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7월 5일 임술 1번째기사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대마 도주가 서계를 보내 새와 짐승을 얻기를 요청하다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차왜(差倭)를 보내어 따로 서계(書契)를 올려 매·개·비둘기·메추리·앵무·고슴도치·원앙·굴속에 사는 제비·산 담비 등을 얻기를 원하니, 조정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였다. 이때 관백(關白)이 새로 원림(園林)을 만들어 진귀한 새와 짐승을 널리 모았기 때문에 도주가 이들을 요청한 것이다.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7월 16일 계유 2번째기사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중국 배가 통영 앞바다를 지나가 잡아서 북경으로 보내다
과거에 중국배가 통영(統營) 앞바다를 지나가는 것을 통제사(統制使) 변사기(邊士紀)가 병선(兵船)을 보내어 잡아왔는데 배에 타고 있는 장사치들이 대부분 산서(山西)·하남(河南)·형주(荊州)·양양(襄陽) 사람들이었다. 배에 실린 재화(財貨)와 약재(藥材)의 값어치가 여러 천금(千金)이었는데 조정에서 상인(商人)과 재화를 우리 나라에 온 청사(淸使)에게 주어 북경(北京)으로 보내게 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한인(漢人)이 또 배를 타고 일본으로 장사하러 가는 길에 도서(島嶼)에 배를 대고 나무와 물을 보충하려 하다가 갑자기 우리 나라 배를 만나자 남만 홍모적(南蠻紅毛賊)으로 오인하고서 와서 싸우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마침내 그들을 다 잡았다.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강도(江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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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摩尼山)과 혈구산(穴口山)이 진(鎭)을 이루고 동진(童津)과 승천진(昇天津)이 가로막고 있는데 사면(四面)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토지가 기름지며, 섬들이 포진(布陣)하여 삼면(三面)이 도회(都會)를 이루어서 서울의 인후(咽喉)가 되고 있다. 둘레가 5만 5365파(把)인데 그중에 1만 6000파는 산과 포구(浦口)로서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그 나머지 중 2만 6975파는 고토(古土)로 기초를 쌓은 것이고 1만 2390파는 고석(古石)으로 기초를 쌓은 것이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외성(外城)과 중성(中城) 2960칸(間)을 쌓았고, 아조(我朝)의 숙종(肅宗) 때에 돈대(墩臺) 48좌(坐)를 쌓았으며, 효종 4년(1653)에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이 청하여 안흥진(安興鎭)을 설치해서 이를 강도의 외원(外援)으로 삼았다. 숙종 4년(1678)에는 김석주(金錫胄)가 군대의 땔나무를 구할 산림을 가꾸는 일이 중요하다 하여 완도(莞島)와 변산(邊山)에서 솔씨를 구해 와서 산기슭의 농사짓기에 곤란한 땅을 골라 두루 솔씨를 심었다. 숙종 10년(1684)에는 강도의 지도(地圖)를 진상하였는데 이때 보음도(甫音島)에 성을 쌓고 그 위에 치첩(雉堞 성가퀴)을 설치한 다음 다량의 화기(火器)를 배치하였는바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강도가 크게 공고하게 되었다. 또 문수성(文殊城)을 쌓아서 편의에 따라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숙종 18년(1692)에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강화에 토성을 쌓지 못한 곳이 휴암(鵂巖)에서부터 인화보(寅火堡)까지로서 그 거리가 1만 4405보(步)인데 이를 이수(里數)로 계산하면 40리 5보가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산꼭대기에 여장(女墻 성가퀴)만을 쌓아도 될 곳이 2826보이고, 평지에 성을 쌓아야 할 곳이 1만 1207보이며, 바다 기슭이 솟아올라서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성을 쌓은 것에 해당되는 곳이 372보나 됩니다. 그런데 유수(留守)가 각각 임기 중에 6리 241보씩을 나누어 쌓을 수 있으니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여섯 유수의 임기 중에 이를 완전히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강도의 군정(軍丁)만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승군(僧軍)을 사용하고 삼군문(三軍門)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비로소 일을 시작하였다. 