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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신8:11-18)-2024.7.7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 이사야서55장8절과9절의 말씀을 아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 생각을 맞추는 것이고, 하나님의 방법에 우리 방법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해보려고 고집합니다. 혹은 우리의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이겨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 방법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우리 생각이 얼마나 미련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나마 나중에라도 깨닫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충돌하는 일이 많습니다. 충돌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보다 옳다고 우겨대는 것입니다. 천하에 어리석은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성도는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하는 법이지요.
그러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물질을 소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입니다. 한마디로 얻어맞고 정신 차린 것이 아니라, 얻어맞기 전에 정신 차리는 것이지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침보다 소를 잃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물론 소를 잃었다면 늦게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이지요.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다양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의 유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런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방법과 능력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믿는 자들의 착각은 이것입니다. 믿음만 가지면 모든 것이 형통할 줄로 생각합니다.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만수무강하고 만사형통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막상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아해 합니다. 더러는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 납득하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무조건 양탄자가 깔린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꽃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믿음을 가진 것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이 주어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고난의 강도가 더 깊어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방편일 수 있습니다. 고난의 무게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원수마귀가 내가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공작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시작하는 입구에서 믿음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계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적전투인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답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고난 속에서 답을 아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답을 모르고 방황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답을 아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답을 아는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는 자는 답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내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침내 내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요. 여기서 ‘마침내’라는 말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과 쌍방 합의로 맺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명하셨고, 일방적인 언약을 주셨으며,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말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인 셈이지요. 그래야 법적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을 동의하고 서약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기19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한 후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선택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제사장적 나라가 되게 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사실을 고하라는 것입니다(출19:6). 모세는 즉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로들을 소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반응을 회보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에 합당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율법이나 십계명을 받은 후에도 비슷한 절차를 밟았습니다.
출애굽기20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다 준수하겠다고 서약합니다(출20:19). 또한 신명기27장에 보면 모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것들을 당부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자신은 들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퍼포먼스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심산은 축복을 상징하고, 에발산은 저주를 상징하는 산으로 이스라엘은 6지파씩 맹세를 해야 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고,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아멘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순종하면 제사장적 나라로 온 나라의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2) 광야 40년은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훈련기간
신명기8장은 모세의 설교문입니다. 당시 모세의 설교에 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제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래서 두 개의 상반된 주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과 잊어버림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광야와 약속의 땅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에 광야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좋아하겠지요. 광야는 풀 한포기도 자랄 수 없는 땅이지만, 가나안은 풍부한 물이 있는 곳이요(7절), 풍부한 농작물이 있는 곳이며(8절), 풍부한 광물질이 있는 곳입니다(9절). 부족함이 없는 땅이지요. 그래서 가나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모세가 우려하는 것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게 되며,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백성들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를 통과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될까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시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궁극적으로는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했던 과정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수르 광야와 신 광야와 바란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그런 광야에 그들이 찾는 것은 없었고, 원치 않는 것은 있었습니다. 물과 양식은 없고, 불 뱀과 전갈들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지 2달 반 쯤 되었을 때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었고, 새벽에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저녁에 메추라기를 잡아 요리해서 배불리 먹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보면 만나가 내렸습니다. 서리 같기도 했고 진주 같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거두어 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솥에 삶기도 해서 과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맛이 마치 꿀을 섞은 과자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먹이셨던 것이지요. 감히 어느 민족이나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기가 막힌 기적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산으로 올라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자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물은 이스라엘이 마시기에 흡족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이 가시기도 전에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의 경험이 한번도 없고, 전쟁준비도 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또 다시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구경해야 했습니다. 아주 희한한 방법이었습니다.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하는 방식입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지쳐서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방법이었지요(출17:11).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 곁에 아론과 훌을 붙여 손을 들게 하사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쳐서 이기게 해 주신 것이지요.
그들은 다시 광야여행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40년차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고 돌아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38년 전 모세가 가나안에 12정탐꾼을 파송했던 곳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그곳에서 파견한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생했던 원인을 제공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는 곳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쓰라린 추억을 제공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좋지 않는 부정적인 역사를 쓰게 됩니다. 물론 모세가 저지른 실수이지요. 그들은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까지 들먹이며 불평합니다. 소싯적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서 모세의 염장을 지릅니다. 모세는 그런 백성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어 답을 구한 것이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처방을 내리십니다. 모세에게 백성들을 모으고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민20:8).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지 얼마되지 않는 르비딤에서는 1세대를 대상으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출애굽40년 차 2세대를 대상으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출애굽1세대나 출애굽2세대 즉, 광야세대들도 불평은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을 통과하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무척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변화되지 않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모세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반석에게 명하지 않고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쳤습니다. 예전에 르비딤에서 하던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을 말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분노의 감정을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가축들이 흡족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문제는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준엄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모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의 수준이었던 것이지요(민20:12).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픈 징계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런 슬픔을 뒤로 하고 이스라엘을 계속 인도해야 했습니다. 자기는 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다른 어려움에 봉착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홍해 길을 좇아 에돔 땅을 통과하려다가 거절을 당합니다. 그래서 길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또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들의 불평은 마치 레코드판을 트는 것과 같았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야생활 전체를 불평한 것입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은 것만 가지고 불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불뱀을 백성들에게 보내어 물게 하신 것이지요(민21:6). 백성 중에 불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잠잠합니다. 모세에게 자기들이 범죄했노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나님이 처방전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나님의 처방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대위에 놋뱀을 형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리라는 것입니다(8절).
