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65
6월23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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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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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jyjjQ2wxnQ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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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세례자 요한의 지극한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자각!>
대부분이 인간 존재는 수명이 다해 쇠락하고 사그라들고, 땅에 묻히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소멸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그의 생애가 기억되고 칭송받는다는 것,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대부분 성인성녀들의 축일은 천국에 입국하신 날, 다시 말해서 돌아가신 날로 정해 기념하고 경축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하나 더 추가됩니다. 탄생 대축일. 그만큼 구세사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의 중요성,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라고 살 수 있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지방의 명문 사제 가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납니다. 명가에서 태어난 외아들, 우여곡절과 큰 기대 끝에 태어난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그에 대한 교육적 투자가 컸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제대로 공부하였고, 큰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파악하게 된 그는 더 큰 뜻을 품고, 더 큰 깨달음을 위해 인간 세상을 떠나 깊숙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세상의 시류와는 완전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다른 거짓 예언자들처럼 감언이설이 아니라 직설적 화법으로, 호의호식이 아니라 메뚜기와 들꿀을 주식으로 삼으며 낙타털옷을 걸치는 극단적 청빈 생활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집중적인 기도로...
호화찬란한 도심의 불빛을 떠나 깊고 어두운 광야,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간 세례자 요한은 거기서 자신을 더욱 연마시키고 내공에 내공을 거듭 쌓아나갑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뿐만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 명료한 의식으로 깨어있다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신속 정확하게 알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혀끝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온 몸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요르단강에서 자신의 모습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명설교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날카롭던지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권고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단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어떤 몰지각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을 규합해서 정치세력화했으면 하는 꿈까지 꿀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단시일 내 세례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전국민적으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게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란 한 인물의 등장을 계기로 형성된 특별한 신드롬에 놀란 유다 최고 의회는 사람들을 그에게 보내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지극한 겸손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자각을.
세례자 요한은 정녕 충실했던 대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자신의 예언자 직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보다 합당한 선구자이자 하느님의 종으로 스스로를 준비시키기 위해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극단적 금욕생활과 열렬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았으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기 위해 끝도 없는 고행을 계속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건 준비 작업으로 인해, 그가 너무나도 잘 닦아놓은 길 위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전하게 잘 착륙하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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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명(黎明)과 태양>
젊은 사제 시절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걷다가 너무 지친 나머지 길 위에서 노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닥불을 피워놓으니 처음에는 분위기도 있고 참 좋았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점점 깊어갈수록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견딜 만 했었는데,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서너 시 쯤 되니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그렇게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데...어찌 그리 시간이 더디 가던지.
머릿속으로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 내 몸이 당신을 더 기다리나이다.’라는 시편 구절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멀리 동쪽으로부터 캄캄했던 어둠이 아주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더니 옅은 여명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 여명이 어찌나 반갑던지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여명은 밤을 꼬박 지새운 파수꾼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 같은 존재입니다.
이윽고 구름바다가 보이고 구름 너머로 그토록 기다리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데...그때 당시의 그 찬란하고 장엄한 일출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 찬란한 광채를 지닌 태양이라면 세례자 요한은 태양이 떠오름을 예고하는 여명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선구자로서 위대한 이유는 평생토록 자신이 태양이 아니라 여명으로서의 운명을 지녔음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신원의식이 명확했습니다.
자신이 빛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실 그분께서 빛나야 된다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자리 하나 차지하면 갑자기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장 하나 차면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미를 자신이 다 받으려고 발버둥을 치니 세상에 그런 꼴불견이 다시 또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을 극도로 낮추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내게, 우리 가정에, 우리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덕을 하나 꼽으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겸손의 덕’입니다. 끝끝내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를 뒤로 하고 무대 뒤로 사라져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 세례자 요한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다렸던 예수님 역시 제자들 앞에 허리를 굽혀 발을 씻겨주신 분입니다.
