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풍 ②
창창창......!
눈보라가 휘날리는 강변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병장기 소리가 들
렸다. 인영이 어지러이 교차하면서 호통과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흐흐......! 가소로운 일이다. 옥환맹의 조무래기들이 감히 본교
의 동정지단(洞庭之壇)에 도전을 하다니, 쳐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음침한 음성과 함께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간간이 분노에 찬 음성이 들리곤 했다.
"웃기지 마라! 현무단(玄武壇)의 형제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
는다. 오늘 밤만 지나면 네놈들은 빙하(氷河) 속에 그 더러운 몸
뚱이를 묻게 될 것이다!"
"흐흐! 그래도 주둥아리만은 살아 있구나, 아예 그 주둥이마저 뭉
개주마!"
눈보라 속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어둠과 눈
보라로 인해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으악!"
퍼펑!
다만 처절한 비명과 장풍소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상황이
살벌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한편, 유천기는 근처의 나무 위에 우뚝 올라서 있었다. 그는 전권
을 살펴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동정호에 천사교의 사대지단(四大之壇) 중 하나인 동정지단이 있
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현무단이라면 옥환맹의 사
단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싸움을 시작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옥환맹의 현무단은 청룡단, 백호단, 주작단에 비해 그 동안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현무단에 소속된 고수들이
대부분 명문대파가 아닌 낭인무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
문이었다.
유천기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진남풍이 바로 현무단주가 아닐까?'
이때 음침한 웃음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크하하하핫......! 그래도 큰소리냐? 오냐, 아주 박살을 내주마!"
유천기는 현무단의 인물들이 궁지에 몰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는 즉시 신형을 날렸다.
장내에는 수십 명이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수십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한 떼의 인물들이 여섯 명의 인물을 중심에 두고 포위공격하고 있
었다. 그나마도 그들은 중상(重傷)을 입은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유천기는 상황을 살펴본 후 진 바깥 쪽에 서서 웃고 있는 흑의괴
인을 향해 날아갔다.
'먼저 수괴를 제거하는 쪽이 낫겠다.'
흑의괴인에게 쏘아가는 동안 그는 손을 뻗어 허공섭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검 한 자루를 취했다.
흑의괴인은 문득 날카로운 검세가 목을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느
끼며 대경했다.
"누구냐?"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막 목구멍으로 뻗어온 한 자루의 검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목구멍이 화끈한 것을 느꼈다.
"크윽......!"
그는 자신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
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벌렁 넘어갔다.
유천기는 일검에 그를 죽인 후 다시 진세로 뛰어 들었다. 그는 처
음부터 손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상대가 천사교의 인물이라면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유령처럼 진세의 중심으로 파고 들며 검을 좌우로 그었다.
"아악! 으악!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천사교의 졸개들은 무엇
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고꾸라졌다. 그들은 다만 검광이 스
쳐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몸이 양단나고 있었다.
"적이다!"
"뒤를 조심하라!"
여기저기서 공포에 찬 음성이 들렸다. 진세가 흐트러지며 겁을 먹
은 듯 인영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또 누군가가 외쳤다.
"억! 신향주(申香主)께서 죽었다아......"
그러나 그 자도 역시 정수리가 화끈한 순간 몸이 두 쪽 나며 쓰러
지고 말았다. 눈보라 속에서 그들은 상대의 모습조차 볼 수가 없
었다.
삽시에 천사교의 졸개들은 반 이상이 황천으로 직행해 버렸다.
한편, 포위되어 있던 현무단의 육 인은 원군이 온 것을 느끼고 용
기백배하여 저항했다. 그렇게 되자 전세는 금세 역전되었다.
천사교의 졸개들은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지면서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싸움은 일각도 못되어 끝났다. 유천기는 피가 뚝뚝 흐르는 장검을
거두며 물었다.
"귀하들은 옥환맹의 친구들이오?"
살아있는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세 명은 피를 과도하게 흘려 이
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 유삼자락을 날리고
있는 유천기를 바라보다가 얼른 포권했다.
"대협께서는......?"
유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상처가 중하니 말은 나중에 하시오."
그러나 중년인이 자신의 잘린 어깨를 손으로 거머쥐면서 다급히
말했다.
