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84
3월2일[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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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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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313xaeYbyM
[서울대교구 박민우 알베르토(사목국 노인사목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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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누군가가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료하게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카 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른바 ‘탕자의 귀향’ ‘돌아온 둘 때 아들의 비유’를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 종종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앞당겨 받는 그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 받자 마자 이게 웬떡이냐며, 멀러 멀리 떠나 갔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돈은 그 행방이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흥청망청 유흥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중의 돈이 사라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듯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언제 봤냐는 얼굴입니다.
완전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물, 불경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사과의 말씀을 되내이면서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저 멀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의 주인공이요 주체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기보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같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탕자에만 시선을 지나치게 고정 시킵니다. 탕자가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동료 사제 한분이 이 복음 구절을 주제로 미사 강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탕자의 그릇된 행동에 필이 확 꽂혀 탕자 야단치느라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강론이 마무리 될텐데, 안 돌아오니 다들 마음을 졸이던 중, 한 형제가 외쳤습니다.
“신부님! 음식 다 식는데, 이제 그만 탕자 돌아오게 하시죠!”
우리도 많은 경우 그릇된 행동을 한 둘 때 아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의 죄목을 나열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유의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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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행동이 아니라 욕구에 집중하라. 그게 나다!>
‘헬과 마리’라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헬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그런 헬이 어느 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를 만납니다. 가슴 깊이 찾아든 사랑의 열정으로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헬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헬에게 가장 온화한 사람의 얼굴 가면을 선물하십니다. 헬은 그 가면을 쓰고 다시 마리를 찾아가 청혼합니다. 마리는 결혼에 응합니다.
결혼하고서도 헬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삽니다. 헬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마리를 보살폈고 마리는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 마리의 행복이 헬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행복을 질투한 친구가 헬의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그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도 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헬의 험상궂은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가면과 같은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도 가면이 있는 것을 안 헬의 친구는 그것을 벗어봅니다. 그런데 헬의 이전 얼굴이 친구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비어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책의 내용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행위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정확히는 ‘욕구’로 드러납니다. 본성이 욕구입니다.
사랑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험상궂어도 속에는 사랑의 본모습이 있고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바라는 것이 험악하면 그 사람의 본 얼굴은 험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욕구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만 의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속은 음탕한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었고 화나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은 죄인이지만 속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세리와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의 형은 아버지 밑에서 죄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온갖 죄를 짓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죄만 짓고 온 놈을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죄는 이것입니다. 동생이 지은 죄를 은근히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흥청대었습니다. 이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도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욕구로는 이미 죄인이지만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니 의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 동생은 이제야 아버지 밑에서 죄 안 짓고 형처럼 일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남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화가 나면 나도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한 본당을 떠나기 직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감사인사를 왔습니다. 형제님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1년 전에 상담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1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지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자매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전엔 남편이 미워서 죽겠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아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불도 깔아주며 잘 주무시고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죄를 지어본 우리들이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이 행복하겠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안다면 그 사람의 가면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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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버지 마음>
요즘 강정마을의 국내 유일 바위습지인 구럼비 바위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늦게 관심을 갖은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듭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4.3 항쟁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더욱 가족같이 끈끈했던 주민들이 새로 건설되는 해군기지의 찬반 문제로 서로 갈라져서 말도 안 하는 사이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주 사람들만 못살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전부 찬성 반대 사람들을 말이죠. 조카 내 동생 아들하고 제사도 같이 안하고 벌초도 같이 안합니다. 아무 것도 안합니다. 만나지도 않습니다.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삼촌 보고도 백부 보고도. 걔는 찬성이거든요. 난 반대고요. 눈물 납니다. 눈물 나요.”(발췌: 뉴스타파 6회)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건설한다는 해군기지, 결국은 나라 안에서 평화가 깨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돌아온 탕자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두 아들을 중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깊이 새겨져야 오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돌아온 탕자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끔 그들을 독사의 족속들, 혹은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며 독설을 퍼부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예수님은 그들을 설득해서 그들도 당신 품에 안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죽었던 아우가 살아 돌아왔으니 함께 집으로 들어와서 잔치를 즐기자고 설득하고 계신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누구하나 당신을 떠나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당신 품 안에서 화해하고 같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으시고 일치시키시지만 사탄은 흐트러뜨리고 분열시킵니다.
