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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kee Stadium
Location : 1 East 161st Street Bronx, New York City, New York 10451 United States
Owner : New York Yankees
Operator : New York Yankees
Capacity
Baseball: 49,642 (2014–present)
50,291 (2011–2013)
50,287 (2009–2010)
Soccer: 33,444 (Expandable to 49,642)
Football: 54,251
Record attendance : Baseball: 50,960
Field size
Baseball : Left Field – 318 feet (97 m)
Left Center – 399 feet (122 m)
Center Field – 408 feet (124 m)
Right Center – 385 feet (117 m)
Right Field – 314 feet (96 m)
Backstop – 52 feet 4 inches (16 m)
Soccer: 110 yards (101 m) x 70 yards (64 m)
Surface : Kentucky Bluegrass
Construction
Broke ground : August 19, 2006
Opened : April 2, 2009 (workout day), April 3, 2009 (exhibition game), April 16, 2009 (regular season)
Construction cost : $2.3 billion
Architect : Populous
Tenant
New York Yankees (MLB) (2009–present)
Pinstripe Bowl (NCAA) (2010–present)
New York City FC (MLS) (2015–present)
Yankee Stadium
브롱크스구에 위치해 있으며 MLB의 뉴욕양키스와 MLS의 뉴욕FC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건설비는 총 23억달러에 달하는, 세계모든 스타디움 중에서 가장 많은 건축비가 들어간 구장이다. 이 중 12억달러는 시 재정에서 지원받아 건설하였다. 구 양키 스타디움의 북서 방향으로 한 블럭 건너 자리잡고 있던 공원터에 지어졌으며 구 양키 구장은 철거되어 지금은 헤리티지 파크라는 이름의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2009년 4월 3일 시카고컵스를 상대로 첫 시범경기가 열렸으며 공식 리그경기는 4월 16일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열려 시시사바티아가 던진 경기에서 양키스는 10:2로 패전을 기록하게 된다. 구장의 주요 몇 장식과 디자인은 구 양키 스타디움으로 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2006년 8월에 건설에 착수하였지만 천문학적인 건설비는 이후 많은 논쟁거리를 낳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지어진 양키스타디움은 세계에서 가장 건축비의 구장 타이틀을 갖게 된다.
건설계획
양키스 구단주인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70년대 대대적인 구장 리노베이션이 긑난지 얼마 되지 않은 80년대 초반부터 새구장건설을 준비하게 된다. 스타인브레너는 뉴욕을 떠나 인접한 뉴저지주 미도우랜드 스포츠컴플렉스에 새 구장을 지을 것을 고민하게 되고 뉴저지 주지사인 토마스 킨은 최고명문구단 양키스를 환영하며 1984년 미도우랜드에 새 야구장을 지을 것을 공식화 하기 이르지만 뉴저지 주의회는 천문학적인 건축비를 부담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뉴저지주는 이 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였으나 뉴저지주 주민들은 18억5천만달러의 건설비 부담을 부결시키고 만다. 뉴저지주의 부결에도 불구하고 스타인브레너는 연고이전을 뉴욕시에서의 보다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기 위한 지렛대로 이용하게 된다. 1988년, 뉴욕시장인 에드 코치는 양키스타디움의 시설개선을 위한 9천만달러의 리노베이션 경비를 지원하는데 동의하게 되었으나 스타인브레너는 새 구장을 짓기위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이를 취소하게 된다. 1993년, 시장인 데이비드 딘킨스는 코치의 제안에 더 나아가 브롱크스 지역에 주택계획과 새로운 법원, 경찰대학을 유치하는 지역개발을 제안하였다. 이어 같은해 주지사 마리오 쿠오모는 철도차량기지로 쓰이고 있던 30에이커에 달하는 지역을 새로운 스타디움 부지로 제안하게 된다. 그렇지만 구단주는 양키스를 브롱크스에 잡아두려고 그들이 제안한 13개 제안 항목을 모두 거부한다. 1998년 브롱크스 구청장은 양키스타디움 일대를 각종 샵과 레스토랑, 박물관을 포함하는 6억달러짜리 양키 빌리지를 개발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 역시 거부한다. 같은 해 뉴욕시장 줄리아니는 웨스트사이드야드에 10억달러를 들여 새 구장을 지을 것을 발표하게 된다. 다시 그는 양키스와 메츠를 위해 총 20억 달러에 스타디움 건설을 제안하기에 이르며 이중 12억 달러는 시 재정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뒤이어 시장이 된 마이클 블룸버그는 뉴욕시가 양키스와 메츠를 위한 새구장을 지을 여력이 없음을 밝히게 되고 뒤이어 여러해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마침내 양키스와 메츠 새 구장건설의 계획을 최종 확정하게 된다. 총 경비는 31억달러에 달한다.
처음에 계획되었던 양키스타디움 개폐식 모델
하지만 역사와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구 양키스 구장의 전통을 많이 계승한 현재의 구장모습으로 조감도가 바뀌게 된다.
