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늦가을에 빈 화분에 구근을 심었다. 내게 빈 화분이 있었다는 것도 아직 어색하다. 구근이라는 걸 심은 것도 낯설다. 나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었냐 하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사람이건 책임질 것들을 버거워한다. 자식 키울 때도 그렇게 힘들더라니…가까스로 자식을 키워내고 이제 한숨 돌릴 지경인데 뭔가 또 책임지고 기른다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애완 동물은 생각도 하기 싫다. 식물은? 내손만 닿으면 죽을게 분명하다. 나는 꽤 이름난 ‘마이나스의 손’이다. 식물이란 건 집 밖만 나가면 나무며 꽃이 계절마다 자라나는 것이 천지인데 굳이 집에 들여야 하는 건가? 자연은 사람이 손안되는게 제일 자연스러운 거지 하며 화훼단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걸 보고 이해를 못했다.
동네 주변의 모든 산과 나무와 꽃은 내 것이 아니지만 나를 위한 것이지, 굳이 집에 들여 자리차지하고 , 흙에 벌레까지 따라오면 어떡하라고..난 냉담하고 건조한 인간이었다.
몇 해전 햇볕이 잘 드는 테라스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음… 텃밭은 무리겠고 화분이라도 있어야 테라스가 좀 덜 삭막할 것 같기도 하고, 비워두는 것은 공간 낭비일 것 같고… 다른 집 테라스에는 뭐가 있나 기웃기웃 해보기도 했다.
그해 4월 어느날 화훼단지에서 깻잎 같은 수국 모종을 데리고 왔다. 깻잎처럼 생긴 것뿐인데도 왜 이리 예쁘던지… 그렇지만 그때의 예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깻잎들이 봉우리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이게 뭔 매직인가 싶게 작은 봉우리에서 꽃잎이 터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달랐다. 나는 물 좋아하는 수국을 위해 일찍 일어나 물을 주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도 수국의 상태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꽃을 피울 수 있었다. 5월이 왜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수국 덕에 알았다. 수국 가지치기를 위해 정원 가위를 샀고, 수국꽃의 색깔을 바꿔주는 수국전용토를 사들였다. 6월과 7월까지 수국은 나를 위해 효도를 다 하는 것 같았다. 집 바깥의 산책로 수국을 보거나 화훼단지의 수국을 볼 때마다 내 수국과 어디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게 되었고 동네 주변 나무와 꽃들도 식물을 기르기 전보다 관심이 가서 동네 산책이 더욱 흥미로웠다. 흡사 내가 자식을 기를 때 내 자식이 유치원생이면 주변 모든 유치원생들이 다 예쁘고,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때 또래 청년들이 다 염려되고 귀여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모든 나무와 꽃과 멀리 보이는 산조차도 아름답고 새롭게 보였다. 다들 하루하루 자라고 있었다. 그 수국은 7월이 되자 꽃이 졌고 꽃이 진 자리에 새잎이 올라 여름내 싱그러움을 담당했다. 줄기는 내년을 위해 삽목을 해서 키워야 한다는 정보를 식집사블로그에서 읽었다. 가지를 잘라 물에 담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뿌리가 난 가지들을 작은 화분에 심었다. 어느날 출근길에 소나기가 거세게 내리칠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작은 화분에 심어뒀던 수국삽목을 비바람을 맞지 않을 베란다로 들이고 나서 출근을 했다. 지각했지만, 그날 오후에 태풍이 덮쳐 모든 게 날아갈 판이었는데도 내 마음은 어찌나 평온하던지.
그 계절에 수국만 키워느냐 하면 아니다. 라일락과 장미, 초화화와 안개꽃, 숙근버베나와 야생화 등 내키는 대로 마구 들였다. 시간 날때 마다 식집사카페에 들어가서 한때 육아서적을 읽을 때처럼 집중해서 정보를 모았다. 집 가까운 화훼단지는 내 참새방앗간이 되었고, 맘에 드는 식물을 사면 그에 맞는 화분을 사기 위해 또 근처 화분 가게에 갔다. 퇴근해서 목욕탕의자에 앉아 분갈이를 시작했다. 분갈이 하고 나면 빈 화분이 생기고, 빈 화분이 생기면 다시 식물을 사오고, 그러면 또 배양토가 부족하고 배양토를 사고 나면 마사토가 모자라고 마사토를 사고 나면 또 화분이 더 필요하고 식물이 더 필요하고…끝이 나지 않았다. 여름날 식물들은 어찌나 잘 자라는지 숨가쁘게 분갈이를 해야했다. 하루라도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허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태양이 뜨거운 8월의 테라스는 식물이 타들어가기 딱 좋았다. 나는 그늘에 화분들을 옮기거나, 짬이 날때마다 물을 줬다. 민달팽이를 발견한 날, 식물 놀이에 잠깐 위기가 있었으나 감내해 냈다.(민달팽이는 진짜 징그럽다). 또 장미 가지에 진드기와 응애가 생겨 초보식집사의 진정한 위기가 왔지만 퇴치제란 걸 뿌리고 잘 넘겼다. 장미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마가 지나고, 절대 시들것 같지 않았던 숙근버베나가 말랐다. 가을은 금세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자 테라스에 있던 화분들은 맥을 못추고 시들어 갔다. 초보식집사는 월동에 잔뜩 긴장했다. 실외에 뒀던 화분들을 가지를 정리해서 베란다로 들였다. 수국도 라일락도 꽃은 흔적도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내 식물놀이도 한가해졌다. 마음 둘데가 없어져서 허전했다. 하지만 동네 화원은 나같은 니즈를 매년 읽어냈기에 월동식물을 팔았다. 향동백을 그해 마지막으로 들인 화분으로 정했다. 겨울은 식집사들에게 채광과 통풍, 온도를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네이버 식집사선배님들이 알려 줬다. ‘식물등이 있어야할까?’
