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과 ‘신부리’
1)
김 명 자*
〔요약〕
‘신부리’란 신(神)의 뿌리를 일컫는 무속용어로서 ‘부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부리란 조상의 영혼이나 집안에 대대
로 내려오는 신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신(萬神)부리’, ‘조상(祖上)부리’라는 용어를 무속에서는 종종
사용한다. ‘만신부리’나 ‘조상부리’란 과거에 조상 중에서 무(巫)가 있었거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무당을 하다 숨진
사람의 혼(魂)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당이 내리는 것은 원인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무당의 혼이 있는 집안
이라야만 그 혼이 내려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당 집에서 무당 난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만신부
리라는 말이 적용된다. 무당은 느닷없이 되기보다는 조상 가운데 무당, 또는 그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을 경우 그
‘부리’를 받아서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조상의 무업(巫業)을 제도적으로 계승[세습]하는 무당을 세습무(世襲
巫)라고 한다. 이러한 세습은 신부리와는 다르다. 무속에서 ‘세습’이란 사제권(司祭權)의 세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한편, 강신무(降神巫)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신부리는 혈연, 또는 인척관계로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신부리의 유형을 크게 ‘친가(親家) 또는 외가(外家)쪽 신부리’와 ‘시가(媤家)쪽 신부리’로 분류하여 사례를 예시하면
서 그 양상을 파악해 보았다. 신부리는 아들과 딸.며느리.손자.손녀.조카.형제 등과 같이 혈연관계로 이어지
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가까운 인척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
지는 것이 그 경우다. 사실상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리는 이어질 수
있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어도 조상 가운데 역학을 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부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되
었다.
Ⅰ. 머리말:신부리의 뜻
‘신부리’라는 말은 어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神)의 뿌리를 일
컫는 용어로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뿌리’가 아닐까 한다. 신부리, 또는 ‘부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부리란 조상의 영혼이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
다. ‘만신(萬神)부리’. ‘조상(祖上)부리’라는 용어를 무속에서는 종종 사용한다.
‘만신부리’나 ‘조상부리’란 과거에 조상 중에서 무(巫)가 있었거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무
당을 하다 숨진 사람의 혼(魂)을 가리키는 말로 무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무당이 내리는 것
은 원인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과거에 무당의 혼이 있는 집안이라야만 그 혼
이 내려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신부리’의 ‘부리’는 뿌리[根]에서 온 말로 생각
하는 것1)은 설득력이 있다.
* 안동대학교 교수.
1) 김태곤, .한국무속연구.(서울:집문당, 1981), 210쪽.
2 한국무속학
“무당 집에서 무당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만신부리라는 말이 적용된다. 무당은 느
닷없이 되기보다는 조상 가운데 무당, 또는 그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을 경우 그 ‘부리’
를 받아서 된다는 것이다.
무당의 유형을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눈다. 강신무란 신을 받은 무당을 일컬으며 세습
무는 혈통을 가계 계승에 다른 무당을 일컫는다. 강신무는 성무(成巫) 초기에 신병을 체험
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얻어 이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
다. 반면 세습무는 영력과는 관계없이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무의 사제권이 세습되어 인
간의 길흉화복 운명을 제의를 통해 신께 기원하는 사제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2)
사실상 무당 집에서 무당이 나오는 경우는 세습무에서는 절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
서 논의되는 것은 세습무처럼 제도적으로 무당이 세습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위적이
고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부리’를 이어 무당이 된 강신무를 대상으로 하므로 세습무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
세습무는 ‘사제권이 세습’되는 무당이며 신부리가 있는 집안에서 나온 무당과는 다르다. 신
부리는 세습무가(世襲巫家)에서도 나타날 수 있겠으나, 강신무가(降神巫家)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이들 강신무가 세습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속에서 ‘세습’이
란 사제권(司祭權)의 세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부리는 혈연관계로 이어지는 경우
가 있는가 하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가까운 인척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시어머니에
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것이 그 경우다. 사실상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리가 작용할 수 있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어도 조상 가운데 역
학을 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부리가 작용한다.
이 글에서는 신부리의 유형을 크게 ‘친가(親家) 또는 외가(外家)쪽 신부리’와 ‘시가(媤家)쪽
신부리’로 분류하여 사례를 예시하면서 그 양상을 파악해 보았다. 여기 분류는 ‘외적으로 드
러난 양상’을 바탕으로 하여 편의적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또한 친가나 외가의 경우 부
계와 모계로 나누었지만 시가의 경우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부계와 모계를 나누지 않고 함께
논의했다. 사실상 혼인 전부터 신병을 앓았을 경우 이미 친정이나 외가에 신부리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혼인 전에는 신부리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다가 혼인 후에 드러난
경우 반드시 시가쪽 신부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중심으로 하므로 시가쪽에 포함시켰다.
신부리의 양상을 소개했다하여 여기서 논의된 것만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일반론을
펴기에는 더욱 위험할 수 있으므로 선별적인 자료임을 전제한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무당
이 모두 신부리인가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지극히 추상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토대로 ‘단순화’했다는 점도 아울러 밝힌다.
여기 모계나 부계라는 용어는 애초 어머니쪽, 아버지쪽으로 하려다가 간략하게 하느라 임의
로 붙인 것이다. 모계사회나 부계사회와 같은 친족용어와는 달리 그저 어머니쪽을 모계, 아
버지쪽을 부계로 편의상 붙인 것이다.
Ⅱ. 신부리의 유형별 양상
2) 김태곤, 위의 책, 15쪽.
무당과 ‘신부리’ 3
신부리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그 계통은 ‘친가(親家) 또는 외가(外家)’와 ‘시가(媤家)’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혈연관계인 반면 후자는 인척관계(姻戚關係)라 할 수 있다. 필자
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친가 또는 외가 쪽은 모계와 부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많이 나타
났다. 따라서 여기서는 친가나 외가 쪽은 다시 모계와 부계로 나누고 시가쪽은 통합하여 논
의한다.
1. 친가 또는 외가쪽 신부리
1) 모계 신부리
안동지역의 권은도 무(巫)의 경우 친정 어머니가 신병(神病)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딸에게로
이어져 무로 활동하고 있다.