건설과정
착공식은 베이브 루스 58주기인 2006년 8월 16일 스타인브레너와 블룸버그 시장, 그리고 당시 주지사인 조지 패터키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한편 구장 건설중에는 양키스의 라이벌 보스턴의 팬인 한 인부가 밤비노의 저주가 보스턴에게 내려졌던 것처럼 양키스에게도 '저주'를 내리려는 의도로 레드삭스의 데이비드 오티즈의 저지를 어웨이 팀 덕아웃 밑에 묻으려다 동료인부에게 발각되어 다시 파내야 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이 인부는 자신이 또한 2004 ALCS 프로그램과 스코어 카드를 묻었다고 주장했는데 그 위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저주는 양키스가 2009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새 구장에서 차지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구장 디자인
파퓰러스사가 구장의 디자인을 맡았다. 외관은 인디애나에서 가져온 11,000개의 석회석 조각이 화강암과 콘크리트 벽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구 양키 스타디움의 디자인적 요소를 많이 계승하였으며 외관의 모습은 1923년 양키스 구장이 처음 만들어질때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고 구장 건물명은 입구 현관 위에 금박으로 v-cut방식으로 새겨져 있다.
정문격인 4번 게이트,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금박으로 v컷으로 YANKEE STADIUM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보이는 유리는 구 양키 스타디움의 개장시 사용되었던 유리를 그대로 가져와 설치하였다.
내관은 양키스의 역사를 말해주는 수백장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사업(The Glory of the Yankees Photo Collection)에는 뉴욕 데이일리뉴스 신문이 협력자로 나섰으며 2,000장이 넘는 사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많은 스포츠계와 예술계도 참여하여 1,300장에 가까운 사진을 제공하였으며 이들중엔 데일리 뉴스, 게티 이미지, MLB사무국, 명예의 전당도 포함되어 있다. 의자 또한 구 양키 스타디움의 형태와 유사하게 배열 되었으며 대략 51,000명의 팬이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고 입석룸까지 더하면 52,325명의 수용규모를 나타낸다. 이는 이전 56,866보다 줄어든 것이며 그만큼 1인당 공간이 늘어나 이전보다 좀 더 쾌적한 관람환경을 확보하게 되었다.
양키 스타디움의 띠장식, 오리지널 양키스타디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남쪽 현관을 따라 좌우로 펼쳐진 'Great Hall' 베이브루스를 비롯한 20명의 양키스 레전드들의 대형 걸개가 드리워져 있다.
영구결번이 새겨진 모뉴먼트 파크
모뉴먼트 레전드
Honoree Position(s) Yankee career Number retired Plaque Monument
Miller Huggins Manager 1918–1929 — May 30, 1932 May 30, 1932
Lou Gehrig First baseman 1923–1939 July 4, 1939 (#4) July 6, 1941 July 6, 1941
Jacob Ruppert Owner 1915–1939 — April 19, 1940 —
Babe Ruth Outfielder 1920–1934 June 13, 1948 (#3) April 19, 1949 April 19, 1949
Ed Barrow General manager 1921–1946 — April 15, 1954 —
Joe DiMaggio Outfielder 1936–1951 April 18, 1952 (#5) June 8, 1969 April 25, 1999
Mickey Mantle Outfielder 1951–1968 June 8, 1969 (#7) June 8, 1969 August 25, 1996
Joe McCarthy Manager 1931–1946 — April 29, 1976 —
Casey Stengel Manager 1949–1960 August 8, 1970 (#37) July 30, 1976 —
Thurman Munson Catcher 1969–1979 August 2, 1979 (#15) September 20, 1980 —
Elston Howard Catcher / Outfielder 1955–1967 July 21, 1984 (#32) July 21, 1984 —
Roger Maris Outfielder 1960–1966 July 21, 1984 (#9) July 21, 1984 —
Phil Rizzuto Shortstop / Broadcaster 1941–1956, 1957–96 August 4, 1985 (#10) August 4, 1985 —
Billy Martin Second baseman / Manager 1950–1957, 1975–1978, August 10, 1986 (#1) August 10, 1986 —
1979, 1983, 1985, 1988
Lefty Gomez Pitcher 1930–1942 — August 1, 1987 —
Whitey Ford Pitcher 1950–1967 August 3, 1974 (#16) August 1, 1987 —
Bill Dickey Catcher 1928–1946 July 22, 1972 (#8) August 21, 1988 —
Yogi Berra Catcher / Outfielder 1946–1963 July 22, 1972 (#8) August 21, 1988 —
Allie Reynolds Pitcher 1947–1954 — August 27, 1989 —
Don Mattingly First baseman 1982–1995 August 31, 1997 (#23) August 31, 1997 —
Mel Allendouble Broadcaster 1939–1964, 1976–1989 — July 25, 1998 —