세상에 이런 말도 안되는 처방전이 어디 있습니까?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불뱀에 물린 자는 놋뱀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바라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쳐다보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인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놋뱀을 상징하는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하고 바라보지 않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통과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들을 낮추고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16절). 광야에서 행하신 모든 과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하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테스트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테스트를 하신 것입니다. 그 테스트는 2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시려는 것입니다(2절).
광야는 이스라엘이 거주할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최종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광야의 40년 세월이 결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지우는 시간입니다. 애굽에서 애굽인으로 살아왔던 모든 것을 세탁하는 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광야 40년을 통과하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런 근성으로는 절대 가나안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최소한 그들이 가나안의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애굽의 시민의식을 벗어야 합니다. 그것을 벗기는 시간이 광야 40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의 시민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시간이 광야의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보기에는 광야 40년 세월이 죽은 시간처럼 여겨질는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을 열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세상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옷을 입는 가장 적당한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병교육대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광야 40년은 연단과 교육을 받는 기간이요, 겸손의 훈련을 통과하는 기간이며,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답을 유추해보면,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준비기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3)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자기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40년을 통과케 하신 것입니다. 복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고난은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시편 기자는 119편71절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편기자는 다시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고 말입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의 기본형 ‘야타브’(יטב)는 ‘좋게 하다’ ‘잘되게 하다’ ‘바르게 하다’ 등의 뜻입니다(to do thee good -KJV).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낮추어 시험한 것은 그들을 좋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잘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지요.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살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평지에서 출애굽 2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입니다. 당연히 출애굽 1세대들이 경험한 광야 40년 세월을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가나안은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가나안은 하나님의 눈동자가 머무는 땅이요,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땅입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곳은 척박한 땅이요, 건조하고 건건한 땅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른바 사막보다 나을 것이 없는 땅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각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심령은 천국을 이루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심령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도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천국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혹은 지역적인 공간으로서의 천국도 아닙니다. 솔직히 가나안보다 애굽이 훨씬 더 살기 좋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맡겨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와 열방과 족속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소양과 자질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특수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세상 어느 민족도 그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계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코자 하심입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이요,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 순서가 바뀌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복음을 영접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촛대가 지금 이방인에게 넘어간 상태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실족한 상태가 아니라 넘어진 상태입니다(롬11:11). 하지만 그 넘어짐도 당분간입니다. 저의 넘어짐으로 지금은 이방인이 은혜 받는 시간입니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세상의 부요함이 되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롬11:12). 이방인이 부요케 되는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잠시입니다. 이방인의 구원받는 충족수가 채워지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향한 구원의 역사가 진행된다는 말입니다(롬11:25). 그러므로 지금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구원역사를 바라보면서 시기심이 발동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스라엘이 완악한 시간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유대인의 때가 올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마다 일마다 복을 주셨습니다.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신 것이지요. 그것은 모세시대에도 그랬고, 모세 이후에도 자기 백성들이 그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장 모세의 후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양한 방편으로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그들의 눈앞에 그런 복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당장 요단을 건너는 것이 복이요, 여리고성을 무너뜨림도 복이며, 가나안의 부족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것도 복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장차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궁극적인 복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우리가 받게 될 최고의 복은 영생의 복이요, 영생의 복을 받은 우리가 마침내 받게 될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영육간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우리 삶 가운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아니할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 때문이요, 여전히 나를 향하사 마침내 복을 주시고자 열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현실의 아픔이나 고통으로 낙심하지 마십시다. 혹은 원망이나 불평하지 마십시다.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십시다. 분명히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곁에서 나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는 준비기간도 다양합니다. 사람에 따라 짧게 느껴질 수도 있고,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살아생전 마침내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우리는 마침내 복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잠잠히 참고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마침내 복 주시는 하나님을 수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도 마침내 복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가나안의 일곱 부족들을 물리친 것도 마침내 복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며, 주변에서 공격하는 수많은 대적들을 이기고 승리한 것도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그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민족인 것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성도들이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안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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