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재정비
방 안으로 들어선 김상철은 잠자코 소파로 다가가 이유미의 앞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한두 점씩 눈발이 보이는 흐린 날씨였다.
이유미는 스웨터에 바지 차림으로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몸을 굳힌 이유미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다. 끌려오고 나서 처음으로 그를 만나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시바다와의 관계 때문에 잡아두자는 말들이 있었지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었어.」
김상철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군, 시바다 정부(情婦)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어서.」
「그냥 부탁만 받았을 뿐예요, 심부름만.」
무릎 위에 두 손을 움켜쥔 이유미가 그의 시선을 받았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을 쳤고 목소리가 떨려 나온 것은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예감 때문이다.
「아는 사실은 모두 말했어요. 시바다의 은신처나, 구좌번호, 그리고 그가 했던 이야기를 모두‥‥‥」
「넌 기회만 있으면 다시 그자와 만날 여자이고 언제든지 나한테 해를 끼칠 인물이야, 너는 악의가 없다고 하겠지만 말이지.」
「그렇지 않아요.」
눈을 크게 뜬 이유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전 이제 안인석 씨하고도 연락을 끊었어요. 당신한테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고 유감도 없어요.」
「시바다의 정부인 너를 인질로 그놈을 끌어들이자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놈이야 끌려들지 않겠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거야, 나하고 인과관계가 없다니 그럼 그렇게 하지.」
「‥‥‥‥‥」
「널 만난 남자는 모두가 불행해졌다. 안인석은 물론 네 전남편, 그리고 시바다. 물론 시바다야 직업적인 관계겠지만 어쨌든 …」
「날 보내줘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테니.」
이제 얼굴을 하얗게 굳힌 이유미가 말했다.
크게 뜬 두 눈에 가득 물기가 배어져 있었는데 이윽고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상철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내였으므로 무력감에 휩싸인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서울에 돌아가 있어. 일이 수습될 때까지.」
「사건이 정리되면 그땐 다시 나와도 돼. 당신은 그땐 스폰서가 모두 없어졌을 테니 내가 뒤를 봐 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한 자가 선이었고 배신당하고 이용당한 자는 약자였어. 당신을 나무랄 수만도 없어.」
「시바다의 행방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김상철을 향해 변순태가 말을 이었다.
「지금 오리엔트 호텔 근처는 어수선합니다. 시바다의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호텔과 카지노의 금고를 부숴 현금을 털었고 서류를 태우거나 찢어 던지는 바람에.」
콘티넨탈 호텔 지하실에 있는 사무실 안이었다. 테이블 주위에 둘러않은 사내들은 김상철과 이한, 그레고리와 변순태, 그리고 오다 센자부로 등이었다. 아침 10시였지만 지하실이어서 천장의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다. 그레고리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새끼는 겨우 몇 시간을 버티려고 그 짓을 했군.」
유창한 한국말이다. 그가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잡아서 없애 버립시다.」
조금 전 근대리아 정부에서는 어젯밤 사건의 수습책으로 오치호를 해임시켰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이대각이 경비본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경비대는 김상철의 요구대로 시바다와 그의 부하들을 체포할 계획이었다.
오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돌아가겠습니다.」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머리를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이대각에 의해 겨우 궁지에서 빠져나온 그는 이한과 합류해 있었던 것이다. 오다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정부 측에서 전남수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어. 강미현이 가로막고 있는 모양이야.」
한숨도 자지 못한 터라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이번에 강미현은 너무 서둘렀다. 시바다를 잡으려고 우리가 압박해 오자 경비대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전에 일을 벌인 거야. 물론 일이 잘 안 되어도 우리가 어쩌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도 있었을 것이다.」
근대리아의 주인은 근대그룹인 것이다. 그것은 임차계약에도 나와 있는 상황인 만큼 근대그룹의 소유주인 강씨 일가는 러시아로부터 근대리아의 통치권을 보장 받은 셈이었다. 강미현은 그것을 믿은 것이 틀림없었다.
김상철이 이한과 변순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너희들은 시바다를 찾아라. 그놈은 아마 근처에 있을 것이다.」
「강미현과 전남수는 서로 연락을 하고 있겠지요.」
변순태가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치호와 경비대 간부 몇 명을 해임시키는 것으로 총독은 일을 수습할 계획이야. 뿌리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 밑 몇 개만 자른 것이다.」
그는 입술만을 비틀어 웃었다.
「이대각 씨를 본부장에 앉힌 것은 고도의 용병술이다. 이대각 씨를 완충 역할로 이용하려는 거야.」
근원은 강미현과 김상철의 반목이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김상철에 대한 강미현의 견제였다. 따라서 그의 말대로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시바다와 전남수가 제거되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의 상황인 것이다.
근대공항의 출국장은 사면이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활주로는 물론 근대시로 향하는 고속도로도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다.
동쪽은 횐 눈에 덮인 대평원이었다. 눈이 내릴 것 같은 흐린 날씨였으므로 짙은 회색 하늘에 깔린 지평선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광활한 대륙이다. 인간은 물론 짐승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던 땅이었다.
머리를 돌린 박기동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시 10분이었다. 이제 손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빈손으로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입장이다.
저도 모르게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금액으로 계산하면 천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쥐었다가 순식간에 무일푼이 된 것이다. 5년 동안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번 돈이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기는 했다. 이번에도 김상철이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저쪽 평원의 눈 밑에 누워 있게 되었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옆자리에 않았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었다.
「아니?」
놀란 그가 입과 눈을 딱 벌렸다 안인석이었던 것이다
「여기 웬일이시오?」
「나도 서울 갑니다.」
그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그도 손가방 하나만을 든 차림이었는데 박기동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다.