Bob Sheppard Public address announcer 1951–2007 — May 7, 2000 —
Reggie Jackson Outfielder 1977–1981 August 14, 1993 (#44) July 6, 2002 —
Ron Guidry Pitcher 1975–1988 August 23, 2003 (#49) August 23, 2003 —
Red Ruffing Pitcher 1930–1946 — July 10, 2004 —
Jackie Robinson Second baseman — April 15, 1997 (#42) April 17, 2007 —
George Steinbrenner Owner 1973–2010 — September 20, 2010 September 20, 2010
Mariano Rivera Pitcher 1995–2013 September 22, 2013 (#42) — —
Tino Martinez First baseman 1996–2001, 2005 — June 21, 2014 —
Goose Gossage Pitcher 1978–1983, 1989 — June 22, 2014 —
Paul O'Neill Outfielder 1993–2001 — August 9, 2014 —
Joe Torre Manager 1996–2007 August 23, 2014 (#6) August 23, 2014 —
Bernie Williams Outfielder 1991–2006 May 24, 2015 (#51) May 24, 2015 —
Willie Randolph Second baseman / Coach 1975–1988, 1994–2004 — June 20, 2015 —
Mel Stottlemyre Pitcher / Coach 1964–1974, 1996–2005 — June 20, 2015 —
Jorge Posada Catcher 1995–2011 August 22, 2015 (#20) August 22, 2015 —
Andy Pettitte Pitcher 1995–2003, 2007–2010, August 23, 2015 (#46) August 23, 2015 —
2012–2013
양키 스타디움은 다양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공간도 구 양키 스타디움에 비해 63%늘어났으며 콘크스도 더 확장되었다. 365km에 달하는 이더넷 랜도 구축되어있다. 1,100여대에 달하는 HD모니터에서 어디서든 경기를 볼 수 있으며 센터필드 뒤의 전광판은 31m, 18m의 가로, 세로 크기로 개장당시에는 카우프먼 스타디움 전광판과 도쿄 경마장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전광판이었다.
클럽하우스의크기는 2,880m²로 넓어졌으며 탈의실도1,019 m² 에 달한다. 웨이트실과 트레이닝룸, 비디오룸과 라운지로 이루어져 있고 양 팀 클럽하우스 모두 배팅 케이지가 설치되어 있다. 홈팀의 테라피 룸에는 수치료법을 위한 트레드밀 풀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박테리아와 세균으로 부터 선수들의 감염을 막기 위한 멸균 세탁실도 마련되어 있다.
6번 게이트로 들어가면 양키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양키스 선수들의 사인볼을 전시하고 있는 "Ball Wall"이 위치하고 있으며 양키 플레이어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1956년 달성한 유일무이의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 당시의 홈플레이트와 요기베라에게 피칭하는 돈 라슨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양키스타디움에 대한 여론
비록 양키스탇움이 쾌적함과 편의시시설을 잘 갖췄다고 하나 비산 표값에 대해선 많은 비난이 일었다. 레전드 석이라 불리우는 그라운드와 가까운 8열의 티켓값은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비싸다. 평균 510달러에 가장 비싼 곳은 2,600달러에 이른다. 보통 이곳은 비싼 이유로 비어있으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좌석은 거의 매진된다. 잉여 레전드 석 표는 장외에서 거래되기도 하지만 공급이 많아 구장에서 보다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어쨌든 양키스타디움 평균 표값은 평균 63달러로 야구팀 중 가장 비싸다.
스타디움 스태프들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5월 4일, 게임은 비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고 이내 관중들은 스타디움 스태프들로부터 게임을 더이상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많은 팬이 경기장을 떠났고 곧 비가 그치자 경기는 재개 되게 되었으나 한 번 나간 관중은 다시 못들어온다는 양키스의 방침 때문에 그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이외 구단 직원과 관련한 많은 팬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첫 시즌이 가기도 전에 스타디움벽에 균열이 발견되기도 하는등 시작 초반에 여러 잡음이 많았다.
홈런양산
개장연도인 2009년엔 수많은 홈런이 터져나와 너무 타자친화형구장이라는 비판이 일었었다. 시즌 81게임동안 237개의 홈런이 생산되었어 좁다는 의미의 밴드박스, 또는 로켓발사장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개장후 첫 23게임에선 87개의 홈런이 나왔으며 이를두고 ESPN의 피터 개몬스는 "야구사에 있어 가장 큰 웃음거리"라고 비난으로 구장의 헛점을 힐난하게 비판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가들이 이점을 집중 부각하면서 비난이 이어졌고 배이브 루스가 신구장에서 플레이를 한다면 120개의 홈런을 쳤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양키스레전드인 레지잭슨 또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구장이 너무 작다고 평하였다.