공동체 지도자들이 다른 구성원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 지도자는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공동체 지도자들이 가난하다면 그것은 너무도 좋은 표시입니다.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 가난처럼 좋은 수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들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이미지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강렬합니다. 잘못한 인간들에게 벌을 주는 강력한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들 앞에 엎드려 아무 말 없이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얼마나 큰 위안과 희망을 갖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에로 초대하십니다.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에서 겸손하게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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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OcajwCcN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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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름을 이어준 분의 이름을 들어 높일 때 성장한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은 즈카르야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당신이 주신 이름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을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쓰시기 위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놀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과 같게 여기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자녀가 죽었을 때의 고통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어주고 불러주던 이름이 없는 동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그 동물을 나처럼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처럼 대해주시는 부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수준처럼 성장하여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를 봅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이름을 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피땀 흘렸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모만큼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이는 부모처럼 성장할 수 없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례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 인입니다. 세례명을 가진 우리도 이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살아갑니다.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합당하게 성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 없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 이름에 맞게 성장하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다른 모음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정도로 발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러면 뭐 하러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을까요? 우리가 합당하게 부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의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처음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할 때는 다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를 위해 당신들 이름 없이 그저 엄마와 아빠로 살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엄마로 살아온 김경희님의 인생은 힘들지 않았나요?”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부모들은 한결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
이름을 준다는 말은 내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어떠셨나요?” 자녀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거 같아요.”
이제 나도 성장했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이름을 잃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등하게 여겨주신다면 나도 그분 뜻에 따라 성장했음을 그분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 이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이 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저도 신자들이 “삼용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당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않겠소. 당신을 전삼용 씨라고 부르겠소” 라고 하면 그것은 사제로서의 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처럼 성장한 것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분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야훼라고 불러봅시다. 그분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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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80: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요한 세례자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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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은 ‘첫 복음 선포’입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그리고 천사가 예고한 대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일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즈카르야 자신과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믿지 못한 것으로만 보이는데(루카 1,18), 어쩌면 즈카르야는 ‘메시아 강생’ 자체를 못 믿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기다렸어도 오시지 않았던 메시아께서 갑자기 오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내가 한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침묵을 지켜라.”라고 명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에 ‘메시아 강생’을 미리 알린다면, 그 소식을 믿는 사람들은 열광하겠지만, 그 열광이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헤로데 같은 자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려고 미리 움직일 것입니다. 어떻든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고 있다가 다시 하게 된 일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하느님의 힘’이 작용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루카 1,64-66)>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의 일이 꼭 필요했나? 처음부터 메시아께서 직접 등장하셔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요한 5,33-35) 여기서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수 조건’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인간들에 대한 배려였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메시아 예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말했다. 그의 임무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끝났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세례자 요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떠났지만, 그의 선포는 살아 있습니다.) 인류의 회개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직 ‘메시아 강생 소식’을 못 들었고,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메시아는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은 그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나를’ 도와주는 예언자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이웃과 친척들과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주님의 손길이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았다면, 또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알았다면,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나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아니라 ‘나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공동체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분이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과 종교 생활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한 노력’은 각자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도 남이 대신해 줄 수 없고, 각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는데, 이 말은 함께 회개하자는 뜻이지 개인의 회개는 필요 없고, 전체의 회개만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는 분입니다.(요한 10,3) 그런 관점에서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은 ‘바로 나’를 위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천 년 전의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일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의 신앙생활은 그때 시작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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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릴 때 읽은 ‘시골 쥐와 서울 쥐’라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서울 쥐가 시골 쥐의 집으로 놀러갔습니다. 시골 쥐가 내놓은 음식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식어 빠진 감자와 옥수수 몇 알이었습니다.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눈을 찌푸렸습니다. 그리고 시골 쥐를 서울에 초대했습니다. 서울 쥐의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서울 쥐는 시골 쥐와 함께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사람 눈에 뛰면 죽기 때문입니다. 다시 나와서 음식을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울 쥐와 시골 쥐는 다시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고양이에게 잡히면 죽기 때문입니다. 시골 쥐는 서울 쥐와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지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골 쥐는 다시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아무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시골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초청을 받아서 큰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갔습니다. 성당의 시설과 사제관은 부러웠습니다. 널찍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학교와 교육관이 있었고, 주차장도 충분했습니다. 성당의 좌석도 넓었고, 공간도 아름다웠습니다. 사제관은 손님방도 큼지막했습니다. 부러운 마음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골 쥐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영어미사와 한국어 미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일에는 한국어 미사 2번 그리고 영어 미사를 2번 한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는 보좌신부님이 한국으로 휴가 갔다고 합니다. 영어 모임, 한국어 모임도 있고, 참석해야 할 회의도 많다고 합니다. 교구의 모임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니니 마치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지난 3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신문을 만드는 일이 훨씬 마음이 편하였습니다. 신문 홍보를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늘 불평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가벼운 십자가를 청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평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동산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였습니다. 불평이 많았던 사람은 신나서 십자가를 고르려고 동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결국, 고르고 골랐던 십자가를 들고 오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지고 가던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가볍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십자가만 무겁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살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없는 십자가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고 합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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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음을 전합니다. 그를 통해서 온 백성을 당신에게 모으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알리시고 모든 민족에게 빛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빛’이시며 ‘계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환히 드러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들의 주님, 메시아가 나오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그의 이름 ‘요한’은 주님의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미리 알려 준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하여 많은 이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이를 믿지 않았고, 그 결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즈카르야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뒤 주님의 손길에 따라 성장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가 되어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아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끕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잘 아시며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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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주님의 길을 미리 닦은 요한 세례자>
경부고속도로 휴게소 중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강휴게소 근처에는 한 위령비가 있습니다. 지금은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 시 순직한 분들을 기억하기 위한 위령비입니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사의 큰 역할을 한 고속도로이지만, 1960년대 당시 열악한 장비와 상황으로 인해 건설 중 77명이나 사망했을 정도로 당시 고속도로의 건설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도 이분들과 같이 이름 없는 영웅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길을 미리 닦아준 분들이라 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닦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분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만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명을 띠고 오셨습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어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기가 유약한 모습으로 처음 세상에 드러낼 때 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다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이름은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이것저것 가려서 많은 숙고를 한 후에 이름을 짓게 됩니다.