「어쨌든 살아서 다행이오, 반갑습니다.」
박기동이 부드럽게 말하자 안인석이 쓰게 웃었다. 안내방송이 들렸으나 서울행은 아니었다.
「그런데 안형, 그 이유미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풀려났나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긴 시바다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모양이군.」
사람을 상대할 때 언제나 활기를 보이는 것이 박기동의 버릇이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듣자하니 어젯밤에 전세가 두 번이나 뒤집혀졌던 모양이오. 시바다는 다시 도주했답니다.」
「나는 이제 관심 없습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요.」
「김상철과 총독과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젯밤은 전초전이었을 뿐이오.」
그러자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박사장은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물론 다행이지.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으니까.」
「허나 살아남았으니 다시 궁리를 해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난 근대리아에 있는 모든 재산의 포기각서를 쓴 대가로 살아 나왔으니 누구한테 빚진 것도 없어요.」
「‥‥‥‥‥」
「안형이야 김상철이하고 오랜 인연이 있었으니 나하고는 입장이 다릅니다.」
「인연은 무슨, 이젠 악연뿐이오.」
「내 재산을 찾겠어, 나는.」
박기동이 활주로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이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오.」
「설령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이라도 하면서 살아야 살아갈 힘을 얻을 거요.」
이번에는 그들이 타고 갈 서울행 비행기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탑승객의 대열에 끼어들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이남호의 사무실 안이다.
다소 지친 표정의 이남호가 테이블 건너편의 강미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흐렸던 하늘에서 한두 점씩 눈발이 보이기 시작하는 오전 열두 시경이다.
「이번 일로 김상철과는 완전한 적대관계가 되었어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면 안 돼요. 이젠 수습할 차례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가씨.」
전에는 반말을 썼으나 요즘은 존대를 한다. 하지만 훈계조는 여전히 남아있다.
강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장님은 이번 일로 김상철의 진면목이 확인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왜냐하면 그냥 앉아서 당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우리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자가 먼저 숨통을 조여 왔을 거예요.」
「아가씨가 노골적으로 견제세력을 키워 왔기 때문이오. 시바다 겐지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로부터도 수배 받고 있는 인물을 말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강미현이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남호가 담배를 꺼내 들었으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대각과 장동택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일이 성공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랬을 수도 있었어요.」
「어젯밤 김상철은 총 한 발 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아예 저택에서 철수했단 말이오.」
「이대각과 장동택을 경비대에 복귀시킨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현 상황에서 김상철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그들 뿐이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짙은 연기를 테이블 위로 뱉었다.
「아가씨, 근대리아를 파국으로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아가씨는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너무 서두르기도 하고.」
강미현이 잠자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라는 것을 이남호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총독께서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어젯밤의 상황을 아가씨는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으셨더군요.」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렇다고 전남수에게 경비대 트럭을 빌려줘서 김상철을 공격하게 한 것은 잘못입니다. 김상철은 모두 알고 있단 말입니다.」
「경비대 안에 스파이가 있었어요.」
「그것은 이유가 될 수가 없어요. 아가씨.」
마침내 이남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김상철은 아가씨의 귀국을 요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놀라실까봐 내가 아가씨께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까지 말했단 말이오.」
그러자 강미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는데 입술 끝을 떨었다.
억지웃음이다.
「그러리라고 예상했어요.」
「우리는 그놈에게 명분을 주었단 말이오.」
「우리 힘이 약하다는 핑계밖에 되지 않아요. 그 말은.」
「총독은 유장석과 이대각에게 중재를 맡겼습니다.」
「점점 김상철의 위상이 높아져 가는군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솔직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남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난 아가씨를 곁에서 겪어 보아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놀랍니다. 저돌적이고 결단력이 강한 건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겉과는 달리 치밀한 분이오.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아가씨의 역량과 재능을 시험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요.」
「‥‥‥‥」
「도대체 왜 그렇게 서둘렀습니까? 김상철이 체류 허가증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말이오.」
자리에서 일어선 강미현이 이남호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로 많은 걸 알게 되었어요. 물론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녀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올렸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소득이에요. 물론 두 번 다시 이런 실패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찻잔을 내려놓은 전남수는 부하로부터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전남수올시다.」
「나, 한용식이오.」
경비대의 총무국장 한용식과는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한 사이였다.
「한국장, 지금 어디시오?」
전남수가 서두르듯 물었다.
오늘 아침부터 그와는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경비본부장이 이대각으로 재임명되고 오치호가 해임되어 대기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침 9시경이었다. 상황이 끝난 것이다.
김상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전세를 뒤집었는데 그것은 그의 막강한 조직이 결집되어 있는 데다 경비대 내부의 반란 때문이었다.
「난 지금 대아센터에 와 있어요. 이층의 밀실에 있습니다.」
한용식이 차분하게 말했다.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바로 와 주셔야겠는데.」
「가지요. 지금 당장.」
대아센터는 경비대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빌딩으로 경비대 간부들의 모임장소로 자주 쓰이는 곳이다.
이층의 밀실이면 중국식당으로 한용식과 자주 만난 장소였다.
「그런데 한국장은 괜찮습니까?」
생각난 듯 전남수가 묻자 그는 피식 웃는 것 같았다.
「난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럼 오본부장은?」
「대기발령 상태지만 곧 회복될 거요.」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기세에 잠시 밀렸다지만 배후에는 절대자인 총독 일가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전남수의 얼굴에 모처럼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배국철과 이응만을 불러라. 지금 대아센터로 간다.」
배국철과 이응만은 그의 심복으로 한국에서 지방 도시를 휘어잡고 있던 보스들이다.