<사례 1>
권은도씨(1931년생, 1994년 1월 조사)는 정식으로 신을 받기 전부터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신병을 길게
앓지는 않았지만 대신 자녀들이 늘 앓았다. 그러잖아도 좋지 않은 가정형편에 자녀들마저 아프니 고통은 말이 아니었
다. 신과의 인연은 친정 어머니 때도 있었다. 친정 어머니는 신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권씨가 23세였던가 24세 무렵
신을 받아 모셨다. 그러나 말문이 터지지 않아 “뛰고 놀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3) 물론 점(占)도 칠 수 없었으며 도무
지 신사(神事)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되든지 안되든지 다시 신을 받아 보겠다”고 또 다시 신(神)굿을 했다. 그 때만해도 권씨는 신
굿이 무언지 가정의 굿이 뭔지 모르고, 어머니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마침 상공부에 일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 와 보니 무당이 어머니의 신굿을 해주고 있었다. 그 때 망자(亡子)풀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조상
망자(祖上亡子)’를 들어도 신이 오지 않으니까 무당이 권씨에게 들라했다. 조상망자는 옷을 돗자리에 넣어 둘둘 말아
일곱 매듭을 묶은 것이었다. 그것을 들면서 “뭐가 오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이미 드는 순간 나랭[내림]이 왔다. 그래서
망자조상 두 낱(두개)을 들었다. 하나 들고 놀고, 흔들고 나니까4) 또 하나 들라해서 또 들었다. 그러고 나니 술이 마시
고 싶었다. 그 때는 물론 요즘도 술을 마시지 못하는 자신이 술을 찾은 것이다. 술을 마시고 그대로 골아 떨어져 자는
데 꿈에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너는 왜 때가 됐는데 깊은 잠만 자고 있느냐”5)하며 등줄기를 두 번 탁탁
쳤다. 깨어보니 할아버지는 없고 내림(신내림)이 계속 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웃저고리를 벗어서 동쪽에 놓고는 절
하고, 처마[치마]를 벗어서 남쪽에 놓고는 절하고, 속바지를 벗어서 서쪽에 놓고 절하고, 마지막 속내의까지 벗어서
북쪽에 놓고 벌거벗은 채 절했다. 밖에 나가 물 항아리를 보니 물이 얼어 있었다. 당시 음력 정월이어서 날씨가 추웠
지만 그 얼음을 깨서 버쩍[번쩍]들고 머리에 부었다…6)
위와 같이 어머니는 신병을 앓아서 내림굿까지 했으나 온전한 무당이 되지 못하고 딸은 내
림굿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나 온전한 무당이 된 것이다. 그야 어떻든 친정 어머니의 신부리
3) 뛰고 놀고 하지 않았다는 말은 굿을 하지 못하고 점도 치지 못했다는 말. 곧 무당으로서 활동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4) 여기서 놀고 흔들고 했다는 것은, 춤추며 굿을 했다는 말이다. 굿하는 것을 흔히 ‘논다’고 한다.
5) 이는 신을 정식으로 받아 그 길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강신자에게 “때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라”는 현몽은
보통 있는 일이다.
6) 권은도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김명자, .안동지역의 무속사례., .안동문화. 제15집(안동:안동대학교 부설
안동문화연구소, 1994), 161~169쪽 참조.
4 한국무속학
가 딸에게 작용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서울 무녀 이강재씨의 증조모는 신을 모시던 분이었다. 이씨의 친정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
터 병약했던 딸이 신병(神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가 신
을 모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딸의 신병을 받아드리기 보다는 ‘떼어버리려는데’ 더욱 마음을
썼다. 딸의 신끼[神氣]를 누르기 위해 독경(讀經)을 하는 경꾼[독경자]을 부르기도 했지만 효
과가 없었다. 오히려 더 아프고 시달려 비실비실 마르고 약해졌다.
<사례 2>
이강재씨(여, 1991년 9월 조사 당시 50세)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4남매 중 셋째다. 어머니가 아들 8형제를
낳았으나 여섯이 어려서 죽고 오빠가 22세에 숨져 성인이 되어 남은 형제는 3녀 1남이다.
아버지는 건축관계 일을 하였으며 전주(全州) 이씨(李氏) 가(家)의 완고한 분이었다. 이강재씨가 혼인을 하던 20세
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후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나이가 드셔서 새 부인을 맞았으므로 새 부인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다. 6.25 한국전쟁 때 돌아가신 이강재씨 부친의 친할머니가 신을 모신 분으로서 궁내(宮內)에 드나들었다.
신단은 벽장에 조그마하게 차려서 늘상 조용히 빌었지만 큰 만신이었다. 이처럼 ‘무당 내력’이 있었던 탓에 이강재씨
의 아버지는 딸이 신을 모시는 것을 꺼렸다. 딸이 어린 시절부터 아픈 것은 신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
당이 되어 신사(神事)를 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49세에 사망한 전 부인(이강재씨의 생모)도 신이 왔으나 받
지 않아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나 신을 받는 일은 절대로 꺼렸다. 8형제 중 여섯이 숨지고 나머지 두 아들
중 큰아들마저 22세에 숨지자 ‘묻는 곳'7)마다 신을 받지 않은 ‘벌전’이며 살고 있는 집도 흉가가 되었다고 했다. 결국
그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포천에서 떠나온 것이다. 이씨 부친은,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막내아들 하나
남은 것마저 잃을까 두려워 집이고 땅이고 다 버리고 서울 숭인동(동대문구)에 방 하나를 얻어서 이사하여 서울에 뿌
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씨의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막내 남동생이 9세였는데 어느덧 38세(1992년 기준)가 되었
다. 아버지와 새 어머니는 이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이강재씨와 가까운 이웃에 살지만 요즘도 전혀 왕래를 하
지 않을 만큼 무당이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강재씨 자신은 첫 남편을 졸지에 잃고 나중에는 맏딸마저 잃는 등 신을 받지 않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도 계속 실패를 거듭하고 건강도 계속 나빴다. 30세에 지금의 남편 이영태씨를 만나 초등학교에 다니는(1992년
기준)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가족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까지 부부와 1남 1녀이며, 39세에 신을 받은 후에
는 ‘할아버지가 거부’하여 남편과 4년에 걸쳐 별거를 해야 했었다. 남편 역시 산기도를 자주 가는데 1992년 조사당시
에는 무속인의 단체인 경신연합회 서울시 노원지부장을 맡아 무속인들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 이강재씨는 지부장 일
을 반대했으나 남편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데 자신은 지부장의 부인이라는 것
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무녀로서의 별명인 ‘광수엄마’라는 칭호가 자연스럽고 편하다.
남편의 부친, 그러니까 이씨의 시아버지도 신을 경험하신 역학인으로 부산에서 유명하였는데 특히 부적을 기막히
게 하셨다. 시아버지가 부적을 쓰시려고 붓대를 잡으시면 팔에서 ‘샥샥샥샥’ 하는 소리가 마구 났다. 그 소리가 나지
않으면 부적을 쓰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예전에 일본에서 신을 받았다 하며 6년 전(1992년 기준)에 작고하셨다. 시아
버지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도 전혀 모르다가 훨씬 후에 모시는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8) 이씨는
3년 전(1992년 기준)부터 부적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조금씩 하고 있다.
