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행의 요법 (日常修行-要法)
<정전> 제3 수행편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옛날 한 선비는 평생 소학만 읽었다 하나니, 우리는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 」(정산종사법어 법훈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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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 요법
日常修行-要法
[개요]
원불교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해 가는 지침으로 삼도록 한 9개의 요목. 교강9조(敎綱九條)라고도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정전》 수행편의 맨 앞에 위치하여, 원불교 교리의 전반을 수행화(修行化)하도록 9개 조항으로 간추렸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그 내용을 마음에 대조하여 챙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경지에 도달하도록 하라(《대종경》 수행품1)고 했다.
[내용과 대의]
①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②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③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④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⑥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⑦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⑧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⑨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일상수행의 요법의 자의(字意)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자면 다음 몇 가지 사항이 간취된다. 첫째 ‘일상’이란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일생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상수행이란 곧 일생 중 어느 때라도 공부의 시간이요 기회가 된다는 의미이며, 일상은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삶이 미치는 모든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상’이란 정기와 상시를 관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모두에서 일상수행의 요법이 가지는 위상이 낮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일상’이란 ‘한결같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상수행이란 곧 동정역순(動靜逆順)이 모두 한결같아야 한다는 공부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일상’이라는 용어 하나에 원불교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생활 속의 공부’, ‘경계 중의 공부’, 평상심을 중시하는 태도 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수행’은 닦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신앙과 대비되는 것이 아닌, 닦고 행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전 교리의 수행적 적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행’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며, 양성하며, 사용하자는 것이 바탕이 되어 일원의 진리에 합일하는 방법을 말한다.
셋째 ‘요법’은 요긴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는 단지 방법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고 교리 전체를 아우른다는 ‘골격’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으며, 모든 마음공부를 한 마음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간결’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상ㆍ중ㆍ하근기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교리라는 점에서 ‘요로’라는 의미를 함의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형성과정]
일상수행의 요법은 1937년(원기22)에 출간된 《회보》에 그 원형이 나타난다. 《회보》 제44호~제51호(원기22~23)를 보면, 표지 다음 면의 ‘본회의 목적’에서 “1조,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 2조, 모르는 것을 제거하고 아는 것을 양성하자. 3조, 이론만 하지 말고 실행을 하자”로 되어 있다. 1937년경에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한 교리적 근간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회보》 제52호~제55호(원기23) ‘본회의 교강’란에서는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 ‘공부의 요도’로 바뀌고, 1조는 “심지가 요란하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2조 “심지가 어리석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3조 “심지가 글으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등으로 정리된 문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근행법》에 정식으로 삽입되기 전 중간의 형성과정으로 파악되며 이는 초기교단에서 빠른 속도로 일상수행의 요법이 교리적으로 정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1939년(원기24)에 간행된 《불법연구회근행법》에 ‘일상수행의 요법’이라는 명칭이 교단 최초로 명시된다. 여기에서 1~4조는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 5~9조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로 구분해놓았다. 1943년(원기28)에 편찬 된 《불교정전》에서는 교리가 전반에 걸쳐 체계화되는데, 이때 일상수행의 요법도 제3 수행편 제1장에 편성되었으며, 1962년(원기47)년에 출간된 《원불교교전》의 내용 구조는 《불교정전》과 동일하다.
[교리적 의미]
첫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교강9조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교강9조란 ‘교법의 골격 아홉 조항’이란 뜻이다. 곧 이는 교법을 실천적으로 아홉 가지 강령으로 추린 것이며, 일원의 진리를 현실생활 속에서 대조하고 챙기는 아홉 강령이라는 의미이다. ‘교강’이라는 용어가 교단에 출현한 것은 1938년(원기23) 5월에 출간한 《회보》 제52호에 나타난다. 이 교강이 다음 《회보》 제55호에서는 ‘본회의 강령’이란 용어로 개변한다.
이것이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정착한 것은 1939년(원기24)에 출간된 《불법연구회근행법》이다. 따라서 일상수행의 요법의 본래 이름은 ‘본회의 강령’임을 알 수 있다. 교강이라는 용어를 ‘원불교의 핵심강령’의 준말이라 본다면 일상수행의 요법이 지니는 교리적 의의는 모든 ‘교리의 압축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정산종사에게도 계승되어 후일 《정산종사법어》에 이 교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1).
둘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구성심(九省心) 9조가 된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30). 구성심 9조는 ‘한 마음을 아홉 가지로 대조하며 챙기는 공부법’이란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경계를 중심으로 하는 챙기는 공부가 된다. 곧 일상수행의 요법은 한 경계마다 대조하며 챙기는 공부법이며, 한 경계가 지난 후에 반성하며 챙기는 공부법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상수행의 요법은 한 경계가 지난 후에 반성하는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챙김을 다짐하는 공부법이 된다.
