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45, 「솔이 솔이라하니」 외 /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박준한이 강화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해 초겨울이었다. 진사시에 급제한 박준한은
이제 송이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겨울 바람에 문풍지가 바르르 떨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뜨거운 정을 나누었다. 그들에게 초겨울 밤은
너무나도 짧았다.
닭아 우지마라 일 우노라 자랑마라
반야 진관의 맹상군이 아니로다
오늘은 님 오신 날이니 아니 우다 어떠리
닭아 울지 마라, 아침 일찍 우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라. 나는 한밤중 함곡관에 갇히자 닭울음소리를 흉내내어 도망치려는 그런 맹상군이 아니다. 닭아, 오늘은 임 오신 날이니 제발 님과 함께 오래 오래 있게 아니 울면 안되겠느냐.
박준한은 지체할 수 없었다. 떠나야 했다. 초가지붕에는 첫눈이 얇게 쌓여있었다.
“그래, 인생은 회자정리가 아니더냐.”
송이는 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화선지를 펼쳤다. 하얀 화선지는 아득한 바다 같았다. 만경창파에 배 한 척 띄웠다. 일필 휘지로 떠나는
뱃머리에는 사랑하는 님이 서 있었다.
내 사랑 남주지 말고 남의 사랑 탐치마소
우리 두 사랑에 행여 잡사랑 섯길세라
일생에 이 사랑 가지고 괴야 살여 하노라
내 사랑 남 주지말고 남의 사랑 탐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랑에 행여 다른 잡사랑이 섞일까 두렵다.
이 사랑으로 일생동안 님과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후 송이는 수절했다. 박준한과의 약속대로 데려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가고
또 두 달이 지났다. 온다던 약속 시간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일년이 지나도 일자 소식이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먼 산 한 줄기 하현달빛이 낡은 침실의 장막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어
옥장 깊은 곳에 자는 님 생각는고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남은 다 자는 밤이건만 내 어이 홀로 잠이 깨어 화려한 침실 깊은 장막에서 단잠 주무시는 임을 생각하고 있는가.
임과 떨어진 천리 밖에서 만날 길 없는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전전반측 베갯머리만 흥건히 눈물을 적실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났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았다. 다시 일년이 흘렀다.
은하에 물이 지니 오작교 뜨단말가
쇼 잇근 선랑이 못 건너 오단 말가
직녀의 촌만한 간장이 봄 눈 스 듯하여라
은하에 물이 지니 오작교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말이냐. 소를 이끌고 오던 선랑이 그래서 못 건너 온다는 말이냐.
직녀는 애가 타서 가뜩이나 조금 남은 간장이 봄바람에 눈 녹듯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송이는 굳은 사랑의 맹서를 하나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님에게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라
이리하여 속이고 저리하여 또 나를 속이니
원수 같은 이 임을 이제는 잊을만도 하다마는
떠날 때의 언약이 굳으니 그를 잊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속이고 저렇게 또 속이니 원수 같은 님을 이제는 잊을 만도 할 텐데 헤어질 때 언약이
너무도 중하고 중해 그를 잊지 못하겠구나.
은하수 강물이 불어 오작교가 떠내려 갔다는 말인가. 나를 이리저리 속이고 속이는 것인가.
이런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님에게서 소식이 왔다. 송이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하인은 송이에게
서찰 한 통을 꺼냈다. 거기에는 달랑 한 수의 시만 적혀 있었다. 하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월황혼 기약을 두고 닭 우도록 아니온다
새님을 만낫는지 구정의 잡히인지
아모리 일시 인연인들 이대도록 소기랴
달빛 아래에서 약속한 그 님이 닭이 울도록 아니 옵니다. 새 님을 만났는지 옛정이 들었던 님에게 잡혔는지
아무리 한 때의 인연인들 이렇게 나를 속일 수가 있습니까.
송이의 눈에서는 왕소금 같은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기별만이라도 있었더라면 한걸음에 달려갔을 것을.
얼마나 그리웠길래 나를 이리도 야속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사람은 나였는데…”
송이는 말끝을 흐렸다. 억울하기도 분하기도 했다.
하인은 그런 송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방님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셔서 얼마 안 되어 이름 모를 병에 걸렸습니 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의 극진히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 정성도 헛되고 말았다.
“그 길로 돌아가셨습니다. 눈을 감으시면서 아씨를 무척이나 그리워했습니다.”
박준한은 늙은 노모만 덩그마니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님을 가슴으로만 부르다 먼 길을 떠났다.
박준한은 시 한 수를 남겨놓고 그렇게 해서 갔다. 노모는 자식의 장례를 치른 후 입산하여 불도에 귀의했다.
송이는 주변을 정리했다. 그녀는 박준한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황해도 어느 작은 암자를 찾아갔다.
그 길로 송이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솔이 솔이라 하니」는 그녀가 박준한을 강화에서 처음 만나 노래한 시조이다.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절벽千尋絶壁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냐 걸어 볼 줄 이시랴
‘솔이 솔’이라고 하니 나를 무슨 솔로 아느냐. 아무데나 있는 그런 흔한 솔이 아입니다. 천야만야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서 있는 낙락장송이 바로 나입니다. 저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 길가의 하찮은 나무꾼 낫쯤이야 걸어 볼 수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노류장화의 기생이지만 아무나 마음을 주는 그런 내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아, 자존심이 강해서 이렇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끝났단 말인가.
- 신웅순, 주간한국문학신문,2022.7.20
[출처] 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45, 「솔이 솔이라하니」 외|작성자 석야
[출처] 「솔이 솔이라하니」 외 /송이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작성자 J S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