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1971alef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02-자유게시판 스크랩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상)(중)(하)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분홍꽃편지 추천 0 조회 188 15.10.22 19: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버는 것 인재 모으는 데 인생 80%를 보냈다”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상

 

▲ 1952년 이병철과 소년 이건희.

 

 

1961년 6월 26일 저녁,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이병철은 창밖의 저녁놀로 붉게 물든 운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5·16군사정변 뒤 ‘부정축재자 1호’로 찍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어떤 사람일까? 목숨 걸고 혁명을 이루어 내다니 보통 강단과 투지가 아닐진대…. 그런 그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이런저런 상념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이병철은 마음이 무거웠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요원들에 의해 서울 명동 메트로호텔로 갔다. 이튿날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있는 태평로 사무실로 안내되었는데, 박태준 의장 비서실장이 미리 나와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 그를 따라 자못 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으로 들어서자 박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안경을 쓴 얼굴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는 순간 이병철은 긴장감으로 굳었으나 박정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조선왕조 500년 이래 고관대작들의 부정축재로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소. 오늘날에도 국민이 이토록 굶주림, 질병에 시달림은 국민의 고혈을 쥐어짤 줄만 아는 정치인들 잘못이 반, 사회적 책무를 버리고 탐욕에만 빠져든 경제인들 잘못이 반이오. 정치, 경제가 썩어 나라가 무너지면 기업과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오?”

 

질책하듯 카랑카랑 울리는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이병철은 입안이 바짝 마르며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산다는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현행 세법은 6·25전쟁 때 기업의 수입을 훨씬 넘는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비상사태의 세제 그대로여서, 곧대로 세금을 내다간 모든 기업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법을 개정하여, 기업인들에게 새로운 각오로 국가 건설에 참여토록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최선을 다해 국가 경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이때 박정희가 호통을 쳤다.

 

“이보시오, 이 사장! 내가 언제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소! 양복지나 설탕, 조미료 같은 소비성 물건이나 만들고 들여다 팔고 있으니 젊은이들이 삼성을 매판재벌이라고 하는 거요. 그런 장사치 노릇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사업을 한번 해보라는 말이오.”

 

설탕과 양복지! 이 말로 이병철의 마음은 아프고 크게 울렸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벌여온 장사가 그것뿐인데 어쩌겠습니까?”

 

이병철이 멋쩍게 웃자 박정희가 다그치듯이 말했다.

 

“사나이로 태어나 한번 사업을 일으켰으면 제대로 벌여 봐야 할 것 아니오? 자동차, 배, 전자제품을 만들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째서 머뭇거리느냐고 세지마 류조 회장이 그럽디다. 이병철 사장이 앞장서시겠다면 힘닿는 데까지 내가 밀어드리리다.”

 

자동차, 배, 전자제품! 이병철의 머릿속에서는 번쩍 섬광이 스쳤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전 세계를 누빈다! 냉철한 이병철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 나쇼날전기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박정희가 이병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나지막히 말을 이어갔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보시오.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왔지만 세계적인 전자회사 나쇼날을 이루어냈잖소! 이 사장도 이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국산품을 제조 수출하는 세계적 대기업을 일으켜, 진정으로 국가 경제에 기여해 보라는 뜻이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박정희에게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죄송한 부탁 올리겠습니다. 먼저 메트로호텔에 갇힌 기업인들부터 풀어주십시오. 그들의 잘못도 있겠지만, 광복을 맞아 열악한 경제 환경 아래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을 해본 노하우가 있으므로 이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들 또한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기업인들 스스로도 자정(自淨)의 뜻에서 국가발전기금을 마련하겠사오니 그것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하십시오.”

 

비로소 박정희는 웃음을 지으며 이병철의 두 손을 꽉 쥐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병철 회장, 우리 한번 조국을 일으켜 세워 봅시다.”

이때 박정희는 44세, 이병철은 51세였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인데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일생의 80퍼센트를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데 보냈다. 삼성의 발전도 그런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인 것이다.”(1980년 7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철 강연에서)

 

이병철은 1910년 2월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손위 누이 둘과 형 해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리산 지맥인 마두산이 완만히 이어지는 골짜기 마을 중교리는 예부터 벽촌이었다. 그해에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한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시작되었다. 뒷날 경제계에서의 활약으로 한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조국과 민족의 수난의 해에 탄생한 것이다.

 

이병철의 아버지 이찬우는 아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늘 엄했지만 아들이 세상 이치를 이해하도록 세심히 이끌었다. 어머니 권재림은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특히 마을에서 누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미역과 쌀을 보내 축하하곤 했다.

“찔레꽃이 필 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가장 힘들 때란다. 그들을 모른 척하면 안 돼.”

