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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m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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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바닷가-송수권(宋秀權)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아래 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서녘 하늘을 깨워 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르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출처 [시집]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 ((P110~111)
인물
송수권(宋秀權) 시인
1940.3.15
1940년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에서 태어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동학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10시집 <파천무> 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등이 있으며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 <들꽃 세상(토속꽃)> <여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
3인 시선집 <별 아래 잠든 시인>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시를 읽는 아침> <사랑의 몸시학>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 <태산풍류와 섬진강> <남도기행>
음식문화 기행집 <남도의 맛과 멋>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송수권 시 깊이 읽기> <한국 대표시인 101인 시선집> 등이 있다
문공부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5년 8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퇴임했다
송수권님 시모음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겨울 이사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통수를 유난히 쓰다듬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오지 않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는 의문을 제기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걷히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폐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봐라. 또 누구는 겁을 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우 돕기 만 원을 빼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지게 써 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홀짝
커피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을 따라가며
기죽기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하리라
시골길 또는 술통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여승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빈집
오래도록 잠긴 저 문에
누군가 빗장을 푼다
삭아내린 싸리 울바자 다시 세우고
눈보라가 설쳐대는 툇마루와
댓돌을 쓸고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도 가지런하다
어제는 서울서 일만이네 식구가 내려와
밤새도록 저 창호 문발에 불빛 따뜻하다
그 불빛 새어 나와
온 마을이 다 환하다
낯선 듯 동네 개가 컹컹 짖고
올바자를 넘는 애기 울음소리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이 다 파르르 떤다
마당가 바지랑대에 널린 애기똥물빛
이제야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굴뚝의 연기가 치솟아
한밭재 대숲머리를 돌아나가는
저 들판의 자욱한 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자진모리 설움 한 가락이
그렇게 풀리는구나
IMF가 대순가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벼르고 벼르던 30년 세월
조금 일찍 돌아온 것뿐이다
조금 앞당겨 돌아온 것뿐이다
아내의 맨발
갑골문 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지리산 뻐국새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때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 냈다.
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작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감꽃
밝은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아이들 두셋이 짚오리에
타래 타래 감꽃을 엮어 목걸이를 꿰면서
돌중 흉내를 내고 있다.
감꽃 속에 까치발 뒤꿈치도 묻히는 게 보이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도
크림색 밝은 향기에 실리면서
오월의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감꽃 줍는 애들 곁에서
하나 둘 나도 감꽃을 주우면서
금목걸이를 목에 두를까
금팔찌를 두를까
능구렁이 같은 나의 어두운 노래 끝도
실리면서
밝은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쓰러진 나무
심산유곡 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고
괜한 걱정 말아라
너의 연민이 안쓰러움이고 사랑일 수 없다
벌써부터 달팽이 한마리 뿔을 흔들며 온다
달팽이 오는 길을 따라 무당벌레 날아들고
줄고사리 참나무버섯이 먼저 와 앉았다
붉은줄무늬 다람쥐 한 마리 그 나무 위에 올라 앉아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앞발로 얼굴을 씻는다
수리부엉이 한 마리 숲 위를 맴돌다가
방금 일어난 일 오랜 경험으로 안다
걱정하지 말아라
쓰러진 나무에서 이상한 향기가 난다
우리 나라 풀이름 외기
봄날에 날풀들 돋아 오니 눈물난다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조선총독부 식물도감을 펼치니
구황식(救荒食)의 풀들만도 백오십여 가지다
쌀 일천만 섬을 긁어가도 끄떡 없는 민족이라고
그것이 고려인의 기질이라고
나마무라 이시이가 서문에서 점잖게 게다짝을 끌고 나온다
나는 실제로 어렸을 때 보리 등겨에 토면(土麵)국수를 말아 먹고
북어처럼 배를 내밀고 죽은 늙은이를
마을 앞 당각에 내다버린 것을 본 일이 있었다
햄이나 치이즈 버터나 인스턴트 식품이면
뭐나 줄줄이 외워대는 어린놈에게
어서 방학이나 왔으면 싶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센인바리[천인침(千人針)]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듯이
나 또한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며
어린것의 식물 표본을 도와주고 싶다.
쇠똥가리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나까이 : 조선총독부 관변학자로 동경대 교수였으며 <조선식물도감>의 편찬자.