레페브르(Lefebvre)는 주교로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반대하여 따르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품을 주었던 사제들도 교회에서는 파문되었습니다.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한 번 그들이 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고 미사에 온 사람들도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성체성사 때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으면 흰 천을 가슴 앞에 대고 성체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입으로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이렇게 미사를 드렸겠구나!’ 하면서 시대를 거슬러 미사를 드리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릴 것을 결정하였지만 그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그 이전의 전통만 고집하기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파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베네딕도 교황님께서는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고 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미사를 거행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에 관해 많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공의회에서 주교단이 결정한 사항을 거부하는 단체를 받아들여서 주교단과 공의회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교회 내에서 이런 반론들이 제기되니 이번에는 그것에 대해 교황님께서 모든 주교님들께 그것을 해명하는 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강경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파문’거리는 아니었습니다. 파문은 교회의 신앙에 어긋나는 신심행위를 했을 때에야 정당합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새로 결정된 교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은 사목적인 사항들이었습니다. 그 사항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교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의 믿을 교리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니 전례 형태만 다른 것입니다 공의회 이전 전례를 고집한다고 하여 그들을 파문해야 한다면 그 전까지 그런 전례를 행해왔던 모든 사람들도 문제가 있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지만 그렇게 쉽게 파문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은 신학자시기 때문에 이것을 깊이 간파하시고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신 것입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도 자녀입니다. 모든 자녀를 한 울타리에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다 당신 품에 안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당 내에서도 서로 분열이 있고 나라 내에서도 이렇게 분열이 있습니다.
사제라면 누가 잘했건 못했건 하나도 집을 뛰쳐나가지 않고 잘 포용해야 할 것이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나라 내에서도 이런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갈라지는 모습이 아버지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하여 한 울타리에 머물기를 결심하고, 또 강정마을에도 참 평화가 머물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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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들과 뉴욕에서 댈러스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운전해 주었고,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해 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던 것처럼 먼 길을 가는 제게 신부님들이 함께해 주니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교회에 관한 이야기, 정치에 관한 이야기, 사제 생활에 관한 이야기, 문학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기에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숙소를 예약한 신부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에 업그레이드된 숙소를 잡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도 업그레이드된 항공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저의 마일리지를 보고서 저도 얼마든지 업그레이드된 숙소와 항공을 예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도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일리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능력이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회개하면 밝은 광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방탕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지라도 회개하면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에 심취했고,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였고, 위대한 교회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하였고, 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간직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였던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업그레이드 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업그레이드된 신앙을 선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큰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고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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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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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작은아들의 행동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멀어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어지려고’ 자기 것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이 멀어짐의 결과는 짐승보다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다가오는 아들을 발견하고 오직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습니다. 그 어떤 분노나 훈계도 꾸짖음도 없습니다. 그저 열렬한 환영과 ‘받아 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독서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선언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멀어진 존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정직한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정직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그 온전한 사랑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그분께 돌아갈 때 우리는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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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되찾은 아들의 비유, 화를 내는 큰아들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5,1-3)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9-32)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진짜 주인공은 ‘큰아들’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의 회개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번 죄인이 되면 그걸로 끝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2절의 ‘투덜거렸다.’는 뜻으로는 ‘비판했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한 말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도 죄인이다.”라는 뜻입니다.>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안에’ 있고,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데, 큰아들은 화를 내면서 ‘밖에’ 있고,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작은아들은 ‘이미 되찾은 아들’이고, 큰아들은 아직 되찾지 못한 ‘잃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찾으려고 가는데, 그 모습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가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로 끝나기 때문에,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큰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잔치에 참석해서 함께 기뻐해야만 이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그 완성은 곧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완성입니다.
‘나의 일’로 좁혀서 생각하면, ‘나 자신’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그 완성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마무리될 때, 남들은 모두 안에 있는데 나만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29절과 30절에 있는 큰아들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내용으로도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말이고, 표현으로도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칭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비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을까?>
“여러 해 동안 종처럼 당신을 섬기며”라는 큰아들의 말은, 자기를 종처럼 부려먹었다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인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시킨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라는 말은, “나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들, 즉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진짜 의인이 있을까? 진짜 의인이라면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선자들이나 그런 말을 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당신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주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감히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라는 말은, “죄인들은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처벌을 하지 않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느님을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을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타이르기만 합니다. 큰아들도, 작은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고”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복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렇게 큰 복이 아닙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말은, 작은아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고 해서 큰아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은 정원 제한이 없는 집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집입니다.(요한 14,2) 자리가 모자라서 못 들어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32절의 아버지의 말은,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큰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는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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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헨리 나우웬이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가 있습니다. 탁월한 영성가, 심리학자, 사목 신학자로 활발히 활동해오던 그가 노년에 신경쇠약증에 걸립니다.