이씨의 사촌언니도 30년간 무업(無業)을 한 큰 만신이었으나 올해(1992년) 음력 4월에 작고하여 진오기굿을 이씨
가 해주었다. 이강재씨는 첫 결혼에 실패한 데다 신까지 모시는 것이 ‘벌’이라 생각하여 그 동안 친척도 만나지 않았
었다. 그런데 사촌언니의 진오기굿을 하면서 만나게 되어 이강재씨가 무녀라는 사실이 비로서 알려질 정도였다. 특히
처녀 때 만나고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육촌오빠에게는 ‘공수’까지 내려 그 동안의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친언니의 남편인 형부마저 처제가 무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7) 여기 묻는 곳이란 점을 보는 곳을 말한다. 점복자나 무당을 찾아가서 운세를 묻기 때문에 흔히 ‘묻는 곳’이라
고도 한다.
8) 이강재씨가 받은 신이 알려주었다는 뜻.
무당과 ‘신부리’ 5
남동생 부부도 누이가 무녀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다가 사촌누이의 굿을 할 때에 여러 가
지 영험을 보고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강재씨 자신은 자신이 ‘신을 모시고 불리는 일’9)하는 것도 벌
이라며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한다.10)
이처럼 이강재 무녀의 경우 친가와 외가 쪽에 모두 신부리가 있다. 증조할머니가 궁내에 드
나드는 만신이었고 친정어머니는 비록 신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을 체험했는가 하면 사촌언니
역시 무당이었다. 나중에 재혼한 남편쪽마저 신부리가 있는데 이렇게 친가와 시가에 모두 신
부리가 있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여기서 어떠한 신부리가 작용했다는 사실을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혼인 전부터 신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하면 일단 친정쪽 신부리를 선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부리가 있는 집과 혼인하게 된 것을 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경
우도 있다.11)
신부리가 양가에 모두 있는 경우는 안보숙무녀(1991년 기준 41세) 역시 마찬가지다. 안보
숙무녀의 친정 어머니는 신이 내렸으나 그 신을 받지 않다가 일찍 작고했다. 그래서 안씨는
어머니가 그 업보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안씨가 무당이 되었으니 신
부리가 작용한 셈이다. 안보숙씨의 이모 가운데에도 무당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댁 역
시 신기(神氣)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재혼을 했는데 남편의 집안도 대가
센12) 집의 후손이었다. 시어머니에게 신이 왔는데 그 신을 받지 않아서 집안에 계속 풍파가
일었다.13) 친정어머니가 신병에 시달리고 이모가 무녀였으니 어머니쪽의 신부리가 이어졌다
고 볼 수 있겠는데 재혼한 시댁의 시어머니 역시 그녀의 친정어머니처럼 신병을 앓았던 것
이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큰 무당인 정대복무녀(2002년 기준 90세)의 경우 외할머니가 큰 무
당이었다.
<사례 3>
외할머니가 집에서 크게 신당을 짓고 무신(巫神)을 모셨다. 정씨가 33세 되던 해 음력 5월 5일에 외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그 15일 후인 5월 20일에 정씨는 저절로 말문이 열려 “옥황상제 일월성신이다.”라고 소리를 쳤다. 정씨는 이것
이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기에게로 대를 물려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신체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도 찾
아다니고 약도 썼으며, 점도 쳐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이 몸이 더욱 아프기만 했는데 외할머니의 대를 물려 신이
내리고 말문이 열린 후로는 차츰 아픈 증상이 덜해지기 시작하였다.14)
남무(男巫)인 이근희씨(남, 1991년 8월 기준 만 46세)는 집안에 신가물15)은 없었다고 하지
9) 무당으로서 활동하는 것, 즉 신사(神事)를 그렇게 말한다.
10) 이강재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서울:1992), 351~364쪽
참조.
11) 이에 대해서는 ‘2. 시가쪽 신부리’에서 간략하게 논의한다.
12) 여기서는 신기가 있다는 뜻을 “대가 세다”고 말한 것이다.
13) 안보숙무녀에 대해서는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191~200쪽 참조.
14) 정대복무녀에 대한 내용은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133~141쪽 참조.
15) 양종승은 “무당들은 신병을 체험하여 신을 받는 내림굿을 할 때까지는 온갖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증상
을 신가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신가물이란 무당들 사이에서 쓰는 전래어로 신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뜻한
6 한국무속학
만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요소를 어머니가 지니고 있었다.
<사례 4>
모친은 고향 근처의 대사찰인 운주사에 열심히 다녔다. 천불천탑이 있고 와불이 놓인 이름난 절인데 일년이면 반
이상을 절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기차역에서 마을로 가지만 큰 산을 두 개 넘어야 하는데 그 정상에서 보면 운주사
가 내려다 보였다. 모친이 그곳을 내려오다 보면 날이 어두워도 절터가 훤하게 보였다고 한다. ‘불이 환하게 비출 정
도’여서 절에서 제라도 지내는가 생각했지만 실은 아무 일도 없고 모친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불심
(佛心)이 강했는데 아마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모른다.16)
신가물은 없었다고 하지만 모친이 불심(佛心)이 강했던 것도 신부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
다. 무불습합(巫佛習合)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무속과 불교의 수수관계는 이미 역사성을 지
니고 있기 때문이다.
배옥진무녀(1991년 기준 50세)의 신가물 역시 이근희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접적이다.
<사례 5>
신가마리[신가물]는 진작부터 집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항상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빌
고 부엌에도 조왕에 정한수[정화수]를 올리고 매일 한결같이 빌었다.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아프다 하면 찾아가서
손으로 만져주곤 하였다. 할머니 손이 닿으면 낫는다고들 했다. 아기가 체하면 바늘로 따주기도 하는 등 마을의 궂은
일을 맡아 하였다.17)
일제강점기에 일인(日人)학자 아끼바가 조사한 무속사례에서도 신부리가 드러난다.
<사례 6>
무녀 C씨. 덕물산 꼭대기 무당 집에서 태어나서, 75세의 노모(老母)도 같이, 지금도 덕물 산 제일 가는 노무(老巫)
로서 함께 굿을 하고 있다. 9세 때 병이 나서 3개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냉수만 마시고 있었는데 이 때 집안
식구가 점을 하여 보니 신이 내리는 것이라 하여, 집은 가난하고 하여 굿을 할 수 없고 푸닥거리를 하여 병이 나았다
고 한다. 그런데 13세 때 다시 병이 나사 3개월간 물만 마시게 되어 몸이 말라 피골이 상접하여 일어날 수도 없는 지
경이 되었다고 한다…18)
무녀 C씨는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병이 들고 다시 낫는 경험을 했는데 27세 때에 내림굿
을 하고 무당이 되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기준으로 하면 친정어머니의 신부
리를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고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양종승, “무당의 신병과 신들림,” .한국무속학. 제2집(서울:한국무속학회,
2000), 117쪽. 그러나 여기 제보자가 말하는 신가물이라는 말에는 신기(神氣), 신불, 신부리의 뜻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16) 이근희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209~216쪽 참조.