또 이인엽(李寅燁)과 민진원(閔鎭遠)을 삼영 당상(三營堂上)으로 삼아서 서로 번갈아 왕래하면서 이 일을 끝까지 완성하게 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심도(沁都 강도(江都))의 성이 바닷가를 따라서 벽돌로 쌓은 곳이 50리나 됩니다. 그런데 해마다 장마가 지면 벽돌이 허물어져서 성첩(城堞)이 무너져 버리고 마니 헛되이 재력(財力)만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탐라(耽羅)의 탱자나무 방책(防柵)이나 왕식(王式)의 가시나무 방책을 본떠서 바닷가를 따라 탱자나무를 심도록 하되, 달곶이[月串]에서부터 승천보(昇天堡)까지 심는다면 6, 7년이 못 가서 2백 리의 거리에 석축(石築)도 아니고 벽축(甓築)도 아닌 하나의 장성(長城)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날에는 심도의 길이 사면 모두 저습(低濕)한 곳이어서 배를 갖다 댈 수 없었는데 여기에 성을 쌓고 포구를 막은 뒤로 편편한 육지가 되어 버렸다. 요사이 서양의 선박이 침입할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인바, 병인년(1866, 고종3)에 성이 함락되는 데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군사를 기르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으니 양적(洋賊)들의 기웃거리는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元景夏啓曰。沁都城。濱海而甓築者五十里。年年潦雨。土潰堞崩。徒費財力。今依耽羅之枳柵。王式之艻柵。遵海岸而種枳樹。起於月串。訖於昇天堡。未踰六七年。可立二百里隱然爲匪石匪甓之一長城矣。按古者。沁都路。四圍皆是沮洳。船不得泊。築城塞浦後。因作平陸。近日洋舶來侵。亶由於是。至丙寅城陷而極矣。今有養兵之論。戒嚴洋賊之窺也。
沮洳(저여)썩은 식물이 퇴적하여 이루어진 낮고 물기가 많은 진펄.
洳 (강 이름 여)1. 강(江)의 이름 2. 물에 잠긴 땅 3. (물에 흠뻑)젖다(물이 배어 축축하게 되다)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산의 조종(祖宗) 열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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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삼각산(三角山)인데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둘째는 백두산(白頭山)인데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당서(唐書)》에는 이를 태백산(太白山)이라 하였다.
셋째는 원산(圓山)인데 관북(關北)의 단천(端川), 이성(利城), 북청(北靑), 홍원(洪原), 함흥(咸興), 삼수(三水), 길주(吉州), 명천(明川)과 육진(六鎭) 및 관서(關西)의 강계(江界)와 폐사군(廢四郡 우예(虞芮)ㆍ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자성(慈城))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넷째는 낭림산(狼林山)인데 관북의 정평(定平), 영흥(永興), 고원(高原)과 관서의 영원(寧遠), 맹산(孟山), 은산(殷山), 성천(成川), 강동(江東), 삼등(三登), 양덕(陽德)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다섯째는 두류산(頭流山)인데 관북의 안변(安邊)과 영동(嶺東)의 이천(伊川) 서쪽 경계 및 해서(海西)의 곡산(谷山) 동쪽 경계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여섯째는 분수산(分水山)인데 관북의 안변과 영동의 흡곡(歙谷), 통천(通川), 회양(淮陽), 고성(高城), 관동의 이천(伊川), 평강(平康), 철원(鐵原), 안협(安峽), 금성(金城), 김화(金化), 낭천(狼川) 및 경기 북쪽의 삭녕(朔寧), 연천(漣川), 영평(永平), 가평(加平), 포천(抱川), 양주(楊州), 고양(高陽)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일곱째는 금강산(金剛山)인데 관동의 양구(楊口), 인제(麟蹄), 간성(杆城), 양양(襄陽)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여덟째는 오대산(五臺山)인데 관동의 강릉(江陵), 삼척(三陟), 정선(旌善), 영월(寧越), 춘천(春川), 홍천(洪川), 평창(平昌), 원주(原州), 횡성(橫城)과 호서의 제천(堤川)과 기보(畿輔)의 지평(砥平), 양근(楊根)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아홉째는 태백산(太白山)인데 영남의 봉화(奉化), 예안(禮安), 안동(安東), 영천(榮川), 순흥(順興), 풍기(豐基), 예천(醴泉), 용궁(龍宮), 문경(聞慶), 함창(咸昌), 영양(英陽), 영해(寧海), 영덕(盈德), 진보(眞寶), 동래(東萊)와 영동의 울진(蔚珍), 평해(平海), 호서의 영춘(永春), 단양(丹陽), 청풍(淸風), 충주(忠州), 