♣센인바리(千人針)) : 일제식민지시대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갈 때 우리 어머니들이 배조각에 천 사람의 바늘 땀을 놓아 지니고 가면 살아서 돌아 온다는 부적 같은 것.
뻘물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구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 울음
그 징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시골길 또는 술통
저전거 짐받이에서 술통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와서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꿈꾸는 섬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
그 소녀가 흘려 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 풀꽃들도 모두 걸어 나와
길을 밝히더니
그 눈웃음결에 밀리어 나는 끝내 눈병이 올라
콩알만한 다래끼를 달고 외눈끔적이로도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도 차지 않고
잘도 지내왔더니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슬퍼라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쬐그만 돌 밑에
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 놓고
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
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
이승에선 누가 그 몹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
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
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
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
온몸에 자잘한 흰 꽃을 달기로는
사오월 우리 들에 핀 욕심 많은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마나 한 것이 있을라고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 귀를 모아 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자치기를 하는지 사방치기를 하는지
온통 즐거움의 소리들이다
그것도 볼따구니에 정신없이 밥풀을 쥐어 발라서
머리에 송송 도장버짐이 찍힌 놈들이다
코를 훌쩍이는 녀석들도 있다
금방 지붕 위의 까치에게 헌 이빨을 내어주고 왔는지
앞니 빠진 밥투정이도 보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엔 봄날 이런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종일 떠날 줄 모른다.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 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땅끝에서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
빚에 몰린 한 여자가 투신했다
마을 사람들 횃불을 들고 나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듬해 유채꽃이 피어서야
그 여자 이바지 떡짐을 이고 왔다
암,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백 번 낫지
마을 노인들 저마다 한 소식씩 던졌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나서야 찍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지!
초록의 감옥
초록은 두렵다
어린날 녹색 칠판보다도
그런데 자꾸만 저요, 저요, 저, 저요 손 흔들고
사방 천지에서 쳐들어 온다
이 봄은 무엇을 나를 실토하라는 봄이다
물이 너무 맑아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초록의 움트는 연두빛 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섭다
초록에도 감옥이 있고 고문이 있다니!
이 감옥 속에 갇혀 그 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연엽(蓮葉)에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혀 밑에 감춘 사과씨
가을이 오면 호주머니에 그 해의 첫 사과 한 알을
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색과 향과 감촉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불두덩에 털이 나기 시작했고, 달거리 한
그 소녀의 비밀스런 미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사과 한 알을 끝내 깨물지 못하고 손바닥에 굴리며
혼자서 썩히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밭을 하나 가지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사과향은커녕 내 몸에선 쉰내가 난다고
아내는 잠자리에서 투덜거린다
오늘 좌판대를 지나오며 햇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오면서,
저 햇빛과 바람과 이름모를 벌레 소리가 그 치렁한
강물소리가 내 몸 안에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늘을 친 사과밭은커녕 아직 한 그루의 사과나무도 심지 못했다
햇사과를 먹으며 얼굴 붉히며, 사과씨를 뱉으며
혀 밑에 감춘 오래된 사과씨는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강
이 겨울에는
저무는 들녘에 혼자 서서
단호한 믿음 하나로 이마를 번득이며
숫돌에 칼을 가는 놈이 있다
제 섰던 자리
벌판을 두 동강 내어
어슬어슬 황혼 속을 걸어 가는 놈이 있다
보아라 저 방랑의 검객
한 굽이 검돌면서 모래톱을 만들고
또 한 굽이 감돌면서 모래밭을 만드는 것은
힘이다
누가 저 유연한 힘의 가락 다시 꺾을 수 있느냐
누가 저 유연한 힘의 노래 다시 부를 수 있느냐
우리는 어느 산굽이
또 한 바다에 퍼런 굽이 설 때까지
흐득흐득 지는 잎새로나 숨어
유유히 황혼 속을 사라지는
저 검객의 뒷모습이나 지켜볼 일이다
그늘
그늘이란 말 아세요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 소리마당
恨의 땟깔을 벗고 나면
그늘을 친다고 하네요
개미란 말 아세요
좋은 일 궂은 일 모래알로 다 씻기고
오늘은 남도 잔치마당 모두들 소반상을 둘러 앉아
맛을 즐기며
개미가 쏠쏠하다고들 하네요
순채란 말 아세요
물 속에 띠를 늘이고 사는 환상의 풀
모세관의 피를 맑게 거르는…
솔찮이란 말 아세요
마음 외로운 날 들로 산으로 바자니며
나물 바구니에 솔찮이 쌓이던 나숭개 봄나물들
그러고도 쑥국과 냉이 진달래꽃 보릿닢 홍어앳굿…
벌천이란 말 아세요
시집온 지 사흘 벌써부터 기러기 고기를 먹고 왔는지
깜빡깜빡 그릇을 깨기만 하는 이웃집 새댁…
사는 재미도 오밀조밀 맛도 아기자기
산 굽굽, 물 굽굽 휘어지는 남도 칠백 리
다 우리 씀씀이 넉넉한 품새에서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에요.