"아니올시다. 대협께서 기왕에 도와주실 의향이 있다면 지금 바로
서쪽으로 가주시오. 부탁이오......!"
유천기는 그의 말이 다급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그런데 현무단 전원이 출동한 것이오? 그렇다면 어
째서......"
중년인은 다급하게 말했다.
"첩자(諜者)가 있었소이다. 본단의 행적이 사전에 놈들에게 유출
된 것이오. 어서......"
그는 더 말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은 두 사람이 그를 부축했으
나 그들도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유천기는 그들이
자신의 안위보다도 현무단을 더 염려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
다.
"염려 마시오. 세 분은 몸을 보중하기 바라오."
음성이 끝났을 때 그는 이미 십여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신법에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유천기는 서쪽으로 달려가는 동안 많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체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었으나 현무단을 표시하
는 복장이 대부분이었다.
현무단 소속의 인물들은 소매 끝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
다.
유천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첩자가 있었다면 이번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할 게 뻔하다.'
그는 신형을 더욱 빨리 날렸다. 어풍와선비를 발휘하자 그의 몸은
눈보라를 타고 둥실 떠올랐다.
약 두 마장 쯤 갔을까? 문득 그는 벼락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연이어 들렸으며 희미하게 그속에서 처참한 비명소리도 들
렸다. 그는 더욱 다급한 심정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윽고 그는 한 무리의 인물들이 있는 곳에 다달았다. 그는 한눈
에 천사교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둥근 원진
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에는 현무단
의 고수들이 수십 명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유천기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리는 이십여 장이나
되었다.
위이이이잉!
파공성을 울리며 검이 날아갔다. 유천기는 어검술(馭劍術)을 시전
한 것이었다.
검은 허공을 선회하면서 한꺼번에 열한 명의 천사교 졸개들의 목
을 날려 버렸다.
"크아악! 으악!"
느닷없는 급습에 천사교의 원진이 잠시 주춤했다. 이때 누군가의
호통이 울렸다.
"벽력신통(霹靂神筒)을 써라!"
순간 유천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쾅! 콰콰쾅......!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사방에서 번쩍번쩍
일어났다.
"크으윽!"
유천기는 비명을 발하며 가공한 폭발력(爆發力)에 의해 몸이 가랑
잎처럼 떠오른 채 날아갔다.
허공으로 퉁겨 올라간 그의 몸은 폭풍에 휩쓸린 듯이 빙글빙글 회
전했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는 옷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전신
피부가 갈라터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록 폭음이 울린 순간 본능적으로 초연
강기(超然 氣)를 끌어 올렸지만 무섭게 폭산된 화약(火藥) 세례
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천기는 십여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전신이 온통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전신이 선혈로 목욕을 한 듯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누운 채 천사교의 졸개들을 바라보았다. 그 자들은
하나같이 손에 원통형의 철통을 쥐고 있었다.
'화기(火器)다!'
유천기는 혼미한 중에도 과거 철금산장에서 천사교가 유황을 채굴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는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사교
는 막대한 양의 유황을 생산하여 마침내 무서운 병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유천기는 내력을 끌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혼미해졌던 의식이 다
소 맑아졌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초연강기 덕분에 내부까지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천사교의 졸개
들은 그가 죽었으리라 생각했는지 그를 주의해 보지 않았다.
"현무단 팔기(八旗) 산하의 놈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가자, 다음
목표는 현무단주가 이끄는 주력대다."
누군가의 득의에 찬 명령과 함께 수십 명의 마졸들이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안 돼지, 너희들은 이 자리에 생명을 놓고 가야 한다.'
유천기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보
퉁이를 끌렀다. 그 속에서 칠현금, 즉 묵아가 나타났다.
그는 묵아를 무릎에 놓은 채 공력을 가다듬었다.
그는 절대삼음(絶對三音) 가운데 제 이음(二音)인 단장비백(斷腸
飛魄)을 전개했다.
딩.......
눈보라가 광풍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은은한 금음이 울렸다. 막 자
리를 뜨던 천사교의 졸개들은 금음을 들었다.
"......!"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디딩.......
두번째 금음이 울렸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에는 비감의 표정이 어
렸다. 세번째의 금음이 딩! 하고 울렸을 때 그들은 소리없이 심맥
이 끊어지면 털썩털썩 나무토막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가공할 일이었다. 수십 명의 천사교 인물들은 전시에 상처 하나
없이 심맥이 끊긴 채 황천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휘유유유유융......!