17) 배옥진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217~222쪽 참조.
18) 秋葉 隆(아끼바) 저, 최길성 역, .조선 무속의 현지연구.(대구:계명대학교출판부, 1987), 67~68쪽.
무당과 ‘신부리’ 7
김순묵(여, 1991년 기준 만 45세)무녀의 경우 집안에 무당은 없었지만 할머니가 무당에 버
금가는 분이었다.
<사례 7>
김씨의 경우 대개의 무당들처럼 오랫동안 신병을 앓다가 무당이 되었는데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집안에도 무
당은 없었다. 그러나 무당이 된 후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무당에 가까운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점만 못치는 무당’
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할머니는 새벽 4시만 되면 남이 일어나기 전에 바가지에 물을 뜨러 간다. 부뚜막에 항시 정화
수를 올렸다. 겨울철에는 옥수물[玉水] 위에 15센티 정도의 얼음이 솟구쳐 얼었다. 정성이 지극한 사람이 청수를 올
리면 지금도 그렇게 된다는데 할머니가 그러한 경우에 속했다. 그 정도로 신심(信心)이 가득하던 분이었다. 당신은 주
로 가족들만을 위해서 빌었다. 몸이 아프게 되면 인근의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자주 하였다. 쌀을 고르는 키를
엎어놓고 결을 긁으면서 무언가를 외우면 열이 가시고 다음날에는 거뜬히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오로지 당
신 혼자만 믿으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믿음이 강하던 분이었다. 즉 점만 못치는 만신이었다.19)
어머니나 할머니의 신부리와는 달리 고모가 무당이었던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고모의 신부
리를 작용한 셈이라 할 수 있다. 18세 때 첫 애를 잃은 후 눈을 감으면 무신도(巫神圖)를
보는 등 이상 증세에 시달렸던 박명순무녀의 경우가 그 예다.
<사례 8>
…20세가 되면서부터는 산기도를 하러 가면 밤에 점잖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박씨에게 밥을 주어, 받으면 하늘로
올라가서 그 밥을 새, 짐승들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점을 해보니 신령내릴 팔자라 했다. 52세 때였다. 자다가 벼란
간 뱃속이 답답하여 전깃불을 켜니 몸이 떨리며 흔들리고 죽은 고모(무녀였다)가 몸에 실렸다…신을 받고 나서는 심
신이 쾌해졌다.20)
2) 부계 신부리
친가의 어머니쪽 신부리가 있는 반면 아버지쪽 신부리도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를
편의상 부계쪽 신부리라 일컬으며 그 양상을 파악해 본다.
<사례 9>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무녀생활을 하고 있는 김영숙(1944년생)무녀의 친정아버지는 도인(道人)생활을 하
던 분이었다. 친정아버지가 산천에 두루 다니면서 도를 닦거나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도인이었기 때문에 생계는
어머니가 꾸려 나갔다.
김영숙보살[무녀]은 처녀 때부터 신경통 증세로 고생을 했는데 온 몸에 신경통 증세가 있어서 약을 써보고 병원에
도 다녀봤지만 낫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는 신병이었다. 19세 때 혼인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 역
시 도인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김씨가 전안(신단)을 모신 것은 43세(만 42세) 때로 1992년 기준 7년째가 된다. 김씨가 전안방(신당)을 차린 것은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신의 현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도사 할아버지(도사님)가 김씨 앞에 탁 내려서시면서
“이 천에[천하] 못된 년, 네가 나를 몰러보다니[몰라보다니]” 하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씨가 “누구신데
그렇게 욕을 하십니까”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니 핼애비다. 핼애비”라며 세 번을 외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거기가 어디십니까”하고 물으니 “서낭이다”라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 후 비로소 깨닫고 김씨는 “아, 내가 이 길을 안 걷구는[걷고는] 안 되겠구나”고 생각하게 되었다.
19) 김순묵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465~476쪽 참조.
20) 박명순무녀에 대한 내용은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218~219쪽 참조.
8 한국무속학
김씨에 의하면 산신도사는 김씨의 9대조 할아버지로서, ‘서낭’(서낭은 산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의 도를 닦으셨는
데 김씨가 모르고 그대로 지내니까 꿈으로 깨우쳐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꿈을 꾸었을 때 남편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제가 꿈을 꾸고 일어나 보니 남편은 이미 꿈을 받은 것이었어요. 똑같이 받은 겁니다. 제가 깨기 전에 남편은 벌
써 일어나서 앉아 있었던 거죠.”
김씨가 “왜 그렇게 앉아 있는가”고 물으며 자신이 이만저만한 꿈을 꾸었다고 하자 남편 조씨는 이미 알고 머리맡
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3일 후에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도끼바위라는 깊은 산 속에서 100일 기도를 가게 되었다. 100일 동안
산 기도를 하며 그 곳에서 지낼 수 있는 소모품을 가지고 혼자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기거하며 신을 향해서 기도를 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 9∼10시, 새벽 3∼4시에 인사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을 향해 신령을 발원할 때나 잠시 천막 밖으로 나
오고 불가피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가능한 밤에 나왔다.21)
김씨의 9대조가 도인(道人)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어쨋든 조상 가운데 신과
관련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보에 도인이었다는 것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김영
숙무녀가 9대조라고 한 것은 몇대조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신부리가 있음을 말
해주는 것이다.
역술인 하지송씨(1992년 5월 기준 만 52세)는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출생, 6. 25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서울에서 신사(神事)를 하고 있다. 신병을 상당기간 앓았는데 신점(神占)과 역
점을 병행한다. 신을 받았지만 철학을 별도로 학습하여 신점복자(神占卜者)이며 아울러 역
리점복자(易理占卜者)가 된 것이다. 하씨 역시 다른 무속인이나 신을 받은 역술인들과 마찬
가지로 처음에는 신을 거부하다가 무수한 고난을 겪고 신을 받아 무속인이자 역술인이 되었
는데 그에게도 깊은 신부리가 있다.
