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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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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 및 신앙 글 스크랩 캄보디아 - ‘킬링필드’에서 돋아난 신앙의 새싹
은하수 추천 0 조회 39 24.02.21 23:1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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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2.21 23:13

    첫댓글 캄보디아 프놈펜대목구에는 대목구장이 십자가를 물려받는 전통이 있다. 현 대목구장인 올리비에 슈밋하우슬러 주교가 목에 걸고 다니는 금빛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십자가는 사실 프놈펜대목구의 첫 캄보디아인 주교였던 치막 살라스 주교의 것으로 알려진 성물이다. 살라스 주교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희생양 중 한 명이다. 킬링필드는 1975부터 4년여 동안 캄보디아 공산당 무장조직인 ‘크메르 루주’가 자국민 약 200만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주교의 십자가가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살라스 주교의 어머니가 그의 십자가를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정부 몰래 십자가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십자가는 1997년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킬링필드’로 단절됐던 캄보디아 교회의 역사가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 작성자 24.02.21 23:17

    가톨릭 신자들 역시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 1975년 이후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돼 고문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가톨릭이 서양 종교란 점도 탄압받은 한 이유였다. 캄보디아 현지인 신부와 수녀들은 물론 캄보디아에 남아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모두 살해됐다. 성당들도 대부분 철거당했다. 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땀꼭 지역 근처에 위치한 깜뽕꼬 교우촌의 경우 수백 명에 달했던 주민 전부가 살해당하거나 실종됐다. 불과 4년 사이에 캄보디아 교회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했다.크메르 루주 정권이 밀려난 이후에도 교회엔 시련이 계속됐다. 베트남의 비호를 받으며 등장한 캄보디아 공산 정부 역시 종교 자유를 억압하며 교회를 탄압했다. 여기에 내전이 오래 이어졌다. 캄보디아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이미 10만이 넘던 신자는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프놈펜대목구장 올리비에 슈밋하우슬러 주교는 “1991년도 기록을 보면 프놈펜대목구의 경우에는 신자가 수백 명 수준이었고, 바탐방지목구는 단 20~30여 명의 신자만이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그 가운데 신부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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