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 끊임없는 기도모임 회원 일일피정 > 베네딕따 보조교사 증언 (50:04)
저는 거내영으로 관계의 지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20)
저를 살고 계신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께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립니다.
저는 1남 4녀 중에 맏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관계로 인한 어려움이 참으로 컸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그 누구와도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를 회상하면 집안 분위는 항상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아버지는 자상한 모습을 보이시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셔서 짜증과 분노를 터뜨리며 폭력을 휘두르곤 하셨기에
가족들은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늘 불안했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한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늘 우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셨고,
자녀들에게 다정한 손길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건넬 줄 모르는
무뚝뚝한 분이셨습니다.
감정적 소통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기에
부모님과의 관계는 늘 서먹하고 불편했으며
어려서부터 강요된 맏이라는 책임감으로
동생들과의 관계조차 무겁고 편치 않았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담임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루에 몇 마디나 하냐고 걱정스레 물어보실 정도로
저는 말이 없었고, 생각을 표현하고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몰랐기에
친구 관계 또한 늘 부자연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내가 선택한 가족 관계 속에서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대학 졸업 후에 바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또 다른 관계의 지옥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계속된 남편의 이직과 저의 직장 생활로 인한 육아 문제로
시댁에 들어가 살다가 친정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여동생 가정과 합가하여 살기도 하며
7년 넘게 독립된 가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육아 문제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관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내야 했지만,
저는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느라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고
관계가 틀어질까 봐 늘 긴장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결혼 8년 만에 겨우 전셋집을 얻어
우리 4식구 단출하게 살아보나 했는데,
분가한지 1년도 안되어 동생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6년 동안 조카를 데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저와 합가하여 살았던 여동생이 주식으로 크게 손해를 보게 되어
동생 집 뿐만아니라 친정 부모님 집도 다 날리게 되었고,
동생이 아이 둘을 함께 키울 상황이 아니었기에
제가 큰 조카를 맡아 키워야 했지요.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저는 늘 불만스러웠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큰소리치며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죽도록 미웠습니다.
부부싸움은 끊일 날이 없었고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매일 부모의 이혼을 걱정하며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저는 제 뜻대로 안 되는 현실에 대한 좌절로
우울과 무기력감에 빠져 있을 때에
저희 집안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저희 아이들을 돌봐주었던 막내 여동생이
췌장암 말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동생은 진단 1년 전부터 등 쪽에 통증이 심해
온갖 병원을 다 다녀보았지만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아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임파선으로 전이된 이후에야
그 엄청난 병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34살이었던 동생은 4살, 9살인 두 아이의 엄마였고
저희 형제 중에서 가장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늘 자기 것을 먼저 포기하고 양보하는
착하고 착한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하느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지만,
전능하신 하느님께 밖에는 또 매달리고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신내림을 받을 정도로 무속에 깊이 빠져 계시던 할머니께서
제가 대학교 다닐 때에 돌아가시자 엄마의 강권으로
가족 모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일 지키는 것조차 어려워하며
수시로 냉담을 하였고, 힘들 때만 하느님을 찾는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 벌을 받는 것이라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할머니께 자주 들어왔기에
동생이 아픈 것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
제 탓인 것도 같아 죄책감이 밀려 왔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 고모, 삼촌께서
몇 년 간격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던 기억이 떠올라
집안에 새로운 재앙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병원 치료를 포기한 동생이
기적적으로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아픈 동생을 이끌고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성령 세미나와 치유 피정을 찾아다녔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
그동안 저의 불충한 신앙생활에 대해 용서를 빌었고
제발 동생을 살려달라며 밤새 통곡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통증이 심하고 앉아있을 기력조차 없는 동생을
억지로 끌고 가서는 그곳에 누워있게 하고 기적을 바라며
신부님과 강사님들께 동생을 위해 안수기도를 청했습니다.
동생은 투병 기간 말기에는 스치는 바람도 아파할 정도로
지독한 통증으로 몸부림쳤습니다.
