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무주의 마을 찾아가기
0), 중가 마을에 가다
무주,
무주는 무주다.
<마을극장>의 영화 "이장"을 본 후, 일주일 만에 중가 마을을 다시 찾았다. 영화를 보던 날, 마을 사람들이 내어온 수박과 과자를 맛있게 다 받아먹고서 슬며시 마을을 내려간 일이 마음에 걸렸던 까닭에, 삼가리 마을 탐방을 시작하고 두 번째 탐방이 중가 마을인 셈이었다. <마을영화>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 누웠을 때 갑자기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이 생각났었다.
"혼불"은 1980년에부터 시작해 1996년까지 17년 만에 완간된 원고지 1만 2천정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혼불"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의 매안 이 씨 문중의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 3대와 이 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저자 최명희 선생은 완간 4개월을 앞두고 난소암에 걸렸다. 자신의 병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필에만 매달린 끝에 1996년 12월 소설을 완간했다. 그 2년 뒤인 1998년 12월에 소천했다.
남원시 사매면 노봉 마을에 자리한 혼불문학관은 작가가 <꽃심을 지닌 땅>아라고 했던 "혼불"의 배경지였다. 한옥 형식의 건축물과 넓은 정원이 있는 문학관을 찾았을 때, 입구의 물레방아는 엣 추억을 떠올리듯 맞아 주었었다. 청호 저수지와 주변 산책길도 산책길이었지만, 문학관을 들어서면 마주치는 현판 글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기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 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 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 글이 생각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이 부분을 읊조리다가 다시 마을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djT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중가마을은 약간 높은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언덕 길을 잠시 오르면 언덕 맨 위에 마을회관이 있었다. 마을회관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적하면서 평화로워 보였다. 회관 앞 풍경이 손에 닿을 듯 펼쳐져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밋밋한 풍경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랬다. 마을회관 옆에 지어진 정자와 정갈한 마룻바닥도 가슴 저미도록 좋았다.
나는 정자의 마루에 앉아 땀을 식혔다. 누군가 매일 걸레로 닦아놓는 듯했다. 한켠에 놓인 걸레가 축축해 보였다. 마을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자에 한참 동안 앉아서 누군가 나와주기를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오래 앉아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을 아래 넓게 펼쳐진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허탕을 친다 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주 살기는 자동차 소리와 각종 소음이 귀를 때리는 도시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했다. 하가마을 정자 앞의 의자에 앉아 잇을때나 중가마을 정자에 홀로 앉아 멍을 때리는 일이 적성에 맞는지도 몰랐다. 시멘트 건물과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서울을 생각하면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 온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문득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아직 이 마을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철없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가마을 탐방에 이어 중가마을에서도 인내를 가져야 마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을 사람이 나타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릴 수 있었던 건 마을회관 정자에 앉아서 보는 그림 같은 풍경 때문에 가능했는지 몰랐다. 매일매일 판에 박힌 푸른 벌판과 푸른 산이 지루할지 모르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마을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도와 외지인이지만 괜찮다는, 그러니까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행위였다. 세상에 하도 흉흉한 일이 많다 보니 자칫 외지인에게 적대적이고 거리를 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보려는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중가마을에 몇 번 오르내리면서 본 특이한 집이 있었다. 독특하면서 멋있는 나무 때문이었다. 집의 대문 대신 만든 아치형 나무는 독특하면서 아름다웠다. 바로 그 집, 그 집에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다. 이번에도 다짜고짜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낯선 외지인의 방문에 조금은 당황해하는 눈빛이었지만, 서창 마을의 농어촌 일자리 센터 <마을을 잇는 사람들>에서 나왔다고 소개를 하자 바로 경계심을 푸는 것 같았다.