또한 그 자식은 부모가 지어준 그 이름을 빛내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필생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사람은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명언도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름을 짓기 위한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의 이웃과 친척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부모님은 요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미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즉 각자 다른 소명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이웃이나 친척들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부르심과 능력보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능력의 이름으로 부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자비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구세주 예수님을 알리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의 소명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인생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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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윤행도 가롤로 신부님]
<소리, 그리고 말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제가 근무했던 해성고등학교만 해도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클릭하는 소리,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밝고 큰 웃음소리,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와서 각종 서류발급을 요청하는 소리 등등.
그렇게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도 별 탈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저의 귀가 익숙해진 탓도 있고 제가 필요로 하는 소리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탓도 있겠지요. 또한 저 역시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행정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내리는 업무지시 소리, 특강이나 수도원 소식지 등 부탁받은 글을 통해 지껄였던 소리(글), 지난 사순 시기 동안, 그리고 그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하며 미사 때 했던 강론이나 여러 본당에서 했던 특강 때 내뱉은 소리 등등.
소리의 바다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수많은 소리들이 발생했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유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한 귀로 나가버리지요.
그러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귀에 들려온 말씀은 마음속에 오래 머물고 나아가 삶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요즘 제 안에서 머물고 있는 말씀은 “쓸모없는 종”(루카 17,10)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시어 당신의 전 생애를 바쳐 인간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는 섬기는 자, 다시 말해 종입니다. 그것도 쓸모없는 종입니다.
이 말씀이 제게 머물고 있는 이유는 종인 주제에 그동안 주제 파악도 못하고 주인처럼 행세해 왔던 지난날의 제 모습 때문입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올해로 19년째인데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냐고 책망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말씀이지만 그동안은 일반 신자님들이 주인 대접을 해주는 것에 맛 들여 애써 외면하고 아닌 채 해왔었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제 주제를 알고 그렇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저는 아무 여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처럼 말씀이 오실 길을 닦는 ‘소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소리만 요란한 쓸모없는 종,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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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한준 롯젤로 신부님]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의 세례로 사람들을 준비시킨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이분의“삶”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알림’과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신약의 시작과 함께 맞이한 “죽음” 또한 ‘선구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탄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며 할례식에 참석한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기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친척 가운데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다며 의아해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 즈카르야가 칠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부모는 이미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13)는 명을 가슴에 품고, 머리에 새기며, 그대로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 부부의 “안 됩니다.”라는 거절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하던 대로~, 지금까지 해 왔으니까~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나, 친척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관습과 전통입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관습과묵은 전통을 과감히 깰 수 있는 거절 없이는 새 시대는 열리지 않습니다. 나아가 맹목적인 거절로 끝나지 않고, 천사가 알려준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요한이라고 해야 합니다.”라는 단호한 순명이 뒷받침되어야 구원의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전통과 악습에 대한 거절’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세례자 요한이 온 삶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최고의 준비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성 요한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최고의 준비가 회개이며, 회개는 과거의 악습에 대한 거절이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임을 자신의 탄생으로 손수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아버지의 이름을 따야 한다.’ ‘친척들의 이름을 가져와야 한다.’며 구태의연한 사고와 끊어버리지 못하는 묵은 악습에 사로잡혀 새로운 시대를 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과감히 “안 됩니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며 과감하고 당당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여 새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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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루카 1,57-66.80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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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닝]
<존재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존재>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마침 어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에 대해 나눴습니다. 오늘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축일에 앞서 예언자에 대해 나눔을 한 셈입니다.