그들은 전남수와 함께 거대한 대륙에서 뜻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제까지는 그것이 실현되어 가는 중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그들이 들어서자 전남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아센터로 한국장을 만나러 간다. 준비하도록.」
이한에게 이빨이 몽땅 부숴지고 나서 그는 틀니를 해 박았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리고 매사에 철저한 성격의 전남수였다.
그의 사무실 빌딩 안에는 백오십이 넘는 부하들이 있었고 움직일 때는 미국 대통령 못지않은 경호를 한다.
그가 대아센터의 현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건물 안에는 헬스클럽과 사우나가 있었으므로 로비에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경비대원들도 섞여 있었다.
배국철과 이응만, 거기에다 십여 명의 경호원까지 대동한 그는 곧장 이층의 계단을 올라 중국식당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종업원이 다가와 그를 안쪽의 밀실로 안내해 갔다. 밀실에는 한용식이 혼자 앉아 요리접시를 앞에 놓고 중국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어서 오시오, 전사장.」
그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오본부장이 움직이기가 조금 불편해서 내가 왔습니다.」
「어쨌든 다행이오, 한국장은 별 탈이 없다니.」
자리에 앉은 전남수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김상철이를 쳤을 때는 이미 빈집이었어요. 경비대 내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한용식이 전남수의 잔에 고량주를 채웠다.
「시바다 겐지가 다시 잠적한 바람에 오다가 대숙청을 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것도 전남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오다 센자부로는 우선 오리엔트 호텔의 관리책임자였던 나까야마의 목을 베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나까야마는 시바다가 모습을 내밀자 재빠르게 그에게 가담한 오다의 부하이다.
그리고 오다는 수십 명의 간부급 가담자를 잡아들이고 있었는데 김상철의 부하들이 그를 돕는다는 것이다.
「경비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대각이와 장동택이 자리를 차고앉았으니 거북하지 않겠습니까?」
말머리를 돌린 전남수가 요점을 물었다.
「아마 조금은 그렇겠지요.」
한 모금에 술을 삼킨 한용식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총독이 건재하고 있는 한 우리가 걱정할 것은‥‥J
문이 열렸으므로 그들은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경비대 간부 두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깨의 견장을 보면 과장급 간부였다.
그들은 한용식의 양쪽에 서더니 전남수를 바라보았다.
「죽였다는 증거로 목을 베어가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셔서.」
사내 한 명이 자신을 향해 말했으므로 영문을 모르는 전남수가 한용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용식의 얼굴이 이미 돌처럼 굳어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 순간 사내들은 일제히 권총을 뽑아들었다.
총구에 소음기가 끼워진 긴 총신이 자신에게 겨누어지자 전남수가 한용식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날 배신하다니.」
그러자 사내 하나가 웃었다.
「나는 김사장님의 부하로 변순태라는 사람이다. 사무실에만 숨어 지내니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겠지.」
그는 총구를 전남수의 이마를 향해 겨누었다.
「이층에 올라온 네 부하들은 모두 죽었다. 네가 마지막이여.」
전남수가 크게 뜬 눈으로 변순태를 바라보았다.
이미 얼굴에는 핏기 한 점 보이지 않는다.
다음 순간 변순태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면서 낮고 둔한 발사음이 났다.
벌떡 머리를 뒤로 젖힌 전남수가 의자와 함께 방바닥으로 넘어지자 변순태는 테이블을 돌아 확인하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마 한복판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전남수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전남수를 비롯한 그의 간부급 부하 두 명이 경호원 여덟 명과 함께 중국식당에서 몰사했다는 소식은 한 시간도 안 되어 근대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근대시의 북한대표부 안이다.
환하게 불을 밝힌 회의실에는 대표부의 간부들이 소집되어 있었는데 의제는 물론 전남수 사건이다. 박기환이 입을 열었다.
「경비대는 시체들을 공립의료원 영안실에 옮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전남수가 중국식당에 누굴 만나려고 갔나?」
서일이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대표동지.」
「그곳은 경비대 간부들이 자주 가는 곳입니다. 전남수는 그곳에서 오치호와 한용식 등 간부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이금철이 대신 말했다.
「경비대원이 가득 차 있는 건물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는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을 수는 없습니다. 경비대의 협조가 없는 한 말이지요.」
「일리가 있어.」
서일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각과 장동택이 다시 경비대를 장악했고 그자들은 김상철의 인맥이야. 그렇다면 경비대가 도왔겠군.」
「경비대가 사건을 재빨리 덮어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와도 맞습니다.」
그러자 서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강미현과 총독이 김상철의 세력에 밀린 증거라고도 볼 수가 있어. 강미현의 세력이 잘려나가는 것이 말이야.」
「아마 타협을 한 것 같습니다. 대표동지.」
그렇게 대답한 것은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장호성이다. 그가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서일을 바라보았다.
「정부가 불리한 상황을 잠시 모면하려고 말입니다.」
「김상철이 정부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있을까?」
서일이 탁자 위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이 벽의 한쪽에 고정되어 있다
「러시아와 근대의 계약에는 근대리아의 임차인은 근대그룹의 강우진으로 되어 있어. 총독은 명실상부한 근대리아의 주인이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은 그의 가계만이 근대리아를 통치하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어. 공식적으로 김상철이 근대리아를 전복할 명분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정부의 요직과 기간시설, 주요사업장을 장악하면 총독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총독은 그것 때문에 김상철을 견제한 것이지요.」
장호성이 말하자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석에 앉은 최태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는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북한은 이미 근대리아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은 상태여서 근대리아의 장래에 무관심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시간에 이대각은 승용차의 뒷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승용차는 근대시를 벗어나 북쪽으로 뻗은 고속도로 위를 총알같이 달려가는 중이다.