<사례 10>
신내린 과정을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안에 어떤 내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친 쪽으로는 큰아버지가
사주를 보던 분이었다. 신은 내리지 않았으나 육효도 볼 줄 알았다. 아버지는 원래 일찍이 부모를 여읜 고아였는데
사주보는 사촌 형님(하지송씨에게는 5촌아저씨, 곧 당숙)이 데려다가 키웠다고 한다. 외가쪽으로는 외할아버지가 신
감(神感. 신가물. 신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지내고 학교 교장도 하던 유식한 분이었는데 신기(神氣)가 있
었다.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평상시에 무복을 만들어놓고 진적할 때면 무당 옷을 입고 춤을 추
곤 했다. 전주 이씨 양반 집인 탓으로 남의 눈에 보일까봐 막상 굴리지 못하고 그 대신에 여러 벌의 무복을 자기 몸주
에 모셔놓고서 굿판이 벌어질 때 끼어 들어 풀어내곤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외할머니쪽으로는 그 윗대에도 장구만
치고 다니시던 분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멀리 선대부터 신줄이 있었던 것 같다.22)
하지송씨의 경우는 신부리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우선 친가쪽으로는 큰아버지, 외가쪽으
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모두가 신부리의 대상이었다. 큰 아버지를 기준으로 하면 하지
송씨는 조카로서 신부리를 이어받은 셈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형제지간에 신부리가 작용했
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환경 속에서는 같은 문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짙다고 보는데 이는 단순히 환경이 같아
21) 김영숙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태곤.최운식.김명자 외, .한국의 점복.(서울:민속원, 1995), 191~210
쪽 참조.
22) 하지송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점복.(민속원, 1995), 273~312쪽 참조.
무당과 ‘신부리’ 9
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하지송씨의 아버지가 사주를 보는 사촌형님 슬하에서 성장하
여 그 영향을 받아 신기가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집안에 신부리가 있었다
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김명순무녀(여, 1991년 기준 만 39세)의 언니(1991년 기준 50세)는 김씨가 9살 때 별안간
신을 받게 되어 점복자로 활동하고 있다.23) 자매 사이에 신부리가 작용한 경우라 할 수 있
다.
이제환씨(1934년생, 1992년 4월 기준. 59세)의 경우 신부리가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집안 중에 먼 친척으로 선거리 강신박수가 있다고 들었다. 또 자신이 신을 받아 모시고 나
서 작은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가 동네 유지로서 약처방, 방향제시 등을 마을 사람들에게 했
다고 들었다. 김포에 사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니 옛날 창호지를 점술관계 등의 책과 섞어
문을 바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점을 봤다는 점술관계 책인 약처방에
관련된 책이었다.24)
먼 친척 중 강신박수가 있었다는 것도 신부리의 영향이 될 수 있지만 할아버지가 점을 보았
다는 것에서 보다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더라도 점을 보는 등
역학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학문을 한 경우에도 ‘신부리’처럼 작용하는 경우 역시 종종 나
타난다.
2. 시가쪽 신부리
친가 또는 외가에 신부리가 있었는데 혼인 후 시가에 가니 거기에도 신부리가 있는 경우가
있다. 또는 친정에서는 무속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시가에 신부리가 있어서 무당이 된 경우
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논의하는데 이 경우 친가나외가쪽 신부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났으므로 모계와 부계로 나누지 않았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여 신사(神事)를 하는 무녀 김임선씨(여, 1991년 기준
50세)의 경우 혼인 후 무당이 되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신병을 앓는 등 신의 단련을 받았
는데 신을 받지 않으려고 계속 신을 떼어내는 굿을 하여 재산을 많이 없앴다. 그러다가 신
을 받고 모셔놓았지만 손님을 받지는 않았다. 그 무렵 며느리인 김임선씨가 계속 신의 단련
을 받았다. 결국 시어머니 신과 합의시키는 ‘합의 굿’을 하여 며느리인 김임선씨에게 완전히
와서 며느리가 무당을 활동하고 있다.25)
시어머니의 신부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송순천무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무
당이었던 그녀의 시어머니는 송씨가 무녀가 되는 것을 반갑게 맞는 현몽이 있었다.
<사례 11>
송순천(1992년 5월 조사 당시 만 43세)무녀가 새로 이사가는 집 대문 앞에 양쪽으로 돌이 있었다. 세 계약을 하고
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돌을 발로 툭툭 찼다. 뭐가 있는지 모르게 웬지 자신을 그곳으로 끄는 것이었다.
23) 김명순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223~227쪽 참조.
24) 이제환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5. 점복신앙편.(서울:1993), 141~161쪽 참
조.
25) 김임선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339~350쪽 참조.
10 한국무속학
“아무래도 돌멩이가 비위에 거슬려서 이것을 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들어 사는 주제에 말이에요.”
이사를 하고 잠을 자는데 한 할머니가 나타났다.
“너 여기 잘 왔다”고 하시는데 그 할머니는 지금 남편의 어머니, 곧 송씨의 시어머니로서 너덜너덜한 서낭옷을 입
고 맨 진흙땅에 서 계셨다.26)
“그래서 제가 아유 어머니 시장하시죠? 하니까 아니다 네가 와서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꿈을 깨고 아침 일찍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대문 앞의 그 돌멩이가 또 눈에 거슬렸다. 나중에라도 파야
겠다고 생각했으나 또 파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멩이 앞에 술잔이 나란히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아 여기 술을 부으라는 거구나.”라 생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새벽에 술을 사다가 거기에 술 석 잔을 부었다.
당시 집주인은 지하실에 살고 송씨가 안채에 세 들었었는데 주인은 기독교인이었다. 송씨가 새벽에 돌멩이에 술
붓는 걸 목격한 주인 집 여자가 화를 내어 마침내 심하게 싸움이 붙었다. “니 종교다, 내 종교다” 하고 종교 싸움으로
번진 것이 나중에는 그야말로 육탄전으로까지 갔다. 결판이 나지 않아 결국 불암 파출소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파출
소에서 해결이 나지 않자 태릉경찰서로 넘어갔다. 여기서도 해결이 나지 않아 유치장에 들어갔다. ‘종교싸움’이니 쉽
사리 해결이 날리 없었다.
그런데 송씨의 얼굴이 술 마신 사람처럼 벌겋게 되어갔다. 형사가 슬을 마셨느냐고 묻자 송씨는 술을 마시지 않았
다며 궁금하면 냄새를 맡아보라고 입을 벌려 보였다. 마침내 해결이 잘 되어 풀려 나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점을
치기 시작했다.
“난 무당이다. 네가 나에게 신(神)굿을 해 주었다.”고 주인 여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법당(法堂)27)도 없었다.
실은 지금의 법당도 달리 꾸미지 않고 자연 그대로다.28) 법당을 차리래서 차린 것이 아니라 ‘그냥 들어앉은 것’이다.
주인 여자와 싸움을 하고 난 얼마 후 송씨와 가깝게 지내던 언니한테 융단 같은 천에 호랑이 가족이 그려진 벽걸
이 하나를 받게 되었다. 그 언니의 남편이 사우디에서 사 온 것인데 송씨 집의 응접실이 워낙 넓으니까 그 언니의 딸
이 놀러오면서 “아줌마 응접실이 넓어 허전하니까 장식이나 하라”며 빌려준 것이다. 응접실 벽에 그걸 걸어놓았다.