어머니는 곧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왕조 연산군 시대에는 신변에 미칠 화를 피하려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목숨을 보전한 선비들이 많았다. 이병철의 경주 이씨 가문 16대 선조도 이렇듯 중교리 땅을 은신처로 정해 이주했다. 조부 이홍석은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 허성재의 문하생이었다. 그가 문산(文山)이라는 호를 붙여 ‘문산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홍석은 이찬우에게 학문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목숨도, 부귀영화도 유한하지만 문장의 생명은 영원하다. 문장은 인격 그 자체의 발로이니 모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섯 살의 이병철은 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교본은 ‘천자문’으로 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암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두세 달 만에 통독한 동무들과 달리 그는 1년이나 걸렸다. 서당에 5년 가까이 다니는 동안 ‘논어’와 ‘자치통감(資治通鑑)’도 뗐지만, 영특한 편은 아니었던 듯 “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 가지고서야”라며 더러 스승에게 매를 맞았다.

 

어린 이병철은 공부보다 장난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싸움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무엇보다 입담이 좋았다. 꼬치꼬치 이치를 따지고 드는 통에 상대가 질려 달아날 정도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집에까지 쳐들어가 결말을 짓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런 그가 고집불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병철은 어릴 적 자신이 골목대장이긴 했지만 ‘무기는 힘이 아니라 입’이었다고 떠올렸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애쓴다. 결국 진보는 비합리적인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 시절 누구도 고집불통 장난꾸러기에게 그런 내일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3·1 독립선언으로부터 2년 뒤, 열한 살의 이병철을 부모는 일본식 보통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친척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부모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어린 이병철은 서당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시집간 둘째누나 집에서 가까운 진주시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둘째누나는 그를 이발소로 데려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주었다. 소년 이병철에게도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고향에 쉬러 온 사촌형이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록 정치, 경제, 사회의 어려운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내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며 물자가 풍부하다는 등의 얘기는 소년을 들뜨게 하고도 남았다.

 

‘그래, 나도 서울에 가서 공부하자.’ 호기심이 왕성했던 소년 이병철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힐 각오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진주나 서울이나 타향이기는 마찬가지”라고 거들자 뜻밖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친정이 서울인 게 승낙을 얻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이병철씨는 틈틈이 서예로써 마음을 닦았으며 그의 휘호 무한탐구는 삼성인의 좌우명이 되었다.

 

 

상경하는 날 아버지는 조심해야 할 점들을 열심히 타일렀다. 어머니 또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다. 겨우 열한 살짜리 아들을 300㎞나 떨어진 먼 곳으로 혼자 보내는데 어느 부모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이병철은 외갓집이 있는 가회동에서 가까운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처음 등교하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지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반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 아이들은 그의 사투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친절한 아이들은 그를 보살펴 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개중에는 심술궂게 따돌리는 아이도 있어 한동안 고독감을 맛보았다.

 

서울에 올라왔다고 해서 갑자기 성적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이병철은 산수는 자신이 있었으나 국어와 일본어는 고작 60점을 받는 정도였다. 음악이나 미술은 겨우 낙제를 면했던 터라 반 등수는 50명 가운데 35등이나 40등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그는 하루빨리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2년을 공부한 뒤 4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보통학교에서 배울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게 속성과가 있는 중동학교로 옮기고 싶습니다.”

그의 뜻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거듭 강조했다.

“어떤 일이든 성급히 뛰어들지 말거라. 일을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거듭해 학교를 바꾸는 아들이 아버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는 아들 앞에서 그 일에 대해 끝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강조한 것은 사필귀정에 이어 “거짓과 위선은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큰 재난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병철은 중동학교 속성과를 택했다. 여기서는 보통학교의 5, 6학년 과정을 1년에 모두 끝내지 못하면 중학부에 올라갈 수 없었다. 꽁무니에 불이 붙은 이병철은 계획대로 중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자유로운 자취생활을 부러워하던 그는 결국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더불어 생활하고 싶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워 외할머니 집을 나왔다. 그즈음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너라.”

 

당시에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개화의 물결로 자유주의 연애론이 득세하던 무렵으로 그는 여성이나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순순히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열여섯 살 겨울, 전통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두 살 위의 건강한 여성이었다.

 

여름방학으로 고향에 내려간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처음과 끝이라는 것이 있다. 열여덟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아버지의 엄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학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며 며칠 뒤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이병철은 와세다대학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서둘러 부관(釜關) 연락선에 올라탔다.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배에서 그는 처음으로 조국을 잃은 국민의 서글픔을 깨닫게 되었다.

 

3000t급의 제법 큰 배였는데도 객실 시설은 변변치 못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갑판으로 나간 이병철은 같은 고향 출신인 안호상 박사를 만났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교토대학에서 1년 더 동양철학을 연구하려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현해탄에 이르렀을 즈음 거친 파도 때문에 몹시 흔들렸다. 심한 뱃멀미로 고생하던 안호상과 이병철은 견디기 힘들어 2등 선실보다 시설이 좋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일본인 형사가 다가와 고함치듯 내뱉었다.

 

“이봐, 너희는 조선인이잖아. 1등 선실은 너희가 들어갈 데가 아니야!”