「전남수를 대신할 관리자는 제가 찾아보도록 하지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대각이 말하자 강미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장동택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시바다가 남아 있지만 곧 잡히겠지요.」
「꼭 그랬어야만 했나요?」
강미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또렷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담당관님.」
「그 정도로 끝낸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김상철은 오늘 밤 안으로 일을 벌였을 겁니다.」
「‥‥‥‥」
「그리고 그 여파가 담당관께 미칠 것이 틀림없었지요.」
「잘 알았어요.」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고하셨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대각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불만인 모양이군. 내 처사가.」
그러자 장동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임시방편으로 우리를 재임용했지만 불안하군요. 언제 뒤에서 총을 맞을지 모릅니다, 본부장님,」
「설마, 그럴 리야. 아무리 총독의 후계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는.」
「이번에는 이것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본부장님과 저를 김상철의 인맥이라고 믿고 있는 이상은.」
머리를 든 이대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경우에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상황에 따를 밖에요. 법대로 진행시킨다고 하면 개도 웃을 노릇이니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신하겠습니다.」
「…………」
「김상철은 조직원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의 조직이 주민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도 김상철 때문이란 말입니다.」
「글쎄, 그걸 누가 모르나? 총독도 그럴 목적으로 김상철을 내세웠었어.」
「그런데 지금 와서 자리가 위험하다고 그를 치다니요? 제가 보기에는 김상철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강미현의 노파심이 이런 분란을 만든 겁니다.」
「솔직히 장래가 염려됩니다, 본부장님.」
「똑똑한 여자야. 할아버지 못지않아.」
「여자는 여자지요.」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각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강미현뿐만 아니라 총독도 이제는 김상철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들은 더욱 김상철을 경계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다시 폭발할 소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미현 쪽에서 일어난다.
장동택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숨을 뱉었다.
「저는 전직이 안기부 직원이었고 제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제가 자원해서 이 눈밭에 온 이상 제 소신대로 일하겠습니다.」
이대각이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는 눈치였는데 찾지 못하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내가 근대밥을 이십 년이 넘게 먹다보니까 근대 사람이 되었어. 총독의 말씀이 곧 법이고,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내 사명이 되었지. 솔직히 난 주관이 없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어. 하나는 내 생명의 은인이고 또 하나는 내 인생의 교사였으니까.」
중국인 거리의 홍등가는 골목이 좁은 데다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대문마다
붉은색 종이등을 달아 놓았다.
종이등에는 갖가지 상호가 씌어져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었다.
따라서 손님들은 단골집의 특징을 기억해 두었다가 찾아 들어간다.
화구(花九)장의 특징은 문짝에 알루미늄 판을 댄 것이었다.
집주인 적씨가 근대시의 공단에서 주워 온 것으로 그것이 밤에는 희게 보였으므로 찾기가 쉬웠다.
사또 이사무가 이시까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사내가 다가와 가로막듯이 섰다.
「아는 여자 있소?」
한눈에 이쪽이 일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으로 일본어로 묻는다.
사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문 안은 바로 다섯 평쯤 되어 보이는 대기실이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사내는 그의 시선을 일제히 피했다.
「매영을 불러 줘.」
「롱이오. 숏이오?」
「롱이야.」
「그렇다면 지금부터 오백 달러야. 열두 시 넘으면 삼백 달러로 깎아줄 수 있어.」
「지금부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 사또가 계산을 치르자 사내는 이시까와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은?」
「나는 아무나.」
이시까와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사또도 그렇지만 그도 중국인의 홍등가는 처음이었다. 만족한 표정의 사내가 커튼을 들치고 안쪽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소파에 않았다.
「시간은 별로 안 걸릴 것이다. 삼십 분 후에 대문 앞으로 나와 있어.」
사또가 이시까와의 목덜미에 대고 낮게 말했다.
「주의해라. 안에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바다 겐지가 데려온 부하 한 명이 화구장의 매영과 단골관계라는 정보를 얻은 것은 오늘 오후였다.
시바다가 다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그와 그의 부하 오십여 명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오다는 예민해져 있었다.
시바다와 내통했던 부하들의 숙청작업도 이미 끝난 상태였는데 간부급은 목을 잘랐고 말단은 총살을 했다.
처음에는 김상철이 부하들을 보내어 오다를 지원했지만 이틀 후에 일본에서 이백 명 가까운 회원이 몰려와 조직을 보강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원흉인 시바다와 그의 부하들이 살아 있는 한 일이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오늘도 중국인 정보원에게서 들은 신빙성 없는 정보였지만 허탕을 칠 셈치고 찾아온 것이다.
커튼이 열리더니 중국인이 대기실로 나왔다.
「당신은 7호실로.」
그가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내 중의 하나에게 중국어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
그는 이제 사또를 바라보며 일본어를 썼다.
「당신은 5호실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사또는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웠다.
복도 위에는 조그만 전등 하나가 달려 있을 뿐이어서 방문 위쪽에 붙여진 호실 번호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집은 일자형 구조로 좌우로 벌려져 있었는데 바로 눈앞이 4호실이다.
먼저 들어간 사내는 어느 틈에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또는 우선 복도의 좌측으로 두어 걸음 들어섰다.
그러자 방문 위에 붙여진 석삼(三)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반대쪽이다. 방음장치가 제법 되어 있는 모양으로 방 안의 소음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아서 복도는 조용했다.
커튼 앞으로 지나칠 적에 커튼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복도로 들어섰다.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사또가 멈춰 섰으므로 젖혀진 커튼 사이로 대기실이 드러났는데 이시까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들어선 사내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는 익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멈춰 섰던 사또는 대기실의 커튼을 젖혔다. 대기실은 비어 있었다.
