고 유통했다. 훈민정음은 세상을 변혁시킬 그 어떤 고급 정보도 백성에게 유통하지 못했다. 19세기 조선은 ‘교묘함이 서양 알파벳을 능가하는 문자의 편리함을 모르는’ 문맹률 90%짜리 나라로 변해 있었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 최혜주 역, 김영사, 2008, p19)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비난과 조롱에 그치지 않았다. 입국 5년 만에 헐버트는 순한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했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도리어 언문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이에 특별히 언문으로 세계 각국 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려 한다.’(헐버트, ‘사민필지’ 서문, 1891) 그리고 그가 책임을 맡은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이렇게 썼다. ‘신분제와 특권의식을 고착시키고 게으름을 낳게 하는 중국 글자를 내던지고 이 새로운 표음문자를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 데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헐버트, ‘조선 문자(Korean Alphabet),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6년 6월호) 헐버트는 이 잡지에 수시로 조선어 문자와 문법에 대해 논문을 실으며 한글 보급과 이를 통한 대중의 각성을 유도했다. 이 미국인 한글학자는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신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근대 한글의 보급, 윤치호와 서재필
1896년 1월 바로 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T.H.Y’라는 필자가 영문으로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쉼표 혹은 띄어쓰기(Commas or Spacing)’.
‘평균적인 조선인은 소설 ‘삼국지’를 보다가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을 타고’라고 읽는 실수를 한다. 이는 쉼표와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들을 분리시키면 없앨 수 있다. 선교사들이 쓴 책은 필연적으로 단어와 숙어와 문장이 낯설다. 아무 띄우기 없이 조선어로 번역하면 조선인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시험 삼아 해보라.’
이 필자 ‘T.H.Y’ 본명은 ‘Yun Tchi-Ho’, 당시 조선 외부 협판(외교부 차관) 윤치호(尹致昊)다. 미국 에머리대 졸업생인 윤치호는 영문법에서 띄어쓰기를 차용해 한글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서재필에 앞서 띄어쓰기를 제안한 윤치호.
서재필에 앞서 띄어쓰기를 제안한 윤치호.
그리고 그해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만든 신문이다. 서재필은 신문 체제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순한글’과 ‘띄어쓰기’다. ‘모두 언문으로 쓰는 것은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한문으로 보낸 투고는 당초에 상관 아니함(취급하지 않음)’. 한문으로 쓴 글은 아예 기고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한글만을’ ‘떼어쓰는(띄어쓰는)’ 목적은 단순명쾌했다.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기리라’.(이상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 새로운 각성과 학문, 곧 근대를 뜻한다. 한글 근대화에 간여한 이 선각자들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은 설명될 수 없다.
‘대중의 각성을 위해’ 순한글 띄어쓰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대중의 각성을 위해’ 순한글 띄어쓰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까막눈으로 맞은 해방
식민시대도 개선은 없었다. 1930년 한글 문맹률은 84.6%였고, 일본어와 한글을 모두 못 쓰는 문맹률은 77.7%였다.(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1930). 노영택, ‘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 국사관논총 51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 조사 결과 조선 문맹률은 78%였다. 건국을 두고 우익과 좌익이 갈려 있는 사이, 군정은 각 시군에 국문강습소를 설치하고 문맹 퇴치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 미군 철수 때 문맹률은 41%까지 낮아졌다.(1959년 3월 31일 ‘조선일보’)