그 무렵 마침 식탁을 주방에 새로 들여왔기 때문에 벽걸이 밑으로 식탁을 밀어 치는데
“여기 내가 앉았다. 내 도사가 여기 앉았다.”며 손뼉을 쳤다. 물론 송보살이 그런 행동을 했지만 이 때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 도사가 된 것이다. 벽걸이를 건지 이틀만엔가 이런 일이 생겨 요즘도 그 벽걸이를 가지고 온 아가씨가
송보살 집에 오면 법당에 들어가 곧잘 울곤 한다.29) 그녀는 직장에 다니는데 자기가 벽걸이를 가지고 와서 송씨가 보
살이 된 것이라며 오히려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30)
한영희무녀(1991년 기준 40세) 역시 시가의 신부리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례 12>
신을 받아 무당이 되기 전, 35세 되던 1986년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도 알 수 없었는데 뒤늦게 신병
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양의(洋醫)와 한의(韓醫)를 찾곤 했으나 효험이 없었으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결국 무당을 찾
아 점을 보게 되었는데 시집 웃대의 할머니가 몸에 실린 것이니 그 분을 모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4대 할머
니가 만신이었는데 그 분이 한영희씨에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무당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친
정 식구들은 병이 낫는 길이 그것이라면 그것도 해보아야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에 시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고 한씨를 찾아왔다.
26) 송씨의 시어머니는 전에 신을 모시던 분이었다. 1992년 당시 79세로 연로하셔서 무업(巫業)은 그만두고 몸
주신만 모셔놓고 있다고 했다.
27) 정확하게 말하면 신당(神堂)이지만 무당들은 흔히 법당이라고 한다.
28) 사실 송보상의 법당은 특이하다. 별 꾸민 것이 없이 자연스런 모습이다.
29) 호랑이는 민속신앙에서는 산신, 또는 산신의 사자(使者)를 상징한다. 벽걸이가 결국 산신탱화(산신 무신도)가
된 셈이다.
30) 송순천무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5. 점복신앙편., 232~243쪽 참조.
무당과 ‘신부리’ 11
“내가 예닐곱살 때 할머니가 계셨는데, 신이 들어 만신이 되자 양반의 집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어른들이 쫒아내
셨다. 쫓겨난 할머니는 산밑에 당집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면서 일을 하셨는데, 내가 몰래 가서 창너머로 안을 보기도
하였다. 나를 보신 할머니가 과자 등 먹을 것을 주신 기억이 있는데 네게 아마도 그 분이 씌운 모양이다. 젊은 사람이
죽으면 한이 되니까 한번 해보아라.”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혼인 후 아이가 없어 할아버지가 둘째 할머니(시앗)를 얻었는데, 신이 내려 쫓겨난 것이었
다.31)
한영희씨의 시아버지에게 할머니가 되니 한씨를 기준으로 하면 4대 할머니가 된다. 즉 한씨
에게 무당이 되어야 낫는다고 말한 무당의 표현대로 4대 할머니가 만신으로 한씨는 시댁의
신부리를 이어받은 셈이다.
시가의 신부리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인학자가 조사한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무녀 R씨는 시
어머니의 신부리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례 13>
무녀 R씨. 47세.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덕물산에 거주, 그녀의 어머니는 무당이 아니었으나 그녀가 무당 집으로 시
집와서 15세 때 시어머니가 굿을 하던 날 밤에 그녀는 꿈을 꾸었다…무서운 꿈으로 인하여 깨어났는데 그날 밤부터
병이 나서 고생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얼굴이 부어 올라서 눈에 띄게 되었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뜨거운 물만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여 무당이 될 신이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병마
를 쫓고자 2, 3회의 굿을 하였는데도 병은 낫지 않고 심할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밖으로 나가서 집집을 돌아다니
며 굿을 할 돈을 모았고 그것으로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었다…32)
앞에서 밝혔듯이 친가 또는 외가에 신부리가 있어서 신병을 앓는 여성 가운데에는 혼인 후
신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 혼인 후에 시댁에 신부리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일도 나타난다. 혼인 전까지는 시가에 신부리가 있는 사실을 모르다가 혼인 후 알게
된 것이다. 이강재무녀(<사례 2>)의 경우 친정에 강한 신부리가 있었지만 시댁에도 그와 유
사한 현상이 있던 것을 혼인 후에 알게 되었다. 즉 시아버지가 역학인인 사실을 혼인 후에
안 것이다.
그런데 친가나 외가에서는 신부리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신부리가 있는 가정과 혼인을 하는
것에 대하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부여의 서근숙무녀(1958년생)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씨의 친정에는 무업(巫業)에 종
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혼인하여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가 모시는 신당을 보고 놀랐는데, 나
중에는 자신이 신을 모시는 무인(巫人)이 되었다.
<사례 14>
…그녀(서근숙)는 20세 때 결혼, 그 후 뚜렷하게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남들 보기에 꾀병같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증세는 결혼 초부터 약간씩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처음에는 몰라서 그냥 넘어갔다. 2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골이 아프고 일하기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면 병명이 나오지 않고 때로는
‘얼토당토’한 병명이 나오기도 하였다. 신병을 앓으면서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급기야 집을 나와 산중의 암
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2년간 산중에 살면서 온갖 기이한 체험을 했다. 결국 1995년 12월에 내림굿을 해서 정식
31) 한영희씨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445~455쪽 참조.
32) 秋葉 隆(아끼바) 저, .조선무속의 현지연구., 67쪽.
12 한국무속학
으로 신을 받았다. 그녀의 친정계보에는 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지나가는 스님들로
부터 “스님이 되거나 무당이 될 사주”라고 여러 차례 계시를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나 그 스스로도 이러한 계시를 별
로 개의치 않고 생활을 해왔다. 그러던 중 연애결혼을 하여 대천에 있는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시집에 들어가
서 기이한 것을 보게 되는데, 집 한쪽에 마련된 시어머니가 모시는 법당과 신단이었다. 처음에는 법당이나 굿하는 모
습들이 낯설고 무서웠다. 얼마 후 사정이 생겨 그녀의 시어머니가 신을 모시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후부터 집안이
풍비 박산 되었다. 결국 그녀가 신을 모시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모시던 신들은 대개 보내드리고 자신이 새로 받은
신을 모시고 있다.
“시집을 이쪽으로 오시지 않았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라는 물음에 “어쩔 수 없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나 운명을 숙명적인 것이라고 받아드리는 듯 보였다.33)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기준으로 하면, 시어머니 신부리가 작용한 것인데 어린 시절에
“스님이 되거나 무당이 될 사주”라고 여러 차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혹 친정 쪽에도 신부
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말속에는 조사자의 표현
처럼 마치 ‘숙명’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록 친정쪽에는 신부리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신부
리가 있는 가정과 혼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래적(生來的)으로 지녔는지도 모를 일이
다.34)
경북 안동의 김정숙무녀 역시 시어머니의 신부리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무속
이나 신병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혼인하면서 신병을 앓게되어 무속인이 되었다는 점은 서
근숙무녀와 흡사하다.