셋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대자적(對自的)ㆍ대타적(對他的)힘을 얻는 길이다. 이를 분류해 보면 1~4조는 대자적 지혜를 증진하는 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대자적이라 하여 자력중심, 신앙중심으로 편중 분류할 수는 없다.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한다고 하는 원불교의 기본적 구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하여 6~9조는 전 인류가 더불어 잘살게 하는 길로서, 대타적 자비의 힘을 얻는 길로 볼 수 있다. 이는 신앙의 사회적 전개인 동시에 이를 다시 수행에 회향하는 길이다. 이 양자를 5조가 허리가 되어 대자와 대타의 양 길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넷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경계 속에서 ‘세우며 제거하며 돌리는’ 공부라는 특징을 지닌다. 경계 속에서 자성의 정ㆍ혜ㆍ계를 세우며, 경계 속에서 신ㆍ분ㆍ의ㆍ성을 세워 불신ㆍ탐욕ㆍ나ㆍ우를 제거해 나가는 공부이다. 또한 경계 속에서 감사ㆍ자력ㆍ배움ㆍ가르침ㆍ공익심의 사람으로 돌리자는 공부법이다. 생활과 경계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 원불교 교법의 특징이라면, 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공부가 일상수행의 요법이라 볼 수 있다.
다섯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진리와 떠나지 않음을 반조하는 공부이다. 이러한 일상수행의 요법의 가치는 “옛날 한 선비는 평생 소학만 읽었다 하나니, 우리는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7)는 정산의 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본 불교와 원불교]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는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다.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는 여러 방면에서 접근하여 설정할 수가 있으나 교리적 방면 가운데 하나가 불교의 계ㆍ정ㆍ혜와 원불교의 삼학과의 관계이다. 소태산은 일원상 수행을 묻는 제자에게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나니…우리 공부의 요도인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도 이것이요, 옛날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 삼학도 이것으로서”(《대종경》 교의품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산은 이에 대해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도 삼학이 있었으나 계정혜와 우리의 삼학은 다르나니, 계는 계문을 주로 하여 개인의 지계에 치중하셨지마는 취사는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케 하는 요긴한 공부며, 혜도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연구는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며, 정도 선정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수양은 동정간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일심 공부라, 만사의 성공에 이 삼학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위에 더 원만한 공부길은 없나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3)고 말하여 그 위상을 세우고 있다.
요컨대 정산의 안목에 비친 불교의 삼학과 원불교의 삼학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불교의 삼학이 보다 좁고 전문적으로 삼대력을 기르는 방면으로 이해되고 있는 한편, 원불교의 삼학은 보다 넓고 생활 속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여 원불교 삼학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교리가 집약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일상수행의 요법에는 《정전》의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 대신 정ㆍ혜ㆍ계로 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당연히 《육조단경》의 영향을 입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초기 교단의 공식 기관지였던 《회보》에서 《육조단경》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37년(원기22) 6월에 출간된 제35호부터이다. 이공주에 의한 한글판 《육조단경》은 ‘육조대사전기’라는 이름으로 이후 제52호(원기24)까지 연재된다. 한편 ‘육조대사전기’가 처음 연재될 무렵에는 《회보》의 모두에 ‘개교표어’ 또는 ‘요언’이라는 이름의 경구들이 연재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8년(원기23) 5월에 발간된 《회보》 제44호에 처음으로 ‘본회의 목적’이라는 제하에 일상수행의 요법의 전신이라 할 만한 것이 출현한다.
이때는 공부요도와 인생요도로 나누어 9조가 배당되고 있는데, 이때의 특징은 1조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 2조 “모르는 것을 제거하고 아는 것을 양성하자” 3조 “이론만 하지 말고 실행을 양성하자” 등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8개월 후인 《회보》 제52호에 이르러서는 ‘본회의 목적’이 ‘본회의 교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그 내용도 현행 일상수행의 요법의 형태로 정비된다. 곧 《육조단경》의 내용이 제1~3조에 정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 제10장에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정이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요, 마음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계(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非自性戒)”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형식이나 논조로 보아 일상수행의 요법의 심지법문은 《육조단경》의 영향을 그대로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개념의 의미와 해석]
① 심지의 의미: ‘심지’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교학의 전통은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대적 규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비다르마의 전통은 이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있는 데에서 세워지고 있다. 아비다르마의 논사들은 이러한 온갖 마음의 현상을 분류했는데, 그들은 마음을 우선 심(心)과 심소(心所, caitasika)로 나눈다. 심이 마음의 주체라면 심소는 마음의 작용, 곧 심리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둘을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비유하여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라 하기도 한다.
