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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전5:6-8)-2024.6.23
누룩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입니다. 실제로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많이 있습니다. 누룩은 술이나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로 이스트라고 부릅니다. 밀이나 쌀을 반죽하여 만든 발효 덩어리입니다. 적당한 온도에 숙성시켜 누룩곰팡이 균을 번식시키는 것입니다. 효모균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누룩은 성경과도 매우 친숙한 단어입니다. 성경에도 누룩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유월절을 지킵니다(출12:7-8).
그때 먹은 음식이 어린 양고기와 쓴 나물과 무교병입니다. 무교병이 누룩 없는 빵입니다. 그들은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무교병을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첫날부터 집에 있는 모든 누룩을 찾아 제거해야 했습니다. 만일 누룩 있는 빵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진다고 말씀하십니다(출12:15). 혹시 누룩 없는 빵을 먹어보신 적 있으시나요? 누룩 없는 빵은 먹기 힘듭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는 것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난의 시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누룩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천국을 상징하고, 하나는 죄를 상징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13장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과 천국이 어떻게 연결됩니까? 천국은 보이지 않게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임한 천국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본인은 알 수 있지요.
그런데 누룩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룩이 들어가면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적은 누룩이지만 여인이 서 말이나 되는 가루 속에 넣어 두었더니 서 말이나 되는 가루가 부풀어 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 말이나 되는 것을 부풀게 한 것입니다. 가루 서 말이면 엄청난 양입니다. 한 말이 13리터이기에 서 말이면 40리터가 되는 양으로 100명 이상의 성인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이 주는 긍정의 변화입니다.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이 본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가수 박진영씨가 기독교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세간에 그가 구원파라는 말도 많지만 본인이 극구 부정하니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의 짧은 유투브 방송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참여자가 박진영씨 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성숙하게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박진영씨 대답이 믿음을 가진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친근히 하다보면 믿음이 자란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과 친근히 하면 그들이 쓰는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믿음을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게 된다는 말이지요. 믿음을 가진 자들과 가까이하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아가는 법입니다.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누룩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룩과 같다는 말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누룩 같은 존재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누룩 같은 존재라면 좋은 누룩도 있고, 나쁜 누룩도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누룩이 천국을 상징한다면, 나쁜 누룩은 부패와 죄를 상징합니다. 천국은 긍정적인 누룩을 상징하고, 죄는 부정적인 누룩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죄를 상징하는 누룩이 훨씬 더 많다는 말입니다.
(1) 누룩의 영적 의미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누룩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사용하는 누룩의 비유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7절). 너희가 ‘누룩 없는 자들’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미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고린도후서5장17절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묵은 누룩을 버리고 새 누룩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누룩 없는 자’들이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누룩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7절하).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준비하여 죽인 후 피를 뿌리고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심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모든 죗값이 지불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누룩 없는 자’로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묵은 누룩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이지요. 묵은 누룩이 제거되고 새로운 누룩으로 한덩이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떡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으로 연합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묵은 누룩을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그들 중에 묵은 누룩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제거해야 합니다.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더 이상 묵은 누룩을 소유하면 안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동안 누룩을 갖지도 말고 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집안에 감추어진 누룩이 있을까봐 대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누룩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룩은 복음을 방해하는 효소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얼마든지 기생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도 누룩이 있고, 생각에도 누룩이 있으며, 말속에도 누룩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에도 누룩은 있습니다. 무엇보다 묵은 누룩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묵은 누룩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덩어리를 이룬 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묵은 누룩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묵은 누룩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비록 묵은 누룩이라 할지라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묵은 누룩을 복음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연조가 깊은 자일수록 묵은 누룩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묵은 누룩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속에 묵은 누룩이 너무 깊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묵은 누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마치 그런 누룩을 제거하면 죽을 것처럼 여깁니다. 