동생을 위해 기도해주러 오신 분들께서는
동생이 지금 여기에서 연옥의 고통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고통이 끝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지켜보며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치유가 아니라면 차라리 동생을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 빨리 데려가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끝내 동생에게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2012년에 동생은 투병 2년 만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하늘나라에 간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치유의 기적은 동생이 아닌 저에게 일어났다는 것을요.
저는 동생을 살려 달라 눈물로 기도하면서
처음으로 하느님아버지를 뜨겁게 만났습니다.
기도 중에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저는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표현 못 하고 억눌려 있던 감정들과
아프고 외로웠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며
울음은 통곡이 되어 끝없이 토해져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돌덩이처럼 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들이 풀어지기 시작하였고
잠을 잘 때면 갑자기 찾아오던 호흡곤란과 가위눌림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저를 붙잡고 있던
우울과 무기력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동생이 저를 대신해서 하늘나라에 갔다는 생각에
동생에게 너무나 미안하였고 동생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의 안녕과 제 마음의 평화를 구하며
하느님아버지를 찾아 온갖 성령 세미나와 피정
그리고 각종 영성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주보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는 알림판이었습니다.
새롭게 올라온 피정이나 영성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를
스캔하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이렇게 저는 쇼핑하듯이 새롭고 특별하고
강력한 영성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또한 성당에서도 성경공부, 레지오, 전례부, 가정교리 교사 등
각종 단체에 가입하여 외적 신심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집안 일과 가족을 챙기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쉬는 날이면 정신없이 쏘다니는 저를
가족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성덕을 쌓고 기도를 하러 다니는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가족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현실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장소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은
너무나 특별하고 달콤했습니다.
지독하게도 저를 괴롭히던 모든 악습들과 문제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내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된 듯한 착각 속에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문제는 그대로이고
저 자신과 현실은 변화되지 않았기에 이내 짜증과 분노가 올라왔고
관계 속에서의 갈등은 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하느님은 항상 거룩한 그곳에 고이 모셔둔 채
제 뜻만을 다시 소중히 품고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변화되지 않는 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자괴감을 느낄 뿐더러 가족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를 반복하면서도
잠시라도 그때의 기쁨과 충만감을 되찾고 싶은 갈망으로
중독처럼 또 다시 거룩한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퇴직하면 그 근처에 방을 얻어
매일 그곳을 찾아가야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렇듯 제가 기복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신앙생활에 도취 되어
살고 있을 때 입시를 앞둔 고3 아들이
학교 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억측과 오해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었기에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갔고 이를 지켜보면서
저는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점점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그 때에 아들과 함께 가해자로 지목된
아들 친구의 엄마로부터 딸랑 책을 건네받았고,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2019년 7월 12일에 무형의 성전 카페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두려움 만큼이나 의심도 많은 사람입니다.
무형의 성전 가입 초기에는 기존에 경험했던 카페들과는
규정이 너무나 달랐기에 바로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입 한 달 후에
삼성산에서 아버지를 기리는 미사 1박 2일 피정에 참여하여
조교사님들의 증언과 조별 모임을 통한 내맡김 체험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이 영성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능구 3개월을 신청했고,
신부님께서 쓰신 <내맡김 영성> <내맡김 영혼> 글을
적극적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글은 지금까지 제가 읽어왔던
여러 신심 서적들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쉽고 단순하면서도 이치에 딱 맞고
저의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제 삶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였으며,
신앙의 기초를 바로 세워주었습니다.
참으로 탐욕스럽고 무지하기 짝이 없던 제가
그동안 하느님을 신앙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이용해 제 뜻을 이루려 발악을 해왔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고백해 왔지만,
사실 저는 하느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완전히 제 중심적 사고의 틀 안에서
제 만족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능구 3개월 동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인 줄도 모르고 지었던 숨어 있던 죄들이 의식 안에 떠올랐고
형편없이 살아온 저의 과거 또한 끊임없이 소환되어져 왔습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온 거지.'하는
엄청난 자책감과 후회스러움이 밀려왔고,
'앞으로 이 죄를 어떻게 보속 하며 살아야 하지.' 하는
막막함과 두려움에 압도당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인 줄 알고
방향도 모른 채 내달리는 동안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을 얼마나 숨막히고 아프게 했는지요...