홈런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여러 주장이 나왔지만 그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외야의 급격한 앵글이라는 의견과 바람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신구장을 건축하기전에 엔지니어들은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한 결과 구 양키구장과 별반다를바 없을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양키스는 이에 대해 수정을 하려 했지만 시즌중에는 그라운드의 어떤 형태도 바꿀 수 없다는 메이저리그의 규정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최종 결론이 나왔는데 기상관측연구소인 AccuWeather가 연구한 바로는 바람보다는 우측담장의 높이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연구는 양키스타디움의 홈런 중 20퍼센트는 구 구장의 완만한 커브와 3미터의 높이를 대입할 경우 홈런이 되지 못하는 나타났으며 바람의 영향은 제로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양키 스타디움 파크 팩터
축구
2014년 4월 21일, 양키스와 EPL 맨체스터 시티의 공동참여로 뉴욕FC가 양키스타디움에서 새로운 팀으로 출발할 것이란 사실이 발표되었다. 새 구장을 지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양키스타디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축구경기가 펼쳐질 때는 야구장에서 펼쳐지는 특성상 그라운드 크기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어 피파규정의 최소규격인 110야드*70야드의 구장이 겨우 만들어진다.
NYCFC의 경기모습
양키 스타디움과 시티필드의 건축비 내역서
Yankee Stadium panoramic view
http://newyork.yankees.mlb.com/nyy/ballpark/panoramas_pop.jsp?pano=420
http://newyork.yankees.mlb.com/nyy/ballpark/panoramas_pop.jsp?pano=stands
Yankee Stadium
Old Yankee Stadium
Yankee Stadium I(1921~1973)
양키 스타디움은 1923년 개장이래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이었으며 이후 1973년까지 계속 사용되다가 2년 동안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다시 양키스가 입주하게 된다. 그 리모델링 기간에 양키스는 메츠의 홈구장인 셰이 스타디움을 임시로 임대해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베이브 루스가 지은집 - The House That Ruth Built"으로도 알려져 있다. 85년의 세월동안 양키스는 이곳에서 6,581차례의 홈경기를 치뤘으며 26번의 우승을 차지하였고, 야구 경기 뿐만 아니라 콘서트, 복싱 등 다양한 이벤트가 치뤄진 미국의 아이콘이기도 하였다. 최근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 리스트 150중에서 81위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1위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위가 백악관, 스포츠 경기장으로는 31위의 리글리 필드에 이어 두번째이며 이외에도 펜웨이 파크, AT&T파크등도 올라와 있다. 야구를 제외하면 108위의 신시내티 뱅갈즈의 홈구장이 유일하다. 그만큼 야구는 미국인에게 있어서 American past-time의 확고부동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양키스는 1913년부터 양키 스타디움 개장까지 뉴욕 자이언츠와 함께 맨하탄의 폴로그라운드를 홈구장으로 썼다. 이 둘의 관계는 무척 불편하고 티격태격하는 사이였으며 자이언츠는 공공연하게 적개심을 양키스에게 표출하기도 하였다. 1920년 시즌들어 양키스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바로 베이브 루스의 영입이다. 영입 첫 해, 양키스는 130만명의 관중을 폴로 그라운드에서 동원하게 되어 흥행면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누르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으나 8차전까지 가서 결국 3승 5패로 월드시리즈에서 자이언츠에게 패하고 만다. 1919, 1920, 1921, 이 3년동안의 월드시리즈는 9전 5선승제였다 (최근 버드셀릭 커미셔너와 일부에서는 흥행을 위하여 이를 다시도입할 것을 내비쳐 주목받고 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자이언츠 구단주 찰스 스톤햄은 양키스가 폴로그라운드를 벗어나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줄 것을 종용하였으며 대체지로 퀸즈지구나 "외딴 곳" 으로 갈 것을 제시하였다. 훗날 자이언츠의 등쌀에 못이겨 양키스타디움에 둥지를 튼 양키스는 베이브루스와 많은 스타들, 그리고 새로운 양키스타디움으로 인해 부동의 명문구단으로 부상하게 되며 도저히 양키스의 명성을 넘을 수 없었던 자이언츠는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짐을 싸게 되는 신세를 겪게 된다.
양키 스타디움과 폴로그라운드
1920년대 양키 스타디움과 폴로그라운드 현재의 같은 지역의 모습
사실 이 사건 이전인 1915년부터 양키스의 구단주 제이콥 루퍼트는 새 구장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일반적인 수용규모는 30,000명이었으며 60,000석을 계획중인 그에게 기자들이 재정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구장을 지을 여력에 대해 질문하였을 때, 그는 공공연히 베이브루스의 존재를 언급하며 그를 각인 시키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뉴욕에 세팀이나 있을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양키스 구단주는 브루클린 다저스나 뉴욕 자이언츠보다는 더 그들의 미래가 탄탄하다고 믿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250만 달러를 들여 새 구장을 짓기로 결심하게 된다. 허드슨과 루퍼트는 새 구장을 짓기위해 뉴욕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했으며 뉴욕의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지금의 브롱크스 지역이 최종 낙점되어 마침내 지어지게 된다.
