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민공원 일대는 한국의 근대현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서면경마장이 들어선 뒤 위락시설로 기능하다가 태평양전쟁을 대비한 일제의 군용지로 활용됐고 이후에는 전쟁 포로를 관리할 군속훈련소가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발발 뒤에는 연합군으로 참전한 미군이 주둔지로 ‘캠프 하야리아’를 설치해 60년간 지속됐다. 1995년부터 캠프 부지 반환 운동이 시작됐고 10여 년 만인 2006년 캠프 기지는 폐쇄됐다. 이후 이 일대는 부산시민공원으로 거듭났으니, 2011년 착공해 2014년 정식 개장했다.
서면경마장
부산 개항 후 일본 자본이 침투하면서 범전동과 연지동 일대의 농지는 대부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 서면경마장이 위락시설로 건립되자 남아있던 소작농들도 다 떠나간 터였다. 경마장은 1920년대 일본의 경기호황을 등에 업고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로 1930년에 준공됐다. 건립 목적은 일본인 중산층의 오락 활성화와 마권 수익, 조선총독부의 세수 확보. 서면경마장 건립은 신흥 지역인 부산부와 구상권인 동래의 중간 지역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 일본인 자본가들이 미리 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부산부 영역의 확장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서면경마장의 운영이 단순히 식민도시의 확장과 마권 판매 수익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는 필요할 경우 경마장을 군용지로 활용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전시에 대비한 군마 훈련과 군사 기지화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기마부대 설치, 1941년 태평양전쟁에 대비한 제72병참경비대 설치, 1942년 임시군속훈련소 설치 등을 통해 잘 드러난다. 제72병참경비대는 군수물자 수송과 주요 교통시설의 경비를 담당했고, 임시군속훈련소는 동남아 포로수용소의 연합군 포로 감시 업무를 맡는 군속을 양성한 곳이다. 이후 광복 때까지 경마장 부지는 군수품 야적장으로 쓰였다.
임시군속훈련소
동남아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해 간 일본군은 포로로 붙잡힌 연합군을 관리하기 위해 1942년 5월 조선인과 대만인 등으로 구성된 군속을 모집했다. 표면상으로는 지원 형식이었지만 행정 관리와 순사를 동원해 강제로 모집한 사실상 강제징용이었다. 3223명이 서면경마장 부지에 있던 임시군속훈련소(일명 ‘노구치 부대’)에서 6월부터 두 달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그중 3016명이 동남아 각지로 파견됐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건설 현장에 동원하는 것.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129명이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이중 14명은 사형, 나머지 115명은 동남아 현지와 일본에서 징역을 살았다.
일본군의 철수
1945년 9월 9일 서울 중앙청 건물에서 미국의 하지 장군과 일본의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졌다. 당시 38도선 이남에는 일본 육군 7개 사단 26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 7개 사단 중 96사단과 111사단, 121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은 제주도에 주둔하고, 한반도 서부 해안에 150사단과 160사단, 대구 근방에 120사단, 청주 근방에 320사단이 있었다. 또한 해군, 전쟁 포로, 식민 관료, 민간인들도 남아있었다. 미군의 감시 하에 부산항에서는 일본군 10만 2984명과 일본 민간인 31만 7452명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포의 귀환
광복 후 부산항에는 철수하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돌아오는 귀환동포들로 붐볐다. 귀환동포는 일제강점기 생업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거나 강제징용‧징병과 같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과 남태평양 등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다. 당시 200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중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 귀환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고향에 돌아가도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어 부산에 정착하는 사람도 많았다.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고 실업‧주택‧식량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해 귀환동포를 ‘우환동포’라 부르기도 했다.
미군 주둔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점령군의 자격으로 한국에 입성한 미군은 38선을 경계로 남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했다. 한국 사람들은 외모와 언어 그리고 문화가 전혀 다른 낯선 이방인들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 식량 및 경제 정책, 신탁통치 방안 등 현안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돼 1948년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정부 수립 후 미군은 일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으로 다시 참전한 미군은 부산기지사령부 ‘캠프 하야리아’를 설치해 군수물자 보급과 후방기지 지휘 임무를 맡았다. 하야리아와 부산의 공존은 1945년 주둔 이후 2006년 기지 폐쇄 때까지 60년간 지속됐다. 캠프 하야리아는 군사기능 수행을 위한 독립적 공간이었으나 부산과 오랜 세월 애환을 같이하면서 서로의 문화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역할도 했다.