송수권 시집목록
1980년 1 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1982년 2 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 시인선)
1984년 3 시집 『아도』(창작과비평사)
1986년 4 시집 동학혁명을 다룬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나남)
1988년 5 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1991년 6 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1992년 7 시집 『별밤지기』(시와시학사)
1994년 8 시집 신국토 생명시『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1998년 9 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시와시학사)
1999년 우리 토속꽃 시선집 『들꽃세상』(혜화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찾을모)
2001년 송수권·이성선·나태주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사)
10 시집『파천무』(문학과 경계사)
2002년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옮긴 글]
시를 잘 쓰는 16가지 방법-송수권( 시인)
① 사물을 깊이 보고 해석하는 능력을 기른다.
지식이나 관찰이 아닌 지혜(지식+경험)의 눈으로 보고 통찰하는 직관력이 필요하다.
② 새로운 의미depaysment를 발견하고 그 가치에 대한 ‘의미 부여’가 있을 때 소재를 붙잡아야 한다.
단순한 회상이나 추억, 사랑 등 퇴행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③ 머릿속에 떠오른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중유화 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이것이 종자 받기(루이스)다
(이미지+이미지=이미저리→주제(가치와 정신)확정).
④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정서의 구조화가 필요하다.
추상적 관념을 이미지로 만들고 정서를 체계화하기 위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찾아내야 한다.
또한 1차적 정서를 2차적 정서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쓴다.
이것을 ‘정서적 객관화’ ‘감수성의 통일’등으로 부른다.
⑤ 현대시는 ‘노래의 단절에서 비평의 체계’로 넘어와 있다는 피스의 말을 상기하라.
‘-네’ ‘-오리다’ ‘-구나’ 등의 봉건적 리듬을 탈피하라.
연과 행의 구분을 무시하고 산문 형태로 시도해 보는 것도 시 쓰기(매너리즘)에서 탈피하는 방법(형식)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면 형식은 그대로 두고 ①-④의 항목에다 적어도 ‘인지적 충격+정서적 충격’이 새로워져야 함은 물론이다.
⑥ 초월적이고 달관적인 시는 깊이는 있어도 새로움이 약화되기 쉬우니 프로근성을 버리고 아마추어의 패기와 도전적인 시의 정신을 붙잡아라.
이는 ‘시 쓰기’를 익히기 위한 방법이며 늙은 시가 아니라 젊은 시를 쓰는 방법이다.
⑦ 단편적인 작품보다는 항상 길게 쓰는 습관을 길러라
⑧ 지금까지의 전통적 상징이나 기법이 아닌 개인 상징이 나오지 않으면 신인의 자격이 없다.
완숙한 노련미보다는 젊은 패기의 표현기법이 필요하다.
실험정신이 없는 시는 죄악에 가깝다.
⑨ 좋은시(언어+정신+리듬=3합의 정신)보다는 서툴고 거친 문제시(현대의 삶)에 먼저 눈을 돌려라
⑩ 현대시는 낭송을 하거나 읽기 위한 시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는 시이니 엉뚱한 제목(진술적 제목), 엉뚱한 발상, 내용 시상 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주제를 깊이 감추고, 모든 것을 다 말하지 말고 절반은 비워둬라.
나머지상상력은 독자와 평론가의 몫이다.
⑪ 일상적인 친근어법을 쓰되 가끔은 상투어로 박력 있는 호흡을 유지하라.
⑫ 리듬을 감추고 시어의 의미가 위로 뜨지 않게 의미망 안에서 느끼도록 하라.