중국인 사내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숨을 들이쉰 사또는 허리춤에 찔러 둔 베레타를 뽑아 쥐었다. 대기실의 출구는 현관뿐이다.
그가 다시 복도 안으로 모습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복도 끝 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고 그 순간 둔한 발사음과 함께 사내에게서 흰 섬광이 번쩍였다.
사또는 왼쪽 어깨를 치는 강한 힘을 느끼면서 손에 쥐고 있던 베레타를 겨누어 세 발을 쏘았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집 안을 울리면서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함정이다.
그 순간 ~호실의 문이 열리면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또의 베레타가 다시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사내가 문틈에 끼면서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쪽의 현관문이 와락 열렸다.
구두를 신은 채로 성큼 대기실로 뛰어든 사내는 안내를 맡았던 중국인이었는데 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와 사또의 권총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다시 요란한 총성이 났고 가슴을 맞은 사내가 몸을 젖히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시 한 발의 총탄이 그의 배를 관통하자 그는 벌떡 뒤로 넘어졌다.
사또는 대기실로 뛰어 들어가 아직도 사내가 움켜쥐고 있는 스미스 앤 웨슨을 빼앗아 왼손에 쥐었다.
양손에 권총을 쥔 그는 커튼을 향해 한 발을 쏘고는 한 발은 현관 밖을 향해 쏘았다.
그 순간 현관 앞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형님!」
그의 부하 목소리였다.
사또는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손에 든 총을 난사할 기색이었다.
그의 앞에는 여자 다섯에 남자 두 명이 꿇어앉아 있었다.
이들이 화구장에 남아 있던 손님과 색시 전원이다.
화구장은 본래 방이 9개에 색시도 9명이었던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7개의 방에 색시는 5명뿐이었다.
안채에 있던 주인은 도망쳐서 보이지 않았고 이시까와의 행방도 아직 모른다.
총성을 듣고 달려 온 부하들이 화구장의 안팎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언제 경비대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또는 총구를 매영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20대 후반의 가냘프게 생긴 중국 여자이다.
「시간이 없다. 이년을 끌고 나가라.」
부하 두 명이 달려들어 매영의 양쪽 팔을 움켜쥐었다.
그들이 골목을 벗어나 길가에 세워둔 차로 다가가자 앞쪽 사거리를 꺾어 들어오는 순찰차는 세 대나 되었는데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둘러 차에 오른 그들은 곧장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대열 속으로 끼어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경비대를 피한 것이다.
화구장 사건을 변순태가 들은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그렇다면 그 주인 놈을 잡아라.」
변순태가 즉시 말했다. 중국인 거리는 달려서 10분 거리였던 것이다.
부하들이 뛰쳐나가자 변순태도 분주했다.
우선 근대시의 로얄 카지노에 있던 이한에게 전화 보고를 한 다음 삼합회의 양필성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 죽은 놈들이 시바다의 부하가 확실하다면 주인 놈이 수상합니다. 우리도 그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양필성의 언짢아하는 표정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사또가 데려간 여자한테서 나온 정보는 없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이제 겨우 십 분이 지났을 뿐이어서.」
변순태는 오다 센자부로한테서 직접 협조요청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시바다를 찾는 문제는 오다와 김상철 두 세력이 같은 열의를 보이고 있다.
양필성과의 통화를 끝낸 변순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9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운의 거리가 가장 활기를 띠는 시간이다.
인구 500만의 근대리아에 타운은 거주민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발전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도 20만이 넘었으므로 찾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나다.」
그의 응답소리를 들은 김상철이 대뜸 말했다.
「여자가 털어 놓았다. 시바다의 부하 나까무라가 임시 주거지역 18동 706호에 살고 있다는 거야. 705호와 704호에도 부하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거야.」
「예,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오다 씨의 부하 가와베와 사또가 그쪽으로 갔다. 그들과 협조하도록.」
「예. 사장님.」
오다 센자부로가 김상철에게도 협조를 부탁한 모양이었다. 김상철은 시바다와 씻을 수 없는 원한관계가 있다.
2년 전 근대리아의 남쪽 철도역에서 그는 장인규와 이한의 여자인 황윤 등 모두 십여 명의 식구를 잃은 것이다.
그 중에는 장국진의 유가족인 두 모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상철은 두고두고 그것을 애통하게 여겨 왔었다.
변순태는 탁자 위의 벨을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시 주거지역은 타운의 변두리에 세워져 있어서 차로 3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김상철이 숙소로 정한 곳은 리조트 시티 안의 빌라였다.
구릉 위에 세워진 빌라 정면으로 스키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뒤쪽은 울창한 숲지대여서 경관이 좋았다.
그가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박미정이 시선을 들었다. 밝은 색 원피스 차림에다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산뜻한 모습이었다.
「이곳이 오히려 아늑하고 더 편해요. 경치도 좋고.」
박미정이 눈으로 창 쪽을 가리켰다.
「마치 캘린더에 나오는 그림 같아요.」
물론 통나무 담장에 둘러싸인 저택보다 경관이야 좋겠지만 아늑하고 편하다는 말은 지어낸 것이다.