캠프 하야리아 명칭
미군은 주둔 부대의 공식 명칭 외에 애칭을 지어 불렀으며 ‘하야리아’도 그중 하나다. 하야리아Hialeah란 인디언 세미뇰 부족의 언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이다. 주한미군역사연구소(USFKHO)에 따르면 부대의 명칭을 2차 대전 당시 유명했던 미국 플로리다주의 하야리아 경마장에서 따왔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주둔하면서 과거 경마장의 모습을 갖춘 부지의 모습을 보고 하야리아 경마장과 유사한 인상을 받아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당시 부산 미군기지 초대 사령관의 고향이 미국 플로리다주의 하야리아시였기 때문에 부대 애칭도 그에 따라 정해졌다는 구술 자료도 전해진다.
캠프의 변천사
캠프 하야리아는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제8069보충대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각기 다양한 체제로 편성됐다. 한국병참관구(Korean Communication Zone), 부산 하위지역사령부(Pusan Sub Area Command), 부산지역사령부(Pusan Base Command), 부산기초지역사령부(Pusan Area Command), 제2수송대대(2d Trans Group), 부산지원대(Pusan Support Activity), 부산게리슨부대(U.S Army Garrison Pusan)로 편성됐다.
1984년부터 캠프 하야리아는 제19전구육군사령부의 제4구역 제34지원단(34th Support Groups)에 포함됐으며 이후 주한미군 재편으로 주요 임무가 용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제20지원단(20th Support Groups) 아래 있다가 2006년 기지를 폐쇄했다.
캠프 하야리아의 생활
한국전쟁 당시 보급사령부 임무를 수행한 캠프 하야리아는 1953년 휴전 후 추가 부지를 인수하면서 현재 공원 부지의 넓이로 확대됐다. 제8부두‧부산저장기지‧군수품재활용사무소‧김해공항 등을 지원‧관리하면서 그 밖의 부산지역 미군과 그 가족들의 숙소로 제공됐다. 부대 안에는 학교‧병원‧스포츠 시설‧영화관‧식당과 그밖의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외부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활이 가능했다. 사병들은 통산 근무기간이 1년이었으며 하사관과 장교들은 2년간 근무했다.
보존 건축물
캠프 하야리아에는 총 338동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이중 역사적 가치를 지닌 24동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됐다. 남아있는 건축물은 장교클럽(1), 퀸셋 막사(5), 하사관 숙소(12), 위관급 관사(3), 사령관 관사(1), 학교(1), 영화관 입구(1)이다.
1949년께 콘크리트로 만든 장교클럽은 장교들을 위한 식당과 연회, 공식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쓰였다. 처음엔 원형 건물로 지어졌으나 외벽에 각각의 통로를 틔우고 주방과 바, 공연장 등이 증축됐다. 미군의 기록에 경마장의 부속 건물로 사용됐다고 해서 마권판매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천정 중앙에는 미8군을 상징하는 마크와 8개의 별이 붙어 있으며 그 둘레로 배너 모양의 붉은색 선이 에워싸고 있다.
한편 고 이용길 화백의 판화 작품이 2013년 부산시민공원 역사관에 기증돼 있다. 이 화백이 1965~68년 당시 캠프 하야리아에서 직접 제작하고 전시한 작품들이다. 이 화백은 부산의 원로 판화가이자 부산미술사 연구의 선구자다.
인근 주민들의 생활상
- 캠프 하야리아 남쪽 중앙 ‘시민공원로 73번길’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형성된 자연마을이 있었다. 원래 농사를 주업으로 했으나 미군부대가 들어서고 그들과 자주 만나면서 점차 미군 대상 상권이 형성됐다. 상인들은 미군에게 물품을 팔기도 했지만 반대로 미군 PX 물품을 한국인에게 되팔기도 했다. 외부에서는 이 마을을 ‘부대마을’ 또는 ‘돌출마을’이라고 불렀는데 주로 미군 상대로 주택을 임대하거나 기념품 가게, 술집, 양복점 등을 운영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호황을 누렸다. 이후 미군 감축에 이은 부대 폐쇄로 마을 전체가 쇠락함에 따라 2013년 부산시민공원 부지에 편입되고 지금은 마을의 흔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캠프 하야리아 미군과 마을 주민과의 첫 만남은 ‘빨래감’을 통해서였다. 전쟁 당시 급수 사정이 좋지 않아 군복 세탁에 불편을 느끼던 미군들이 하나씩 철조망 밖 주민들에게 빨래감을 맡기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도 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에 이들의 거래는 부대 안에서 세탁소가 생길 때까지 이어졌다. 한 벌에 100원(당시 쌀 한 되 가격)이었고 보통 10벌 정도 받아서 세탁했다.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도랑에서 물을 길어와 빨기도 하고 밤에 큰 개천으로 가져가 빨고난 후 주변에 널어 말렸다. 때로는 미군들에게 흰 세탁 비누와 떨어진 군복을 받기도 했는데 흰 비누는 다른 곳에 팔고 군복은 그냥 못 입고 염색해서 입었다.