이해 행간을 읽어가는 상상력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애매모호ambiguity성이 전체 의미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심층심리 복합현상(원형상징)과
교묘한 시어들의 울림에 으한 콘텍스트를 적용하라.
⑬ 시의 주제는 겉뜻(문맥)이 아니라 읽고 나서 독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게 감추어라(주제).
아니마를 읽고 반대항인 아니무스의 세계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라.
⑭ 현대가 희극성/비극성의 세계로 해석될 때 비극성의 긴장미(슬픔, 우울, 고독, 권태, 무기력, 복수, 비애 등의 정서)를 표출하라.
이것이 독자를 붙잡는 구원의식이다.
이는 치유능력 즉 주술성에 헌신한다.
⑮ 유형화된 기성품이나 유통언어를 철저히 배격하라.
개성이 살아남는 일―이것이 시의 세계다.
정서의 구조화’가 되어 있지 못한 시는 실패작이다.
왜냐하면 ‘감수성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에 의한 의미구조의 통일만이라도 꿈꾸어라.
[송수권 교수 강의]
송수권의 체험적 시론 중에서
-시적 표현과 진실에 이르는 길-상상력이란 것은 인지능력 즉 경험을 통과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는 해가 산에서 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갯가에서 자란 아이는 해가 바다에서 뜬다고 여긴다.
어린이는 돌을 단단한 장난감으로 여기나, 성숙한 어른은 돌을 용암이 굳어져서 풍상에 깨어진 인내-감내-인고의 표상으로 본다.
이것이 인식의 눈이며 표상능력이다.
-시인이 지녀야 할 태도와 정신 中- p.474
나의 경험으로도 유형화되고 유통언어에 걸린 시들을 몰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진지한 시작詩作 과정의 극기훈련 없이는 대중화에 물든 저속성의 시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우처럼 쏟아지는 정보매체의 언어에 시인은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칩거하면서 부정하거나,
이를 극복하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시인인 것이다.
-시인과 고생물학자의 삶 중-p.472
시란, 시인이란 아니 시를 쓰려고 작심한 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탄생시킨 셰익스피어가아니라,
무릇 고생물학자의 고행을 먼저 배우고 진진한 감성의 논리로서 진지한 어법을 먼저 배울 일이다.
진지한 어법이란 한 시대의 이념에 종속되어 굳어진 말버릇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러니나 위트, 해학, 풍자 등의 언어 본래의 정신을 폭넓고 다양하게 구사하는 어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어가 가진 자율성을 말하며, 이 자율성의 정신이 풍만했을 때 상상력은 그만큼 넓어진다는 뜻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말라 中-p.460
탤런트나 거리의 화제를 뿌리고 사는 인기 있는 사람이 시집을 내면 ‘떴다방’이 되고 전문코드를 가진 시인이 시집을 내면 외면당하는 수가 허다하다.
수위가 시를 못 쓰고 교수가 시를 잘 쓴다는 얘기가 아니라 독자층의 70%는 정보언어나 유통언어로 씌어진 소비적인 시를 좋아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다름 아닌 쇼비즘(속물주의) 근성이며 달갑잖은 포퓰리즘(대중성)으로 바깥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시인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지을 수도 이해하고 감상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시인이 독자보다 많다거나 천 사람의 독자보다 깊이 있는 한 사람의 독자가 참다운 독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애매성 中- p.285
문명이 발달하고 시에 대한 독자의 안목이 높아짐에 따라 시인들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로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기교와 방법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시의 기법은 바로 이러한 결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계속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질리게 한다. 새로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일 말하는 ‘낯설게 하기’와 모순어법 등은 현대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시적 애매성을 초래했다,
은유체계는 비유와 상징이 생명이다 中-p.240
시란 결국 ‘발상과 표현’의 문제다.
발상에 있어서는 ‘상상력의 코드번호 찾기’이고, 표현이 문제에 있어서는 경구나 선전문구(로고송)또는
속담유의 직설로는 시가 되지 않으니 반드시 비유와 상징의 하나의 은유체계가 완성되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인문학적 바탕이 없이는 고도한 지적능력(상상력)을 발산할 수도 없으며 설사 이 능력(직관력)을 갖추엇다 하더라도 표현기법 없이는 한편의 시를 완성할 수 없다.
끝
[출처] 📝적막한 바닷가-송수권(宋秀權) / 송수권님 시모음|작성자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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