오랜 활동으로 인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자 그는 한 공동체에 들어가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공동체에 처음 들어갔는데 한 장애인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누구에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헨리 나우웬입니다”.
그러자 상대가 물었습니다.
“하버드가 뭐에요?”
“전 세계에 있는 지성인들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교입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왜 공부를 하려고 해요 사람들이?”
신부님은 그날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지금껏 나에게 하버드가 무엇인지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들에게 얘기해주기가 어려웠다.
내 친구 중에 아주 유명한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자문을 구하는 세계적인 리더들이 있다는 것을 이들에게 알려주기 어려웠다.
어쩌면 나의 오래된 정신적 방황이 여기서 마무리 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나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헨리 나우웬은 이곳에서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게 되고 스스로의 무능함 또한 경험하게 됩니다.
학구적인 삶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달변가인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과의 삶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더 지혜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 그들의 삶에 감화된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란 바로 이렇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것.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대화하고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작은 아들이 커다란 불효를 저지르고 멀고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므로 사육할 수 없었는데 작은 아들이 나중에 돼지를 쳤다는 것을 보면 작은 아들이 떠나 있던 고장이 죄인들의 도시라 불리던 이방인의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모두 잃은 작은 아들은 남의 집 머슴으로라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자신의 고장에서 혐오스러운 동물인 돼지를 치고, 그들이 남긴 음식을 먹습니다.
온갖 비참함과 굶주림 끝에 정신을 차린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들이 매우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무조건 잘못을 빌어 다시 아들의 역할을 수행해야지’ 이런 생각이 아닌,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는 생각에서 그의 진심어린 반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아는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인자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고 질책을 해도 속이 시원찮을 텐데,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안아 줍니다. 그냥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성스럽게 꼭 안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몇 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 아버지는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또 죄를 짓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죄를 짓더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언제라도 반겨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사랑에 지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아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데서 기인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나간 지난날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잘못을 다그치고 일깨운 다음 환영의 마음을 전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기쁨과 사랑이 너무 큽니다.
초라하고 메마른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 지난 과거를 잊을만큼 너무나도 큰 지금의 사랑.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세 번째, 하느님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께 불만을 표시하는 이유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에게 대우를 해주는 아버지의 행동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 타인의 과거를 들추는 것은 인간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잘못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존재만으로 똑같이 감사하고 소중하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사랑은 반드시, “아버지께로 돌아온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통회하고 반성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 아들처럼 잘못된 길을 가던 그 발걸음을 행동으로 되돌리는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를 끌어안아주시고 무한한 사랑을 쏟아주십니다.
우리들은 종종 우리가 짓는 죄에 짓눌려 허우적대면서도 이겨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미사 없이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조금은 더 간절히 느껴야 하겠습니다.
사소한 잘못들이 있다면 그것을 반성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기도드릴 날을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결국 지적 장애인들의 공동체에 눌러앉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는 돌아온 탕자의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신다. 그리고 밝은 빛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즉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특별하고 완전하게 사랑받고 있음을 보라고 재촉하신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나는 마침내 내 이웃을 나의 형제로,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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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구원의 보편성>
작은아들이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쓰고 갈 곳을 찾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나가 맞이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형이 분개하여 집을 나갑니다.
이에 대해 철학적 인간학을 전공하신 한 신부님이 강론으로, 큰아들도 작은아들이 갔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재미있는 상황을 물음표로 던지며 묵상거리를 주셨던 때가 떠오릅니다.