 

몸도 좋지 않은데 당하는 설움은 자꾸만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형사는 조선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대역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함부로 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2등 선실로 돌아가야 했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국민의 가치라고 하지 않던가. 엄청난 굴욕감에 시달린 이병철은 처음으로 망국의 의미를 실감하면서 비애에 젖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국이 되려면 경제를 발전시켜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뒷날 불처럼 사업을 일으킨 배경에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년기에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의 원통함을 가슴에 새기게 된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로 갈아탄 뒤 도쿄역에 내렸다. 그는 먼저 자취방을 정하고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 절차를 밟았다.

 

이병철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나 와세다대학에서는 달랐다. 강의를 절대 빼먹지 않았고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꼭 앞쪽에 앉았다. 또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나 ‘×’ 표시를 해둔 부분이 많아 읽기 어려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도 곧잘 읽었다.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그는 ‘열심이었다’고 와세다대학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자취로 건강은 전혀 생각지 않고 편식한 탓에 이병철은 심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몹시 피곤했다. 대여섯 명의 중산층 가정 한 달 생활비가 60엔이었던 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달마다 200엔을 보내주었으므로 돈은 넉넉했다. 그는 2학년 때 1년간 휴학계를 낸 뒤 남은 돈으로 온천과 명소, 유적지 등을 여행하며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 없다. 아쉽지만 대학을 그만두어야겠다.’ 오랫동안 고민한 그는 마침내 1931년 2학년 가을에 와세다대학을 중퇴했다. 그러고는 연락도 않고 조용히 귀향했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 그리고 와세다대학까지 연속 네 번이나 중퇴한 셈이다. 결국 그는 졸업장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심한 감회에 젖지도 않고 ‘앞으로는 더 잘될 것’이라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생각을 했다. 고희를 맞았을 때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똥배짱만 남아 있던 나 자신이 생각나 고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자금 여유 생길 때마다 새 투자 대상 찾아 나서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중)

 

 

▲ 1938년 3월 1일 대구시 수동(현재 인교동)에 세워진 삼성상회 전경.

 

 

1936년 봄, 이병철은 마산에 부지를 마련해 ‘협동 정미소’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장사의 기본도 몰랐다. 쌀값이 쌀 때 사서 오를 때 내다 팔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해 적자를 보기 일쑤였지만 다행히 정미소 사업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사업이 기울어 문을 닫고 말았다. 할 일이 없어진 그는 부산을 거쳐 중국 상하이에 이르면서 세상을 둘러보고 자신의 꿈을 다졌다.

 

반년 뒤 이병철은 다시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란 상호를 걸고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이것이 오늘날 ‘삼성’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삼성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며,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병철은 자신의 회사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삼성상회’의 실적은 순조롭게 커나갔다. 이병철은 자금에 여유가 생기면서 무언가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던 끝에 양조업에 손을 댔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 양조’라는 회사가 매물로 나왔는데, 연간 양조량 7000섬으로 대구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규모였다. 가격이 10만원을 호가하는데도 이병철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사들였다. 장사가 무척 잘되어 어느덧 그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고액납세자 신분이 되었다.

 

1948년 11월, 이병철은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에 이길수 소유의 건물 330여㎡(100여평)를 빌려 ‘삼성물산공사’ 간판을 내걸었다. 사업자본은 이병철 75%, 김생기·이오석·문철호·김일옥·조홍제 등이 나머지 25%를 냈으며 전무는 조홍제, 상무는 김생기였다. 직원은 20여명이었으나 여느 회사보다 좋은 대우를 해주었고, 참여의식을 높이자는 뜻에서 직원들에게도 조금씩이나마 사업자금을 내게 해 하루 빨리 한국에서 가장 배당률 높은 회사로 만들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6·25전쟁과 1·4후퇴를 겪으면서 ‘삼성물산공사’는 북한군에 의해 회사 자산 일체를 몰수당하고 만다.

 

의기소침한 것도 잠시, 이병철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1951년 10월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새로 설립한다. 전쟁으로 생활필수품마저 모자라는 상황에서 삼성물산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수입, 공급하는 데 한몫을 했다. 생필품 무역으로 큰돈을 벌면서도 그는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이 국민 경제에 무슨 공헌을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에 잠겨 있었다. 일상적으로 쓰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기댄다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이었다.

 