연풍(延豐)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열째는 속리산(俗離山)인데 영남의 상주(尙州), 금산(金山), 개령(開寧), 선산(善山), 지례(知禮), 고령(高靈), 성주(星州), 합천(陜川), 거창(居昌), 산청(山淸), 삼가(三嘉), 의령(宜寧), 진주(晉州), 초계(草溪)와 호서의 황간(黃澗), 영동(永同), 보은(報恩), 청산(靑山), 회인(懷仁), 문의(文義), 청주(淸州), 청안(淸安), 괴산(槐山), 음성(陰城), 호남의 무주(茂朱)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열한째는 장안산(長安山)인데 영남의 안의(安義), 함양(咸陽)과 호남의 운봉(雲峯), 장수(長水), 남원(南原), 임실(任實)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열두째는 지리산(智異山)인데 호남의 구례(求禮)와 영남의 단성(丹城), 하동(河東), 곤양(昆陽), 사천(泗川), 고성(固城), 함안(咸安), 진해(鎭海), 창원(昌原), 칠원(漆原), 웅천(熊川), 김해(金海)의 여러 산들이 여기에 근원한다.
물의 조종(祖宗) 열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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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한강(漢江)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강릉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회양 금강산의 만폭동(萬瀑洞)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보은 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에서 발원한다. 달천강(達川江)은 문장대의 서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복천(福泉)이 되어서 북쪽으로 흘러 충주에 이르고 다시 단월(團月)의 서북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신연강(新淵江)은 만폭동의 서남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명연(鳴淵)이 되어 홍천강(洪川江)과 합쳐지고 다시 굴운천(窟雲川)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용진(龍津)이 되어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임진강(臨津江)은 그 근원이 문천(文川)의 노령(蘆嶺)에서 시작되는데 남쪽으로 영풍(永豐)의 고현(古縣)에 이르고 다시 사천(沙川)을 지나 오두(鰲頭)에 이르러서 조강(祖江)에서 한강과 합쳐진다. 그리하여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의 서쪽 지방과 철령(鐵嶺), 분수(分水), 쌍령(雙嶺), 운악(雲嶽), 불곡(佛谷), 왈롱(曰籠) 이남 지방과 대관령, 백복산(百福山), 태백산(太白山) 이서 지방과 조령, 죽령, 속리산 이북 지방과 피반(皮盤), 상당(上黨), 칠현(七賢), 백운(白雲), 광교(光敎), 수리(修理), 안남(安南), 문수(文殊) 이동 지방과 서울의 모든 물들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둘째는 예성강(禮成江)인데 그 근원이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성천(成川)을 지나 미라산(彌羅山) 동방포(東方浦)에 이르러서 벽란도(碧瀾渡)가 되는데, 수룡산(秀龍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磨山)의 서쪽 지방과 총수산(葱秀山), 멸악산(滅惡山), 운달산(雲達山) 이동 지방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셋째는 대진(大津)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양지(陽智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의 곡돈현(曲頓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청양(靑陽)의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공주의 차령(車嶺)에서 시작된다. 돈곶진(頓串津)은 백월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여양(黎陽)을 경유하여 왕자산(王子山)에 이르러 승선천(昇仙川)을 지나 북쪽으로 행담도(行擔島)로 들어가서 공진(貢津)과 만난다. 미륵천(彌勒川)은 차령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덕평향(德坪鄕)을 경유하여 온정천(溫井川)을 지나서 단포(丹浦)가 되어 팔당(八堂)의 서쪽에 이르러서 돈곶진과 만난다. 그리하여 광교산(光敎山), 성륜산(聖倫山) 이남과 칠현산(七賢山), 성거산(聖居山) 이서와 차령, 각흘산(角屹山), 사자산(獅子山), 오서산(烏棲山), 가야산(伽倻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든다.