어제 저는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라는 취지로 나눔을 했습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예언자인양 하는 자이고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참 예언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그분이 결코 아니라고 강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거짓 예언자였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여길 때 침묵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은근히 그것을 즐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 없는 자기는 없다는 뜻으로 자기는 그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모든 인간이 하느님 없는 자기가 없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하느님 없는 자기는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나가 아닙니다. 하느님 없이 있는 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독립적인 나가 아니라 관계적인 나라는 얘기이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내가 있는 존재라는 얘기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의 나까지 하느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람은 그분과의 관계에서만 자신을 얘기하고, 말뿐 아니라 자기의 존재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세례를 주고 있는 요르단강에 주님께서 나타나 지나가시자 요한은 주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바로 그분이시니 그분을 따르라고 하며 제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인계합니다.
자기만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도 이제 자기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인계하는 겁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존재,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리키는 존재,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마침내 인계까지 하는 존재, 우리도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함을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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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을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 3,30)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앞서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을 커질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살아감으로써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도 소중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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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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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57.63)
<선구자!>
오늘은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내일이지만, 내일이 '예수성심대축일'인 관계로 교회는 오늘로 이동시켜 지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구원자로 파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앞서 파견된 선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고,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구약에 예시된 메시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줄 강한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뒤에 오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그들에게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 13,2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구자!'
예수님의 구원 행위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안에 세례자 요한과 같은 선구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도나도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실천하는 작은 사랑과 이런저런 이유로 냉담하고 있는 교우들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작은 복음화 활동들은 세례자 요한이 충실하게 지켜 낸 '또 하나의 선구자 사명'입니다.
'또 하나의 선구자',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많아져야 할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만의 잔치, 있는 이들과 잘하는 이들만의 잔치가 아닌, '모두의 잔치'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함께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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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버킷 리스트가 있습니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말입니다. 이 버킷 리스트가 있어야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가? 버킷 리스트는 내게 사치스러운 말이야. 나는 버킷 리스트가 없어. 이유는 간단하지. 하고 싶다고 하면 바로 실천하니까. 남겨두지 않으니 리스트에 적을 수가 없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그걸 지금 당장 하지 않고 종이에만 적고 있나? 먹고 싶은 건 매일 당장 어떻게든 잘 먹고 살면서 말이지.”(김종원, ‘마지막 질문’ 중에서)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전혀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희망은 실천을 당장 해야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이 의미 있을까요? 희망의 구체화를 위해 지금 더 주님의 뜻을 잘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희망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실천해야 희망이 구체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는 희망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얼마나 아기 갖기를 희망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쓰는 순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태어난 세례자 요한도 철저하게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하게 희망의 주님만을 바라보며 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구체화 됩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닌,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보이는 희망이 될 수 있으며 그 희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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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인생 숲길을 걸읍시다>
- 사명, 우정, 떠남 -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당시 강론에 인용했던 이 영어 말마디입니다. 세수를 하려 플라스틱 대야를 보던 순간 투명한 물을 통해 바닥에 씌어져 있던 이 영어 말마디를 봤을 때 참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그날까지 힘차게, 하루하루, 행복하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건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수도원 입구에서 수도원 주자창까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나무 울창한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아름다운 인생 숲길을 걷듯 그렇게 걷습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인생의 숲길을 걷듯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사명,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떠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예수님을 빼놓고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아마 성 요한 세례자 한 분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절친切親 성 요한 세례자에 대한 너무 당연한 예우禮遇이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주님과의 관계에서 사명을 다한 삶이, 주님과의 영적우정이, 또 자기 사명을 다했을 때 겸손히 사라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점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 사도행전 마지막 절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참 멋진 사나이, 아름다운 사나이, 행복한 사나이, 겸손한 사나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자기의 신원을, 자기의 사명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이제 사명을 다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조용히 퇴장하는 참 아름다운 떠남의 사람,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에 소리없이 사라지는 달같습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도 없습니다.