이병철은 국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직접 만들어 값싸게 공급함으로써 국민의 편의를 도모함은 물론 대한민국 자립경제의 기반을 닦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값싼 원조물자가 쏟아져 들어오는 판국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공장을 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말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의 폐허 위에 국내 최초의 근대적 시설을 갖춘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제일제당’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제일제당’을 설립한 지 2년 만에 또다시 수입대체산업 가운데 생필품과 관계 있는 모직산업에 도전했다. 최신 시설의 대규모 공장을 지어 생산원가를 낮추고 품질 좋은 상품을 싼값으로 공급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한국이 제 힘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안에 제대로 상품이 생산되면 내가 하늘을 날겠다”는 미국 업자들의 비아냥 속에서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고, 1년6개월 만에 국제 수준의 대단위 공장을 건설해 냈다. ‘제일모직’에서 만든 국산 모직은 그때까지 국내 모직시장을 휩쓸고 있던 수입 ‘마카오 복지’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병철은 모직 공장을 세우며 기숙사를 먼저 완공시켰다. 기숙사 전관에는 일류 호텔에서나 볼 수 있던 스팀 난방 설비가 깔렸다. 그의 인재 중심 경영은 이때부터 빛이 났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통해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켜 눈부신 성과를 낸 이병철은 1960년대부터 소비재산업에서 중공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식량 증산이야말로 한국의 시급한 선결 과제임을 절실히 느끼고, 그즈음 원조금에 의한 수입품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비료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1969년에 그는 전자산업에 도전했으며, 1970년대 문턱을 지나면서 중화학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그의 사업 행로를 두고 사회 한쪽에서는 삼성이 주로 소비재산업에 치중해 왔으며 이는 한국의 경제 건설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 발전에도 단계가 있음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물론 생산재산업은 국가 경제 발전의 근간을 이루지만 기술 축적도, 자본 축적도 전무한 상태에서 생산재산업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1970년대 초까지 그는 소비재산업의 기반을 굳히는 과정에서 기술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자본을 축적해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충실히 밟았다. 그 뒤 조선, 기계, 석유, 화학, 건설, 반도체 등 더욱 더 적극적인 사업의 변신을 꾀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면서 국가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선택된 길’이기도 했다.

 

이병철과 기업인들은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고 이병철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지금은 그 역할이 줄어들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 수출의 산파 역할을 해온 것은 종합무역상사였다. 1975년 한국에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신설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 권유와 이병철의 실행 덕분이었다.

 

 

▲ 1979년 당시 삼성전자 이코노컬러TV 생산라인.

 

 

그가 일본의 전설적인 상사맨이자 대하소설 ‘불모지대’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세지마 류조 회장에게 물었다. “한국이 일본처럼 세계적인 수출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지마 회장이 말했다.

“한국에 당장 종합상사를 만드십시오.”

그 뒤 이병철에게 ‘종합무역상사 육성을 위한 리포트’를 요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세지마 리포트’였다. 이병철과 세지마 류조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이낙선 상공부 장관에게 지시해 둘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의 일본 육군 사관학교 2년 선배였다.

그는 관동군 사령부의 참모였으나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8년 동안 유형 생활을 하다 풀려나 귀국하여 이토즈상사를 세계적 대기업으로 키운 인물이었다.

 

사실 박정희 생애에 그만큼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관동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은 이미 만주 시절에 들은 적이 있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넘겨받은 한국의 현실은 다 썩어 무너지려는 집안과 다름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세지마 류조를 떠올렸다. 박정희에게 그는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다름없었다.

 

세지마 류조가 경영하는 이토즈상사는 예전에는 일본 재계 서열 2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중견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 경영사상 유례가 없는 ‘종합상사’를 만들어 중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일본 생산품을 팔게 되면서 이토즈상사를 재계 서열 10위권까지 급성장시켰다.

 

세지마 류조와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말했다.

“한국은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습니까?”

세지마 류조는 조국을 살리겠다는 박정희의 진정성 넘치는 너무나 무거운 말에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이제 바다를 건너 세계로 나아가 인재를 팔고 물건을 팔고 아이디어를 팔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현재 한국은 GNP 60달러이고, 북한은 400달러입니다. 예전에 일본이 북한을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는데, 북한이 그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제 바다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수출입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만들고, 그리고 곧 다가올 전자시대에 대비해야 합니다.”

박정희는 세지마 류조의 그 말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고, 나중에 이병철을 만났을 때 세지마 류조와 그가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던 것이다. 1974년 ‘삼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로 확대되었으며, 1975년 5월 종합무역상사 1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그해 삼성물산은 수출 2억달러를 달성해 영예의 ‘2억불 수출탑’을 받았다.

 

이병철의 사업보국 경영이념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를 설득하는 도의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사업을 통해 국가에 힘을 보태는 일은 의무나 헌신의 범위를 뛰어넘어 자신의 삶 자체이며 기쁨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잡지에 이러한 글을 싣기도 했다.

 

“내가 한결같이 사업을 확장해 온 이유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언제까지나 신선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늘 안일함을 혐오하고 굳이 도전과 시련의 나날을 선택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한다는 것은 곧 살아 있음을 뜻한다. 세상을 떠날 때 후회 없이 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에게 후회 없는 삶이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일이야말로 삶의 보람이다. 그리고 좋은 일은 사람,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뜻한다. 기업 경영은 경영자 인생관 그 자체를 반영한다.”

 

 

▲ 삼성전자는 1996년 세계 최초로 1기가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메모리 반도체시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자기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것은 이병철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확고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은 계속된다.