나는 겨울만 되면 계절성 우울증이 심각하게 오지만 이번 겨울은 조금 달랐다. 본격겨울에 접어들기전 구근을 심은 덕이다. 봄이 오려면 몇달이 남았지만 벌써 삐죽이 싹을 틔워 올렸다. 이 글을 쓰는 2월 중순에 그중 한 구근(아마 무스카리인듯)에서 꽃도 폈다. 아침마다 베란다문을 열어 향기를 맡으면 곧 봄이 온다는 걸 저 녀석때문에 느낀다.
나는 식물을 키우지 않았을 때는 계절의 왕래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고, 별 상관도 없었다. 날씨조차도 무신경하게 하루하루 보냈다. 식물을 키우니 매일의 날씨와 계절변화를 오롯이 느끼고, 바쁘다. 계절의 변화가 이토록 설레일줄은 몰랐다.
식물을 키우며 나의 마음에도 물을 준 것같다. 내가 키워내는 식물이 예뻐서 공원이나 산책로에 있는 식물도 잘 크는 걸 보면 다 기특하고 예쁘다. 물론 관공서의 조경 담당부서의 노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 모든 게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이번 봄에는 우선 배양토 100리터부터 구입하고 맞이 할꺼다. 겨울동안 실내에서 자란 고무나무와 제라늄을 분갈이 해야 하니까. 농번기를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이 된다. 그 어느 때보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
한때 나는 돌보고 신경쓰는게 많아질수록 삶은 복잡하고 성가셔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뭔가를 신경쓰고 돌보았던 그 시간은 복잡하고 바빴지만 그래서 즐거웠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커피한잔값으로 식물하나 사가면 거기에 맞는 화분과 흙을 고르는 일이 애기의 새 내복을 사입히는 새댁의 맘이 되는 것만 같았다. 뭔가를 키우는 것이야 말로 흩어지는 시간을 거머쥐는 느낌이랄까? 식물은 한자리에서 저지레 않고 투정도 없어서 수월하긴 했지.
쉽사리 질리는 내가 얼마나 오래 식물 놀이를 할지 모르지만 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삶의 의욕을 생기게 하는 불쏘시개라는 건 확실하게 안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거나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무서운 일만은 앞으로 나에게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식집사는 ‘물주기 3년' 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3년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2년정도 이니 사실 죽어나간 식물들도 많다.
이 글을 쓰는 김에 초보라 서툴러서 죽게 만든 올리브나무, 황칠 그리고 마오리소포라에게 심심한 사과와 애도의 말을 전한다. 올해는 좀 더 잘해볼게요.
첫댓글 저는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누가 화분을 선물하면 애들이 '아...우리집에 오면 금방 죽을텐데...' 탄식을 한답니다. 키우는 건 어려워 한 번씩 화병에 꽃(절화)을 꽂는 걸로 기분전환을 해요. 3년 물주기를 하면 정말 나아질까요? :)
많이 죽여본자가 더 잘 키운다고 하던데요.. ㅎㅎ 글도 일단 많이 망쳐봐야 잘 쓸 수 있는 것처럼요….올 봄에 화분하나 들여놓으시죠… ^^
식물에 대한 써머의 애정이, 그야말로 담뿍? 느껴지네요. 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저도 제가 애정넘치는 인간인줄 몰랐다는 ㅠ
냉담하고 건조한 인간이라고 했지만 아끼는 것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라는 이승희 시인의 산문집을 예전에 읽었는데 참 재밌고 좋았어요. 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썸머도 혹시 관심 간다면 읽어보길 추천드려요!
우와~ 제목도 너무 멋지네요.. 관심있어요 찾아 읽어볼래요~~ 저도 가끔 식물들 붙들도 울고 싶을때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