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고 영감을 얻는 것이 최고이다-- 롱지누스 민 용 태(고려대 명예교수,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훌륭한 글에 대하여(Peri Hupsous)”라는 롱지누스의 문학서가 이딸리아의 로보르뗄로의 의하여 1554년에 번역된 것은 근대 낭만주의적 문학론을 위하여 획기적인 일이었다.기원 후 8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의 저자 롱지누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저자 이름이 롱지누스가 아니라 디오니시우스라느니,3 세기에 살았던 팔미라 국의 여왕 제노비아의 비서였다느니,아직도 작가는 미스테리에 묻혀 있다. “문학적 훌륭함에 대하여(On Literary Excellence)”,아니면 “고상한 문체에 대하여(On Elevation of Style)” 등으로 번역되었던 제목을 우리는 평범하게 “훌륭한 글에 대하여”로 옮기기로 한다.책의 내용이 가장 좋은 글 쓰기,혹은 감동적인 낭송법에 대한 충고를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다.플라톤의 문학론이 그러했듯이, 고대의 시학은 늘 시인과 시 낭송가, 웅변가,시 쓰기와 시 읊기를 혼동하는 게 보통이었다.오늘 우리에게도 시 낭송이 있듯이 오래 동안 시는 쓰여지기보다는 노래하여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탓이다.입에서 입으로 낭송가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 호메로스의 노래였으니까. 어떻든 롱지누스의 책은 고대 문학론에서 최초로 “정렬적 감정(enthousiastikon pathos)”이 좋은 글을 낳는 핵심적 요소임을 지적한 낭만주의적 시학의 효시이다.그는 “훌륭한 글기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그가 제 8 장에 제시한 조건의 맨 먼저가 “좋은 착상”이다.즉 위대한 사고(noéseis)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두 번 째가 우리가 말한 “영감에 찬 정렬적 감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롱지누스는 위 두가지 요소, 즉 “좋은 착상”과 영감을 얻은 정렬적 감정은 시인의 타고 난 재능에 힘 입는다고 주장한다.그는 호라티움과 함께 시인은 재질을 타고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연마를 통하여 닦어쟈야 된다고 믿는다.그의 의견을 들어보자: “사람들이 주장하기를,위대한 사람은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고 한다.천재 또한 오직 천성으로 타고나야 된다고 말한다.천성적인 재능의 산물은 매마른 기술자의 손을 거치면 망쳐지게 되어있다고 생각들한다.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속설은 내 생각으로는 실제로 거짓일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은 강력한 감정 속에서는 스스로의 법칙을 따른다고 하지만,그렇다고 자연이 아무 규칙 없이 거칠게 작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비록 천성적인 재능은 모든 것의원초적 요소나 싻을 커버할 수 있지만,다음은 기술적 방법이 언제 어떻게 각 요소가 쓰여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게 되며,그 자연적인 능력을 연마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제 2장) 여기에서 시인의 천재성은 곧 그 천재적 직감에 수반하는 수사법을 필요로하게 되며,시의 내용과 형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이들이 유기적 관계에 있을 때 좋은 시,좋은 시인이 태어나다고 롱지누스는 믿는다.앞서 이야기한 “좋은 착상”과 “정렬적 감정”의 관계도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연설,놓은 낭송,좋은 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그는 같은 “정렬적 감정”이라도 소재나 내용과 맞지 않는 감정은 엉터리라고 못박는다:
“...이런 감정이 공허하고,때에 맞지 않으며,이유 없이 쓰일때,과장되었을 때,이는 반드시 제어되어야 할 것들이다.왜냐하면, 때때로 말하는 사람이 술에 취한 것처럼 감정을 쏟아놓는데,그 감정이 말하는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고, 일부러 감동을 주려고 하는 노력만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제3장) 이런 유기적 관계를 중시하면서, 롱지누스는 “훌륭한 글”의 제 3의 요소로 “좋은 어휘 구성(schémata)”을 충고한다.제 3과 제 4의 법칙은 모두 수사법에 속하는 문장작법의 요소들인데,제 3에서는 구문 사용의 변형를 통한 시법을 말하고 있다.예를 들어, 말의 순서를 바꾸는 도치법(huperbaton),“그리고 ...”따위를 빼거나 “....그리고...그리고...그리고...”로 계속 연결해 나가는 접속사 없애기(asundeton),접속사 겹붙이기(polisundeton),말 돌려서 하기(periphrasis)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제4의 법칙은 “고상한 말(phrasis)”을 권고하고 있다.즉 고전을 통하여 갈고 닦아진 은유나 비유,문어체를 모방하여 쓰라는 말이다.“고상한 말”이란 결국 전 세대의 문학을 통하여 이미 고양된 향취를 얻는 문학적 표현들을 일컫는다.