넷째는 금강(錦江)인데 그 근원이 장수산(長水山)의 수분치(水分峙)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용암(龍巖)에 이르러서 송탄(松灘)이 되고 옥천(沃川)에 이르러 강경(江景)을 거쳐 옥구(沃溝)를 지나 용당진(龍塘津)이 된다. 그리하여 장안산(長安山), 성수산(聖壽山), 마이산(馬耳山), 주취산(珠翠山) 이북과 상당(上黨), 피반(皮盤), 황악(黃岳), 대덕(大德) 이서와 망이(望夷), 차령, 각흘 이남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다섯째는 사호(沙湖 영산강(榮山江))인데 그 근원이 담양(潭陽)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원율천(原栗川)이 되고 작천(鵲川)을 서남쪽으로 지나서 곡강(曲江)이 되어 용포(龍浦)에 와서 머문다. 그리하여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巖山), 추월산(秋月山), 용천산(龍泉山) 이남과 옥천산(玉泉山), 무등산(無等山), 중조산(中條山), 여점산(呂岾山) 이서와 반등산(半登山), 취령산(鷲嶺山), 불갑산(佛岬山), 군니산(君尼山) 이동과 화악산(華嶽山), 덕룡산(德龍山), 쌍계산(雙溪山), 월출산(月出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리로 흘러든다.
여섯째는 섬강(蟾江 섬진강(蟾津江))인데 그 근원이 진안(鎭安) 마이산의 중대(中臺)에서 나와서, 전주의 웅치(熊峙)에 와서 쌍계(雙溪)의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용연(龍淵)이 된 뒤 남쪽으로 흘러서 두적강(斗赤江)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성수산, 마이산, 소치산(掃峙山), 모악산(母岳山) 이남과 내장산, 금성산(金城山), 설산(雪山), 무등산 이동과 억불산(億佛山), 주월산(舟越山), 도솔산(兜率山), 백운산(白雲山) 이북과 장안산(長安山), 여원산(女院山), 주치산(走峙山), 지리산 이서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일곱째는 낙동강(洛東江)인데 그 근원이 안동의 태백산(太白山)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산을 뚫고 흐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천천(穿川)이라고도 한다. 천연대(天淵臺)를 경유하여 탁영담(濯纓潭)이 되고 다시 가야천(伽倻川)을 지나 박진(朴津)이 되어 진강(晉江)과 만난다. 그런 다음 호포(狐浦)를 지나 월당진(月堂津)이 되어 다시 흩어져서 삼차하(三叉河)가 된다. 금호강(琴湖江)은 그 근원이 청송(靑松)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서 하빈(河濱)의 고현(古縣)을 경유하여 서쪽에서 낙동강과 서로 만나며, 황둔강(黃芚江)은 그 근원이 무주의 덕유산(德裕山) 불영봉(佛影峯)에서 나와서, 합천(陜川)에 이르러 징심천(澄心川)을 지나서 진천(鎭川)으로 들어갔다가 현창(玄倉)에 이르러 낙동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태백산과 소백산, 조령과 죽령의 이남과 속리산(俗離山), 황악산(黃嶽山), 대덕산(大德山), 덕유산(德裕山), 장안산, 지리산 이동과 고초산(高草山), 백암산, 취서산(鷲棲山), 구룡산(九龍山), 원적산(圓寂山) 이서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여덟째는 대동강(大同江)인데 그 근원이 영원(寧遠) 내악림(內樂林)의 백산(白山)에서 나와서, 금천(金川)을 지나 비류강(沸流江)과 합쳐지고 다시 합장포(合掌浦)를 지나 은탄(銀灘)이 된다. 그런데 능성강(能成江)은 그 근원이 두류산에서 나와서 문포천(文浦川)을 지나 마탄(馬灘)에서 대동강과 만나며, 그리고 월당강(月唐江)은 그 근원이 서흥(瑞興) 웅파산(熊坡山)의 부연(釜淵)에서 나와서 영진(迎津)을 지나 철화강(鐵和江)이 되어 북쪽으로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검산(劍山), 마유(馬踰), 철옹(鐵甕), 오강(吳江), 화여(花餘), 재령(載寧) 이서와 악림(樂林), 광성(廣城), 생천(栍川), 알일(謁日), 고야(姑射) 이남과 덕업(德業), 언진(彦眞), 멸악(滅惡), 수양(首陽), 달마(達摩) 이북과 구월(九月) 이동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아홉째는 청천강(淸川江)인데 그 근원이 강계의 갑현(甲峴)에서 나와서, 문천(文川)을 지나 고성진(古城津)에 이르러 노강(老江)이 된다. 