빌라는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임시 주택이어서 좁은데다가 가재도구는 물론 입을 옷까지 몽땅 태워버린 신세였으므로 식사준비부터가 이만저만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창으로 다가간 김상철이 커튼을 닫았다
「아무래도 당신은 내일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가는 것이 좋겠어.」
그는 박미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아버지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지 않아? 이 기회에 인사도 드리고 말이야.」
잠시 굳어졌던 박미정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도 전화로만 안부 여쭙는 것이 죄송했어요.」
「반가워하실 거야.」
머리를 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혹시 이곳이 위험하니까 날 보내시는 것 아녜요?」
「그런 건 아냐. 하지만 조금 불편하긴 해. 그래서 새로 집을 짓는 몇 달 동안만. 석 달이면 된다고 하던데.」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시선을 내린 박미정이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같이 가서 인사 드려야 정상인데 내가 이곳을 비울 형편이 안 되어서 미안해.」
아직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박미정의 부모한테도 마찬가지였는데 근대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김상철의 형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가의 허락은 모두 받아 놓은 상황이다.
빌라 안은 조용했다. 조태광은 좌우로 나란히 연결된 세 동의 빌라에 부하들과 함께 묶고 있었으므로 빌라 안에는 두 사람 뿐이다. 거실의 벽에 걸린 시계가 밤 열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지 마.」
김상철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당신이 한국에 가 있는 사이에 모든 일이 정리될 거야.」
전화벨이 울리자 김상철은 전화기를 집었다.
「변순태입니다.」
변순태가 소리치듯 말했다.
「집이 비었습니다. 눈치를 채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알았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찾아라.」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선 마음 놓고 쇼핑도 하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도 있을 거야.」
「시골 아버님께 가 있겠어요.」
그러자 김상철이 웃었다.
「아버지가 불편해 하실걸? 며칠이면 몰라도.」
그는 박미정의 배를 눈으로 가리켰다.
「임신한 며느리 보살피는 것에 힘들어 하실 거야.」
헤드라이트의 가시거리는 5,6D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트럭은 100킬로 이상의 속력은 내지 않았다.
강한 북서풍이 벌판에 쌓인 눈가루를 고속도로 위로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리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남진하는 네 대의 트럭에는 모두 근대운송의 마크가 찍혀져 있었다. 근대리아 정부가 직영하는 운송회사의 트럭이다.
선두차의 조수석에 앉은 나까무라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12시 20분으로 한 시간 후면 포포크 시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타운에서 간발의 차이로 추적자들을 따돌린 지 세 시간이 되었고 이젠 남쪽으로 2백여 킬로 거리에 있다.
그는 옆에 앉은 오무라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오무라, 다음 간이휴게소에서 십 분간 쉰다. 연락을 해라.」
「예, 보스.」
오무라가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뒤를 따르는 차량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간이 휴게소는 ~킬로쯤 앞쪽이었다. 주차장에는 두 대의 트럭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차에서 내린 나까무라는 두 번째 트럭의 뒤쪽 문을 열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전등이 켜져 있었고 히터를 들여 놓았으므로 훈훈했다.
근대운송의 컨테이너 트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오치호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오치호는 행정청의 명의로 트럭을 빌려 총독 직인이 찍힌 특별운행증을 발급하여 주었으므로 시바다는 이제까지 근대리아 전역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이 모여 앉은 대기실을 지나 나까무라는 안쪽의 문을 열었다. 컨테이너를 두 칸으로 나눈 이곳이 시바다의 방이다.
「보스, 앞쪽으로 사십 킬로 지점에 고속도로 검문소가 있습니다.」
그의 앞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나까무라가 말했다.
「지난번에는 별 문제 없이 통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변해서, 미리 손을 써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검문소 경비대야 열 명 안팎 아닌가? 수상하면 깔아뭉개고 지나가자.」
시바다의 얼굴은 술기운에 달아올라 있었다.
그야말로 절치부심하는 자세로 일본의 야쿠자를 모아들였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다나 김상철 측의 금고를 털었다.
오다의 간부급 부하들을 설득하고 회유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결과 그날 밤, 작전이 시작되자 단숨에 오다 센자부로에게 넘어간 사업장과 조직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개는 네 시간도 못되어 허망하게 무너졌다.
경비대의 내분과 김상철의 위협 때문이다. 시바다는 요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보스,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까무라를 시바다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까무라, 지금 우릴 따라온 놈들은 모두 몇 명이냐?」
「35명입니다. 보스.」
나까무라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급해서 아사노 일행 열두 명이 합류할 수 없었습니다. 곧 연락이 되겠지요.」
보름 전만 해도 500명 가까운 부하가 휘하에 있었고 일거에 오다의 본거지인 오리엔트 호텔에 입성하여 위세를 자랑하던 시바다였다.
나까무라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10분쯤 후, 간이 휴게소 남쪽의 검문소 소장 이필석은 행정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총독 비서실 소속의 행정담당 보좌관 박태혼으로 국장급 인물이다.
「거기. 얼마 후에 총독 비서실에서 보낸 트럭 네 대가 갈 거야.」
그가 대뜸 말했다.
「물론 총독이 발행한 특별운행증이 있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책임자더러 빨리 서두르라고 해. 그놈들 한 시간이 늦었다.」
「예, 보좌관님.」
긴장으로 몸을 굳힌 이필석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만 말하면 됩니까? 초소에서 보좌관님께 연락을 취하도록 할까요?」
「필요 없어. 총독의 지시니까 빨리 서두르라는 말만 전해. 늦었다고. 그리고 보고는 당신이 나에게 직접 하도록.」
「알겠습니다. 보좌관님.」
「하바로프스크로 보내는 하물이다. 그놈들. 이제야 차보스를 지난 모양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필석이 옆에 선 부하를 돌아보았다. 그는 전라도 전주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하고 근대리아로 자원해 들어온 사내였다.
「보좌관놈이 솔찬이 급헌 모양이여, 나 같은 말단헌티 전화헌 것을 보먼.」
긴장이 풀리자 사투리가 술술 나왔는데 군대에서부터의 버릇이다.