마무리 공사중인 양키 스타디움
신축구장 개장
양키스타디움은 공식적으로 1923년 4월 23일 개장하였다. 뉴욕 텔레그램의 기사에 의하면 "모든 것이 새로운 향기다, 새 패인트, 새로운 잔디 냄새"
이 개장경기에서 보스턴으로부터 이적해 온 베이브 루스가 우측 스텐스에 꽂는 쓰리런 홈런을 쏘아 올림으로서 보스턴을 4-1로 꺽으며 승리한다. 실로 양키스에게는 기나긴 세월동안의 영광을, 보스턴에게는 그와 같은 세월의 저주가 내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양키스는 이 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2009년 뉴 양키 스타디움의 개장경기에서는 반대로 클리블랜드에서 데려온 C.C.사바시아가 클리블랜드를 맞아 패전 투수가 되고 만다, 베이브 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첫 경기의 사바시아의 개인적 운명이 또한 이후 팀의 운명과 함께 할 것 같지는 않다. 양키스는 2009년 새 구장 개장년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개장일 당시의 양키 스다디움 풍경
개장식 행사 국기 게양대가 그라운드 안에 서있다.
1920년대 양키 스다디움 모습
1930-40년대, 초기의 양키스타디움
이날 개장 경기에서는 정원을 초과한 무려 74,217명이 입장하고 25,000명이 넘게 발길을 돌리기도 하는 등 많은 이야깃거리를 전하고 있다.
이후 양키스타디움은 1936년과 1938년의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나무의자는 콘크리트로 대체되었으며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좌측 팬스는 여전히 메이저리그 구장 중 가장 먼 곳에 해당되었다. 1938년을 거치면서 이후 35년간 유지된 고전적형태의 구장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며 히틀러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5월, 당시 양키스 구단주 래리 맥파일은 2차대전이 끝나면 10만석으로 증축할 것을 발표하게 되지만 이뤄지지는 않게 된다.
1946년의 양키스타디움
1950,60년대 양키 스타디움
Yankee Stadium II
양키 스타디움은 이후 1974년과 75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어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구장을 다르게 이해하기도 하며 대표적으로는, ESPN의 스포츠 연감에서는 이전 구장을 "양키스타디움 I", 이 후 구장을 "양키스타디움 II"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주요 외형적 변화로는 중간중간에 서 있던 118개의 기둥을 없앴으며 천장을 따라 일렬로 서 있던 금속 4,6m짜리 금속 장식품이 있던 곳은 윗 덮개와 조명라이트로 대체 되었다. 그라운드는 2m 가량 더 내려가게 팠으며 개장당시부터 남아 있었던 목재의자는 모두 플라스틱으로 바꿔지면서 수용규모도 57,545명으로 바뀌었다. 당시 리노베이션 비용이 1억 6천만달러이며 이를 요즘 비용으로 환산해보면 약 6억 5천만 달러가 된다. 현재 워싱턴 내셔널스 구장 신축 비용이 6억 5천만 달러임을 감안하면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금액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할 수 있다.
양키스타디움은 2년간의 기간에 걸쳐 리모델링을 거치고 1976년 다시 오픈하게 되어 54,000명이 운집하였고 이경기에서 미네소타 트윈즈를 11-4로 꺽게 된다. 이해 역시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되나 신시내티 레즈에 4연패를 당하면서 월드챔피언 타이틀을 가져오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2년간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이 끝난 후 재개장을 알리는 포스터. 리노베이션 기간인 74년과 75년에 양키스는 셰이스타디움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이후 2009년에 철거될 때 까지의 기본적인 모습을 이 형태로 계속 유지하게 된다.
새구장 건설과 철거
수많은 역사와 애환을 담은 양키 스타디움은 이제 그 역할을 새 구장에게 물려주고 2009년에 사라지게 된다. 2006년 8월, 새 구장을 위한 착공식이 새 구장 부지인 매컴 댐 공원에서 거행 되었다. 이후 양키스는 2007년과 2008년, 그들의 새 구장이 지어질 때 까지 마지막 두 시즌을 양키스타디움에서 계속 플레이를 하게 된다. 2008년 9월 21일 양키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에도 양키스타디움 투어는 양키스 기념공원(Monumnet Park)과 영구결번 기념비를 중심으로 11월 23일까지 계속 되었다.
11월 8일 처음으로 기념공원과 영구결번 기념비 일부가 새 구장으로 이전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폴 오닐, 스캇 브로셔스, 데이비드 콘, 제프 넬슨 등의 1998년 우승 멤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브롱크스 지역에서 선발된 60명의 리틀리그 어린이들과 피칭 플레이트와 홈 플레이트를 파기 시작하고 뒤따라 철거 작업도 이뤄지게 되었다.
