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梧軒公(啓龍) 遺稿[오헌공(계룡) 유고]
휘 계룡(1870~1943)의 자는 운여(雲汝), 호는 오헌(梧軒)이다. 아버지는 춘파(春坡) 휘 관식(瓘植)과 어머니 인천(仁川) 이씨의 아들로 1870년(고종 8 庚午)에 호동에서 출생했다. 오헌 역시 복재․계사공과 같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 여러 스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1948년(戊子)에 78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많은 유작을 남겼다.
공은 반일(反日)사상이 투철해 일제의 감시인물 이었다. 그래서 우국의 유문과 경승지를 관람한 소회를 밝히는 글을 남겼는데 유고 가운데 당시를 되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중요한 일부를 골라 소개한다. 특히 공은 춘헌공(春軒公) 휘 계반(啓泮)․죽암공(竹菴公) 휘 계문(啓文) 등 문중의 종형들과 남북종친의 숙원사업인 합보(合譜)를 위해 문중의 대의원 자격으로 관북종친에게 통지문을 발송한 글이 있기에 남북문중의 글을 한꺼번에 다루었다. (유고집)
■ 長興憲兵 竹川場 派遣所 控辭(16)
(장흥헌병대 죽천장 파견소장을 내치는 글)
「君臣人之大倫傳云國皆其國大凡各國其國各君其君亘萬古不易之通義也惟我東國雖僻於海隅殷師設敎之地魯聖欲居之邦入我朝五百年禮樂文物三英可逮以小中華見稱天下萬國者誠然矣夫何一朝爲日本國所據脅我君父殺我國母臣妾我奴隸我威制困迫無所不至列致乙巳誘五賊受勒約於是乎宗社邱墟矣生靈奐肉矣爲我李氏臣民者豈無刻骨痛寃之心哉淵齋勉庵心石三先生由是而殉節爲其門人者其致奠也直書其實痛其日本之勒奪朝鮮可乎反道悖義快我朝鮮之見呑日本可乎設使日本爲朝鮮國亡則爲日本臣民者其心果何如哉易地思之必皆然矣若使野史氏直筆爲可罪則几三千里江山冠儒服儒讀書知方之類者執不犯此科乎焚詩書坑儒生必如秦呂氏子然後爲可執此爲政日亦不足矣鳴乎日本之行政處事何其煩琑也何其勞苦也一則可笑一則可憫況此是庚戌合邦以前事也爲我國臣民者其於斥日之道豈有餘地哉一自合邦以後自處以亡國之民以朱夫子所謂含寃忍痛迫不得己八字爲家計民籍也稅金也諸般施爲惟命令是從不言時事杜門閣筆更不以此等說形諸紙墨知我罪我惟在所長之反求之如何耳孔子曰三軍可奪帥也匹夫不可奪志也余直一匹夫也雖不足爲有無於世然事君之道尊華之義聞之熟矣講之素矣思故國憲舊主不覺淚血膓爛當此將無罪勒作案之地雖刀鋸在前鼎濩在後曷足以動吾一髮況八萬六千年間一度生於天地之間者以百年爲期而人間七十古來稀古人有詩今余年恰當五十豈惜一死夗夗夗猶榮荑以朝鮮衣冠皎見先聖先王先賢先祖先師先父母於地下則豈不快活哉古語云從容就義難慷慨殺身易此正男兒慷慨之秋也惟所長處之緘口結舌順受而己」
〈해설〉임금을 받음은 신하로서 행해야할 중요한 도리이다. 전하는 말을 종합해 살펴보면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임금이 있고, 그 임금은 만고에 바꾸지 않은 것이 통례이다. 우리 조선은 비록 바닷가 모퉁이의 후미진 곳이라도 여러 스승이 베푸는 가르침에 따라 노나라 성인(공자의 학문)을 배우며 살고자 하는 곳이다.
공자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500년은 예악과 문물이 삼영(三英)(17)의 치적을 이루어 가히 작은 중화(中華)에 이르렀음을 천하의 모든 나라가 그러하다고 칭찬함이 드러난 곳이다.
대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일본국에 의해 우리 임금이 협박당하고, 우리 국모와 신첩이 살해당하여, 우리가 노예가 되고, 우리의 위엄과 제도가 곤궁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을까? 이는 을사(乙巳)년 오적의 꾐으로 늑약(勒約)을 받아들임으로써 종묘와 사직과 구릉이 폐허가 되고, 생령의 살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도다. 나는 조선의 신민으로 어찌 뼈를 깎는 고통과 원통함이 없겠는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9),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20)선생이 이로 말미암아 순절하셨다.
(각주)
(16) 공사(控辭); '고하다' '아뢰다'의 뜻으로 쓰일 때의 음(音)을 공(共)으로 읽으나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오히려 칠강(控)으로 읽어 강사(控辭) 즉 일본을 내치는 뜻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글은 1917년 6월 장흥헌병대 죽천장 파견소의 헌병들이 공의 집에 들이닥쳐 淵齋 勉庵 心石 선생을 기리는 글 등을 압수해간 일로 잠시 필화를 피하기 위해「緘口緘舌」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다. 일제말엽「梧軒全書」를 발간하려다 당시 헌병대의 검열에서 문제의 글은 삭제토록 붓으로 ×표를 그은 자국이 2001년에 발행된 오헌전집에 그대로 남아있다.
(17) 삼영(三英): 임금의 治世와 敎化를 비유할 때 쓰는 말로 삼영은 대개 임금의 검소함을 禹임금에, 인자한 聲色은 湯임금에, 예의와 위의는 堯舜을 묶어 삼영이라 한다.