그리고 저의 탐욕으로 인하여
제 이웃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던 장면 장면들이
머릿 속에 선명히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죄마저도 자비하신 하느님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라고 하신
신부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저는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 당시에 저에게 가장 마음에 와 닿는 화살기도는
"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
이 화살기도 성가였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나비야” 좀 그만 부르라고 핀잔을 주곤 하였지만,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불러댔습니다.
제가 입으로 부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아도
계속 머리속에서 플레이되어
잠을 자는 중에도 들리는 듯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언제나 두려운 심판자이셨던 하느님께서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 아버지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죄와 부족함마저도 다 괜찮으니
당신께 내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맡김 봉헌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하느님께 드리는 약속인데,
내가 정말 모든 것을 다 내맡겨 드릴 수 있을까?
약속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두려움으로
봉헌을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오묘하신 아버지께서는
저와 제 딸과의 갈등을 통하여 봉헌 결심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당시 딸은 자신은 무신론자이니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며
자꾸 제가 신앙을 강요하면
절에 다니겠다는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모든 것을 하느님아버지께 내맡겨드리면
그 모든 것 안에 저의 딸도 포함이 되니
이 교만한 딸 또한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내맡김 봉헌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2019년 10월 20일에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거룩한 내맡김 봉헌식을 올렸고,
그 때 부터 저에게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봉헌 반지를 끼고 흰 국화꽃을 받으니
제가 죽었다는 것이 참으로 실감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께서 제 안에 사신다는 감격스러움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저를 품어 안아주신
하느님아버지의 무한 사랑에 가슴이 터지도록 감사했고
이제는 살아도 죽어도 아버지 품 안이기에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 요한1, 4,18)
내맡김 봉헌과 함께 이 성경말씀이 실제로 제 안에서 이루어져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아버지께서 제 안에 사시게 되니
그토록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던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 삶에서 가장 큰 숙제였던
관계의 어려움이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아버지께서는 우선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내맡김 봉헌 이후에
저는 끊임없는 화살기도와 무형의 성전 카페 방문을 통하여
하느님아버지를 날마다 새롭게 만나며 기쁨에 겨워 살고 있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저의 내맡김 봉헌을 결심하게 한
그 잘난 딸아이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고 실패 경험이 전혀 없던
완벽주의자적 성향의 딸아이가 엄청난 양의 의대 공부를 하면서
학업에 대한 부담감과 시험에 대한 공포감에 압도되어
공황과 우울, 강박이 함께 터지면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외에는 생전 먼저 전화를 하지 않던 딸아이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 너무 무섭다고, 죽을 거 같다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딸 아이가 있는 서울로 급히 올라와 보니
직접 눈으로 목도한 딸 아이의 상태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처참했습니다.
딸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여 몸은 비쩍 말라 있었고,
여기저기 자신의 몸을 잡아 뜯어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공부를 놓지 못하고
책상에 꼭 붙어 앉아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무 무섭다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바들바들 떨기도 하고 새벽에 맨발로 뛰쳐나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시로 공황 발작이 찾아오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죽을 것 같다는 극심한 공포를 호소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당시 딸아이는 완전히 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눈빛과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때를 회상하며 딸아이에게
“엄마가 성당을 다니지 않았으면 굿을 할 판이었고,
내맡김을 하지 않았으면 구마사제를 찾아다녔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서로 웃곤 합니다.)
딸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 부모의 잦은 불화로 늘 불안했을...