 

“기업을 이용해 사리를 도모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부하를 아는 데 3년이 걸리고 상사를 아는 데 3일이 걸린다고 하듯, 사리사욕을 채우는 경영자는 부하들로부터 곧 인품과 자질을 의심받는다.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위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을 제대로 부릴 수 없다. 또한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영자에겐 뚜렷한 견해가 없으며 확고한 인생관도 찾아보기 어렵다. 선악의 판단도 잘못되기 일쑤이다. 따라서 신상필벌을 엄격히 실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치지 않는 도전으로 자기 삶을 부단히 가꾸어 가는 것도 평범한 사람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시대와 국가의 요구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 또한 녹록지 않다. 양자의 결합이란 모든 인간의 소망이겠지만, 그 소망을 삶에서 실천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그런 뜻에서 이병철의 삶은 뜻있는 삶의 한 본보기였다.

 

그는 중소기업과 대기업, 본사와 대리점, 공급자와 수급자, 근로자와 소비자, 이들 모두가 적정한 이윤을 취하고 각자가 견실한 경영을 추구함으로써 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공존공영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의 공존공영 원칙은 국제사업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는 상대국가에 기술이전을 요구할 때도 그들이 삼성에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원칙으로 삼았다. 과다경쟁을 하는 대신 서로의 이익을 보존하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생산가격을 낮추고 질을 높여서, 그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공존공영 이론의 귀착점일 것이다.

 

국가와 인류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국가와 인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야말로 이병철 사업 인생의 좌표였다. 그러나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기업의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그의 주장이었다. 공존공영의 원칙은 결국 기업의 확실한 이윤과 미래를 보장하는 제일의 합리적 경영원칙이었던 셈이다.

 

1974년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는 커다란 서류 뭉치를 비서실에 건네면서 검토를 지시했다. 부도가 난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한 것이었다.

반도체가 뭔지도 모르던 비서실에서는 충무로에 있는 외국 서점에 가서 ‘반도체(半導體)’라는 글자가 써 있는 일본 서적과, ‘세미컨덕터(semiconductor·반도체)’라고 쓰여 있는 영국과 미국의 서적을 모두 사들였다.

 

일찍부터 반도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이병철이 셋째 아들 이건희에게 반도체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처음에 이병철은 규모가 너무 작아 인수를 망설였지만 인수하고 나서는 크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반도체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반도체 분야는 너무나 낯설었다.

“왜 전도체(全導體)가 아니라 반도체(半導體)라고 한담?”

그래서 궁금한 것을 알 때까지 물고 늘어지며 열성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병철은 일본에 직접 가서 반도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검토하고는, 반도체사업 참여를 결정했다. 대부분의 계열사 사장들이 너무 어렵고 무모한 사업이라며 반대했지만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언제나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인가,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시점에서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이병철은 수원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면서, 18개월 걸린다는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공장을 6개월 만에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그즈음 한국에는 반도체 경험자가 없던 터라 그는 전 세계를 뒤져 한국인 반도체 전문가를 찾아 모조리 발탁했다. 일본 기술자도 영입했다. 그렇게 해서 6개월 만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었지만, 삼성 반도체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 수원에 삼성 공장을 지을 때의 일이다. 계열사 사장 회의에서 이병철은 수원 공장 부지를 142만m²(약 43만평)로 정하라고 했다. 이에 사장들은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그는 굳이 뜻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은 132만m²이다. 우리는 언제고 일본과 일본 기업을 뛰어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그들보다 한 평이라도 크게 지어야 한다.”

 

경영자로서 그가 가진 진정한 덕목은 기업가로서 타고난 열정, 삼성의 패러다임을 바꾼 자유로운 발상과 통찰력일 것이다. 그는 경영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국내외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읽었다. 이병철의 이야기는 늘 군더더기 없이 일목요연했다. 그는 198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반도체 호황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이건희는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사업보국의 ‘보국’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 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이 말처럼 이병철은 나라에 은혜를 갚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한결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과감한 결단과 실천을 거듭해 여러 사업을 일으키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완벽주의·최고주의의 화신 질문으로 부하들 훈련시킨 리더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하)

 

 

1979년 10월 26일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청와대에 유고가 생겼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는 급보입니다.”

 

비서실 보고자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박정희의 죽음! 순간 이병철의 뇌리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비서실 보고자가 무언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이병철의 머릿속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무슨 소리인가, 청천벽력이란 말이 이것인가! 우리 역사에 그만 한 인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나이로는 동생뻘이었지만, 이병철은 박정희에게서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모든 승리는 죽음의 패배로서 끝난다고 한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면 패배는 죽음의 승리로 이루어진단 말인가.

 

문득 박 대통령의 강건하고 다부진 모습이 떠올랐다.

“이 회장, 힘내시오.”

박 대통령의 음성이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서 입가에 조금 웃음을 띤다. 이병철은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1981년 교보문고가 문을 열던 날 이병철은 을유문화사 은석 정진숙과 함께 밝은 얼굴로 대산 신용호의 손을 꼭 잡고 한 손으로 테이프를 잘랐다. 이들 셋은 평생 골프 친구였다.