요즘 시법에서 상징,은유,비교,비유 등을 일컫는다. 제 5의 법칙은 “좋은 구성( sunthesis)”을 강조한다.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좋은 작품은 좋은 구성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늘 있어왔다.그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이상으로 제시한다.시는 다양한 사고와 사건들,아름다움과 멜로디를 포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우리의 감정 속에서 공명을 얻도록 통일성을 가져야 된다는 것.(제 39장) 중요한 것은 이들 수사법에 관한 모든 법칙들은 후천적으로 고전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그러나 호라티우스가 호메로스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히라고 충고했다면,롱지누스의 고전 모방설은 우리가 “창조적 모방론”이라고 이야기할만큼 독창적이다.롱지누스는 고전에서 영감을 얻고 수사법을 배워야 한다고 달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롱지누스는 우리가 고전을 읽고 배움이 표절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플라톤의 영감론과 교묘하게 연결시키면서, 그는 글 읽기를 감동 받기를 넘어서 신들림 얻기로 이해한다: “...고전의 위대한 시인들이나 산문 작가들을 모방하고 영감을 맏는 것이 중요하다.나의 사랑하는 친구여,우리 모든 힘을 다 해서 고전 읽기에 몰두하자.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정신에 의하여 영감을 받고 있다.기록에 보이듯이,피티아의 사제들은 땅에 틈바귀가 있는 곳에 3각대를 세우고,성스러운 기운을 빨아들여,하늘의 기운으로 가득 채운 뒤에,그 기운으로 주문을 읊조린다는 것.그와 같이 고대 현인들의 훌륭한 정신이 성스러운 주문의 동굴로부터 영향력을 얻었듯이,정렬로 보아 다른 사람들의 위대성만큼은 못하다 할지라도, 이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호메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어찌 헤로도투스 뿐이겠는가!....” 쉬운 이야기로 뮤즈의 신들림을 받아 호메루스가 “일리아드 오딧세이”을 읊었고,그것을 내가 듣고 감동하고,시를 쓰고 샆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플라톤ㅢ 영감설처럼 신들림의 고리의 연장일 뿐이라는 것.호메루스의 뮤즈가 “일리아드 오딧세에” 속에 숨어 있다가,독자인 나의 가슴에 다시 뛰어드는 것을 말릴 사람은 없다.작품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고전의 작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뮤즈에게 신들림을 당한 거리고 설명한다.따라서 호메로스가 신들림으로 그 위대한 작품을 산출했듯이, 우리가 그의 글의 신들림에 접하여 다른 작품을 산출하게 되는 것은 모방이나 도둑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뮤즈의 주인이 아무도 아니듯이 감동이나 신들림의 주인공이 아무게일 수는 없다.우리는 그저 시가 좋아서 시를 읽고, 그 신들림으로 시를 쓰고,그 시에 감동(신들림)할 뿐. 요즘 포스트모던이즘에서 잘못 읽기,패러디,짬뽕하여 쓰기(패스티쉬pastiche)가 글 쓰기라고 주장하는 그 밑바탕을 롱지누스로가 옹호한다.아차피 모든 문학은 앞의 문학의 되쓰기,혹은 신들림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그러면 그 독창성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여기에 롱지누스는 뮤즈와의 관계를 따진다. 즉 진정으로 영감 받은 위대한 고전 작품에 대한 신들림같은 감동적 독서의 산물인가,아니면 근거 없는 독불장군의 고고성인가. 롱지누스는 고전을 모방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그것이 영감이 아닌 기술적 모방이더라도,“다른 예술 작품이나 이미지,아름다운 형태의 형식을 따 오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플라톤이 호메로스에게서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훌륭한 철학자가가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영광은 많이 읽고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는 것.좋은 작품에 많이 감동을 받으면 그만큼 좋은 뮤즈의 신들림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롱지누스의 이런 생각은 낭만주의 이후의 독창성 추구에 병들어 있는 우리 세대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이미 이야기했듯이 고대 문학가 중에 누구부다도 감정을 중요시한 사람이 롱지누스이었고(낭만주의자), 동시에 좋은 고전을 읽어야 뮤즈의 신들림(감동,영향...)을 받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또한 좋은 작품의 영향을 받는 것이,좋은 글을 읽다가 좋은 영감,감직을 받는 것이 문학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서, 이런 글 쓰기는 우리 시대로 그토록 두려워하는 모방이나 표절이 아니라 창조 행위임을 시시하고 있다.아비 없는 자식이 없듯이,나의 글은 앞에 글을 쓴 분들의 연장이다.