그리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너무나 무거웠을
아이의 마음이 저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저는 딸아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과 함께
이러다가 아이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동아줄을 붙잡듯이
내맡김 화살기도에 집중몰입 하였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맡김 화살기도 안에서
저는 바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고
침착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꼭 붙잡고
증상이 점점 심해져 가는 딸아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던 중에
"그 아이는 너의 육을 빌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랑하는 나의 딸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너의 손을 놓아라." 하는
하느님아버지의 음성이 저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딸아이에게서
제 마음의 탯줄을 끊어내지 못하였고
딸아이를 제 소유인양 꽉 붙잡고 싶어하는,
그리고 딸아이가 잘 회복되어
힘들게 시작한 공부를 잘 끝마치기를 바라는
저의 탐욕을 발견하였습니다.
" 네, 하느님, 이 아이는 당신의 자녀가 맞습니다.
당신의 딸이니 당신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저는 아이를 붙잡고 있던 저의 손을 놓으며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저는 제 뜻대로 안되어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제 삶에서 유일한 위로이고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아니 어쩌면 저의 가장 큰 우상이었던 딸아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봉헌하듯이
원래의 주인이신 하느님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딸아이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이성적이어서
어떤 상황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딸아이가
5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되어 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딸아이는 "엄마, 이상해. 눈물이 멈추지 않아.ㅜㅜ 가슴이 너무 아파." 라며
가슴을 움켜잡고 몇 날 며칠을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딸아이 곁을 지키며 아이의 수족이 되어
아이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었고,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아이가 쏟아내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주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딸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기는 커녕
저 자신의 감정도 주체하지 못했을텐데,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께서 저를 사시니
아플지언정 사랑으로 받아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아버지께서는
그동안 제 뜻에 눈이 멀어 자식도 사랑할 줄 모르는
형편없는 엄마였던 제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딸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딸아이의 숨통을 막고 있던
지독한 외로움을 그 사랑으로 녹여주셨습니다.
저를 광신자라고 비난하며 무신론을 고집하던 그 딸아이가
조금씩 치유되고 일상이 회복되면서
“엄마의 변화를 보면 하느님이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 같아.
하느님이 계시다면 사랑이실 거야.”라고 고백하여
저는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딸아이의 고통을 통해
딸과 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내맡김 이후에 남편과의 풀리지 않던 매듭들도
자연스럽게 풀리게 되었습니다.
수동적이고 매우 의존적이며 우유부단한 저와는 달리
주관이 분명하고 독립적이며 의사 결정이 빠른 남편의 성향이
결혼 전에는 저에게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살아보니
장점으로만 보였던 남편의 성향이
제 결혼 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남편은 의사 결정이 빨랐기에 자주 이직을 하였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수시로 사업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오랫동안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주관이 뚜렷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인 남편의 성향은
의존적이면서도 통제적인 저의 성향과
수시로 부딪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이 많았기에 작은 일에도 안절부절 못하며
“큰일 났다. 어떻게 하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남편은 "숨 막힌다,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라고
면박을 주곤 하였지요.
불안한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저를 번번이 무시하는 남편이 저는 너무나 야속하여
그때마다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남편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분노로 쏟아내곤 했습니다.
남편은 거친 말과 행동으로 저를 제압하려 하였고
저는 그런 남편이 너무나 미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원인을 전적으로 남편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의 시작은
내 뜻에 눈이 멀어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중심적 사고에 갇혀 있던 저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겉으로는 강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사실은 두려움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었고,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무지하고 교만한 아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더욱 방어적이고 공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남편의 상황과 마음은 외면한 채
제 뜻대로 안되는 남편을 미워하고 무시하면서
남편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저는 저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리고 무관심으로 인해
외롭고 아팠을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였고,
그 이후 남편과의 풀리지 않던 매듭들은
급속도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내맡김 이후에
잔소리가 사라져서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들갑스럽던 예전의 저의 모습과는 달리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딸을 돌보는 저를 지켜보며
남편은 저와 제 안에 계신 하느님을 크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저의 변화를 놀라워 하며
본인은 지금 신앙생활을 쉬고 있으면서도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면
" 내맡김 해, 내맡김이 최고야" 라고 말하며
변화된 저의 모습을 증언해주기도 한답니다.