이미 1946년 2월 실질적 단독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북한은 “지금 싸움은 선전적 말의 싸움과 글의 싸움”(김일성, 1946년 5월 19일)이라며 맹렬하게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이주환, ‘1945~1949년 북한에서의 문맹퇴치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북한은 1949년 3월 문맹 퇴치 완수를 선언했다.(교육부, ‘한국 성인 문해 교육의 발전과정과 성과’, 2012, p30) 그리고 이듬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
1950년대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 기사. ‘작대기 선거는 수치’(1950년 5월 10일), ‘이번엔 기어이 (문맹 퇴치) 성공을’(1954년 3월 21일), ‘그래도 남은 4%‘(1959년 3월 31일)./조선일보db
1950년대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 기사. ‘작대기 선거는 수치’(1950년 5월 10일), ‘이번엔 기어이 (문맹 퇴치) 성공을’(1954년 3월 21일), ‘그래도 남은 4%‘(1959년 3월 31일)./조선일보db
문맹 퇴치에서 블랙핑크까지, 대서사극
전쟁 와중인 1953년 1월 1일 대한민국 문교부가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을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민주 국가의 건전한 진전을 기함에는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여하가 절대적인 근본 요소이다.’(문교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부의사항 ‘문맹국민완전퇴치계획’, 국가기록원)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그해 2월 전국에 국문강습소가 설치되고 한글교재 84만부가 배포됐다. 5차례 실시된 퇴치계획 동안 문교부, 내무부, 국방부, 농림부, 보건복지부, 공보실부터 통·반장, 다시 말해서 전(全) 대한민국 정부가 총출동해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58년 말, 대한민국은 공식 문맹률 4.1%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교육부, 앞 책, p36) 이름 대신 작대기 개수로 선거 입후보자를 분별했던 까막눈 조선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어찌됐는가. 글을 통해 신문물을 습득한 대한민국인들이 각성을 하더니 500년 동안 묶여 있던 문화 창조력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스로 즐기던 그 문화가 흘러넘쳐 BTS, 블랙핑크로 상징되는 한류(韓流)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틈에 2692명이었던 1997년 제1회 한국어능력시험 지원자는 2022년 35만6665명으로 늘었다.(교육부, 국제교육원 통계) 문득 보니 500년 문자 감옥을 목격한 숱한 선각자들이 내건 목표, ‘대중의 각성과 신문물 습득’이 예정했던 기적 아닌가.
1948년 첫 총선은 ‘작대기’ 선거로 치러졌다. 입후보자 이름을 못 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국사편찬위
1948년 첫 총선은 ‘작대기’ 선거로 치러졌다. 입후보자 이름을 못 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국사편찬위
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
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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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2023.05.24 06:07:16
문맹율이 78%, 즉,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22%이던 해방후에, 새로 나라를 만들려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을 써야 하는데, 일제시대 일본식 교육을 받고 여기저기 취직했던 사람들을 소위 친일파로 몰아서 등용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까? 북쪽 거지놈들도 일제시대 관료출신을 대부분 그대로 써 놓고도 마치 놈들은 친일청산을 하고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모인 정부를 수립한 것처럼 거짓말로 선동하는 놈들에게 속고 사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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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2023.05.24 10:02:55
백곰님! 문맹율이 4%로 낮아지고 신문과 호외가 자유롭게 뿌려진 것은 어느 정권때일까요? 자유를 갈망하는 중산층이 두꺼워진 것은 어느 정권때일까요?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못하는 좌파들이 불쌍하고 한심할뿐입니다.
