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강론
연중 제 24주일(2011.9.11) 용서해 주려면?
지도사제 11.09.10 14:40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교처럼 '죄와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정말 엄청나게 강조하고, 또 실지로 '죄를 용서해 주는 종교'는 이 세상에 또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다른 어떤 종교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종교가 있는가?
인류의 4대 종교인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중에서 어느 종교도 없다.
혹시, 죄의 용서를 말하는 종교가 나타났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종국에는 죄를 용서해 주는 댓가로 '돈'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몸'을 요구하는 사이비 종교임이 틀림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용서'라는 말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들어왔기에 이 말이 우리의 귀에는 지극히 평범한 말로
들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이 말은 마치 '외계 언어'와도 같은
매우 특이한 언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차치하고 2천년 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 복수법'이 통용되던 예수님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었을 것이다.
(...)
잘못에 대한 '복수'가 오히려 사회의 정당한 규범의 하나로 통용되던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예수님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은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오히려
'용서의 종교' 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한 명칭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당신이 이미 여러 차례 밝히셨던 그대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었으며,
당신이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도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권'이 있음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죄 사함의 '권한' 을 넘겨주심과 동시에
또한, 교회 구성원은 누구나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고 당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한 대목을 살펴볼 때에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로,
'끝없는 용서, 완전한 용서(일곱=완전, 일흔일곱=완전의 완전)'를 말씀하셨다.
완전한 용서,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정말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하루에 수도 없이 외우면서도 막상 누가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되면
자신이 입은 피해가 크면 클 수록 용서하기에 더욱 큰 어려움을 느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완전한 용서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에 사람들은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느니,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느니,
'아름다운 용서'라느니, '용서는 신적인 행위'라느니 등등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용서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면
아마 예수님께서도 아예 그 말씀을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살해한 청년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고
더나아가 그의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해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단 하나, '하느님의 마음을 갖는 것' 뿐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단 하나,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단 하나,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겨 드리는 것'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내어 드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족함도 죄스러움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완전한 용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된다.
인간인 자신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신적인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용서가 아무리 신적인 행위라고 해도,
그 신적인 행위가 적용되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에 한해서' 라는 점이다.
미사 시작의 참회 예절의 셋째 양식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우리가 외치듯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에게만이
진정한 용서가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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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49)
이미 받은 용서로 용서함
영원한일치 18.12.01 08:08
■ 칼릴 지브란의 권고
2013년이 저물어 간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를 달궜던 키워드 중 하나가 ‘증오’ 아니었을까 한다.
그 원인과 양상이야 어떻건, 우리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할 숙원의 과제가
분열과 적개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누구도 감히 ‘용서’를 권하지 못한다.
왜일까? ‘정의’라는 명분이 워낙 우뚝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의 상황에서 ‘용서’를 말하는 것은 금기일까?
시인이자 구도자인 칼릴 지브란은 기개 있게 말한다.
그대들은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의로운 자가 사악한 자의 행위 앞에서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가 그릇된 자의 행위 앞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는 없는 것.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이들은 다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 중 누군가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녀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고, 영혼도
재어보게 하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는 자는 죄지은 자의
영혼을 헤아린 연후에 그리 할 것인가를 고민하라.
정의란, 그대들이 기꺼이 따라가려는
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죄인의 가슴에서 뉘우침을 빼앗지 마라.
뉘우침이란 청하지 않아도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며 스스로를 응시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곰곰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영감어린 글이다.
남을 판단하지도 말고 단죄하지도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한 맥락이다.
게다가 궁극의 반전인 ‘뉘우침’을 겨냥하고 있으니 손색없이 성서적인 예지라 하겠다.
대림절 판공성사 성찰문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 베드로의 셈법과 예수님의 셈법
<사도신경>에서 ‘죄의 용서를 믿으며’는 여러 차원의 은총을 함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죄의 용서’는 남의 죄를 용서하는 특은을 내포한다.
어떻게 그런지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아내야 하는 부르심 앞에 서게 된다.
그 하나는 ‘용서 받은 사람의 삶’이다.
용서 받은 사람의 당당함이 필요하다. 천국의 자녀답게.
앞의 글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고개를 들어라. 나는 네 뒤통수를 보려고 너를 만든 게 아니다.
네 두 눈을 보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다. 그러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용서 받았으면, 이제 용서를 자꾸 확산시키는 것이다.
용서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한테 거저 용서를 주셨는데,
내가 이 세상 사람들하고 원수를 맺으면 되겠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하고 화해하며 살 필요가 있다.