"대문이 아주 멋있습니다." 하면서 슬슬 집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을 따라 남편의 고향인 이곳 중가마을로 아예 내려왔다는 손미향 여사님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집안 깊숙이 밀고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밖에서 잘 보이지 않던 집의 내부가 훤히 보였다. 여기저기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정갈하게 꾸민 꽃밭이며, 작은 연못이며, 마당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꽃밭과 잘 어울렸다. 마당은 모두 예사롭지 않은 주인의 솜씨의 경연장이었다. 아담하고 작은 정자까지 있었다. 정자의 마루는 잠시 누워만 있어도 피로가 말끔히 풀릴 것 같았다. 정자 옆에 장독대는 크고 작은 항아리가 올망쫄망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항아리들을 보는 순간 나는 또다시 어릴 적 시간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살던 옛집엔 뒤안에 제법 큰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선 할머니와 어머니가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간장독이며, 된장독이며, 고추장독을 매일같이 먼지 하나 없이 닦아 냈었다. 나는 가끔 장독대 옆에서 깨진 사금팔이를 갖고 소꼽놀이를 하며 놀았다. 나를 끔찍이도 아꼈던 할머니가 살아계셨던 때였다. 나에게 그렇게도 살가운 할머니가 어찌해서 어머니에게는 그리 혹독하게 대했는지 나는 묻지 못했다. 그냥 나를 이뻐해 주는 할머니가 좋았을 뿐이었다. 매운 시집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쩌자고 그리도 서글프게 통곡하며 울었는지도 나는 묻지 않았다. 나에게 무한 사랑을 베풀던 할머니와 매운 시집살이를 견딘 어머니가 화해는 했는지도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대했던 할머니 말년의 분위기는 서러에게 악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두 분은 언젠가부터 신기할 정도로 화목하게 지냈다. 미운 정도 정이여서 그랬던 것이라고 추정했을 뿐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손미향 여사님은 집에 혼자 있었다.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밭에서 남편이 일하고 있는데 가보려고 나왔다고 했다. 나는 슬슬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대문이 멋있는데 남편분께서 만드셨나 봅니다"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년 3월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만드신 거라고 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마당 한 켠에 작은 연못으로 눈길을 피했다.
"저 연못도 아버님이 만드셨어요" 손미향 여사님이 말했다.
"아, 아버님이 재주가 많으셨나 봅니다." 네가 물었더니 아버님의 이야기를 줄줄 책을 외우듯이 쏟아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들어 주었다.
≪106세였어요……. 아버님이 동네 최 장수 어른이었습니다. 갑자기 코로나에 걸려서……. 생각지도 않은 코로나가 건강하신 아버님을 데려갔답니다. 장례도 제대로 못 치렀어요……. 바로 화장하라고 해서 바로 화장했어요……. 전북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결국 돌아가셨답니다……. 남편도 코로나로 입원하고 있었어요. 엎친 데 겹친 거였죠……. 106세라도 건강하셨어요. 좀 더 사실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정말 정말 안타까워요……. 지금 생각해도……. "≫
손 여사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이토록 깨끗하고 청정한 농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비극이 예외 없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이 평화로운 마을마저도 비극을 몰고 온 것이었다. 그것도 건강하게 살던 106세의 어른을 데려가다니,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던 마을의 코로나 피해자 가족을 직접 만난 거였다. 손미향 여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장례절차는 철저하게 무시되었어요……. 임종은 지켜보지도 못했고…… 염습 절차나 입관 절차는 모두 생략되었답니다……. ≫
코로나 세상에선 아무런 방해 없이 치르던 장례절차도 치르지 못한 가족들이 부지기수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과 누구라도 마지막으로 나누는 작별 의식은 존중되었어야 했다. 너무 성급하게 장례절차를 생략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묻고 싶었다. 코로나 시데에 정부의 규제와 방역 정책은 실패와 성공이라는 두 얼굴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장례마저도 선 화장 후 장례로 진행된 건 분명 성급한 거였다.