백곰
2023.05.24 09:43:08
1958년 문맹률이 4% 대 까지 낮아지니 바로 나타난 현상이 독재 타도 였습니다. 1960년 4.19 혁명은 국민들이 한글을 깨우친 덕분에 당시 신문이나 호외가 전국으로 뿌려지면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무시무시한 철권독재가 계속 되었으나 이기간 산업화와 경제성장까지 되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지자 아이로니컬 하게도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화 인권을 위한 국민들의 요구가 분출되어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물구비
2023.05.24 08:26:46
그걸로 끝나면 괜찮은데 문아무개가 아들 문재인을 평생 사상교육을 시킨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46년도에 김일성이가 싫어서 월남하여 전투경찰에 투신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을 직접 겪으면서 공산주의자의 무서움을 알고 자식들에게 알게 모르게 반공교육을 시켰는데 보나 마나 문아무개는 아들에게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살던 김일성 치하의 추억을 문재인이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였고 알려진 변변한 직업 없는 문아무개는 아들을 공산주의자 내기 종북사상가로 만들었다. 당시 나이로 보아서 문아무개 본처는 이북에 있을거고 거기에 두고 온 자식과 친척들이 대부분일텐데 항상 이북을 동경한 문아무개 밑에서 자란 문재인은 북한과 대치한 남한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다른 종북주의자나 좌향 진보 세력과 태생이 다르다. 이제 윤석열이 대통령 되어서 나라가 바로 잡혀 나가는 과정에 많은 진통과 이런 세력들을 축출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우파 보수 세력은 마음을 놓지 말고 끝까지 응원 합시다
KJ
2023.05.24 06:10:34
북쪽거지들이 일본 관료를 그대로 쓴 대표적인 예가 문아무개라고 함경도에서 농업계장하던 사람인데, 김일성이 밑에서 같은 일을 했다고… 그 사람 아들이 어디서 대통령을 해 먹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수영필라
2023.05.24 06:34:59
이런기사는 정말 최고 수준의 기사이다. 모르던 사실을 많이 깨우쳐주네.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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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山遠
2023.05.24 08:13:32
20세기가 열리면서 120여년간 짧게는 해방이후 70여년간 한국이 이룩한 이 기적 같은 진보가 앞으로 100년 200년 이어져야 할텐데 많은 이들의 걱정처럼 지금이 한국의 최융성기이고 현상유지 내지는 점진적 하향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우려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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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ou
2023.05.24 08:20:00
세계문명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제 1요인은 이외로 상하수도의 보급에 있다는 다수설이 있듯 우리 한국의 경제문화발전은 한글이 대세화되면서라고 감히 생각한다. 물류의 흐름은 도로 등 교통망이 좌우하듯 인간교류의 교통망은 통신이전에 언어다. 조선말기부터 갑질의 대명사 조선양빤들의 한자독식, 한자권력화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레 쉽고 다양성이 풍부한 한글이 국민들 의사를 자유롭게 교류시키면서 경제문화발전의 주원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글은 대한민국을 융성시키는데 일등공신으로 역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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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다
2023.05.24 07:58:03
1930년대 문맹율 80%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에 얼마나 큰 폐해를 주었는 지를 잘 말해준다.당시 일본인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은 당연시 되던 시기였지만 한국 농촌 지역에선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동보다 다니지 못하는 아동들이 훨씬 많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엘리트였다.그러니 일본이 항공기,탱크,항공모함을 만들 때 한국인들은 자전거도 만들지 못한 거다.아직 한국인이 일본 식민지 지배하라면 현대자동차,삼성전자는 탄생 조차 못했을 거고 한국인이 누리호를 발사하고 전투기,탱크,잠수함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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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5.24 04:46:59
한글보급과 문화융성의 기초를 일본놈이나 친일파 윤치호가 했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없다. 서재필의 제자, 주시경은 왜 빼먹었는가? 또한 많은 조선지식인들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방직후 문맹률은 78%다. 이유는 단한가지다.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의해, 또한 일선동조, 내선일체로 표현되는 일제영구점령의 계획하에 한글을 사용금지하고 일본어만 사용케한 것이 원인이다. 결국 일제의 식민지배는 경제적 수탈을 넘어 문화지체까지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일제를 용서할 수없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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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5.24 08:00:11
일본놈이 국한문혼용체를 써서 독립신문이 순한글신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서재필의 업적이며 이에 감동한 주시경에 국어연구에 헌신한 것이다. 일본놈들이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 조선어도 못쓰게하고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면 체벌했는데 일본놈이 우리 근대화와 문화에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일본놈을 옹호해?
이재명2
2023.05.24 05:54:23
좋은 글에 개 똥같은 댓글이군요.. 동의 할 수 없으면 한글 보급의 기초를 누가 했는지 공부라도 해오든가 해야지요.
