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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동행선언(출33:12-23)-2024.6.16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직접 상종하지 아니하시고 모세와만 상대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바보’이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딸 바보 아빠’라고 말입니다. 오직 딸만 사랑하는 아빠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다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바보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와만 상종하신 것입니다. 속칭 죄는 이스라엘이 짓고, 회개는 모세가 하는 격이었지요. 그런 모세는 자기 목숨을 담보하며 기도합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지 않으시려면 자기 이름을 주의 기록한 책에서 지워달라고 말입니다(출32:32).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바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바보’, ‘모세는 이스라엘의 바보’였던 셈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백성들 때문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잘 아는 모세의 기도는 간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의 간절함은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들을 용서해달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요,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는 죄사함을 포함하여 각종 은혜가 다 포함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충족시켰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12-13절). 그 은총가운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13절하).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결별선언을 하셨거든요. 하나님의 결별선언으로 호칭부터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는 말을 거두시고, 모세의 백성처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줄곧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출3:10).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 이후로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그 심각함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호칭문제를 거론합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13절하). 먼저 호칭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관계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모세는 알았던 것이지요. 사실 호칭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관계도 호칭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거든요. 영적문제도 마찬가지구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호칭문제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모세는 호칭문제로 예민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모세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비록 표면적일지라도 호칭문제는 회복을 위한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호칭문제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 지속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상당히 누그러지셨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의 기도가 인격적인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인격적인 기도라 함은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모세는 인격적인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백성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자기들을 가나안에 올려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가나안보다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광야가 낫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도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라면 인격적 기도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인격을 구성하는 지정의의 소통이 가능한 존재라는 말이지요. 모세의 기도는 충분히 인격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받은 것을 무엇으로 알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증거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의 차별적 관계가 아니냐는 말입니다(16절). 그의 기도는 설득력이 있는 지극히 성경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도 인격적으로 응답하십니다(17절). 모세가 말하는 의도를 하나님이 충분히 아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가 기도한 것을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또한 모세의 이름만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임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17절).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모세와의 관계로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는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관계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되 모세를 통해서 사랑하십니다.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면 하나님은 모세 때문에라도 이스라엘을 선대하십니다. 모세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때문에 모세는 자기 목숨보다 이스라엘의 운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 역시 하나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모세는 먼저 자기 백성들을 주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라는 기도였습니다(13절).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동행해 주시라는 것입니다(15절). 또한 자기들의 가는 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13절). 무엇보다 모세의 기도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지요(18절). 이를 근거로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17절)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어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아야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관계는 틀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설령 관계를 맺고 살지라도 정상적인 관계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지요. 특별히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관계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기도를 우선했습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누구보다 모세를 잘 알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도 그런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백성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1절). 그런데 모세와 함께 올라갈 자를 지시하시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를 혼자 보내지는 아니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자를 먼저 그곳으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출32:34, 33:2).
물론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십니다. 모세가 가는 길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눈에 보이는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지시하지 아니하셨다고 투정을 부립니다(12절). 이것이 바로 인간 모세의 한계입니다. 모세가 이런 표현을 당돌하게 하는 이유는 당시 모세의 형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로서 해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자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모세는 이제 든든한 다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직이 모세 곁에 여호수아를 붙여놓고 계셨습니다. 그는 모세의 시종으로 2인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도 여호수아는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수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동행을 위한 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억합니다. 하나님이 전에 자기에게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셨고,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은 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12절하). 그는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를 알고 부르셨고, 자기를 부르신 자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당신이 누구신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출3:1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핵심은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13절하). 저는 이 기도가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이 문제가 선행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사 그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출19:5).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관계를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제 이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해주시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문제를 거론한 것입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자기 백성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세의 백성인 것처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만큼 불편하셨음을 방증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세는 알았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나 실제적인 기도입니까? 매우 인격적인 기도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어느 백성이냐는 문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아니라면 비참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시작했지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부터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아니면 동행하지 아니하시거든요.