<사례 15>
김정숙씨는 19세 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폐병이라고 하여 약을 7∼8년 동안 복용해도 낫
지 않았다. 22세에 남편과 대구에 살면서 큰 아이를 가졌는데 꿈을 꾸면 이튿날 일어나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꿈에서 할배[신]와 대화를 하고 할배가 지시를 많이 했는데 슬픈 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할배가 꿈에 나타
나서 “조심해아, 니가 이래 사는데 불쌍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남편도 약간 신기가 있었는데 부정하였더니 돈이 나가고 사고가 났다. 남편은 신내림을 피해 기독교, 불교 등 여러
종교를 찾기도 했는데 김정숙씨 역시 남편과 다녔다. 김씨는 나날이 심하게 아프자 점을 보러 갔는데 신을 받아야 한
다는 점사가 나왔다. 그러나 무속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평소 점을 친 적도 없어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을
부정하며 보냈는데 어느 날 꿈에 할배가 승복을 입고 “내가 부처님이다” 하면서 나타났다. 다음날 꿈에 할배가 또 나
타나서 “어디 어디 가면 니가 알 길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곳은 처음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 안동에 있는 명
현사였다. 내림굿 날짜를 받았지만 당시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다. 무속을 심하게 부정했던 김씨의 오빠에게 가까
스로 돈을 빌려 김씨가 26세였던 1999년 12월 26일 풍산 막곡에 있는 진원사35)에서 내림굿을 했다. 굿을 하는 과정에
서 시댁으로는 고조 할아버지.고조 할머니.증조부 세 분이 내렸는데 증조부는 장군으로 좌정하고 친정으로는 5대
조부터 줄잡아서 들어왔다. 친정의 고조 할아버지가 용신대감, 그 부인이 옥정부인, 증조부가 천신대감, 할매가 약사
보살이며 시댁도 같은 줄로 같이 활동한다. 칠성할매는 시댁과 친정 양줄로 내려오는데 친정의 고조모와 증조모, 시
댁의 고조모 세 분이 합쳐 삼불제석도 되고 각자의 기술도 있다. 친정은 용신줄이고 시댁은 산신줄인데 김정숙씨는
천신제자로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몸주신은 천신대감 할배인데 처음 내려올 때 구름을 타고 “내가 증조할아버지다” 라고 하는데 체격이 좋고 수도를
33) 이 내용은 안동대 민속학과에 재학중이던 김문정(93학번)이 ‘한국무속론’의 과제로 제출한 무속사례의 일부
를 최대한으로 요약한 것이다. 무속사례는 1997년 6월에 충남 부여에서 현지조사했다.
34) 사실 이는 객관적인 표현이 아니어서 연구자로서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서근숙씨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드린
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표현해 본 것이다.
35) 진원사는 신당과 굿당이 있는 일종의 ‘암자’같은 곳이다.
무당과 ‘신부리’ 13
많이 하셨다. 옛날 기생집 같은 곳에 간 것을 보여주면서 노래부르고 그동안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수도를 닦았는지
예기를 해 주었다. 고조모가 몸에 실릴 때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눈을 감았는데 언덕배기(내림굿을 한 진원사가
언덕배기에 있다.)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그곳에서 구부정한 할머니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가 걸어오면서
“고바우[고개]가 높기도 높다. 물 한잔만 주소”라고 말했는데 보이는 즉시 몸에 실렸다. 증조부가 장군이니까 힘이 장
사이니까 칼을 썼다. “내가 어떤 장군인데 칼이 작다. 이게 웬 말이냐. 내인데[나한테] 안 맞다. 더 큰 걸 가져와라.”라고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뛰고 놀고 했다. 그렇게 신마다 각각 다 실려서 다 풀어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객사나 교통
사고로 인한 잡신이 실리기도 해서 고생하기도 했다. 굿할 때 신이 내려 풀어내고 뒤고 하는 것은 2∼3시간 걸리는데
신내림을 받아서 행동하는 당사자는 30분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36)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부리는 시어머니다. 신을 받는 과정(내림굿 과정)에서 양가의 조상들
이 신격화하여 김정숙씨에게 실렸다. 이처럼 내림굿 과정에서 조상이 신으로 실리는 경우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들 조상이 신부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부리인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김정숙무녀의 경우, 남편이 신을 거부하여 벌을 받고(사고가 나고) 결국 김씨가 신을 받았
는데 이처럼 신을 거부하면 가족 가운데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김정숙
무녀와 흡사한 경우는 앞에도 있었다. <사례 2>의 이강재무녀, 그리고 안보숙무녀의 경우
모두 친정 어머니가 ‘신을 거부하여 일찍 작고’했으며 결국 딸이 무당이 되었다.
특히 이강재무녀의 경우 친정 쪽에 신부리가 있었는데 재혼을 한 남편의 가계에도 신을 경
험한 역학인이 있었다. 즉 시아버지가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이씨의 남편은 무당은 아니지
만 종종 산에 수양(修養. 산기도)간다고 했다. 산에 수양(기도)가는 일은 무속인에게는 흔한
일이다. 남편에게도 신줄이 있다는 것인데 신을 받지 않은 대신 수양으로 대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강재무녀의 시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부적신이 내렸다. 이씨의
신부리는 기본적으로 친정쪽이라 할 수 있으나 시가쪽의 신부리 역시 전혀 무관한 것은 아
닌 셈이다. 곧 친가와 외가 및 시가의 신부리가 모두 작용한 셈이다. 그야 어떻든 신부리는
후손에게 거의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Ⅲ. 신부리의 성격
무당 집에서 무당이 나오는 예는 강신무와 세습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습무는 제도
적인, 곧 인위적으로 세습하여 무당이 되는 반면 강신무는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신이 왔을
때 성무(成巫)하는 것이다. 비록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이 오지만 ‘신부리’가 작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무당집에서 무당 난다”는 말은 주로 강신무를 일컬을 때 하는 말이다.
신부리는 친가 또는 외가쪽 신부리와 시가쪽 신부리로 나눌 수 있지만 양쪽의 신부리가 모
두 작용할 수도 있다. 혈연관계인 친가 또는 외가와 인척관계인 시가 중 어느쪽의 신부리가
양적(量的)으로 우세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를 본다면 혈연 관계
쪽이 우세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시가쪽의 신부리가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친가나 외가쪽 신부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시가쪽만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만은 없
다. 특히 여성의 경우 처녀 때부터 신병을 앓았을 경우 친가 또는 외가쪽에 신부리가 있었
36) 이 내용은 안동대 국학부 민속학 전공에 재학중이던 권윤.김수미.신정민이 ‘한국무속론’의 과제로 제출한 무
속사례의 일부를 최대한으로 요약한 것이다. 무속사례는 2001년 4월과 5월에 경북 안동에서 조사했다.