문제는 누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묵은 누룩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 우리가 제거해야 할 묵은 누룩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사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 있는 묵은 누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누룩을 찾아내어 제거하려면 종교개혁을 시도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적당한 선에서 몇 가지의 누룩을 찾아내어 제거한다고 모든 누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누룩들이 얼마나 간교하게 교회에 침투해 있는지 모릅니다.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아 버렸습니다. 이제 그런 누룩을 제거하려면 엄청난 진통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쪼개질 정도의 아픈 진통을 겪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각 사람의 심령에 들어 있는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이런 누룩들은 우리 곁에 항상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묵은 누룩을 찾아내는 작업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지나치게 서두르면서 다그칠 필요는 없습니다. 혹은 내가 원하는대로 제거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다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급진적 변화를 시도하다가 자기 한계에 부딪혀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묵은 누룩을 찾아내는 것은 주님과 한덩이로 연합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묵은 누룩을 제거하는 것은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안에 누룩을 제거하는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묵은 누룩을 찾아서 제거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기보다는 주님께 나로 하여금 내안에 있는 누룩, 내 주변에 있는 누룩을 제거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함이 옳습니다. 다만 누룩을 찾는 일은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 혹은 한 달 두 달에 찾아서 제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누룩은 내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때문에 항상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내안에 혹은 내 주변에 묵은 누룩이 발견되거든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압니다. 잡초는 수시로 제거해도 다른 잡초가 금방 자라납니다. 기르지 않아도 자라납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은 누룩은 더욱 그렇습니다. 묵은 누룩은 복음을 방해하는 원수거든요. 내안에 누룩이 없을 것 같아도 복음을 방해하는 누룩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누룩은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절대 스스로는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손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누룩이 내안에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누룩들
그러면 묵은 누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누룩으로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6장6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8장15절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각각의 누룩이 의미하는 바가 다를 수 있습니다. 누룩의 본질은 동일하나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12장1절에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외식입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바리새인은 존경받고 인정받는 종교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경건의 대명사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과 밖이 전혀 달랐습니다. 겉은 경건한 척하지만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찬 위선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외식이라고 하는 말은 ‘배우’라는 말입니다. ‘휘포크리시스’라는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위선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연극배우에 비유한 것이지요. 연극배우가 자신의 성격이나 인품에 상관없이 대본을 따라 연기하듯이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본 모습과는 상관없이 연기하는 인생을 사는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주님보시기에 매우 악한 모습이었습니다. 왜냐면 진리를 왜곡시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바리새인의 누룩들이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이른바 종교적인 누룩들이지요. 물론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가득할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누룩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누구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런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무도 바리새인들의 누룩에서 자유 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성바이러스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절대 우리 안에 소유해서는 안 될 종양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드시 색출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물론 바리새인의 누룩을 한번에 뽑아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살면서 지속적으로 나를 관찰한 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생각되면 제거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수시로 제거해야 할 누룩인지 모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있습니다(마16:6,11). 사두개인의 누룩은 어떤 누룩일까요? 사두개인의 누룩은 거짓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주로 현실세계에 집착하며 내세라든지, 혹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이나 천사, 부활이나 내세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을 바리새인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인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인 것입니다. 둘 다 주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누룩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 사회의 교권주의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누룩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들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물론이거니와 사두개인들의 누룩도 가득할 것입니다. 부정하고 싶을는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만일 부정한다면 분명히 그런 누룩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입니다.
또한 헤롯의 누룩도 있습니다(막8:15). 헤롯의 누룩은 어떤 것일까요? 마가복음8장을 근거로 말씀드리면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인 폭정과 지배욕을 통한 세속주의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모술수를 통한 세속주의인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대부분 정치일선에 있는 지도자들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우리 안에도 세속주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본주의 신앙을 방해하는 세속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헤롯의 누룩 역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누룩들인 것입니다. 아무튼 복음주의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은 죄와 부패를 상징하는 누룩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제거해야 할 누룩이지요.