그런데 대령강(大寧江)은 그 근원이 의주의 천마산(天摩山)에서 나와서 해망우(海望隅)의 동쪽에 이르러 노강에서 청천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갑현, 적유(狄踰), 구현(狗峴), 우치(牛峙), 구계(九階), 방장(防墻) 이남과 천마, 청룡(靑龍), 길상(吉祥) 이동과 악림, 광성, 생천 이서와 향산(香山), 알일, 고야, 마두(馬頭), 도운(到雲)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째는 용흥강(龍興江)인데 그 근원이 영흥의 철옹산에서 나와서, 비류천(沸流川)을 지나 제인포(濟仁浦)가 되어 남쪽으로 말응도(末應島)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유령, 철옹, 오강, 화여, 재령 이동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한째는 압록강(鴨綠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대택(大澤)에서 나와서, 지하로 복류(伏流)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청성(淸城), 방산(方山), 옥강(玉江)의 보(堡)와 수구(水口)의 진(鎭)을 거쳐 의주부에 이르러 적도(赤島)의 동쪽에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남쪽으로 흘러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니 이것이 곧 압록강으로서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처럼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간을 따라 흐르는데 이를 이름하여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서 이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백두(白頭) 이남과 원산(圓山) 이서와 후치(厚致), 황초(黃草), 설한(辥罕), 적유(狄踰), 우현(牛峴), 방장(防墻), 천마(天麼), 노동(蘆洞), 망일(望日)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두째는 두만강(豆滿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남쪽 갑산(甲山)에서 나와서, 경흥부(慶興府)에 이르러서 적지(赤池)를 경유하여 수빈강(愁濱江)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서 조산(造山)을 지나 녹둔도(鹿屯島)에 이르게 된다. 백두 이동과 원산(圓山), 장백(長白), 무산(茂山)의 잿마루와 송진(松眞), 백악(白嶽) 이북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묘향산(妙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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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寧邊)에 묘향산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기를 이 산이 바로 단군(檀君)이 하강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산에는 향단(香檀)이 많이 나서 자라기 때문에 지금 그 이름을 묘향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산의 형세가 높고 커서 400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의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에는 360개의 암자가 있었다.
속리산(俗離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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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報恩)의 동쪽 40리에 속리산이 있는데 3도(道)가 교차하는 곳이다. 신라 때에는 이를 속리악(俗離嶽)이라 하였는데 중턱에 올라 제사하였다. 산세가 웅대하고 산 위는 모두가 석봉(石峯)으로서 우뚝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다듬은 부용꽃 같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이를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부른다.