저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매듭이었던 남편이
지금은 이렇게 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력자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맡김 이후에 저의 변화로 인한 관계 개선은
가족을 넘어 사회적 관계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철저히 고립되어 가족 이외에는 관계를 단절하고 살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동생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과의 관계는 물론
세상과의 관계 또한 이어주셨습니다.
동생을 보내고 난 후에 저는 성당의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울렸습니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의 배움과 즐거움은 저에게 참으로 컸습니다.
하지만 어느 수녀님께서 저에게
"자매님은 착한 사람 컴플렉스를 넘어
구세주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요." 라고 걱정하실 정도로
저를 희생하여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맞추려고만 하였기에
관계로 인한 피로감 또한 참으로 커져갔습니다.
그런 저를 하느님아버지께서는
거내영을 통해 관계 속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막가파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교대를 졸업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초등교사가 된 저는
저의 출신이 다른 교사들과 달랐기에
직장에서도 매우 위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임용 후 10년이 넘도록 제가 이곳에서 미운 오리 새끼 같다는 생각에
두려움으로 교무실 문도 잘 열지 못하였고
교실 밖을 잘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중학교 때에 시골 학교에서 도시로 전학을 오면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제 스스로 경계를 높이 세웠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연차가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학년 부장 업무를 맡곤 하는데,
저는 부장교사 대신에 차라리 6학년 담임을 선택하였습니다.
늘 주눅이 들어있던 저에게는
동 학년 교사들과 소통하며 학년을 꾸려 간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내맡김 봉헌 후에 학년 부장 업무를 요청 받았을 때에는,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이니
<거,머시기>로 이끌려 드리라고 지도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떠올라
용기를 내어 그 업무를 수락하였습니다.
저는 업무 능력 및 소통 능력이 매우 부족하지만,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통해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저의 부족함 마저도 내맡겨 드린 채
저의 업무에 충실히 이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족함마저도 아버지께서 다 괜찮다고 하시니,
저 자신의 실수뿐만 아니라 이웃의 실수와 잘못도 너그럽게 보아 넘겨지고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버지께서는 예기치 않은 문제 상황속에서는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저에게 떠올려 주셨고,
말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적절한 말로 이끌어 주시어
아버지께서 저를 통해 직접 일하시는 것을
제가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쌓이게 되니 익숙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미리 겁부터 먹고 늘 회피하려고만 했던 예전과 달리,
저는 새롭고 낯선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신부님께서 “아님말구”를 가르쳐주셨기에
대범하게 아님말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아버지께서는 그림자처럼 늘 숨어 지내며
하고 싶은 말도 언제나 삼키고만 살던 이 찌질이를
거내영을 통해 당신의 막가파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사실 예전의 저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지요.)
또한 저는 내맡김 이후에 교사로서의 제 일에 대한
진정한 기쁨과 보람, 그리고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
작년에 4학년 아이들을 맡아 지도하면서
참으로 힘든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은 물론 교사인 저에게도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학기 초에 그 아이의 거친 말과 행동에 대해 제가 지도를 하자,
"어차피 선생님이랑 나랑은 내년이면 헤어질 사이인데,
서로 힘 빼지 말고 나한테 신경꺼요." 라고 말하더군요.
예전의 저라면 선생님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노발대발했을 텐데 아버지께서 제 안에 사시니 신기하게도 화가 나지 않고
"선생님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야.
너와 나의 인연도 선생님이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고 생각해.
그렇게 스승과 제자로 한 번 맺어진 인연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위해 계속 기도할거야 " 라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제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를 통해 그 아이에게 하신 말씀이시지요.
그 아이는 "기도하든지 말든지." 하며
그 당시에는 제 말을 무시하는 듯했지만,
학년 말에 그 아이는 제 안에 계신
하느님아버지의 사랑으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년 마지막 날에는 자신이 이렇게 변화된 것이
선생님 덕분이라며 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지요.
정말 그 순간은 제 교직생활에서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보람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사랑이 없는 열정으로
원칙만을 우선시하는 정말 바리사이와 같은 교사였습니다.
아이들 각자의 마음과 사정은 살피지 않고
획일적이고 통제적으로 지도하면서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포기하곤 하였지요.