심 또는 심왕은 그것이 지니는 속성을 따라 세 가지 이름이 있는데, 심소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찟따(citta)’라 하고, 소연의 경계를 사량한다는 의미에서 ‘마나스(manas)’라 하고, 요별(了別)한다는 의미에서 ‘비즈냐나(vijñāna)’라고 한다. 대체로 심왕은 오온 중에서 제5의 식온(識蘊)을 말하고, 십이처설에서 말한다면 의처(意處)이며, 십팔계에서는 의계(意界)와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육식계(합하여 7心界)에 해당한다. 심소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 중에서 수와 상에 해당하며 행온도 일부가 포함된다.
유부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한편으로 ‘심지’(心地, citta-bhūmi)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란 토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활동하는 지반’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다른 것을 생산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심지라 표현한다. 그러나 착한 마음(善心)이 악한 마음(不善)을 지로 하여 활동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심지는 한 종류일 수 없으며, 성질이 다른 5종의 지가 설정되고 있다. 예컨대 ‘번뇌지’는 그로부터 번뇌가 생기는 지반이다. 그런데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는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얻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번뇌지이다.
유부에서는 심소법을 분류하는 방식이 한결같지 않아서, 《계신족론》 이래로 여러 가지 심소법이 정리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정리가 잘된 《구사론》에서는 심소법을 크게 6종류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를 세분하여 46종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규정하는 태도는 시대와 분파를 따라 변천하여 왔으며, 이 마음의 규정 그 자체가 하나의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심지는 그 어의로만 따지면 ‘찟따 부미(citta-bhūmi)’로서, 심소를 가리키는 하나의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심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어원은 아비다르마를 비롯한 인도불교의 전통이 아니라 중국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 이후이다. 따라서 심지를 5종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구태여 말한다면 여래장사상의 특징인 자성청정심의 사유를 소박하게 수용하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하고 이해된다.
《육조단경》의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등에서 출현하는 ‘심지’는 매우 단순화ㆍ간략화 된 중국적 심의 표현이며 이는 심ㆍ심소 등의 구분을 넘어 선 마음바탕을 통틀어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방향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심지는 여러 요소를 참고할 때 ‘마음의 땅’,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 ‘선악이 없는 근본 마음자리’, ‘한 생각 나오기 이전의 마음자리’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는 의미: 일상수행의 요법 제1조에서 원래 요란함이 없는 심지에서 어떻게 요란함이 생기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없는 데에서 있는 것이 생기는 것은 모든 존재론에서의 핵심과제이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하고 하나에서 둘이, 둘에서 셋이 생하고 셋에서 만물이 생한다고 생성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도덕경》). 물론 무에서 유가 생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없다. 불교에서도 교의의 핵심에 가면 무명(無明)에 이르는데, 무명은 어떤 의미에서 인과의 최초원인이며 중생의 근본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의 성립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불가능하다. ‘홀연일기(忽然一起)’라 표현한 것이 무명에 대한 설명의 한계인 동시에 적실한 설명이듯이, 요란함이 없는 심지에서 요란함이 생기는 것이 존재의 이치요, 성품의 생김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순되면서 조화되는 진리의 속성을 잘 나타낸 용어로 ‘진공묘유’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홀연일기’는 시간적ㆍ절차적 변화가 아니다. 시각의 차이이며, 분별의 결과이다. 진공 그 자체가 묘유요, 묘유 그 자체가 진공인데 이들 양 면은 분별과 시각을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즉 성품을 유상으로 보면 진공의 모습으로 파악되고, 무상으로 보면 묘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처가 보면 진공과 묘유가 조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중생이 보면 또는 진공, 또는 묘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가 보는 것은 분별성이 없는 즉체적(卽體的) 인식이지만, 중생이 보는 것은 아(我)ㆍ법ㆍ선후ㆍ친소 등 무명에 바탕 한 분별적 인식이다. 이러한 분별적 인식에 바탕 하여 그렇게 ‘보는 순간’을 홀연일기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홀연일기는 분별성에서 본 일어남일 따름이지 본체적 측면 즉 분별성이 없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어날 것도 없고, 분별될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요란함이 없는 부처의 세계에서 요란함이 있는 중생의 세계가 함께 있는 것이므로 요란함을 없애는 수행의 힘에 의하여 요란함이 없는 부처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③ 요란함의 본 뜻: 요란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요란함은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전》을 살펴 볼 때 심지의 다른 표현으로 가장 근접한 개념인 ‘정신’에 대하여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름이요”(《정전》 삼학)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성이란 정할 때의 요란함이며, 정할 때의 요란함은 부유난상이며 산란함이다. 주착심은 동할 때의 요란함이며, 애욕ㆍ재산ㆍ명예 등이 주착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정할 때는 분별성을 없애고 동할 때는 주착심을 없애는 공부가 요란함을 없애는 공부이며 수양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분별성과 주착심의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 집착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학에서 말하는 집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따라서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은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을 실현하는 것이다. 아공과 법공은 정신의 본래에 복귀하는 바른길이 된다.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개념들을 《정전》에서 골라 보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함”(《정전》 일원상수행),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정전》 일원상서원문),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함”(《정전》 삼학)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요란함에 대한 본질을 반증하는 개념들이라 하겠다.