14 한국무속학
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만약 친가나 외가의 신부리를 알 수 없는데 서근숙무녀(<사
례 14>)처럼 혼인 전부터 “스님이 되거나 무당이 될 사주”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그녀
의 친가나 나 외가에 신부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래적으로
스님이나 무당이 될 팔자[사주]였기에 신부리가 있는 가정과 혼인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앞에서 예시한 바에 의하면, 신을 거부하면 가족 가운데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경우도 나타
날 만큼 신부리는 후손에게 거의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우 무당으로 신사
(神事)를 하는 수도 있지만 수양을 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로 대체하여 ‘종교인’으로 활동함으로
써, 무인(巫人)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37)
필자가 오래 전에 알았던 한 ‘종교인’의 예를 들어본다.
그녀는 연극무대에서 꽤 오랫동안 활약을 했었다. 개인적으로 나름의 아픔도 겪었는데 연극
활동 중 모 기독교에 귀의했다. 대학 시절만 해도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
녀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신학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도 큰
종교인이 될 것이라며 학문적 연구를 권했다. 신학대학에 학사편입을 하여 우등생으로 졸업
했으며 대학원도 마쳤다. 이후 교회의 전도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집안에 ‘신부리’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기독교를 택하지 않았다면 ‘무당’이 될 수도 있었
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전도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당들은 신부리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자랑은커녕 숨기고 싶어하고 꺼린다. 그러나
일종의 숙명처럼 받아드리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사용하던 물건을 없애버리는 것에 대하여 각기 다른 설이 있다.
우선 무당이 쓰던 물건은 “대를 물리거나,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불에 태우는데 쇠붙이는
땅에 묻는다는 것이다. 땅에 묻은 이런 무구들이 노출되어 산골짜기를 헤매 다니는 강신 체
험자들에게 발견될 수 있다. 반드시 눈에 띠지 않더라도 현몽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신비체험을 하고 성물을 습득하는 체험은 범속한 인간이 신권자 무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38)
그런가 하면 신부리를 꺼려 무당이 쓰던 물건을 없애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즉 “무당은 무
당부리에서 나온다고 하는 강신무들은 후손으로 무당의 대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들이 사용하였던 무의식구(巫儀式具. 무구)들을 땅에 묻거나 불태워버리는 관습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무구들은 신이 내릴 예비무당이 현몽으로 찾아내기 때문에
무업의 종결은 무업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39) 곧 무구를 찾아내면 새로운 무당이 탄생한
다는 점에서는 전자나 후자가 같은 결론이다. 후자를 중심으로 본다면 무당이 신부리를 상
당히 꺼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신부리는 인척관계보다 혈연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부계쪽보다는 모계쪽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을 파악할 수는 없다.
37)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속 사례를 조사하다보면 다른 종교를 믿다가 무속인이 되었
다는 경우가 있다. 또는 무속인이 싫어서 다른 종교를 택했으나 신병이 낳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무속인이
되었다는 경우도 있다.
38) 김태곤, .무속과 영(靈)의 세계.(한울, 1993), 19쪽.
39) 양종승, “무당의 신병과 신들림,” .한국무속학. 제2집, 2000, 117~118쪽.
무당과 ‘신부리’ 15
무속을 여성종교로 고착화시키는 것은 상당히 도식화되고 경직된 논의일 수 있다. 이 논의
대로라면 모계쪽이 강한 요인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혹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종교와
관련된 일은 여성이 중심이 되고 이는 신부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을 해본다.
신부리는 인간심성을 지배하는 신관념과 관련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남성쪽보다는 여성쪽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무속과 같은 맥락에 있
는 가신신앙이 대체로 여성중심의 신앙이라는 점도 이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Ⅳ. 맺음말
지금까지 강신무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인 신부리의 양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
사례를 예시하며 간략하게 해석을 곁들였다.
신부리의 양상은 혈연관계와 인척관계로 나눌 수 있는데 친가와 외가쪽은 전자, 시가쪽은
후자에 해당된다. 전자의 경우 다시 모계쪽과 부계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이는 시가쪽
에 비해 한층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신부리는 아들과 딸.며느리.손자.손녀.조카.형제 등과 같이 혈연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
가 하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처럼 가까운 인척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어도 조상 가운데 역학을 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부리가 작용하
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신부리가 있는 집안에서 신을 거부하면 가족 가운데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경우도 나타
날 만큼 신부리는 후손에게 거의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부리는 인척관계보다 혈연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사례에 따르면 부계쪽보다는 모계쪽
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무속을 여성종교로 고착화시키는 것은 상당히 도식화되고 경직된 논의지만 이 논의에 따른
다면 모계쪽이 강한 요인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같은 맥락이지만 남성
과 여성의 역할 분담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종교와 관련된 일은 여성이 중심이 되고 그것은 신부리에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인간심성을 지배하는 신관념은 여성쪽이 중심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신부리는 여성쪽이 많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논지는 ‘추정’일 뿐 그 이상 전개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김명자, “안동지역의 무속사례,” 안동문화 제15집, 안동대 부설 안동문화연구소.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 집문당, 1981.
, 무속과 영의 세계 , 한울, 1993.
김태곤 외, 한국의 점복 , 민속원, 1995.
서울특별시 편, 서울민속대관 2, 서울무속편 , 1992.
16 한국무속학
양종승, “무당의 신병과 신들림,” 한국무속학 제2집, 한국무속학회, 2000.
秋葉隆, 최길성 역, 조선무속의 현지연구 , 계명대학교출판부, 1987.
무당과 ‘신부리’ 17
Shaman and "Sinburi"
Kim, Myung-ja (Andong University)
"Sinburi" which means sinn's root is a term used in shamanism. The terms such as
"mansinburi" and "josangburi" are often used in shamanism. They say, "a shaman
comes from a shaman's family." In this case, "mansinburi" is used. It is said that
shamans inherit their "buri" in cases that their forefathers are either shamans or
persons associated with shaman. Shamans who succeed to their forefathers' shaman
job are called hereditary shamans. But this heritage is different from "sinburi".
Because, the heritage in shamanism is one of minister's privilege. "Sinburi" is a
phenomenon appeared generally in charismatic shaman and succeed to family or
relatives. "Sinburi" succeeds to a son, a daughter, a granddaughter, a grandson, a
daughter-in-law and even a nephew. In this paper, the type of "sinburi" was both
extensively divided into "sinburi" of father's family or "sinburi" of mother's family.
And agin the extensivley divided types are subdivided presenting examples.
Key Words. sinburi, shaman, shaman's family, charismatic shaman
첫댓글 참으로 같은제자길을 가지만 여러모로 배웠습니다 내용 감사합니다 내용담아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