그렇게 형편없는 교사였던 저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아버지께서 사시니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들 하나하나가 각자 각자의 꼴대로
귀하고 사랑스럽게 보여집니다.
또한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에게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결핍된 사랑으로 인한 아픈 상처들을 먼저 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조급하게 내 뜻과 내 방식으로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내맡겨드리니
저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되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제가 맡아 가르치는 동안 그 아이들이 크게 변화되지 않을지라도
저의 아버지이시자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그 아이들을 사랑으로 내맡겨 드릴 수 있으니
저는 자유함와 평안함 가운데 아이들을 바라보고 지도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내맡김은 믿음이고 희망이고 사랑인 것이지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아버지께 내맡겨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 동안 저는 제 뜻에 눈이 멀어
얼마나 많은 어린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요...
하지만, 이 또한 자비하신 아버지께 내맡겨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부족한 저에게 거내영을 통해
새눈과 새마음을 주시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아이들을
새롭게 가르치고 사랑할 기회를 주셨으니,
부족한 저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교사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이끌려 드리겠습니다.
눈을 떠보니 새로운 세상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내맡김 봉헌 이후에 저는 참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늘 어렵고 어긋나기만 하던 관계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니, 이런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의 정답,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아버지께서 제 안에 사시게 되니
저는 새사람이 되어 관계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맺게 되고
관계 속의 천국을 살게 된 것이지요.
내맡김 봉헌식 날에 신부님께서 저에게
“하느님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 무지하고 아둔한 저는 왜 하느님만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봉헌 5년 차인 지금 저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마목정으로 사랑할 때에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나 자신 뿐만아니라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저의 체험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제가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될 때
저 또한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이번 증언을 준비하면서 준비 기간이 길었음에도
부족한 저에게는 증언을 준비하는 과정이
사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글로 잘 표현이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고
증언 글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다는 조급함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과거를 반추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들이 떠올라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증언 준비 기간 동안
저의 삶 전체를 차근 차근 되돌아보게 하시어
제 삶의 모든 상황과 시간 속에 항상 아버지께서 함께 하셨음을
그리고 제가 아버지의 은총으로 엄청나게 변화된 삶을 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버려진 고아처럼 막막함과 두려움에 갇혀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 때에도....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아버지를 찾아 온 사방을 헤매고 다닐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께서는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하여
지금 제 안에 사시며 저를 이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감사와 찬미, 그리고 영광과 흠숭을 아버지께 올려드립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저의 증언을 들어 주신
끊임없는 기도 모임 식구님들과 이 거룩한 길을 갈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선배님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를 뜨거운 사랑으로 지도해주시는
우리 이해욱 프란치스코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Father Gabe, welcome from the faraway United States,
and thank you so much for listening to my testimony,
and I love you. )
첫댓글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눈을 떠보니 새로운 세상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내맡김 봉헌 이후에 저는 참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늘 어렵고 어긋나기만 하던 관계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무척님의 수고로 그날의 감격, 감동을 다시 느껴 봅니다.
증언을 들으며, 또 마지막 찬양으로 얼마나 감동이며 감격의 눈물이 흘렀던지요.
아버지만이 하실수 있는 변화된 삶속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나의 아버지께 얼마나 감사의 눈물이 나던지요.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된 삶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지만 믿고 신뢰하며 한결같이 따라하지 않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본인은 따라 한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올인 하지 못하고 걸쳐놓고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든 대충대충 본인 뜻대로 이끌려 살면서도 내맡겨 드렸다고 착각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께 내맡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베네딕따의 증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믿고 희망하며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변화된 모습들에서 빛의자녀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이끌어 주소서.
여러가지 이유로 함께 할수 없었던 식구들에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우리 모두가 부족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말씀을 믿고 항구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아버지를 주구장창 부르며 살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도 가능하게 이끌고 가시는 아버지를 뜨겁게 뜨겁게 만날수 있고 사랑할수 있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베네딕따와 거내영식구들을 통하여 계획하신 당신 뜻이 이루어 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죄마저도 자비하신 하느님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라고 하신
신부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저는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언제나 두려운 심판자이셨던 하느님께서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 아버지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죄와 부족함마저도 다 괜찮으니
당신께 내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엄마의 변화를 보면 하느님이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 같아.