용서해야 우리가 이미 거저 받은 용서를 유지할 수 있다.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1-35 참조)에서처럼 우리가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 갚을 것을 호통치는 꼴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미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명령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산더미’ 같은 빚을 다 탕감해 주셨는데 거기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한테 한 잘못은 ‘개미 집’ 정도밖에 안 된다.
하느님께 받은 그 큰 용서를 생각할 때 어떻게 서로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하도 “용서, 용서” 하시니까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당시 라삐들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용서의 횟수를 최대 ‘세 번’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베드로는 이를 파격적으로 마음을 써서 ‘일곱 번’으로 올려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이 베드로를 크게 한 방 때렸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대답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 한 것은
용서란 주판알을 튕기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 바오로는 용서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정의의 판결을 모두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 그냥 줘버리는 것
‘용서’라는 말 뜻이 재미있다.
한자로 용서(容恕)는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容)과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如心)을 의미하는 서(恕)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동양적인 의미에서 용서는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마침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반면, 영어로 용서는 ‘forgive’다. 이는 ‘위한다’는 ‘for’와 ‘주다’는 뜻의 ‘give’의 합성어다.
또 ‘pardon’이라는 단어로도 쓰이는데 여기서 ‘don’은 라틴어 ‘donum’ 즉 선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무조건,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동양적 사고방식과 서양적 사고방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보인다.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면 사실 모든 것이 끝난 셈이다.
다 청산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소화하고 헤아리다가 오히려 미움의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본래 취지는 말하자면 이렇다.
용서치 못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자. 좋다. 옳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래도 선물처럼 거저 베풀어라. 그까짓 거 그냥 줘 버려! 이거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복음 사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진짜배기 용서는 ‘容恕’와 ‘forgive’의 합작품일 터다.
-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
첫댓글
아빠아버지,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거룩한 내맡김의 길을 허락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 지도사제 16.08.11 10:07
< 용서가 아무리 신적인 행위라고 해도,
그 신적인 행위가 적용되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에 한해서' 라는 점이다. >
정말, < 진심으로 통회 >하는 것이 용서의 핵심입니다, 핵심!
그것을 과거에는 < 상등통회 >, 아주 높은 차원의 통회라 했습니다.
상등통회에 비해서 낮은 차원의 통회를 < 하등통회 >라 말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통회, 상등통회는
★ 완전한 통회 ★ 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내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청했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고 말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자로서의 기본 자세는,
무릎을 꿇거나 눈물을 흘리는 < 외적인 자세 > 에 있지 않고
먼저 ★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깊이 뉘우치는
< 내적인 자세 >에 있습니다. ★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용서를 청(구)하는 자로서! ]
[ 지도사제 13.07.22. 23:10
하느님을 찾아 얻은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인이든 죄인이든 누구나 하느님 앞에 < 죄인 >임을 깨닫는 것이,
그럼으로 눈물, 콧물, 통곡 등의
< 눈물의 강 >을 거치는 것이 < 순서 >임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의 강, ★ < 회개의 뜨거운 눈물의 강 > ★을 거치는 않는 눈물을
저는 가끔가끔 악어의 눈물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나중에야
< 자기 연민의 눈물 >과 < 회개의 눈물 >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답니다,
하느님께 내맡겼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말입니다! ]
< 지도사제 12.02.05. 09:41
내맡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서약식 때의 "굳은 결심(맹세)" 입니다.
서약식 때의 결심이 100%의 굳은 결심이었다면
나중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깊은 통회의 마음을 선물로 주실 겁니다.
제가
"눈물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지금, 내맡김의 서약을 하신 분들 중에서
"눈물의 강" 을 체험하지 않으신 분은
아직 영적으로 많이 뒤져 있는 상태로 보시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내맡김의 화살기도가 적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물의 종류도
처음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의 눈물을 통하여
서서히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로 변화합니다.
눈물도 점점 뜨거워집니다.
울음도 "흐느낌" 에서 "통곡" 으로 변화됩니다.
그 뜨거운 눈물로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 다음부터
하느님을 진실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없으신 분들은 정말로 자신이
"내맡김의 화살기도를 입에 달고 사나" 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 지도사제 16.07.01. 09:25
하느님을 만난 이들은 누구나
이 성가를 부여안고 눈물의 부르스를 땡기게 됩니다.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뜨거운 눈물의 강을~~~
뜨거운 눈물의 강을 건넌 사람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절대로, 진짜입니다, 진짜~~~
이곳에 들어왔다가 떠난 사람들은
< 뜨거운 눈물의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 >입니다. ]
아멘, 아멘!!!