세찬 눈보라가 불었다. 눈발이 강변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시신들
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선혈도, 시신도 백설로 완전히 뒤
덮히고 말았다.
③
"우우우우......!"
한 가닥 장소가 광풍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것은 유천기가 두번째로 펼친 음공(音功)이었다. 과거 철금 산
장에서 처음 시전한 이후 그는 음공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심이 무너졌다. 그는 현무단이 천사교 동정지단에 의
해 처참하게 당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자비심(慈悲心)을 가질 필
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현무단은 오래 전부터 천사교의 동정지단을 궤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정호반에 있는 앵무주(鸚鵡洲)의 지단을
공격한 것이었다.
현무단은 도합 팔기(八旗)의 고수들을 총동원하였으며 이번 일전
에 생사를 걸었다. 그러나 천사교는 그 계획을 미리 알고 요로를
봉쇄하여 오히려 역습을 가한 것이었다.
결국 앵무주를 공격하려던 현무단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것도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게다가 천사교
가 비밀리에 제조한 벽력신통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
었다.
유천기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신형을 날리며 천사교의 인물
들이 눈에 보일 때마다 살인음공(殺人音功)를 펼쳤다.
때로는 한꺼번에 백여 명에 가까운 마졸들이 거꾸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절대삼음을 펼치려면 공력
고모가 극심했다. 더구나 유천기는 연속해서 펄쳤으므로 선혈을
여섯 번이나 토해냈다.
그에 따라 의식마저 가물거렸다. 만일 더 이상 무리하게 음공을
펼친다면 진기가 고갈되어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으음......!"
유천기는 신음을 발하며 얼어붙은 강가에서 비틀거렸다. 그는 이
십여 명의 천사교도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벽
력신통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놈이 지쳤다! 쳐라!"
천사교도들은 일제히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십여 가지의 병기
가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왔다. 평소 같으면 안중에도 두지 않을
그였으나 그는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만유산보를 펼쳤으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크윽!"
그는 전신에 세 자루의 칼을 맞고 비틀거렸다.
그는 포위망이 좁혀드는 것을 바라보며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남
은 진기를 모두 끌어모은다면 한판 승부를 벌일 수도 있었다. 그
러나 그렇게 되면 그도 치명적인 중상을 당할 지도 몰랐다.
"흐흐흐!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주마!"
전면의 애꾸눈 사나이가 철삭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이때였다. 애꾸눈 사나이가 갑자기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동작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으악! 캐액!"
그 뿐 아니라 포위했던 자들이 비명을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
가? 유천기는 의아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
의 등과 목덜미에는 강전(强箭)이 깊숙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사방으로부터 궁노(弓弩)가 쏘아져 온 것이었다. 천사교도들은 예
상못한 궁노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멈춰라!"
낭랑하고 호방한 외침이 들렸다. 유천기는 그 음성의 주인을 떠올
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 위로부터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들은 소매에 검은 띠를 두른 현무단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선두에 회의청년이 앞장 서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진남풍이었
다.
진남풍도 악전고투를 벌인 듯 온몸이 피투성이였으나 여전히 늠름
함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유천기에게 가까이 오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은......?"
유천기는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운기가 필요
했던 것이었다.
그가 운공조식에 들어가자 진남풍은 경이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
보며 손짓했다.
"호법(護法)을 서라! 이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밤 현무단은 강호에
서 영원히 사라졌을 뻔 했다."
그 말에 오십여 명의 현무단 무사들은 겹겹이 유천기를 에워싸고
삼엄한 경비를 서기 시작했다.
진남풍은 운공삼매에 들어간 유천기를 바라보며 넋을 잃은 표정이
었다. 그는 유천기의 무릎 위에 놓인 칠현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유공자가 바로 마금(魔琴)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영웅대회에서
죽은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분명한 것은 오늘밤의 탄금(彈琴)과
소성(嘯聲)이야말로 진정한 마금의 음공(音功)이라는 것이다.'