하느님이 계시다면 사랑이실 거야.”라고 고백하여
저는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맡김 이후에 저의 변화로 인한 관계 개선은
가족을 넘어 사회적 관계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마목정으로 사랑할 때에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나 자신 뿐만아니라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저의 체험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
<결국 사랑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제가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될 때
저 또한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와~~
사랑하는 베네딕따님, 정말 너무나 감동입니다!
베네딕따님의 인생이 어쩌면 이렇게 아버지께서 쓰신 드라마 같은지요!
너무나 성실하고 꾸준히 아버지의 뜻에 이끌려드리셨음이 느껴지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거룩하십니다.
그동안 겪으신 어려움들을 들으며 마음이 너무나 아프기도 하였지만
또 이토록 멋진 탈바꿈, 변화된 모습이 이제는 아무도 앗아가지 못하는 보석 같은 삶의
경지에 들어서 계시니 축하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도 저의 삶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이 되려는 지향으로
기쁘고 감사히 살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베네딕따의 모든 것을 통하여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아버지께서 변화 시켜 주신 놀라운 새 삶을 온 세상에
증언하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그제서야 저는 제 뜻대로 안되어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제 삶에서 유일한 위로이고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아니 어쩌면
저의 가장 큰 우상이었던 딸아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봉헌하듯이
원래의 주인이신 하느님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딸아이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
< ■ 내맡김 영성 ■
7. 내맡김의 영성의 수준은? (1)
지도사제 09.12.21 10:20
참으로 놀랐다, 나도 처음엔 몰랐다, 그것이 바로 이것인 줄을!
내 것들!
나의 모든 것-내 생명, 내 자식, 내 배우자, 내 재산, 내 일, 내 취미,
내 명예 특히 내 뜻 등-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려, 내 것이 없어진 상태!
그것이 '무아(無我)'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없어졌으니, 남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누구한테 맡겼는가?
하느님께! 하느님만 남은 것이다.
완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겨 드림으로 소위 '하느님을 소유' 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무아가 됨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가 된다." 라는 깨달음!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자녀" 가 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는 즉,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처럼" 된다는 깨달음!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神)이 된다." 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깨달음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하느님만이 남는 것이다.
참 빛, 하느님을 소유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
<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제4장 -02 내어맡김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면, 모든 피조물에서 이탈해야 한다.
신비 19.07.07 07:17
순수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사고나 정신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성으로써 뿐 아니라
괴로움과 장애를 통해서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것은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맛 들이는 실천적 지식입니다.
이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현세적으로 부자유스러움을 견디어 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시련과 굴욕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체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순수한 사랑을 몸에 지닐 수 있습니다.
창조된 것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는 단계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곳까지 인도하시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애착심을 파괴 시킵니다.
무엇인가에 애착심을 느끼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시어 그러한 계획을 뒤엎으시고
평화 대신 혼돈과 근심과 어리석음을 체험토록 안배하십니다.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영혼을 구하며
또 영혼을 위해 피조물을 살리는 일은
모든 생명의 주인인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뜻을 통해 우리 마음은 피조물에게 향하고
우리 영혼은 그들을 맞아들여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없이는 피조물이 영혼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고
영혼도 피조물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없이는 피조물이 영혼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고
영혼도 피조물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뜻을 통해 보여주신 한계에 머무르는 모든 피조물은
영혼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하느님 자신이고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평화 속에 머물며
전 창조(全創造)에 완전히 내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아멘, 아멘!
< 거룩한 내맡김의 삶 >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위대한 삶인 지를
넘 넘 깨닫게 해 주는 증언이었습니다.
100% 내맡김이 어렵다고 많이 말씀들 하십니다.