현재 양키스타디움의 터- 해리티지 필드라는 야구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남쪽 내야는 양키스의 그것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Polo Ground
폴로그라운드 개장장면
Polo Grounds I
처음에는 폴로를 위해 지어진 시설이라 이후 폴로 그라운드로 불리게 된다. 주 사용팀은 뉴욕 자이언츠로써 1890년에서 부터 195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기까지 67년을 이 구장에서 보내게 된다. 메이저 리그팀으로는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이름의 팀이 이 경기장에서 처음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이 팀은 1880년부터 1882년까지 이 구장을 단독으로 쓰게 된다. 이후 내셔널 리그팀으로서 뉴욕 고담스(자이언츠 전신)가 들어옴으로써 아메리칸 리그의 메트로폴리탄스의 공동 홈구장이 된다. 당시 폴로 그라운드는 맨하탄 필드와 폴로그라운드의 듀얼 스타디움으로써 두 구장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서쪽 폴로그라운드의 그라운드 상태가 도로가 그라운드 안으로 통과하는 구조로 경기를 하기엔 엉망이어서 두 구장 다 리그를 돌리는게 불가능해졌다. 이후 1886년 메트로폴리탄이 스탠튼 섬의 세인트조지 크리켓그라운드로 이전하기까지 두 구단은 동쪽필드를 같이쓰게 된다.
두 폴로글운드 구장, 전면의 맨하탄 필드와 외야 넘어의 폴로그라운드
Polo Grounds II
1889년 뉴욕시는 맨해튼 외곽까지 도로망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폴로그라운드를 가로지르는 111번도로도 그중의 하나였다. 작업인부들은 도로작업을 위해 갑자기 나타나 펜스절단작업을 하였다. 이에 자이언츠는 대체구장을 빨리 찾아야만 했다. 이에 1889년 시즌을 저지시티의 오클랜드파크에서 맞이하게 되고 시즌초 두게임을 거기서 치르게 된다. 4일후 다시 세인트조지크리켓 그라운드로 옮기게 되었다. 6월 14일 홈경기가 끝나고 자이언츠는 7월 14일까지 긴 원정기간을 보내고 다시 폴로 그라운드로 돌아오게 된다. 관중석은 가변석으로 새롭게 건설되었고 훗날 . 남쪽으로 쿠간언덕이 자리잡고 있어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지않고 이 언덕위에서 경기를 보곤 했다. 관중석은 내야 쪽으로 완만하게 굽어져 설계되었고 토지의 모양에 따라 센터쪽은 양쪽보다 홈에 더 깝게 만들어졌다. 기형적인 모양이었지만 이는 데드볼시대의 야구에선 별로 이슈화 될 문제는 아니었다. 부지는 쿠건 부동산회사의 소유였고 자이언츠는 폴로그라운드를 사용하는 기간동안 얹혀사는 모양새였다.
이후 자이언츠는 폴로글운드III로 이사하게 된다. 1891년까지 폴로그라운드II는 맨해튼필드로 불리웠고 풋볼이나 육상경기가 자주 열리곤 했다.
Polo Grounds III
폴로그라운드 3(좌)와 맨해튼 필드(우)-1900
1905년의 폴로 그라운드
1890년에 건설된 폴로그라운드3는 외야가 뚫린 형태의 구장이었다. 외야쪽으로 가변석을 넓혀갔고 1900년 초기에는 파울라인을 따라 그라운드 내부까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투수뒷면 관중석에 위치한 배터스아이 양쪽으로는 담배박스마저 적재되어 너저분한 모습이었다. 넓은 외야는 마차나 차량의 주차장을 경계짓는 로프로 펜스가 쳐져 있었다. 이후 1910년까지 외야의 가변석들은 다 철수되었고 마찻길도 사라졌다. 초기 기형적인 가변석의 난립 덕분에 외야 그라운드 모양은 매우 복잡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1890년, 자이언츠는 내셔널 리그와 그해 생긴 브러더후드 리그 양리그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같은 날 옆구장에서 경기하는 날에는 홈런볼이 서로 다른 구장으로 날아가기도 하였고 윗층 관람석의 관중들은 두 경기를 다보는 경우도 있었다.
1911년 4월 14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말발굽 모양의 관중석을 휩쓸고 지나갔다. 서로 분리된 구조탓에 외야와 클럽하우스는 화재로부터 온전할 수 있었다. 나무로 된 자질은 모두 타고 철제구조만 남게 되었다. 이에 폴로그라운드를 콘크리트와 철제로 만들어진 9번째 메이절그 구장이 된다.