코로나가 휘몰아친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마저도 평범할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한 허망한 죽음 앞에서 오열을 하면서도 고인과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정책이었다. 이별다운 이별을 가로막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노년층의 사망률은 전체 사망자의 90프로를 넘는다고 했다. 노년층이 감염병에 취약하여 직격탄을 맞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을 비켜가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손미향 여사의 시아버님은 중가마을 최고 장수어르신이었다. 마을의 역사가 허망하게 묻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재는 코로나 균의 전염이 장례절차에서 일어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장례절차를 정상화로 돌아서고 있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여사님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가족들이 희생을 감내한 일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까지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 감염을 막는다는 이유로 급조된 장례절차에 대해 전쟁 때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심각한 병으로 입원한 환자는 가족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오늘 내일 하던 환자를 두고도 가족들은 면회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고 생활전선에 매달려야 했던 가족들의 눈물젖은 사연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방역에 촛점을 맞췄다고는 하지만, 부분별, 상황별의 디테일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힘들고 막막하고 급할 때일수록 탁상행정보다 발로 뛰어야 한다. 그것이 코로나시대의 억울한 죽음과 피해를 막는 길이며 코로나 시대 이후 휴유증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작별하는 순간은 단 한 번이다. 이 한 번뿐인 작별은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후회를 가져오기도 한다. 작별의 의식이라도 후회 없이 한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남은 자의 슬픈 의식마저도 막는다면 안 될 일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누구나 겪었을 일은 나에게도 비켜가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다. 내 인생에 지대한 도움을 주며 은혜를 베풀었던 지인의 부음을 들었지만, 고인의 가족들은 규정상 장례식장 조문을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장례식장 언저리에서 배회하다가 무작정 밀고 들어갔었다. 조용히 장례를 치르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조문을 하게 해주었다. 조문을 하고 바로 나오긴 했다. 그 일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유가족에게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닌지 자책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편과 함께 10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 중가마을로 왔다는 손미향 여사님은 이야기하는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연못에 있는 수련이 자꾸만 죽는지 알 수가 없네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면서도 여사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버님만의 비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말은 했지만 조심스러운 말인데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말은 하늘로 흩어져 버린 후였다. 손미향 여사님의 아버님은 향년 106세로 돌아가신 양0섭 어르신이었다. 중가마을의 최고령 장수 어른을 나는 본적도 없지만, 잠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우리는 때로 미리 준비하고 염려한 일이라도 실제로 현실이 되었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은 허망하고 어떤 위로의 말로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삶을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해의 목가적인 시처럼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리라.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손미향 여사님이 앉아 있던 전동 휠체어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타시던 휠체어라고 했다. 한사코 거절하던 커피 한 잔 주겠다면서 앉아 있던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 가더니 냉커피 한 잔을 내왔다. 미리 만들어 놓은 커피 인 듯했다. 달고 시원했다. 일어서지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는 생각과 놀란 가슴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남편 성함은 양래수 씨라고 했다. 현재 73세라고 했다. 중가마을로 내려오기 전에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서 오래 살았으며, 서울 화곡동 전화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고 했다.
"여기 내려오시니 좋죠?" 내가 물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답니다." 여사님의 얼굴이 조금 진정된 듯 보였다.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다 보면 도시 생활이 몸에 배었을 것이었다. 어찌 불편한 것이 없겠는가. 농촌에서 사람이 떠나는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가장 크다지만, 여러 가지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생필품의 자유로운 구입, 의료 혜택과 병원 문턱, 문화생활의 접근 등일 것이었다. 농촌 인구가 감소하면서 소멸된 인프라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문명의 혜택을 뒤로하고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까지라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가마을에서 대문이 가장 아름다운 집 손미향 여사님과 헤어져 마을을 내려오는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나는 마을 아래로 내려와 조금 한적한 곳에 차를 멈추고 비가 내리는 마을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다시 멍을 때려도 좋았다.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쏟이진 소나기에 발이 묶여 있는 것처럼 낭만적인 일도 없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감상하는 일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어느 땐 자연이 주는 풍경도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행운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리라. 한적한 중가마을 어귀에서 만난 비 오는 풍경이 그랬다. 한낮 소나기와 만남이었지만, 까닭 없이 가슴이 먹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