큰아들 역시도 세상이라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죄를 짓고 다 탕진하여 작은아들이 걸어 들어왔던 그 집,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를 떠올릴 때 비로소 큰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을 하지만 사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각양 각색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 또한 인류를 보고 계시는 너그러우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도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한 죄,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감사할 줄 모르는 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판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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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아버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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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15,32)
세상이 그를 버렸건, 그가 세상을 버렸건 홀로 버려진 채 살아가는 삶은 분명 두려운 상태일지 모르지만, 그 버려짐을 통해서 더 깊은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며 천국을 얻을 수도 있음을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멀리 떠난 우리를 잊지 않고 보고 계시며 우리의 어려움을 다 아시지만 스스로 되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못한 채 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미7,14)은 뒤늦게야 하느님만이 자신들의 의지이며 피난처임을 알고 손을 내미시는 주님을 향해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며, 또한 가엾이 여기시고 허물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미7,18~19)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자신들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홀로 버려진 채 살아갈 때 뒤늦게나마 되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과 되돌아 갈 그곳에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화답송 후렴) 아빠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는 현실을 깨닫고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이토록 사무치는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아빠 하느님의 자비가 바로 우리의 복음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설렘보다 아버지의 셀렌 기다림의 무게가 더 크기에 먼저 알아보시고 달려와 되돌아온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기쁨에 넘쳐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이며 너의 아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4,32)라고 외치는 모습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아빠의 돌아온 자식에 대한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은 단지 성경의 작은 아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대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아빠의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우리의 죄까지도 허용하시기에 우리의 되돌아옴과 뉘우침 또한 허용하십니다. 형제를 용서할 수 있을지, 아니면 못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단지 돌아온 아들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연상해 보길 바랍니다. 이 묵상 글과 함께 읽으면서 렘블란트의 「탕자의 그림」을 상상하면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밖에서 안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끌어들이시길 바랍니다. 대략 설명하면, 그림의 전체 구도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과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을 떠나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말해 줍니다. 그의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의 모습처럼 삭발인데, 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동생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는 큰아들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릅니다. 왼손은 크고 강인한 손 모양으로, 세상의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손입니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운 손 모양으로, 아버지가 다 품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품어 주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늙어 버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자비롭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한쪽 눈은 집 나간 아들을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실명 상태입니다. 그러나 눈가에는 분노가 아닌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그림의 피상적인 묘사인데 여러분이 먼저 성경 본문을 읽고 난 뒤 이 그림을 아버지의 시선에서, 작은아들의 시선 그리고 큰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서 떠남과 되돌아옴의 과정처럼 우리 역시도 거의 흡사한 영적 여정을 통해서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마음으로 깨닫게 되고 새롭게 거듭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뒤에야 깨닫는 자신의 어리석음,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가족의 일원이며 가족에 소속되어 있다, 는 사실입니다. 사실 탕자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삶의 행복은 ‘아버지’ 존재이며, 이 아버지와의 관계는 바로 그 자신이 그토록 묻고 또 물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붙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물음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깨달을 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되고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골수에 새긴 것은 바로,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는 사실처럼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자신을 찾고 만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렇습니다. 자기 잘못과 실패, 무책임한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만을 기억했기에 작은아들은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아들처럼 우리 역시도 감정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사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신뢰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기어코 돌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나간 뒤에 그곳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집을 나가던 순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 ’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쩌면 떠나고 돌아오는 건 하나의 과정일지 모릅니다. 특히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는 가지 마라, 고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마도, “그래. 아들아 가거라. 아마 상처를 입을 테고 사는 게 힘들어지고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한번은 겪어야 하기에 막지는 않겠다. 다만,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너를 기다리마. 또 네가 떠나는 순간에도 난 여기에 있겠다. 그렇다. 너와 나는 한 가족이고 나는 너의 아버지이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길 바란다.” 라고 말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날마다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은 짓물러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멀리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몰골이 달라진 아들을 아버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한순간에 아들을 향해 달려가서 아들을 안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춥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이시며 바로 우리 하느님의 본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고,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다른 이름 중 하나는 사랑이고 기다림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며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은 까닭은 바로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을 미처 알지 못해 마냥 멀어지려고만, 떠나려고만 안달했던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떠난 그 자리에서 서서 기다리시는 당신 사랑을 의식하지 못하는 저희의 눈멂에서 사랑으로 눈뜨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가 머물러야 하고 아버지 곁에서만 참된 저희 자신이 될 수 있는 당신의 집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사랑만이 저희의 희망이며, 사랑만이 저희의 구원이기에 사랑이 있는 아버지 집을 향하렵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만이 저의 집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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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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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회개>
루카 15,1-3.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회개>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아직은
멀리 있어도
가야할 곳이
있으니
벌써부터
힘이 솟습니다
아직은
아득히 있어도
안길 품이
있으니
벌써부터
따뜻해집니다
아직은
그러하지 못해도
그리 될 수
있으니
벌써부터
새로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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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 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같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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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나는 누구인가?"-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아침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136장 26절까지 계속되는 후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말마디가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요즘은 홈페이를 열어 뉴스 확인하기가 겁납니다. 어디나 어둡고 불길한 뉴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느낌도 듭니다. 다만 교황님 홈페이지는 가장 먼저 열어보는 살아 있는 영성의 보물 창고입니다. 늘 어둔 세상에 길을 열어주는 희망과 지혜의 빛 가득한 뉴스와 기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눈에 들어오는 여러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불림받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믿고 선포해야 할 진리가 되었다.”
“‘성 이념(Gender ideology)’은 우리 시대의 가장 추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은 인간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는 풍요로운 ‘긴장’가운데 존재한다(Man and woman exist in a fruitful ‘tension’).” 성 이념에 종지부를 찍는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요!