이후 잠시 구단주의 이름을 따 브러시 스타디움으로 불렸으나 이내 곧 다시 폴로그라운드로 불리게 되었다. 남아있던 가변석들은 1923년 시즌에 모두 철수 되었고 관중석은 영구적인 더블덱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관중석과 클럽하우스가 외야뒤쪽을 따라 만들어졌고 이로인해 구장특유의 기형적 필드모양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모양이 욕조와 비슷하다 하여 The Bathtub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기묘한 모양의 그라운드로 인해 많은 변수가 훗날 생겨나게 되고 흔히들 알고 있는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윌리메이스의 '더 캐치'의 장면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전에 힐탑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양키스는 대여기간이 만료되자 1913-1922년 사이 자이언츠의 허락하에 폴로그라운드를 같이쓰게 되나 1923년부터는 새로 건설된 양키 스타디움에 영구적으로 둥지를 틀게 된다. 두 구장은 서로 의식하여 경쟁적으로 수용규모를 늘리지만 양키스타디움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폴로그라운드에서의 자이언츠의 마지막 나날
폴로그라운드의 마지막은 다른 주얼박스 스타일의 구장에 비해서 초라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194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열악한 구단사정때문에 구장을 유지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구장주변지역도 점점 쇠퇴해가는 과정이었으며 이런 것들이 겹쳐져 입장수입은 급감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얽혀 관중수는 급감하게 되고 티켓수입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례로 월드시리즈 우승한 1954년엔 중소도시 밀워키의 200만 관중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110만명만 입장하게 되는 참담함 결과를 맛보게 된다.
풋볼 자이언츠팀이 할렘강 건너 양키스타디움으로 떠나고 더욱 가혹했던 1956년의 상황은 더 열악한 티켓판매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관객수는 전년도에 비해 반토막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다른 구단주처럼 부유하지 않았고 다른 사업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구단주 호레이스 스톤햄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은 스타디움을 지탱할 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점점 쇠퇴해가는 구단과 낡은 폴로그라운드에 실망한 스톤햄 구단주는 양키스타디움에 입주하길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30년전에 양키스가 자이언츠에 얹혀살면서 나가기를 종용받아 양키스타디움으로 옮긴 후 그 상황이 지금에 와서 완전히 역전이 된 것이다. 또한 시 소유이 다른 구장으로 옮길까도 깊이 고민하게 되지만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게 된다. 이에 1957년 8월 19일, 다저스를 따라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길것을 마침내 발표하게 이른다. 이로써 그동안 5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을 안겨주었던 폴로그라운드를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다. 다저스 양키스, 자이언츠 중 뉴욕의 마지막 승자는 양키스였던 것이다.
메츠 홈구장 폴로 그라운드
폴로그라운드의 마지막
이후 3년간 아무도 사용않던 구장은 메츠가 62년과 63년의 2년을, 뉴욕제츠이 전신인 타이탄스가 4년간 더 사용하게 된다. 이후 이 일대를 주거단지로 개발하려는 시의 수용의사에 반해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쿠건일가는 시측의 승소로 끝난 1967년의 판결이 있을때까지 법정다툼을 벌였지만 폴로그라운드의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철거는 1964년 4월에 이뤄젔다, 이때 사용된 철거용 쇠철구는 4년전 에버츠 스타디움(구 다저스 홈구장)철거에 쓰였던 동일 기구였으며 작업반은 자이언츠 저지를 입고 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폴로그라운드 타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뉴욕주택공사의 관리하에 있다.
폴로그라운드 이미지
오늘날의 폴로그라운드 터, 땅소유주의 이름 딴 쿠건의 언덕으로 당시 사람들이 올라갈때 사용하던 철제 계단, 이곳에서 뉴욕시민들은 공짜로 경기를 보곤 했다.
photos from http://www.stadiumpage.com/stpages/poloremains.html
쿠건의 언덕에서 본 지금의 경기장 터, 폴로그라운트 타워라는 주택단지가 건설되어있다. 강 건너 지금은 양키스타디움이 자리잡고 있다.
Ebbets Field
다저스의 브루클린 시절에 홈구장으로 쓰여진 경기장이며 목재구장인 이전의 워싱턴 파크를 대체할 영구적 구장으로 지어졌다. 구단주인 찰리 에버츠는 몇년간의 준비끝에 부지매입을 끝내고 1912년 공사를 시작해 돼지사육장이었던 피그타운은 이후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연출된 에버츠 필드로 1년만에 다시 태어났다.
양키스와의 시범경기 장면, 1913년 4월 5일. 공식 개장일은 4월 9일 필라델피아전
구장이 오픈되었을 때 구장모양을 본따 담배박스라고도 불리웠다. 전체적은 구장으 모양은 그라운드를 관중썩이 애워싸는 모습을 띄고 있었다. 여기서 다저스는 이후 1916년과 1920년의 리그챔피언십을 따냈다.