- 부대가 들어서고 철조망이 생겼지만 마을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경계가 아니었다. 꼬마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과 베어링 등을 가지고 놀았고 먹거리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재미도 알았다. 전쟁 초기 전기가 공급되지 못한 텐트에서 야영하던 미군에게 램프를 1달러에 팔았다. 이때 외친 소리가 “해피 뉴욕? 유 바이 램프 원 달라?”였다. ‘해피 뉴욕’은 ‘해피 뉴 이어’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 미군부대 주변과 시내 곳곳에는 거리에서 미군부대 물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물건들은 부대 내에서 훔쳐오거나 PX를 관리하는 미군과 짜고 몰래 빼돌리거나 또는 비교적 구매가 자유로운 미군 양색시를 통해 구했다. 품목은 담배, C레이션, 커피, 과일, 옷, 라이터부터 라디오, 카메라, 전축까지 다양했다. 담배는 선호도가 높은 만큼 단속도 심해서 1970년대 범전동에서 담배를 싣고 택시로 가서 국제시장에 내리자마자 단속반원들에게 잡히는 경우도 많았다. 라이터도 작은 전기불이라 하여 사람들이 신기해 했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옷은 제법 잘 사는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한편 토마토와 오렌지 같은 과일도 인기 품목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에 오렌지를 부대에서 가지고 나와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15원에 팔면 하루 술값은 해결됐다. 무엇보다 가장 활발한 유통 경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남포동 국제시장에서 판매되는 루트였다. 은밀한 통로로 거래되는 이 거래는 부산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 김OO 씨는 서울의 큰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부대마을의 한 양복점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는 곧 ‘빅토리아 양복점’이라는 자신의 가게를 열고 미군을 상대로 양복을 만들었다. 당시 이 골목에는 양복 가게가 많았는데 통상 ‘세일즈(통역)’와 재단사 그리고 종업원 여러 명을 두었다. 미군과 관련 외국인들은 한 번에 양복을 3~5벌씩 맞춰갔기 때문에 벌이가 좋았다. 또한 고객을 미군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고 고리원전, 거제도 조선소 등에서 근무하는 외국인까지 소위 ‘사이드’ 작업을 통해 영업 고객을 확대했다. 따라서 타 양복점과는 차별화하여 영업을 확장할 수 있었고 지금은 가게를 접었지만 아직 단골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그의 성실함과 독특한 경영철학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와이셔츠와 양복에 ‘태극기’와 ‘MADE IN KOREA’ 그리고 ‘지구를 밟고 있는 사자 로고’를 새겨 넣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기술자의 자부심과 긍지의 상징이었다.
발굴 문화재
부산시민공원 부지 일대는 백양산‧금용산‧화지산‧황령산 등의 경사지로 둘러싸여 있는 완만한 충적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성지곡에서 흘러내린 큰 물줄기가 구릉지 사이를 지나 부전천으로 흐르고 그 지류들이 부지 내부로 그물망처럼 흘러 다양한 생활유적이 입지하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 주둔기를 거치면서 원지형이 많이 훼손돼 유구의 원형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단위 복합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전천 동쪽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과 집자리가 다수 발굴됐다. 아울러 농경생활과 관련된 도랑(구상유구)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는 논에 물길을 대거나 논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부지 동편 현대아파트 아래 구릉지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주로 4~5세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송나라 화폐인 희령원보‧원풍통보가 출토돼 고려와 송의 활발했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건물지로는 경마 트랙 남쪽의 마구간 4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