진남풍은 회의에 찬 눈으로 유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속속 현무단의 무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삼백 명
정도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악전고투한 듯 행색이 엉망이었다. 팔다리가 끊
긴 자, 전신이 피로 목욕을 한 듯한 자, 복부를 끌어안고 있는 자
등, 거의 모두 중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비록 엄청
난 희생을 치뤘으나 승리를 거뒀다는 자족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남풍이 입을 열어 물었다.
"상황은?"
누군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보고했다.
"본단의 형제들은 비록 반수 이상이나 당하긴 했지만 천사교 동정
지단의 마도들을 대부분 섬멸했습니다. 남은 것은 앵무주에 남아
있는 잔당을 처리하는 것 뿐입니다."
진남풍은 한숨을 쉬었다.
"놈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분 때문이었다. 만일 놈들
의 천화조(天火組)를 이 분이 제거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벌써
불고기가 되어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현무단은 오늘의 일전을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으나 미
처 벽력신통이란 무서운 화기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않았었다.
그로인해 팔기의 공격대가 벽력신통 앞에서 무수히 희생되지 않았
던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이때 유천기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안색은 창백하였으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형이 바로 현무단의 단주 일진풍(一陣風)이었소?"
진남풍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불초가 바로 일진풍이외다. 유공자께서는 혹시 마금이 아니시오?"
유천기는 피식 웃었다.
"그렇소. 사람들이 한때 이 사람을 그렇게 부른 적이 있소."
"그렇다면 영웅대회에서 죽은 마금은 또 누구란 말이오?"
"당시 개방의 한 분 의인이 불초를 대신하여 변장하고 있었소."
"아......."
진남풍은 탄성을 발했다.
유천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력이 이미 육 성 가량 회복되어
있었다. 놀랍도록 빠른 회복이었다.
이때 진남풍은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수하들을 통솔
하는 그의 모습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현무단의 고수들은 질서정연하게 대를 나누더니 어둠 속으
로 속속 사라져 갔다. 잠시 후 남아있는 자는 이십여 명에 불과했
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주변을 엄밀히 경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유천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진풍이 현무단의 단주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구나.
무공이야 어떻든 타고난 지도력과 치밀한 두뇌,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굴종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다. 과연 형님
의 말대로 개방의 차기 방주감이로구나.'
이때 진남풍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유천기는 깜짝 놀라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나 진남풍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본단의 형제들을 구해주신 은혜는 이 일진풍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은혜이외다. 향후 무슨 일이라도 은형께서 요구하신다면 끓
는 물, 기름 가마솥이라도 서슴없이 들어갈 것이오."
유천기는 문득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진형은 날 고작 이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단 말이오? 그렇다면 정
말 실망했소이다."
진남풍은 움찔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후후, 내가 공을 바라는 그런 인물로 보였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유천기는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진남풍은 한 가닥 무형의 기운이
몸을 받들어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힘을 주어 계속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둥실 몸이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고 만 것이었다.
그는 경악을 금치 했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런 공력을 발휘하다니, 대체 이분의 무공
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 동안 소생은 일진풍 형을 찾고 있었소이다."
유천기의 말에 진남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불초를......?"
유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본래 나는 개방의 방주이신 주형님과는 결의형제요. 형님의 당부
를 받고 진형을 만나고자 하였소. 그런데 정작 눈 앞에 두고도 알
아보지 못했으니 정말 우스운 일이구려."
"아, 주방주와 결의형제였다니."
진남풍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그는 한동안 격동을 금치 못하다
가 마침내 유천기의 두 손을 덥썩 마주 잡았다. 그 손에서 유천기
는 뜨거운 사나이의 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실종된 병서생 주무현이 떠올라 가슴이 울적해졌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앵무주로 갈 생각이오? 진형?"
진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동정지단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입니
다."
유천기는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의 천사교도들은 내가 보기에 진정한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소. 동정지단에 인물이 그렇게 없을 리는 만무요. 그렇다
면 앵무주에 진정한 고수들이 남아있을 지도 모르오."
진남풍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앵무주에는 천사교의 절정고수인 적발신군(赤髮神君)을 비롯하여
동정육마(洞庭六魔)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대하기 벅찬 자들입
니다. 하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유천기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으나 진남풍이 서두르는 바람에 더
묻지 않았다.
"배가 준비되어 있으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한 척의
배가 강안에 닿고 있었다. 앵무주를 공격할 준비가 완비된 것 같
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