그는 유리창 밖으로 위쪽 도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시키가 몰고 오는디 이런 농땡이여?」
그때 위쪽의 도로에서 일렬로 다가오는 전조등의 불빛이 보였다. 한두 대씩 지나는 차량들이 검문소 앞에 멈춰 서서 검문검색을 받고 통과하고 있었는데 차량의 통행이 뜸한 새벽이다. 검문소 앞에 멈춰 서 있는 차량은 서너 대밖에 되지 않았다.
「저기 온다.」
방한모를 집어든 이필석은 초소를 나섰다.
백령도에서 3년을 보낸 경험이 있는지라 초소 근무는 이골이 나 있는 것이다.
트럭은 근대운송의 마크를 붙인 컨테이너 트럭이었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속력을 줄인 트럭의 대열은 곧 이필석의 앞에서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사내 한 명이 뛰어내렸다.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는데 보나마나 특별운행증일 것이다
「이보쇼. 금방 총독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서두르라고.」
이필석이 대뜸 말하자 사내가 멀뚱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시오. 어서, 연락은 내가 할 테니까.」
「고맙소.」
사내가 몸을 돌리자 이필석이 한 걸음 다가갔다
「운행증은 보여 주셔야지.」
이필석은 사내가 내민 운행증을 플래시로 비춰 보았다. 이미 검문이 끝난 차량들은 모두 빠져나갔으므로 트럭 대열이 선두가 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오,」
「고맙습니다.」
이필석이 손짓을 하자 철제 차단봉이 올라갔다. 바람이 세었고
체감온도는 영하 40도가 훨씬 넘는 추위였다. 초소로 돌아온 이필석이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하물인 모양이여, 총독 비서실이 서두르는 걸 보면.」
그 순간 말을 멈춘 그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무전기로 다가가 스위치를 켰다. 잡음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곧 방 안에 말소리가 울렸다.
「경비본부 일직 사령실입니다.」
「여긴 524 초소장 이필석이올시다.」
「일직부관 고현수다. 말하라.」
이필석이 침을 끌어 모아 삼켰다.
「방금 총독의 특별허가증을 가진 컨테이너 트럭 네 대가 통과했습니다. 모두 근대운송의 트럭입니다.」
초소 안에 모여 선 십여 명의 경비대원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
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필석이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트럭이 통과하기 전에 총독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으로부터 트럭을 서둘러 통과시키라는 지시가 왔었습니다. 총독의 특별지시라고 했습니다.」
「총독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이라고?」
일직부관의 목소리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 부관님.」
「컨테이너 트럭 네 대라고?」
「그렇습니다. 근대운송의.」
「알았다.」
무전이 끊기자 이필석이 허리를 펴고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조금 턱을 치켜 든 자세였다.
「내가 말단 초소장이지만 총독 비서실이 지난번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쯤은 알아. 총독의 손녀 딸내미가 보좌관들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 그가 무전기의 스위치를 다시 켰다.
「매사가 불여튼튼이여. 우리가 보낸 컨테이너 트럭 속에 그 강미현이가 뒤를 돌봐 준 시바다라는 일본 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가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행정청 일직입니다.」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님 부탁합니다.」
잠시 후에 박태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박태훈입니다.」
「보좌관님. 저 524 초소장 이필석입니다. 트럭이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정중히 말하는 이필석을 부하들이 멀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럭은 포포크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놈들은 트럭을 버리고 다른 교통수단을 택한 것 같습니다.」
전화기를 쥔 장동택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실의 시계는 새벽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포크에서 불칸까지는 이십 킬로 거리이고 그 시간대에 러시아행 열차가 두 편이나 내려갔습니다.」
불칸 역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근대리아 역이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러시아로 넘어간 것 같군. 아마 열차로 내려간 모양이야. 하물칸에나 아니면 빈 컨테이너 안에 숨어서.」
전화상이어서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지친 목소리였다.
「하지만 소득이 있어. 비서실의 회색분자를 또 하나 잡았군.」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이대각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총독이 발행한 특별운행증을 갖고 돌아다닌다니. 이건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 경비대가 허탕만 칠 수밖에요. 우린 허수아비 노릇만 한 겁니다.」
「본부장으로 오치호가 앉아 있을 때는 오죽했겠나?」
탄식하듯 말한 이대각의 목소리가 갑자기 팽팽해졌다.
「장국장. 이 일은 극비에 부치도록. 담당자 모두에게 지시하도록 해. 일이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이미 시바다도 떠났다. 근대리아 정부 내의 부끄러운 사건이야. 이 일이 알려지면 여러 놈이 좋아할 테니까.」
「그렇지요.」
장동택이 길게 한숨소리를 내었다. 그 첫 번째가 북한계 조직이다. 대표부를 중심으로 그들은 이번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분열이 심할수록 그들은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었다.
「근대리아의 발전은 곧 우리 공화국의 발전이나 같습니다. 솔직히 지난 육 개월간 근대리아에서 공화국으로 송금된 돈이 이천 달러가 넘었지요.」
서일이 얼굴을 펴며 웃었다.
「지도자 동지께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강미현의 사무실에는 서일과 박기환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들로서는 강미현과 첫 공식회담이다.
3월 초순, 푸른 하늘에 흰 태양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밝은 날씨였다. 밝은 색 정장 차림을 한 강미현의 표정도 밝았다.