 

“대산, 애썼어. 정말 수고했소. 도쿄에 가면 야에스 북센터, 산세이도 서점, 기노쿠니야 서점이 부러웠는데 이제 한국도 교보문고가 있으니 됐어. 참 잘됐어!”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이병철과 신용호는 일본에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형서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젊은이의 물결로 꽉 찬 서점은 나라의 진정한 미래를 보여 주었기에, 그들은 서울 종로에 새 건물을 올리면 꼭 큰 서점을 열기로 의기투합했다. 신용호가 그 약속을 먼저 지킨 것이었다. 대산 신용호는 출판계 원로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에게 규모가 작은 서점들의 반발을 막아 달라고 간청했다. 옆에서 이병철도 껄껄 웃으며 거들었다.

 

“내가 보증을 하지요. 은석께서 나서서 대산을 좀 도와주세요.”

 

이윤추구를 기본 생리로 하는 기업가이면서도 언제나 한 개인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 왔던 그는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의 “잉여재산이란 신성한 위탁물”이란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병철은 1965년 개인 주식 10억원 상당과 부산의 임야 33만㎡의 사재를 털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착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적극적으로 막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명품들을 수도 없이 서울로 다시 들여왔다.

지금이야 외국으로 유출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높고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던 1960~1970년대에는 아무도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찍이 민족의 문화 유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선 그는 더 나아가 조상들의 미적 가치를 상실해 가는 젊은이들에게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는 의욕을 갖게 된다. 평생 소중하게 모아 온 소장품 1167점을 문화재단의 사업 일환으로 공영화하여 호암미술관에 기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서예를 즐겨하고, 말년에 이르러 중진 서예가로부터 글씨 지도를 받았던 것도 어쩌면 그의 내면에 예술혼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즐겨 썼던 구절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였다. 빈손으로 귀의하는 그 담담한 무심의 경지, 기업이 단순히 산술적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전과 창조라는 인간 정신의 발현이라는 점을 재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힘들여 번 전 재산을 바쳐 민족정신과 예술정신의 고취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이면 누구나 좌절의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늘의 삼성을 만들기까지 그 또한 몇 차례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쳤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실패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반면, 그는 그 실패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에게 실패란 인간의 그릇을 넓히고 단련하는 훈련의 장이었다.

 

이러한 자기계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병철의 완벽주의, 최고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넥타이 하나라도 최고가 아니면 매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의 과시로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자기계발에의 집착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술품부터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것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던 그는 틈나는 대로 모은 물건들을 어루만지곤 했다고 한다. 아마도 수집한 물건들에서 최고의 것을 만들어 내는 장인의 손길과 위대한 창조의 정신을 느꼈던 것이리라.

 

최고가 되었다는 그 결과가 아니라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 불굴의 창조 의지야말로 이병철 자신의 삶이었으며, 또한 그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는 결코 결과 그 자체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실패에 대해서 그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체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병철은 노력하는 인간, 근면한 인간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노력을 부단히 계속해 왔다. 그의 성공은 성공의 집착이 아니라, 노력의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일 뿐이었다.

 

이병철은 1971년 1월 ‘현대문학’에 게재한 수필 ‘담(淡)’에서 삶이란 결국 죽음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인과연기(因果緣起)의 무상이라고 말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아니라 자신의 용기와 창조, 노력과 도전의 산물인 기업을 남기고 싶어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소망조차 집착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담여수(淡淡如水), 초탈의 세계야말로 그가 마침내 닿고자 했던 무욕무빈(無慾無貧)의 경지였던 것이다.

 

이병철은 그야말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하며 하루하루 살아간 인물이다. 어느 날 그에게 국가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런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유교, 특히 정치와 도덕의 학문으로 유학이 지향하는 바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나를 수양하고 나서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국민을 지도하고 다스리는 국가 경영에 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수양해야 한다. ‘대학(大學)’ 원문을 번역하면 이렇다.

 

“스스로를 바로 하고 닦은 다음 집안을 다스린다. 집안을 다스린 다음에야 나라가 안정된다. 나라가 안정된 다음에는 천하가 태평하다.”

 

이것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도자가 수양을 통해 덕을 쌓아야 기업이 평온하게 발전하고 일하는 이들의 생활도 안정돼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병철은 수기치인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했고 동시에 ‘수기지인(修己知人)’이라는 말도 즐겨 사용했다. 스스로를 바로 해야 비로소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지인’을 실천하지 못하면 ‘치인’은 실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어서 이병철은 명인의 경지였다. 특별한 용건이 있다면 모를까 마주 보고 있어도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30분이든 1시간이든 힘들어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애용품인 워터맨 만년필로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가벼운 맞장구나 ‘예’ ‘아니오’ 정도가 전부였다. 그만큼 그는 경청을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이병철이 멍하니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말투나 말의 내용으로 상대의 됨됨이를 파악했다. 특히 성실한지, 신뢰할 만한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지, 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등에 주목했다. 한마디로 그는 ‘한 번 말하기 전에 두 번 들어라’를 실천했고,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100퍼센트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논어’에 ‘멀리서 보면 다가가기 어렵다. 실제로 만나 보면 의외로 상냥하다. 그러나 그 의견을 들어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엄격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이병철을 만난 손님들의 이야기와 기막히게 일치한다. 이병철은 가끔 그룹 계열사 사장들과 중역들을 불러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나 당면과제 등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때 설명과 대답이 충분히 정리돼 있지 않아 이해하기 어렵거나 정확함, 신속함이 결여돼 있으면, 그는 엄격한 회장으로 돌변한다. 그렇다고 얼굴색이 바뀌거나 큰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조목조목 따질 뿐이었다. 문제는 왜 일어났는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연신 ‘왜’와 ‘어떻게’를 사용해 핵심을 콕콕 찔렀다.