산 정상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돌이 쌓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위에는 돌웅덩이가 있는데 마치 가마솥과 같고 여기에서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비가 오거나 날이 가물거나를 불문하고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법이 없다. 그리고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서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洛東江)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錦江)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북쪽으로 꺾여서 달천(達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남쪽으로 천왕봉(天王峯)이 있는데 문장대를 마주하고 서 있으며, 이 산에 이름 있는 절들이 많아서 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무등산(無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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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의 동쪽 10리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여 리의 지역을 걸터타고 앉아 있다. 산 위에는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데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서 세운 듯하며 높이가 거의 백 척이나 되고 모두 여섯 개의 모서리가 나 있다. 또 석벽(石壁)이 있는데 길이가 수십 무(武 반보(半步))가량 되고 높이는 수십 장(丈 10척(尺))이나 되는바, 그 돌 무늬가 마치 물결 같고 구름 같으며 희고 붉은 색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석실(石室)이 있는데 산 이름을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매양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마가 지다가 날씨가 개려고 하면 문득 소리를 내어 우는데 그 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속악(俗樂)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월출산(月出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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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영암(靈巖)에 있는데 일명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치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어 바라보면 마치 옥을 깎아서 세운 듯하다. 정상에는 구정암(九井巖)이 있는데 높이가 2장(丈)이며 이 바위 곁으로 구멍이 하나 나 있어서 이 구멍을 따라서 위로 올라가면 산꼭대기가 펀펀하여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여기저기 우묵하게 파인 곳에 물이 고여서 마치 항아리 아홉 개가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이 봉우리 밑에는 세 개의 큰 돌이 있는데 이를 이름하여 동석(動石)이라 하는바 바위 위에 벌여 서 있으며 높이는 한 길 남짓하고 둘레는 열네 아름이나 되는데 동쪽으로는 절벽에 면하여 있다. 그 우람한 모습이 보기에는 마치 수많은 사람을 동원한다 해도 이를 움직일 수 없을 듯한데, 한 사람만 흔들어도 돌이 움직이는바 고을 이름을 영암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라산(漢拏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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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이 산에서 하늘의 운한(雲漢 은하(銀河))을 더위잡아서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높다고 해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봉우리의 꼭대기가 모두 둥글고 평평한데 여기에 마치 가마솥처럼 생긴 못이 있으므로 이를 또 이름하여 부산(釜山)이라 하기도 하고, 세속에서 가마솥을 두무(頭無)라고 하기 때문에 또 이름을 두무산(頭無山)이라 하기도 한다. 높이 하늘에 치솟아 있으며 수백 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못은 그 지름이 수백 보(步)나 되는 것으로 이를 일러 백록담(白鹿潭)이라고 하는데 흰 사슴이 무리를 지어 이곳에 와서 논다고 한다. 대정현(大靜縣)을 거쳐 외줄기 조도(鳥道)를 따라서 그 절정에 오르면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라고 하는데 곧 영주산(瀛洲山)이 그것이다.
도성(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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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5년(1396)에 민정(民丁) 20만을 동원하여 도성을 쌓았는데 평양백 조준(趙浚)이 이 성역(城役)을 감독하였다. 유관(柳觀)이 정도(定都)에 관한 의견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중국은 고금의 도읍지가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사경(四境) 안의 거리가 만리에 불과하니 도읍할 만한 곳이 어찌 많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송도(松都)와 한양(漢陽)만이 그중 좋은 곳 중에서도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해 봄에 계룡(鷄龍)에 도읍을 정하여 백성들이 모두 걱정하였는데 그것은 지세(地勢)가 너무 좁고 토지가 푹 꺼졌으며, 사방과의 거리가 고르지 못한 데다 수로(水路)까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한양(漢陽)으로 옮기게 되어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양은 지세와 토지, 도로와 수로가 모두 송도(松都)와 서로 비슷합니다. 따라서 민심(民心)을 가지고 살펴볼 때 한양은 참으로 전하께서 천명(天命)을 받은 도읍지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太祖五年。發民丁二十萬。築之。平壤伯趙浚監役。柳觀上定都論。畧曰。古今所都。不越乎關中洛陽。况我國。四境之內。 不過萬里。可都之地。豈能多有。
인용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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