봉헌 때의 부족한 내 마음이 100%였고,
뜨거운 열망으로 < 끊임없는 화살기도 >를 쉬지 않고 바치면
분명 < 아버지 >께서 그 누구라도 이끌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베네딕따님이 넘 잘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베네딕따님, 넘 넘 감동입니다.
새 학기 바쁜 중에 순명으로 기꺼이 증언 준비에 들어가고,
더군다나 사랑하는 게이브 신부님을 위해 영어 번역까지 준비해 주시니
과연 내맡긴 영혼의 참 모습을 보았어요.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시는 이 크신 은총에 무한찬미감사 드립니다!
내맡긴 영혼 베네딕따와 그 가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마음껏 드러내소서.
부족한 저희 모두가 죽도록 뜨겁게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 거내영 >의 모든 것을 통하여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지도사제 2009.12.17. 17:26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은 내어 맡기고 사는 삶,
그 영성이 하느님께
가장 쉽게, 가장 완전하게, 가장 탁월하게, 가장 안전하게,
가장 가깝게 나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그러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지혜롭다는 사람"도 "슬기롭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철부지들"입니다.
철부지는 "단순함"의 다른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순함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를 따라 그저 "단순히"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베네딕따님~
참으로 거룩한 증언 은혜롭게 잘 들었습니다.
잔잔하게 그러나 힘입게 아버지를 증언하는
님의 증언이 참으로 감사했고, 은혜로운 시간이였습니다.
베네딕따님의 미소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아픔과 어려움이 지난 과거되어
님의 증언을 통해 식구들의 가슴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며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살포시 스며든 아버지 사랑처럼......
<그제서야 저는 제 뜻대로 안되어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제 삶에서 유일한 위로이고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아니 어쩌면 저의 가장 큰 우상이었던 딸아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봉헌하듯이
원래의 주인이신 하느님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멘아멘!!
잘난 자식은 어느 순간 우상이 되고, 이사악이 되지요.
못난 자식도 자신의 십자가인 양 꼭 붙들고 놓지를 못하곤 하지요.
사랑하는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보내주셨고, 사랑으로 돌보라 보내주신 자녀를
집착과 우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저희의 욕심과 기대였겠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 사랑이 저희를 살리셨듯이 저희 자녀를 살리고 계십니다.
참생명을 받은 이는 더 이상 죽음의 그늘에 살지 않듯이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이는 그 사랑의 힘으로 살고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지더군요. 사랑의 도미노 되어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베네딕따 가정을 손수 이끌시어 아버지 도구로 세워주셨습니다.
참으로 엎디어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드립니다.
베네딕따 가정과 저희 모든 자녀들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그리고 그제서야 저는 제 뜻대로 안되어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제 삶에서 유일한 위로이고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아니 어쩌면 저의 가장 큰 우상이었던 딸아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봉헌하듯이
원래의 주인이신 하느님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드릴 수 있었습니다. >
구구절절 아멘과 눈물로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네딕따님의 따님과 저의 아들의 이끄심이
너무나 닮아 있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하고,
남들 하는 것을 따라해야 한다는 이원론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저를 탈이원론 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방법은 고통이었지만,
그 열매는 아들에 대한 자유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학생이라고 반듯이 공부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관념에서 해방되다 보니,
시험기간에 컴퓨터에 않아 있는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계획이 있을 것을 알기에,
희망하지 않는 희망!
그냥 아버지의 존재로 빚어질 아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우울증상과 복통과 두통으로 아파하던 아들이
점차 나아지며 밝아졌습니다.
아들에 대한 이론원적 관념의 집착을 갖게 함도
아버지의 이끄심이었고,
그 관념에서 탈출해서 자유함을 얻음도 아버지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베네딕따님의 내맡김의 삶을 통해 그려지는
관계에서의 해방과 사랑이 너무나 거룩해서
천상의 스토리를 보는 듯 합니다!
내맡김의 길을 너무나 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증언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실지요.
마지막 노래안에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함에
또 눈물이 났네요!
사랑하는 아버지 베네딕따의 증언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