 

이럴 때의 이병철은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상당히 매섭다. 갑자기 지방에 있는 공장을 방문하는 일도 있다. 당연히 공장 측은 느닷없는 회장님의 방문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방문지가 제조업체라면 그는 제품 디자인과 관련해 미국과 일본의 패션이 어떻게 다른지 등을 질문한다. 미국은 기존의 것을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패션을 재창조하는 디자이너가 살아남는 교체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 일본 문화의 주류는 지속의 문화이다. 기모노는 3대에 걸쳐 일곱 번은 고쳐 입고, 이불과 다다미도 목화솜을 틀어 다시 만들거나 겉을 바꿔 몇 년 몇십 년씩 쓴다.

 

이병철은 적어도 이 정도의 답변이 나와야만 만족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칫 긴장을 풀고 자만에 빠질 수 있는 삼성의 현장을 꾸짖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사업 발자취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다. 공장을 짓는 기간은 늘 설계자 측에서 말하는 기간의 절반이거나 그보다 짧았다. 기계 설비를 새로 수입하면 제조업체 전문기술자의 지도 감독 아래 설치하고 시운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그것을 경험 없는 국내 기술자와 함께 도전해 성공했다.

 

설탕, 모직, 비료 등 삼성이 초기 단계에 건설한 공장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절대 불가능하다.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기계 제조업체의 조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성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자금 부족으로 벽에 부딪히면 해외차관 도입에 도전하는 등 스스로 조사하고 궁리해 반드시 이루어 냈다. 초기의 이러한 성공은 그에게 절대적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사람이 하려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 못하는 것은 단호한 의지와 결사적인 노력 없이 모호한 자세로 임하기 때문이다.’ 그의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근원은 이런 확신에 있었다. 최우석은 이병철에 대해 “사업은 추상열일(秋霜烈日·한 치의 미흡함도 없는 완벽주의자), 일 외에는 따뜻한 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이병철은 부하직원들의 가족을 비롯해 그들 신상에 일어난 일 등에 대해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썼고, 편안하게 말을 거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특히 동양방송이 국영방송에 강제 흡수됐을 때 남고 싶어하는 사원은 전원 삼성에 남게 했으며, 삼성을 떠난 사원도 돌아오고 싶어하면 다시 받아주었다. 최우석은 말한다.

“회장님의 그런 면모 때문에 사원들은 회장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고 따랐다.”

이필곤 역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행동이 반듯하며 흐트러짐이 없었기 때문에 부하직원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의 카리스마에 대해 들려주었다.

 

‘논어’는 공자에 대해 “온화함 속에 엄격함이 있고 위엄이 있으나 과격하지 않으며 행동이 공손하고 마음은 평온하다”고 했다. 이병철의 인물상도 온화하면서 불타는 투지가 있고, 위엄이 있으나 두려운 느낌은 없으며, 지극히 정중하고 여유가 있다.

 

그는 문화재단을 통해 인재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삼성장학금제도를 만들었으며, 대학 경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삼성의 발상지인 대구에 위치한 대구대학이 경영난에 처했을 때 문화재단의 힘으로 구제했고, 뒤에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합병되어 영남대학으로 거듭났다.

 

그뿐 아니라 삼성문화재단은 경영난에 빠진 성균관대학을 인수해 운영했다. 인문계 대학에 이공계 학부를 추가해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인재들을 양성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대학이 홀로 설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운영을 정부에 일임하고 일단 문화재단으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국가의 운명은 청년교육에 달려 있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었다.

 

문화재단 설립으로부터 6년 뒤인 1971년에 이병철은 또다시 사재를 처분했다. 금융기관에 그의 모든 재산에 대한 평가를 의뢰한 결과 그 액수가 180억원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를 삼등분해 60억원은 삼성문화재단에 추가 출자하고, 그 다음 60억원은 직계자손들을 위한 생전 상속과 회사에 큰 공적을 세운 사원에게 증여하는 데 썼다.

 

나머지 60억원 가운데 10억원은 사원공제조합에 기부했으며, 그 잔금은 그가 갖고 있다가 뒷날 유용한 용도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재산을 내놓는 것은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똑같다고 하면서도 사회 환원에 대한 자신의 철학에 따라 행동했다.

 

“부는 개인이 쓸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또한 관리할 능력 이상의 재산을 자손에게 남기는 것은 잘못이다.”