정말, 참으로 아멘!입니다.
< 처음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의 눈물을 통하여
서서히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로 변화합니다. >(지도사제)
< 거룩한 내맡김 영성(삶) >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봇물 터지듯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졌는지,
그리고, 거내영을 찾은 많은 진실한 영혼들이 또 왜 그리 울었는지,
그 눈물로 한 마디 말도 필요 없이 하나가 되었는지,
이제는 압니다. 알고 말고요~.
< 내맡긴 영혼 > 들이 한결같이 왜 그리 겸손한 영혼들인지,
왜 그리 더욱 더 온유해지는지, 매 순간 진실한 아멘!을 하고 있는지, 알고 말고요~.
<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아멘, 아멘!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품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저희들이기에 참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살게 되었네요.
사랑하는 신부님,
< 거내영 >으로 < 아버지 나라 >에 살게 해 주시니 정말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주만물을 아버지께 내맡겨 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용서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정의의 판결을 모두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아멘 아멘!!
용서에 대하여 많은 글과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내적 치유의 안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살아계심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아버지기도와 함께 살게되니 미움의 상대가 자연스레 치유되며 용서의 묘약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모든것, 즉 미워지는 상대 까지도 내맡겨 드리고 기도하는데 아버지께서 치유의 손길을 베풀지 않을수 없도록 이끄시는것 같습니다.
일어나는 모든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내맡겨 드리고 기도만 하는데 상대를 알아서 처리해 주시는것을 체험하게 하셨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방법대로 이끌고
가신다는 굳은 믿음의 확신이 있기에 내맡겨 드리고 끊임없는 화살기도와 함께 살았을 뿐인데도 신기하게 처리하시는 아버지,
당신에 대한 신뢰심으로 내맡겨 드리고 기도한다면 모든 것을 알아서 이끌어 주시는 나의 아버지를 뜨겁게 뜨겁게 사랑만하는것이 모든것의 해결사인 만능키 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
끊임없이 끊임없이 아버지를 찬미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거룩한 입술이 되도록 저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
감사 드리나이다.
모든 일의 모든것을 열수 있는 만능키를 갖고 싶으신 분들을 아버지를 자꾸 자꾸 부르며 사랑만 해 드리면 끄~~~ 읕!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저의 마음을 낱낱이 헤아려
용서로 이끄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정의의 판결을 모두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아 멘~!
사랑하는 아버지
오직 아버지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와 하나로 하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거내영의 여정이 참으로 오묘할 뿐입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아버지를 부르지 않는다면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용서하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하실수 있는 신비를 철부지인 저를
통해서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리며 무한찬미영광 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지금여기 함께 하시기에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의 생명이 되시고 하심을 믿습니다.
더 더 아버지만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 지소서.
지도사제와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사 완영을 위하여~!!!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내어 드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족함도 죄스러움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완전한 용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된다. >
아멘! 아멘!
아버지, 어제 이 글을 보았을 때,
저는 마음속에 깊은 울림이 있었지만,
댓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으로 하루를 보낸 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제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사실을요.
사실 아직도, 완벽히 정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댓글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제 자신을 용서하라고 이끌어 주신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제 스스로를 용서하기란 몇 배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남이 나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어쩌면 쉽게 용서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제 자신을 용서하기란 너무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하기도 하며,
제 스스로를 제 자신이 가장 미워하고, 원망하며 때로는 혐오하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고,
저는 제 자신을 미워하기를 멈췄다고 생각했고, 제 자신이 좋아지는 순간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스스로를 미워했던 시간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족하게도, 조금만 제 스스로를 미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스스로를 공격했습니다.
왜 그랬냐고, 밉다고, 이런 내가 너무 싫다고…
하지만 저는 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렵지만 제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어리석은 제 스스로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저는 진심으로 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자 합니다.
한 번에 되지 않을 것이며, 오래 걸릴지도, 용서하기를 포기할지도, 생각보다 더 큰 아픔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버지께서 이런 마음을 이끌어 주셨음에 용기를 얻었기에,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 스스로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나아가겠습니다.
@야다.보조
용서하는 과정에서 흔들리더라도,
아버지를 믿으며 나아가겠습니다.
내맡기지 못했더라면,
스스로를 내 것이라고 여겼다면,
저는 스스로를 용서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제 스스로는 더 이상 저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임을 알기에,
저를 용서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어,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왕창 이끌어 주시어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부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욱더, 열렬히 아버지를 사랑하며 내맡겨 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오니,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거룩하신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