사실 사명을 다하고 직위에서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특히 마지막 아름다운 죽음의 떠남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이요 제 주변에도 길이 그윽한 향기를 남기고 떠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아름다운 분들도 많습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참으로 살고 싶은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좋은 가르침을, 깨우침을 줍니다. 우선 우리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요 이를 날로 깊이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도반인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 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 랍비 신비주의자 여호수아 헷쉘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언명합니다만, 여호수아 헷쉘은 달랐습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에서 주님께 불림받아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참나의 삶을 살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내가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무지와 허무속에서 존재감 없는 무명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인을 물론이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서 주님을 빼면 완전 제로, 무의미와 허무의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 같은 우리 성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다음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늘 새롭게 자각하고 확인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신원이요 사명임을 믿고 새롭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우리 각자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불림받은 섭리의 존재임을 깊이 각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보라,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바로 이 은혜로운 말씀이 예수님과 성 요한 세례자는 물론 우리의 신원과 사명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예수님이요 또 하나의 성 요한 세례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이야기에서도 참으로 불림받은 그의 모습이 작명作名과정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하지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며 완곡하게 반대했고, 이어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을 달라하여 “그이 이름은 요한”이라고 화답하여 쓰니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바로 하느님 친히 작명하신 ‘주님의 은혜’라는 뜻의 요한 이름입니다. 여기서 즈카르야가 부른 찬미가는 우리가 날마다 아침성무일도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어지는 그 지방 사람들의 반응과 성장과정을 보면 정말 불림받은 ‘신의 한 수’ 같은 성 요한 세례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위의 묘사에서 보다시피 새삼 요한 세례자는 결코 우연한 인물이 아니라 섭리의 인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또한 요한 세례자처럼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각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충일한 사명감과 주님과의 깊은 우정이란 성소의 관점에서 보면 어제 복음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가 어제 복음 독서를 하고 강론을 하면서 잊고 언급해지 못했던 아차했던 첫 구절입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 행동을 보면 사람을 압니다. 참으로 주님께 부름받은 제 신원을, 제 사명을 모를 때, 잊었을 때 무수한 가면들이요, 거짓 위장의 옷차림입니다. 사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보호본능상, 방어본능상 가면을 쓰고 속과 겉이 다르게 위선적 삶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제 신원과 사명에 대한 자각입니다. 제 신원을, 제 사명을 깨달아 살아갈 때 마음은 저절로 통합되고(intergrity) 투명하고(transparency) 순수해져 가면은 저절로 사라져 어디서나 본모습, 본 얼굴로 자연스럽게, 자유스럽게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매력을 발산하여 많은 사람들을 끌어드려 주님께 인도하니 바로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어제 읽은 영어 주석을 잊지 못합니다.
“속을 돌보라, 그러면 겉은 스스로 돌볼 것이다(Take care of the inside and the outside will take of itself)”
안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 질 것이니 가면이나 위장을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체로부터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이, 향기가 속과 안을 같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부의 관리보다는 마음 관리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속은 그대로 놔두고 아무리 화장하고 성형하고 가면쓰고 위장해도 속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름다운 사명, 아름다운 우정, 아름다운 떠남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요한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주신 사명에, 당신과의 우정에 충실하므로, 아름다운 인생 숲길을 산책하듯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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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9Jtca1As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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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 63)
가장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탄생한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가까이와
멀리서 바라보는
탄생은
사뭇 다르다.
사람을 통하여
길을 여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확실한
예수님을
먼저 보여주시는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삶의
시작이다.
삶이란 만남의
숨가뿐
여정이다.
탄생도 함께
나누는
기도이다.
나눔으로
감추어진
신비는
생활로
드러난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묻는 가슴의
탄생이다.
가슴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사람이 만들어진다.
희망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사람의 탄생이다.
사람의 탄생과
하느님의 탄생이
사랑 안에서 결국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이
감사라는 것을
알게된다.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요한의
탄생이다.
하느님은
계획하시고
우리는
실행한다.
사람에게
의미있는 시간은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의
탄생이다.
탄생이
가치의 여정을
걸어간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
삶을 선물로
받고 가치를
또 넘치는
은총으로
받았다.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의
오늘이다.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 우리에게
오신 참희망을
만나는 희망의
뜨거운 신비이다.
신비의 여정이
탄생이며
봉헌이다.
+++++++++++++++++
(2)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 63)
먼저 앞서
길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탄생이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사이에
요한 세례자가
있습니다.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새 이름이 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의 새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요한 세례자가
탄생합니다.
탄생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선물이 됩니다.
탄생은 삶을
던지는 뜨거운
불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던지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앞서간
요한 세례자의
탄생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또한 기꺼이
우리 삶을
내어놓읍시다.
앞서 가며
길을 닦아 놓을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과 삶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어놓지 않고서는
결코 길을 닦을 수
없습니다.
내어놓을 때
모든 일은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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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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