 

부의 사회 환원에는 호암미술관의 창설과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수집하고 소장해 온 고미술품 증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화, 골동품 등 그의 민족 미술품 수집 역사는 1982년 4월 호암미술관의 개관으로 결실을 맺는다. 용인 에버랜드 그의 분묘 옆에 세운 이 미술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건면적 4000㎡(1200평)의 규모로 그는 여기에 20억원을 투자했다.

 

그 무렵 호암미술관은 민간 미술관으로는 동양 최대로 알려졌으며 최첨단 습도조절 장치까지 갖춘 이병철의 자랑거리였다. 그는 여기에 자신이 40년에 걸쳐 수집한 고미술품 모두를 기증했다. 이에 따라 호암미술관은 청자, 백자, 금관 등 국보 7점을 비롯해 일본의 중요 문화재에 해당하는 보물 4점을 중심으로 회화, 자기, 붓글씨, 금속품 등의 걸작을 갖추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병철은 자신의 바람대로 인생이라는 석재의 사업을 위해 산 사나이의 위대한 초상을 남겼다. 근대화를 위해 치달린 격동의 시대에 그의 사업 인생은 그대로 조국의 산업화 역사와 맞물려 있었다. 그의 사업 인생이 곧 한국 근대화의 역사였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계급 간 부의 격차보다 세대 간 부의 격차가 커진다는 것은 환상”이며 “격차의 대부분은 같은 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유산 상속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커지면서 소득불평등 또한 점점 심화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속도(자본수익률)’가 ‘사람이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경제성장률)’보다 빠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진다는 뜻이다.

 

역사적이고 통계적인 접근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연구한 피케티의 이론에 따르면, 부는 자본을 소유한 최상위 계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이며 오랫동안 세계 최고 부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빌 게이츠는 해마다 사회에 엄청난 액수의 기부를 하고 있음에도, 2008년 경영에서 물러난 뒤에도 재산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화장품 최대 기업 로레알 창립자의 딸 릴리안 베탕쿠르(Liliane Bettencourt)는 직접 돈을 벌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2015년 현재 세계 3위, 여성으로서는 1위 자산가이다. 이처럼 상속관계로 이어지는 재벌 2세, 3세 등 부유층의 재산은 마치 금융기관처럼 안정적이고 빠르게 수익을 늘리고 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어마어마한 부를 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렇게 차지한 부를 가지고 점점 더 부당하게 재산을 늘려가는 그들의 금권만능주의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얻는 것이야말로 상속으로 얻는 것보다 참된 자기 것’이라는 박정희의 말이 있다. 호암 이병철은 천신만고 산을 넘으며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았겠는가. 한국의 상속자들은 오만함과 자만심에 빠져 이를 바르고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만 같다. 이제라도 선구를 본받아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통한 기업 발전을 지향하고, 더불어 국가적·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활동을 해 국민의 사랑을 받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병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사업가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는 그가 고액의 추징금 부과 파문이 가라앉은 뒤 사원들 앞에서 말했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협조하십시오.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과 결탁해 적산(미 군정청이 몰수한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넘겨받거나 부도덕한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졸부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정한 재산과 관계없이 이만큼 훌륭한 회사를 만들어 온 겁니다. 이 회사를 더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위와 폐에 암이 발병한 이병철은 두 번에 걸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천신만고’라고 표현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철은 1987년 7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 절창(絶唱)을 남겼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일이 잘되어 나갈 때는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 기쁨 뒤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난날의 불행을 잊지 않고 거울 삼는 것이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는 것보다 몇 곱 더 중요하다. 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자라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니다불대 수장선고(泥多佛大 水長船高)’라는 말이 있다. 진흙이란 좋은 흙이 아니다. 더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진흙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상도 더 큰 것을 만들 수 있다. 물이 들고 파도가 거칠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대신 배는 그만큼 높이 올라앉는다. 떫은 감도 정성으로 잘만 말리면 달고 맛있는 곶감이 된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늘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도 필요하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주간조선

 

 

 

--------------------------------

 

 

 

김지하 시인의 오적에 재벌이 그 중 하나다.

재벌이 역사에도 공과가 있다. 자본의 독점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지만 중화학 공업이나 반도체 사업은 재벌이 아니면 꿈도 못꿀 일이다. 과거 경제발전 모델을 일본을 벤치마킹한것은 맞다. 그렇다고 친일파는 아니다.

일본의 재벌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2차대전은 일본 재벌이 한 것이나 다름없다.

 

반도체는 "황금알"이다.

중국이 뭐든 짝퉁을 만들어도 이건 못만든다. 온갖 값싼 제품을 바리바리 한국에 팔아도 단 하나 "반도체" 수입액에 못 미친다. 현재 중국입장에서 미칠일이다.

 

과거 반도체 사업은 너무 투자액이 많아 미국,일본도 섣불리 손을 못대던 분야이다. 삼성에 대해 외국에서 재벌의 문제를 들먹인 적도 있었다.

 지금 한국이 이나마 큰소리치며 먹고 사는건 반도체 때문이라해도 틀리지 않다.

삼성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공로는 인정해야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