이외에도 장로들의 누룩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장로들의 누룩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15:1-2). 장로들만의 독특한 유전이 있다는 말입니다. 유전은 전통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모세오경 외에 모세에게 말로 전해준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중심이 되어 고대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것이지요. 그들은 그것을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유전이 탈무드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성경의 권위에 버금갈 정도의 신뢰도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의 권위보다 탈무드의 가르침을 앞세우기도 하지요. 이것도 역시 반드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누룩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누룩이라고 지칭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누가보아도 누룩 같은 속성을 가진 누룩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들마다 고유한 누룩들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현재 우리가 소속된 오늘날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묵은 누룩들
본문에 나오는 누룩은 고린도 교회의 누룩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대표적인 누룩은 음란과 방종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통해 개척한 교회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사당과 사원들이 즐비하고 사랑의 신이라는 아프로디테라는 신전이 있었으며, 1,000명이 넘는 신전창기가 있었던 아주 음란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고린티아조마’라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방탕과 매춘의 동의어로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되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별명인 것이지요.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은사도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누룩과 같았습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누룩들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속성들이 지금의 교회들안에도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 교회의 누룩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묵은 누룩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종교적인 습성이나 관습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나 사상도 포함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표적으로 묵은 누룩은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가장 오래된 누룩이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맡겨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 배우고, 잘못 알고, 잘못 사용함으로 인하여 누룩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신기하게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 율법 때문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바르게 알았다면 당연히 복음을 영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율법이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데 엄청난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속성을 잘못 알기 때문이지요. 율법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대표적인 속성은 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율법의 속성을 모른 체 율법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 그 율법을 지켜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당연히 율법의 한 가지 계명도 지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율법 때문에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의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지요. 예컨대 하나님이 많은 재물을 주셨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사용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그렇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마치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이 그런 케이스라는 말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을 대신하여 복음을 영접하는 일이 쉬운데,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은 차라리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지금 율법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것은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생각으로 아쉬운 점은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자기들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찌르고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한 것이지요. 그 율법으로 유대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 손에 든 율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보호막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천박한 종교인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불행하게도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만나려면 반드시 율법으로 자기들의 실상이 공개되어야 합니다. 율법의 칼로 자신들의 영혼이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 복음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뿌리 깊게 내리워진 누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인 것처럼 소개합니다. 자기들처럼 율법의 옷을 입으라고 강요합니다. 자기들처럼 할례라는 율법의 흔적을 남기라고 주문합니다.
심지어 복음으로 거듭난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율법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서슴지 않습니다. 주로 그들의 먹잇감은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개척한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율법을 지키라고 종용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중에 하나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묵은 누룩을 제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묵은 누룩을 제하여 누룩 없는 자가 되었기에 혹시라도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누룩이든지, 혹은 각 개인의 심령 안에 있는 숨어 있는 누룩을 찾아서 버리라는 것입니다(7절).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명절을 지킬지라도 묵은 누룩으로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은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명절은 문자적으로는 유월절을 의미할 것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3대 명절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이기에 고린도교회 역시 유월절을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처럼 절기를 지키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절기를 지켜야하는 정신은 유효한 것입니다.
다만 절기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명절을 지킬지라도 묵은 누룩으로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누룩으로 지키라는 것이지요. 새 누룩으로 지키는 유월절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누룩이 아닙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입니다. 새 명절은 누룩 있는 빵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종교적인 의식에 매이거나, 시간과 장소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새 명절은 삶으로 드리는 명절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드리는 명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요, 명절입니다. 그 명절을 묵은 누룩으로 드리면 안됩니다. 명절을 지키려면 반드시 누룩 없는 떡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제하여 버리고 새 누룩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빚어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새 누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급하시는 복음입니다. 새 덩어리는 예수와 함께 한 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을 이루는 것이지요. 절대 거기에 누룩이 섞어지면 안됩니다. 주님이 누룩 없는 떡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안에서 누룩 없는 떡으로 한 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안에 어떤 누룩도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묵은 누룩을 고집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각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도 은근히 많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누룩을 찾으려는 생각이나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버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방해하는 어떤 누룩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누룩이 지금 내 영혼을 부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짓과 위선과 권모와 술수로 말입니다. 자기의 정체를 왜곡시키고 부풀리는 작업을 마다치 않고 있습니다. 전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양으로 부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 누룩의 폭발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영적으로는 핵무기보다 더 파괴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합니다. 삽시간에 수많은 영혼들을 범죄 속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범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부패와 죄를 상징하는 누룩입니다. 내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한 바이러스 누룩을 반드시 색출하여 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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