(18) 연재(淵齋): 송병선은 고종 때 문신으로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참판, 대사헌에 이르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경계할 것을 상소하려다 일본 헌병에 의해 고향으로 이송되어 음독자결했다. 시호는 文忠이다
(19) 면암(勉庵): 한말의 지사로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파탄 등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삭직됐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반대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에서 의거의 심정을 토로하고, 8도 사민들에게 납세거부, 철도 이용 사절, 일본상품불매운동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 임락(林樂) 등 80여명과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기일본정정부(寄日本政府)」라는 16개항을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돼 음식을 거절하다 굶어죽었다.
(20) 심석(心石): 송병순(1839~1912)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心石이다. 충북 영동(永同)출신으로 1888년(고종 25)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왜(討倭)격문을 8도에 돌리고,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두문불출하며 시문으로 망국의 슬픔을 달래다 자결했다.
나는 그 문인된 자로 치전(致奠)①을 하고, 통한을 직서하였다. (그로 인해 나는 죽천헌병대에 끌려가 문초를 받으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늑탈(勒奪)이 옳은 일인가", 반대로"도가 어그러지고 의리가 방종하여 우리 조선이 만약 일본을 삼키는 것을 그대들은 옳다고 생각하겠는가?"나아가 설령 그것이 옳다하더라도 "일본이 조선국을 망하게 하였는데 바로 일본의 신민(臣民)되라고 하면 과연 따를 수 있겠는가? 이는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반드시 그러하지 아니한가?" 고 반문하며 다그쳤다.
만약 민간인이 사사로이 역사를 직필하였다고 해서 죄로 삼는다면 삼천리강산에 관복 입은 유생이 글을 읽어 방책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이 과정을 범하지 않겠는가?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을 땅에 묻은 일은 여불위(呂不韋)의 아들(秦始皇)②과 같은 사람이 된 뒤에나 이를 가히 집행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정사(政事)라고 한다면 날로 또한 부족할 것이다. 오. 슬프다! 일본의 행정처사가 어찌 그렇게 너저분하고 자질구레하단 말인가? 어찌 그렇게 애써 수고한단 말인가?
가소롭고 한편으로는 가련스러우니 하물며 경술년(1910) 합방 이전의 일로 써야! 나는 조선의 신민된 자로서 일본을 물리치는 도에 어떤 여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합방 이후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자처하고, 주부자처럼 원통함을 머금고, 몹시 절박함을 참는 부득기한 운명으로 집안의 살림과 백성의 호적, 세금 등 여러 일들을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러하다고 이제 시사(時事)에 관해 말을 하지 않고, 집의 문을 걸어 잠그며, 필을 들어 다시 이러한 것들을 논하는 것을 종이와 먹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나의 죄를 스스로 키우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도리어 어찌 이와 같은 죄를 구할 것인가?
공자께서 논어③ 자한(子罕)편에서 말씀하시기를 "삼군(三軍)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 있을지언정 굳게 다져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 고 함과 같이 나는 올곧은 필부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세상에 있고 없다하더라도 그러나 임금을 섬기는 도리와 중화를 존중하는 의리는 들어서 익숙하게 배워서 소박하다. 국헌과 옛 임금 생각으로 피와 눈물로 애간장이 문드러짐을 깨닫지 못하는데 이러한 때를 맞아 장차 죄가 없는 자리를 억지로 만든다면 비록 일찍이 칼과 톱으로 정강이를 잘라 솥에 삶은 형벌이 있는 후 일지언정 어찌 족히 나의 터럭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8만6천년 사이 천지간에 한 번 태어나 100년을 기약하나 인간 70 고래희라는 고인의 시가 있듯이 이제 내 나이 꼭 50이니 어찌 한번 죽은 것이 아깝겠는가?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정강이가 잘리어 조선의 의관을 빛나게 할 것이다. 지하에 계신 선성, 선왕, 선현, 선조, 선사 그리고 먼저 가신 부모를 뵙게 된다면 어찌 떳떳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글에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려우나 분을 참지 못해 살신하기는 쉽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사나이가 분을 참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오랫동안 살려고 도모한다면 입과 혀를 꿰매서 순종함을 받아드려야 할 뿐이다.
(각주)
① 치전(致奠): 고인을 위해 제물과 제문을 가지고 조상(弔喪)하는 일
② 진시황(秦始皇): 장양왕(莊讓王)을 이어 13세에 즉위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시황은 자초(장양왕)가 조(趙)나라의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보고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임신 중인 몸이기에 여씨의 아들이라 한다. 시황이 황제가 된 후에 여불위는 國相이 되어 태후(진시황의 어머니)와 자주 간음했다.
③ 論語 子罕篇 25장: 충절이 굳센 사람의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마음속의 뜻은 뺏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방득(謝枋得)의 각빙서(卻聘書): 慷慨赴死易 從容就李難 즉 분을 참지 못해 죽기는 쉬우나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절구를 인용한 것이다. 사방득은 중국 송나라 때의 인물이다.
(144-100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99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99일차에는 '오헌공(계룡)의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99일차 에서 103일차 까지, 5일차분)
[본문내용- 오헌공 유고]
/ 무곡
세고선집 100일차 밴드게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그 선집의 무게감과 존재감이 크게 부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 기록의 중요성은 사마천의 '사기'나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등의 예에서 보듯이 그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다수의 선조님들의 생생하고 주옥같은 글들이 실려있는 '천년세고선집'의 중요성은 해가 갈수록 더욱 강하게 빛을 발할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오헌공의 항일운동과 그 행적은 오헌유고를 통해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번역되지 않아 연구를 하는데 어려움이 많네요./ 벽천
조선조와 근대에 걸친 큰 유학자 중의 한분으로
사료됩니다. 유고집이 7권 2책으로 되어있군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