첫 야간경기는 1938년 6월 15일 38,748명앞에서 치루어졌고 어웨이팀의 투수 조니 밴더 미어는 이 경기에서 2게임연속 노히터 게임을 이루어냈다.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어떤 선수도 만들지 못한 지금까지의 유일한 기록이다. 좌석은 35,000명의 수용규모를 넘어선 적이 없어서 구단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우겨넣기도 하였다. 구장을 넓히고 싶었으나 주변건물때문에 그것도 힘들었고 또한 주차시설이 없어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와야 했다. 이 시기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이에 사비를 들여 돔구장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뉴욕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대신 다저스가 시 소유의 퀸즈지구 플러싱 메도우에 위치한 새구장을 사용해 줄 것을 것을 희망했다. (현 시티필드 구장 소재지) . 이에 대한 오말리는 "우리는 브루클린 다저스이지 퀸즈다저스가 아니다"라는 대답으로 일거에 거절해 버린다. 오말리는 뉴욕시를 압박하기 위해 LA로 연고지을 옮길 계획이라는 내용을 발표하고 이에 더해 뉴욕을 떠나 뉴저지의 루즈벨트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갖기도 했다. 이후 오말리와 시 당국은 어떠한 합의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이상 뉴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오말리는 LA를 새 연고지로 옮길것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1957년 시즌이 끝난 후, 브루클린 다저스는 LA다저스로 바뀌게 되었다. 옮기기전 다저스는 마빈 크래터라는 부동산 업자에게 에버츠필드를 팔아치우고 옮기기 직전까지 이 구장을 임대하여 쓰게 된다.
1920년, 에버츠필드에서의 월드시리즈장면
LA로 연고지를 옮긴 오말리는 오랫동안의 뉴욕라이벌이자 폴로그라운드의 뉴욕자이언츠 구단주인 호레이스 스톤햄에게 같이 서부로 옮기자고 제안하였다. 낡은 구장과 어려움에 처한 구단사정으로 고민하던 스톤햄은 다저스를 따라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로서 다저스는 LA에, 자이언츠는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둥지를 틀게 되었다. 다저스가 떠난 에버츠필드는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 이후 1960년 2월 23일 철거작업이 시작되었고 오말리는 연고포기에 대해 "스포츠 연고이전사에 있어서 가장 오명으로 얼룩진 사건"이라 하기도 했다.
에버츠필드가 서있던 자리, 이제는 에버츠필드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에버츠필드의 외형을 본 딴 시티필드
애버츠필드 이미지
Hilltop Park
1903년부터 1912년까지 훗날 양키스로 바뀐 하이랜더스가 홈구장으로 쓰이다가 1913년 양키스가 폴로그라운드로 떠난 후에는 곧 철거되었다. 1911년 시즌에는 화재로 인해 폴로그라운드를 잠시 떠나야 했던 자이언츠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좌측이 111m, 센터가 165m, 우측이 120m에 이르러 홈런왕의 홈런이 10개 미만인데 비하여 3루타는 이보다 세배나 많아 스피드를 강조한 데드볼시대에 적합한 구장이었다. 이후 공의 재질변화와 베이브루스의 등장으로 데드볼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1908년의 힐탑파크
1912년의 힐탑파크 출입구
수용인원은 16,000명이었으나 데드볼시대의 야구는 관중이 몰릴 경우 외야너머에서 공짜로 보는 경우가 많았고 펜스아래 3루측 그라운드에 내려와서까지 구경하는 사람도 많아 실제 수용구모는 25,000정도로 보인다. 건설비 200,000달러 대부분은 부지 바위를 제거하거나 땅파는데 쓰였다.
1910년의 힐탑파크
1912년이 힐탑파크, 뒤의 건물 세 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있다.
Washington Park
워싱턴 파크는 세개의 구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루클린에 위치해 다저스가 에버츠필드로 옮기기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첫번째 구장과 두번째 구장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서있던 구조였고 두번째 구장터에 나중에 새로 구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은 이전에 독립전쟁 당시 워싱턴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자리와 밀접한 곳이어서 구장이름도 워싱턴 파크로 불리게 되었다.
1880년대의 워싱턴 파크
1909년 워싱턴 파크
워싱턴 파크의 스코어보드, 센터필드에 있어 공이 밑으로 가면 공을 찾느라 더듬거려야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구장의 외벽
New York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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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양키스 구장은 주차장은 어디있는걸까요? 다저스 구장보면 어마어마한 주차공간이있던데 다른 신축구장들도 어느정도 자리는있는데 양키스구장 사진보다가 문득드는생각이 경기장빼고는 자리가진짜협소해보이네오 마치 고척스카이돔처럼 딱 경기장만들어가게보입니다 지하에주차시설있다치더라도 엄청나게 모자랄거같은데 혹시 아시나요?
근데 수정할 것 있습니다. 건축비용은 23억달러(2조3천억)가 아니라 16억달러(1조6천억)입니다.
이전 자료신거 같은데,, 일단 위키에 나와있는 자료를 올렸습니다.
@이승엽 글 말미에 구장 건축비 내역서를 올렸습니다. 양키 스타디움의 total project cost가 23억 달러, 시티필드가 8억3천만 달러로 나와있네요. 이 프로젝트 코스트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건축비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양키스타디움과 관련된 부대시설까지 다 포함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확실한 건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키스스타디움... 그저 웅장하단 말밖에 생각나는게 없네요!!! 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