(2)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16절)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에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슬픈 통보였지요. 더 이상 이스라엘과는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결별선언이었거든요. 사귀는 사람과 이별을 해도 슬프거든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의 결별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런 슬픈 통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슬픈 통보는 모세로 하여금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가나안에 올라가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올려 보내지 말라고 기도한 것입니다(15절). 하나님이 없는 가나안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천국이 천국인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눅17:21).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는 자는 어디 있든지 천국을 경험하고 사는 자라는 말이지요. 천국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입니다. 천국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나안도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갈 이유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15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실 거라면 지금 있는 이곳에서 가나안으로 자기들을 올려 보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세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한 가지 결정적인 증거로 인하여 자기들이 천하 만민 중에서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논리입니다.
그 이야기인즉 만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기들과 동행하지 않으신다면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방인들이 과연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만일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한다면 이방인들이 입방아를 찧어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망신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충분히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인격적인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말씀을 기초로 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이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인도해 가시는 과정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심을 알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난 부분을 말씀의 정과 끌로 다듬어서 양육해 가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모세는 넘어졌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수많은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모세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합니다(22-23절)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 증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18절).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은 자기들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지요. 물론 본문에서 모세가 간구하는 주의 영광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은 특정한 몇 가지로 결정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직접 보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최고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11장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임마누엘로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본문에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크게는 하나님이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떠나지 아니하셨음과 그들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볼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지요. 모세의 기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좁은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개인적인 시각으로 말입니다. 얼마든지 성경은 주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보여 달라는 하나님 영광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모세와 친근함이 이스라엘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모세가 모를 리 없습니다. 나이 80세의 노인을 하나님이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세 한 사람의 영달을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비록 개인적으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지 몰라도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럼 모세가 개인적으로 주의 영광을 보기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산 밑에서 자기 형 아론과 백성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하나님의 황급한 명령을 받고 산 아래로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했습니다. 자기 손에 들려진 두 돌판을 자기 백성들에게 던져서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지요(출32:19).
그리고 깨어진 돌판을 불살라서 부순 다음에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린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한 것입니다(출32:20).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이 없습니다. 그 두 돌판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키고 살아가야 할 영광스러운 지침서였던 것이지요. 두 돌비는 십계명이요, 십계명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모든 언약의 축소판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지침서가 그들에게 없습니다. 이미 깨어지고 불살라져 흐르는 물에 뿌려지고 말았지요.
이제 그 지침서를 새로 받아야 합니다. 돌비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 기도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두 돌비의 언약을 허락해달라는 청원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조건없이 응답하십니다. 34장1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친히 돌판에 하나님의 언약을 새겨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언약을 다시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관계를 정상화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분노가 풀리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언약의 축소판인 두 돌비를 다시 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인 것이지요. 물론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비록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모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죽은 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죄로 얼룩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상종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만나는 순간 자동 소멸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은 한번도 빛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빛도 마찬가지지요. 때문에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4:12). 하나님을 볼 자도 없고(딤전6:16),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출33:20).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소개하십니다(골1:15).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계시해주신 것입니다(19절).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모세 앞으로 지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세 앞에서 반포해주신 것입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신 것이지요.
다만 모세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반석 틈 사이에 감추었다가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신 다음에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비록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등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이지요.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바라보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는 당신의 영광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드러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사 이방의 빛을 삼아 그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려하심입니다(행13:47, 사42:6,49:6). 물론 신명기서7장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심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적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그 단순한 논리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보다 더 적은 민족이 없었겠습니까? 그 말씀의 의도는 선택의 주권이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으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말미암아 선택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심도 하나님의 몫이요, 이스라엘을 버리심도 하나님의 몫인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할 백성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죽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살 때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고 살 것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린 것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비록 한순간의 실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총력을 기울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회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구하고 찾는 자를 외면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화목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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