④ 경계에 대한 인식: ‘경계’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하는 것도 교학상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경계중심의 마음공부’, 또는 ‘경계의 실체 없음에 바탕 한 마음공부’라는 두 가지 마음공부에 대한 태도가 그동안 교단의 일각에서 문제가 되어 왔었고, 이에 대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경계는 유식학의 이론을 빌어서 말한다면 견분(見分)에 대한 상분(相分)이라 볼 수 있다. 범부의 식은 견분ㆍ상분, 능취ㆍ소취로 분열되어 있으며 견분이 자신의 식인 상분을 보면서 그것을 외계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볼 때 유식학에서 인식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개체(自己)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때는 그 개체의 주체(心)가 놓여 있는 장(場)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체 곧 ‘자기’는 주체와 환경을 전체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고 하는 것은 마음(心)이 환경세계와 감각기관을 통하여 교섭할 때, 그 사건의 총체로서 파악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라고 할 때는 환경세계까지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 자기는 세계 전체가 된다. 곧 세계가 자기가 되는 것이다.
둘째, 자기란 일단 대상화된 측보다도 오히려 대상화하는 주체에 중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심적ㆍ신체적ㆍ환경적 사건들을 초월하여, 나아가 그것들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에 자기의 당체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알라야식에는 상분(相分)의 측면에 종자ㆍ5근ㆍ기세간 등이 있고,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견분이 있는데, 양자의 조화를 통하여 궁극적인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에 입각하여 인식의 문제를 살펴보면 유식학에서는 언제나 사물이나 사건을 식이라고 파악하고 있으므로, 삼라만상을 나와 구분된 별개의 심적 실재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곧 알라야식의 견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분을 안에 갖추고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는,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을 눈으로 봄으로써, 그 눈에 비치는, 곧 안구의 망막에 비친 영상을 신경을 통하여 뇌가 감각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럴 경우, 감각기관이 취한 내용과 외부세계의 사물 그 자체 사이에 뭔가의 대응관계는 있겠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보통 우리 범부들은 소박하게 그 둘이 일치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곧 우리는 외부세계의 사물 그 진실한 자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식에서는 역시 안근(眼根)이라는 기관을 통하지만,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안식은 식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지각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곧 마음은 마음 밖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비쳐진 마음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 보고 있는 것은 그 스스로의 마음이 드러낸 것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인식한다’고 할 때는 마음이 재현한 작용을 마음이 보고 있는 셈이 되는데, 이 두 마음을 유식설에서는 상분(相分) 곧 대상(所緣)과, 견분(見分) 곧 주체의 면(能緣)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인식했다’하는 것을 유식설에서 설명한다면 제8알라야식의 상분에서 본 것, 곧 식의 영상인 것이다. 알라야식의 대상은 미세하고 알기 어렵지만 ‘오근(五根: 신체의 총체)’과 ‘기세간(器世間: 환경세계, 사물의 세계)’과 ‘종자’라고 간주되고 있다. 이 중에서 기세간은 그 ‘사물의 세계’, 다시 말하면 안식 등 감각을 맡은 식(전5식)의 감각의 근거가 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굳이 ‘사물의 세계’라고 말해 왔던 그 세계는 결코 그 자체에 자성이 있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식으로서의 존재, 곧 식 안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유식’인 셈이 된다.(정순일, 《인도불교사상사》) 유식학적인 안목으로 원불교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참고삼아야 할 점은 매우 많다. 특히 경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식학적 구도를 동원하는 것은 매우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경계의 실체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정리될 수 있다. 곧 경계는 그 실체가 있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경계에 대한 ‘나의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보편적으로 중생의 생각의 정체는 분별심과 주착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제3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말로 나를 무시한다면 화가 난다. 무시하는 말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무시한다는 ‘나의 생각’에 의해 화가 나는 것이다. 