「우리도 만족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적지 않게 우려가 되었거든요. 북한 이주민이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투입되었다고 해서.」
얼굴에 웃음을 띤 강미현이 서일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를 북한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 북한 지도층의 목표라고도 들었습니다.」
「모두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와 근대리아 사이를 이간질시키려는 수작이지요.」
서일이 따라 웃었다
「그 사람들, 정권다툼이나 하면서 이제까지 근대리아의 발전을 방해만 해 왔지 않습니까? 우리가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무조건 공산화가 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간섭하려고 드는 겁니다.」
「제가 오시라고 한 건 이주민 문제 때문인데요.」
자리를 고쳐 않은 강미현이 정색을 했다.
「이젠 근대리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이주민 문제를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우리 공화국 정부는 환영합니다.」
얼굴이 굳어진 서일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적극 협조해 드리지요.」
「이번에는 오만 명으로, 물론 가족단위의 이주민을 받고 싶은데요.」
「인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난번 5천 명의 이주민을 들여올 때는 민간 차원에서 김상철과 북한 정부가 계약을 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거부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국 정부와 북한과의 비밀협상에 근대리아 정부가 참석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 될 것이다.
이제 근대리아 정부는 더 이상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약점을 잡은 입장인 것이다.
「그럼 구체적인 사항을 이야기할까요?」
강미현이 서류를 펼치자 서일과 박기환도 제각기 노트를 꺼내었다. 모두 생기를 띤 표정이었다.
근대리아는 인구가 500만이 넘어서자 국가의 체제로 자리잡혀 갔는데 행정청은 정부기관이다.
행정청의 16개 국(局)은 제각기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고 경비대는 사법과 국방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입법기관으로 총독이 의장을 맡은 국민회의가 있었는데 인원은 백 명으로 주 구성원은 한국에서 데려온 각계의 전문가들이었다.
따라서 행정기관은 물론 경비대, 국민회의 의원 전체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총독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또한 근대시 외곽과 지방 소도시에 세워진 거대한 공단들은 반 이상을 정부에서 직영하고 있는데다가 갖가지의 사업장에도 투자한 상황이어서 근대리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정부의 고용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근대그룹을 경영하듯이 근대리아를 통치해 왔고 그것을 대부분의 주민들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근대리아는 근대그룹의 영지이고 총독의 소유였다.
그러나 차츰 인구가 많아지면서 중소 자영업자를 비롯한 한국의 오성그룹, 외국의 자본이 기업체를 세우면서 정부의 지분이 날로 줄어들어 갔다.
처음에는 정부직영의 기업이 거의 90퍼센트였던 것이 이제는 절반 정도로 줄어 든 것이다.
이것은 근대리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부 투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총독은 한국은 물론이고 각국의 투자가들에게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으므로 기업가는 물론 검은 돈도 대량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근대리아는 유흥과 도박, 향락의 천국이어서 올해의 관광객은 200만 명을 예상하고 있다. 한 해 관광 수입만도 20억 달러가 넘는 것이다.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는데다 정부에서 주택을 영구임대해 주고 있었으므로 아직도 밀입국자가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밀입국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러시아인이었지만 요즘 들어 북한인의 수가 부쩍 늘어나 있었다.
이제까지 북한 정부는 철저하게 국경을 막아 북한인의 근대리아 밀입국을 통제해 왔다.
이미 근대리아의 소문이 난 터이라 대량 탈북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행정청의 잠정 통계로는 밀입국한 북한인이 만 명 가깝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밀입국한 북한인은 조선족이나 고려인 행세를 하였는데 그것은 북한 대표부의 규찰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밀입국한 북한인을 잡아 가차 없이 총살시킨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규찰대는 북한인은 물론이고 조선족이나 고려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는데 책임자는 32호실 소속의 박기환이었다.
저녁 무렵, 김상철은 최태호와 단 둘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다.
레이크 호텔의 카지노에 딸린 밀실 안이었다.
「오만 명을 들여온다니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 이주민을 받을 모양이군요.」
최태호의 잔에 보드카를 따르면서 그가 말했다.
「더욱이 공식적으로 말이오.」
「근대리아 정부가 더 이상 한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최태호가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켰다.
「정치공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몇 수 위요. 우리는 일사불란한 체제로 연구하는데 남조선은 중구난방 아닙니까? 더구나 정치인들의 인기 위주의 정책에다 선거 때가 되면 더욱 볼 만합디다.」
최태호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 남조선의 북한 전문가라는 학자들이 쓴 글을 나도 읽어 보았는데 정치권의 반응에 따라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더구만. 이러니 남조선이 무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김상철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북한 텔레비전에서 어린애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지도자 동지의 은혜로 잘 산다고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 끔찍합니다. 저렇게 자란 애들과 우리 한국 애들이 과연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지던데.」
「애들은 잘 우니까요.」
「어른들도 그러던데 영양실조에 걸린 몸으로.」
「버릇이 되어서요.」
「오만 명도 모두 사상교육이 투철하게 배인 사람들로 보내겠지요?」
「물론이지요. 성분이 확실한 자만. 그리고 가족 중에 인질을 꼭 한두 사람 공화국에 남겨 놓을 겁니다. 지난번 오천 명을 보낼 때도 그랬지요.」
김상철이 정색을 했다.
「난 강미현이 갑자기 북한의 이주민을 대량으로 받는 의도를 알고 싶은데, 본래 북한 이주민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늘리기로 했었단 말이오.」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술잔을 든 최태호가 머리를 저었다.
「서일과 박기환 둘이서만 협상을 했기 때문에, 나와 이금철 동지는 사업장 관리자로 전락되었으니까요.」
그 후 최태호는 분주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북한산 박기동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는 밀입국자들이 가져온 마약을 팔았고 은밀하게 고리대금업을 했으며 김상철에게 정보를 팔았다. 돈이 될 만한 일에는 모조리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이미 북조선공화국은 조국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근대리아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