오늘의 다산 어록과 맹자의 사단설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맹자
다산어록 3월의 모토인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도 깊고 멋집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뜻으로,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늘 들어도 늘 새로운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pure Gospel)’이라 칭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비유’라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이처럼 감동적인 예화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묻고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라 이 복음을 대하면 늘 넘치는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되며 오늘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루가복음의 결론같은 가르침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 6,36)
우리의 평생과제가 부여되니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갈파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하면 정주와 환대의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두 편의 자작시입니다. 24년 전 감동을 담은 “아버지 산처럼”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자비의 품으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아버지 산처럼!”-2000.11.17.
늘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아버지를 닮은 불암산같은 요셉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침묵의 저녁 불암산!”
한량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 시를 썼을 때의 감동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이런 산같은 분입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복음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아버지입니다. 제 고백상담 집무실벽에 수십년 동안 걸려있는 바로 귀환한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은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거지가 되어 생환한 작은 아들의 환대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체의 책임 추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잃었던 아들을 찾음에 너무나 기뻐 얼싸안고 환호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은총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종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존재감 없는 거지같은 신분에서 왕자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신분을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채 존재감 없이 무명의 거지처럼 세상 속에 살다가 불쌍하게 죽어가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외아드님을 통해 날마다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귀환을, 생환을 환영하시며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불타오르는 질투에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는 큰 아들 역시 소위 잘 산다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산 큰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아버지와의 신뢰 관계가 참으로 빈약했던 큰 아들입니다. 수십년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정주가 아닌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안주하다보면 우리 또한 이런 큰 아들이 될 위험성도 다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너무 화가 나니 말에는 사실과 어긋난 과장과 왜곡도 심합니다. 아우가 아닌 저 아들이라 하며 아버지와 작은 아우를 하나로 몰아 붙입니다.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다음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런 아들인 예수님 당신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효성스런 아들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생명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시나니,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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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더 큰 사랑에 더 감사하는>
오늘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실은 자비의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제이고 그래서 자비의 하느님 비유가 제목으로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 하나하나 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은아들은 눈치나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굴곡 많은 캐릭터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기에 굴곡은 없지만 억울한 캐릭터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자비는 큰아들에게보다는 작은아들에게 잘 나타납니다. 왜냐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은총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미사 때마다 통회의 기도 다음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을 바치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작은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자비를 받습니다.
반면 큰 죄를 짓지 않은, 아니, 어쩌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큰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또 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아버지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동생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 억울함, 동생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억울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에서 박차고 나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사랑을 늘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달려들지도 못해 억울한데, 그런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지만 작은아들은 기쁨 곧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드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아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강제로라도 자기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자유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떠나는 죄를 짓지만 이 자유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큰 죄인인 우리를 자비로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 위험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더 큰 사랑에 더 감사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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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2,13)
<의로운 요셉!>
오늘 복음(마태2,13-15.19-23)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신하시는 말씀'과 '이집트에서 돌아오시는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러 온 동방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려고 한다."(마태 2,13) 그러자 요셉은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고, 그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마태 2,20) 그러자 요셉이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3월은 '성 요셉 성월'입니다.'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기른 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의 삶을 묵상하는 달'입니다.
성 요셉은, 묵묵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느님 구원 사업에 협력한 조력자입니다. 성 요셉은, 천사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뜻에 언제나 순종했습니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간직했던 순종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성 요셉은, 교회와 우리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찬양을 받고 있습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가톨릭성가 280번 1절)
우리의 전구자이신 어머니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우리도 성 요셉처럼 깨끗한 몸과 마음을 지닌 '정결한 자녀들', 말씀과 너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순종하려고 애쓰는 '의로운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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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 32)
아름다운
재산은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자연스레
길도 잃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입니다.
출발점도
종착점도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아들의
움직임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아들의 극적인
여정입니다.
잃었다가
되찾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끝 모르는
깊이의
사랑입니다.
뭐가 뭔지
분간조차
하지 못했던
아들이
하느님께로
제정신이 들어
돌아섭니다.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자만임을
깨닫습니다.
자만을 치우는
여정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마음을
만날 때마다
친근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회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느끼는
가장 본질적인
도움이며
사랑입니다.
우리의
혈관 속에
흐르는
하느님의
피입니다.
아들을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입니다.
무한한 사랑은
기다림을 통해
드러납니다.
고통과
비참함을
소중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어떤 자격을
뛰어넘는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새로운 생활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아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는 사순입니다.
기다림을
따라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은
기다림이라는
사랑의 재산입니다.
우리를 향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엄청난 사랑
엄청난
기다림의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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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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