경계 자체가 실체로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중생이 지니고 있던 생각’에 의하여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는 아상의 그림자 곧 상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식으로 인식을 하든 그 경계를 공부의 계기로 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중생성으로 인하여 고통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통하여 그것이 없음을 투철하게 알게 될 때 해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상’에 대한 철저한 극복 이전에는 어떤 형태로든 경계도 있고, 요란함도 있고, 요란함을 없게 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요란함을 자각하고 요란함을 없게 하는 노력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경계를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여 매달린다면 헛된 망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⑤ ‘그름 없음’에 대한 해석: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에 출현하는 ‘그름이 없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실 성품에 그름이 없다는 점은 불교학적 전통에서 본다면 다소 어색한 진단이다. 왜냐하면 바름과 그름을 나누는 것은 사실상 유교적 전통에 가까운 것이지 불교적 색채에는 덜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품을 바름과 그름으로 나누는 것은 그 불교적 본질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에서 ‘심지에 그름이 없음을 자성의 계’라 한 것은 인도불교적이기보다는 중국불교의 전통을 거친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를 주석하는 데 있어서 ‘그름이 없다’ 함은 계(śīla)가 지닌 ‘금제(禁制)’라는 불교적 의미보다는 ‘시비와 선악을 초월한 바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계’라는 것도 편의상 바름과 그름으로 구분하여 볼 수는 있겠으나 실은 바름과 그름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품에 이르기 위한 번뇌요건의 제거’라는 규정이 보다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름과 그름으로 성품을 규정하려 한다면, 성품은 본래 언어도단이며 유무초월한 자리여서, 나가대정ㆍ반야지 따위로 밖에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는 현실적 정ㆍ사의 구도를 초월한 ‘절대 바름’이라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 바름의 내용을 ‘자성의 계’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는 시비선악을 초월하여 있는 것을 절대 바름이라고 표현한 따름으로서 윤리적 ‘그름(邪)’에 대비되는 ‘바름(正)’이라 보기 어렵다.
‘정의’라고 말할 때의 바름은 어디까지나 현실생활 속에서는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성의 정’에서의 정은 보통 말하는 ‘정의(Justice)’라든지 하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상대적 정’이 아닌 절대적 정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절대정(絶對正)’ㆍ‘절대선(絶對善)’ㆍ‘지선(至善)’ 등으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에서의 ‘그름을 없게 한다’는 것은 본래 선악이 없는 절대 바름의 경지에 비추어 현실에서 바름을 지향하여 본래의 경지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⑥ ‘세우자’와 ‘돌리자’의 차이: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세우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세우다’에는 ‘잃지 않고 보존하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또한 ‘넘어진 것을 세우자’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유추하여 본다면 경계마다 자성을 발현하여 ‘잃지 않고 보존하다’는 의미도 있다. 곧 경계 속에서 자성을 떠나지 않고 정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세운다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곧 경계 속에서 내정정ㆍ외정정을 아울러 이르게 했으므로, 경계 속에서 신해탈ㆍ심해탈을 하게 했으므로, ‘세운다’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경계 속에서의 공부법인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특별히 ‘세우자’는 용어를 사용한 뜻은 아마도 경계 속에서 참된 정ㆍ혜ㆍ계에 이르게 하자는 목적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상 경계에서 생사해탈의 심경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원불교에서의 생사해탈의 개념이며, 극락수용도 자심미타를 발견하여 경계에서 자성극락을 수용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다(《정전》 염불법). 따라서 세우자는 표현은 ‘경계 속에서의 공부’라는 원불교적 특성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용어라고 생각된다.
‘세운다’ 함은 달리 표현하면 ‘깨어 있음’의 의미도 된다. 뿐만 아니라 ‘세운다’는 말의 뜻은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원래 있는 것을 ‘각성’ㆍ‘챙김’이라는 의미 때문에 ‘만든다’고 하지 않고 ‘세운다’는 말을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대비하여 ‘돌리자’는 용어도 그 의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일상수행의 요법 5조에서 9조까지의 조항에서 ‘돌리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1조에서 4조까지는 주로 대자적(對自的)인 면이 강하고, 5조에서 9조까지는 대타적(對他的)인 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신의 내면적인 힘은 ‘세우는 데’에서 나오고, 외적인 관계는 ‘돌리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외적인 잘못된 관계를 제대로 된 관계로 화하게 하는 데에는 ‘돌린다’는 표현이 적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