오늘 간 텍스트 문학론(intertextuality)이나 해체론(deconstruction)이 이야기하는 글쓰기-되풀어쓰기의 공식은 이미 호라티움이나 롱지누스가 예고한 문학됨의 양식었다.그러나 여기 롱지누스가 보태준 고전 모방론의 당위성은 신과 뮤즈로부터의 신들림을 받는 행위가 독서라는 신비주의적 해석이다. 피티아의 사제가 지기(地氣),천기(天氣)를 받아 주문을 읊조리듯이,시인 또한 고전을 읽고 뮤즈로부터 신들림을 받아 시를 쓴다는 것.그러니까 시인은 지기,천기 이외에 예술의 신의 신기(神氣) 하나를 더 받는 셈이다.거기에다가 좋은 작품의 형식을 본따는 작업이 고전 읽기의 헤택이며 훌륭한 글 쓰기의 필수 과정이다.이것은 글 쓰기가 고전이나 다른 작픔품의 표절이 될 수 없음은 물론 훌륭한 글 쓰기 자체가 다른 글의 창조적 모방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롱지누스는 호라티우스보다 문학 창작의 현묘함에 더욱 무게를 둔다.즉 좋은 문학은 수사법의 연마와 선천적 재능의 상호보완의 산물(호라티우스)이라기보다는 뮤즈로부터의 신들림을 받는 수행을 더욱 중시한다.혹시 고전 문학 형식의 모방을 필요로 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내용과 향식의 혼연한 조화의 예를 본배우는 것으로 이해한다.롱지누스의 이런 신비주의적 문학관은 영감을 얻은 훌륭한 작품에도 인간적 기술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에 이른다. 내용 면에 있어서도 문학은 만드시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다.역사적 관점이나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오류일 수 있는 사실도 글 속에서는 정당화된다는 이야기이다: “시인이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을 때는,(문학속의 현실은)그렇게 되어야 할 현실을 제시한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소포틀라스가 사람을 묘사할 때는 그 사람들이 당연히 그래야 할 모습으로 그렸다.그러나 유리피데스는 있었던 사실 그대로 그렸었다.시인이 사람을 묘사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도 아니고,있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라고 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는 신들의 눈에 비친 모습 그대로 그렸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시학” 60b32)
사실 기준보다는 최대한 상상력의 자유,심지어 오류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문학 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옹호했다면,롱지누스는 시인의 천재성이 위대한 것이지 사소한 기술적 오류가 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롱지누스는 기술적 완벽주의보다는 천재적인 위대성을 중시한다: “....어떤 작가의 글이 실수 하나 없이 나무랄 데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자.우리는 일반적인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시나 산문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약간 흠이 있어도 위대한 작품?아니면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이 건전하지만 평범한 작품?....(중략)나로서는, 정말로 위대한 천재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흠이 없다는 이야기 아니라는 생각이다.정확하기만을 바라면 경박해질 위험이 있다.그래서 위대한작품들에서는, 커다란 재산을 운영할 때처럼,소사한 잘못같은 것은 지나칠 수 있다고 본다.”(제33장) 롱지누스는 훌륭한 글의 기본 요건으로 제일 먼저 “훌륭한 착상”과 감정을 쭝시하고 있다고 했다.그는 시인의 천성과 천재성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문학의 수사법적 측면에서도,고전 속에서 영감과 기술을 감동적으로 습득할 것을 권한다.고전 속에는 신의 능력에 버금가는 위대성과 영원성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작가들을 대할 때, 그들의 위대성이 인간을 이롭게 하고 교훈을 주고 있음을 본다.따라서 우리가 먼저 얻은 결론은 그런 작가들이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보통 인간 능력보다는 훨씬 뛰어남을 알 수 있다.다른 점들을 보면 그것을 쓴 자들도 역시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러나 예술적 천재성은 그들로 하여금 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신적 힘을 갖게 한다. 오류가 없으면 남의 비판을 면할 수 있다.그러나 진짜 위대함은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제36장) 롱지누스에 와서 우리는 고전을 읽고 감동하고 글을 씀이 어떻게 창조적글쓰기인가를 배운다.위대한 문학의 위대성은 작가의 기술적 완벽성보다는 개인의 천재성이나 고전을 통하여 전수 받는 감동과 신들림의 조화로 이해한다.일단 이것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기술적 보완이 중요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