사실과자유
2023.05.24 08:38:13
근대한국어 만드는데 일본 개화파들의 영향이 이렇게 컸었다니. 근대 한자단어들은 거의 다 일본에서 온 것이다. 일본 알레르기 일으키는 수구OO들이 숨기고 싶은 역사..한글의 변천에서 일본산 앙꼬를 빼니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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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이
2023.05.24 09:01:50
이게 바로 조선일보를 열독하는 이유이다! ㅡ 박종인 선임기자, 선우정 논설위원,김윤덕 선임기자 등,..조선의 달필.직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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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바른말만하는王꼰대
2023.05.24 09:59:50
내가 지역봉사단체에서 도움을 주는 할배.할멈들. 글자도 모르고 숫자도 모르면서 짐짓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랑질을 해댄다. 전화기는 최신형 200만원짜리를 덜커덕 구매를 하는데 그 간단한 연락처.전화번호도 저장을 못하니 자식들.나에게 부탁을 해댄다. 검색을 하고 자기가 원하는 동영상.내용을 읽기는커녕 찾지도 못한다. 그래놓고서는 지하철.사람많은데서 아무거나 만지작 거려서 동영상을 띄워서 마치 자기가 조작을 하는 것처럼 수작을 부린다. 답답해서 3세대 노인.국민학생용 전화기를 사용하라고 한 마디를 하면 삐져가지고 쳐다도 안 본다. 한 달에 전화값으로만 10만원을 지불하면서 하는 것은 전화기 자랑질뿐이다. 식당에 가서는 턱~하니 식탁에 소리나게 내려놓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단지 장식물.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할배.할범들이 아직도 진짜로 많다. 동사무소.은행에는 문맹이 들통이 나니 벌벌 떨면서 가지를 못한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해준다. 말은 정확하게 잘 하고 의사표시는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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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독
2023.05.24 09:06:14
일본은 막부시대가 끝나는 1868년경, 이미 70%의 국민이 문맹을 벗어나 있었다. 이때 이미 서양식 와인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에도 막부 시대의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아마 지금도 안 가르칠거다.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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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kup
2023.05.24 08:48:52
이 기사를 폄회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아주 심한 대립속에 있다. 문화 강국이 되려면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사화에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편가르기가 있는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이라고 할수 있나? 문화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아주 인위적인 도구이다. 자연과 달리.. 오늘날을 보면 오히려 자연이 더욱더 문화적인 것 같다. 역설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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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리
2023.05.24 08:20:28
좋은 기사입니다. 근데 헐버트가 비난 조롱했다는것은 좀 수정되어야할 어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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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깡
2023.05.24 09:58:36
한국어의 중추는 한자에서 비롯된거야 수천년동안 발전되고 축적된 문자를 하루아침에 버린다는것도 넌센스야.. 한글을 읽을줄 안다 라는것으로 문맹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것도 한글사용이 주는 사고의 단순함에서 비롯되는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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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leJoe
2023.05.24 09:39:07
이 글을 읽어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수 있다. 이때 이미 일본은 문맹율이 거의 미미한 수준인데 우리는 84.6%?? 일본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뭘 해 줬다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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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죽
2023.05.24 09:35:59
문화의 힘을 강조한 김구 선생님이 저승에서 기뼈 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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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아빠
2023.05.24 09:20:29
와 서재필 박사님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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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海
2023.05.24 08:24:30
언문을 멸시.. 그것은 "사대사상"에 맹종하고 "한자"를 우선시한 양반문화에서만 했던 말이고 사실은 왕실과 사대부 여성과 아이들 모두 한글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세자가 이모에게 보내는 편지, 사대부 부부의 편지.. 이게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그렇지.. 한글은 세종 이후.. 널리 펴졌으나.. 기록이 없을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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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자유
2023.05.24 08:39:33
그 당시 누가 한글 표준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교육을 시켰나요? 역사에 카더라~ 그만 합시다.
Egg
2023.05.24 08:08:57
문맹에서 벗어나 미몽과 주술에서 깨어났다고? 아닌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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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상등병
2023.05.24 07:02:38
너무 똑똑해서 탈이지, 어설픈 O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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