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밭회 정기모임-육영수 생가,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보문산 탐방
일시:2016년 3월 17일 목요일
장소:충북 옥천읍 육영수 생가,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대전 보문산
* 옥천 육영수 생가
오삼밭회는 나고 자란 고향의 어릴 적 친구들 모임이다. 우리들의 엄마끼리도 친구이고, 우리들의 아버지끼리도 친구인 아주 끈끈한 우정이다. 오삼밭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유년 시절에 우리들은 우리 마을을 오삼밭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정다운 이름을 붙여 우리 5명 친구들의 모임을 오삼밭회라고 지었다. 모두 오삼밭 한 고을의 아래, 윗집에서 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1년에 4번 정기모임을 갖는데, 오늘은 대전에 사는 친구가 있어 수도권 친구 4명이 기차를 타고 대전에 왔다. 대전 친구가 자가용을 주선하여 충북 옥천읍에 있는 육영수 생가에 왔다. 육영수 생가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100리 길의 마지막 장소에 있다. 육영수 여사가 나고 자란 집이다. 허물어진 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해 2011년 5월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이 집은 1600년대 정승을 지낸 김씨가 처음 지어 살았고, 이후 송 정승, 민 정승 등 3명의 정승이 살았던 집이라 하여 삼정승집이라 불렸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기 전인 1918년 육종관이 민 정승의 자손에게서 사들여 수리하면서 조선 후기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건넌채, 안채, 뒤채, 행랑, 별당, 후원, 정자, 연못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육영수 여사는 내가 공주사대부고 재학 중 우리 학교에 오셨었다. 앨범에도 그날의 환영하던 사진이 있다. 그리고 내가 천안시의 초등학교에 첫발령을 받아 처음 부임했던 학교에서 1974년 8월 15일 일직당번 하던 중 광복절 행사를 시청하다가 저격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저녁 먹을 때 라디오를 켜니 오후 7시 뉴스에서 육영수 여사가 운명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많은 충격을 준 사건이다. 우리 나라 역사의 아픈 고리 한 장면이다. 그런 회억으로 애절한 걸음을 옮기며 육영수 생가를 둘러보았다.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의 차녀다. 옥천 읍내 죽향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란 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 근혜, 근영 1남 2녀를 두었다. 오늘날 그분의 첫째 딸인 박근혜가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시다. 육영수 여사님은 당신은 슬프게 떠나셨지만, 지하에서나마 이 사실을 아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만년에 맡은 공직은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돕기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매우 바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 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에 저격당하여 최후를 마쳤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 10시 중앙청, 현 경복궁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 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도 발족되어 추모 책자를 펴냈다. 육영수 여사의 남편이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오면 집무를 보시던 집도 있고, 곳곳에 방들이 많다. 그 당시 얼마나 큰 규모의 집인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가장 가슴을 울리는 것은 육여사의 생시 활동사진들이다. 화사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그날을 부른다. 관람을 마치고 연못 앞에서 벗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떠나왔다.
* 옥천 정지용 생가
정지용 생가는 육영수 생가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나는 성균관대학교 시창작 과정 수강을 할 때, 스승님이신 성찬경 교수님으로부터 정지용 생가인 옥천에서 문학행사를 하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땐 시인 등단하기 전이어서 그 말씀이 아련하게 먼먼 이야기로 들렸다. 그 후 등단하고 나서는 나도 꼭 옥천 정지용 생가에 가 봐야갰다고 다짐했다. 문단 행사에서 갈 기회를 놓쳐 못 갔는데 오늘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옥천 정지용 생가에 온 것이다. 나는 '향수; 노래를 즐겨 부른다. 정지용 시 '향수;에 곡을 붙인 노래라서 노랫말이 상당히 좋다. 그 분의 생가에 오니 어딘가서 그 분이 마중 나올 것 같은 환상이 스친다. 초가지붕의 정겨운 풍경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시인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아명을 지룡(池龍)이라고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瑞光)'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에 시작 활동을 하였고, 휘문고보 출신의 문우회에서 발간한 '휘문(徽文)'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던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그해에 신민, 어린이, 문예시대 등에 ‘다알리아(Dahlia)’, ‘홍춘’, ‘산에서 온 새’ 등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이무영 등과 함께 9인회를 결성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그해에 새로 창간된 가돌릭 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그곳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의 시를 소개하여 그를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34세 때인 1935년 그 동안 발표했던 시들을 묶어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부터는 '문장'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이 시기에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발간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사회 상황이 악화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의 시인 이토를 국민문학 4호에 발표하였지만, 이후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은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을 발간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을 출간했으며,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와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는 1993년 4월에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지용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생가 앞으로는 정지용의 대표시 '향수'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부엌이 딸린 안채와 행랑채 등 2동의 ‘一’자형 초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엉을 얹은 흙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두 개의 사립문이 있다. 생가 옆으로 물레방아와 정지용 동상 등으로 꾸민 작은 공원이 있고, 그 옆으로 정지용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생가와 문학관은 바로 곁에 이어져 있다.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 초가집으로 복원해 놓아고 문학관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 놓았다. 물레방아도 있고,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다. 방에는 사진과 그 분의 온기가 서린 물품들이 있다. 생가를 돌아보고 문학관으로 이동하여 탐방하였다.
* 옥천 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문학관은 정지용 생가 바로 곁에 있다. 넓은 마당에 들어서면 생가와 정지용 시인 동상과 문학관이 잘 보인다. 생가를 보고 문학관으로 갔다.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서정적인 언어구사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 5. 15~1950. 9. 25)의 삶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문학관이다. 2005년 5월 15일, 정지용의 생일에 맞춰 개관하였다. 정지용문학관은 문학전시실·문학체험공간·영상실·문학교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 오른쪽으로 정지용 밀랍인형이 벤치에 앉아 관람객을 맞는다. 음악과 영상으로 정지용의 시세계를 전달하는 통로를 지나면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산문집 초간본 전시’ 코너로 구성된 문학전시실이 나온다. ‘지용연보’ 코너에서는 정지용의 삶을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의 문학사를 통해 살펴보고,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상을 통해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지용의 삶과 문학’ 코너는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대와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를 한다. ‘지용문학지도’ 코너에서는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흐름 속에서 정지용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시·산문집 초간본 전시’ 코너는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문학독본> 등 정지용의 시집과 산문집 원본을 전시하고, 영상을 통해 육필원고와 초간본의 내용을 감상할 있도록 꾸몄다. 문학체험공간은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기를 통해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관람객이 정지용의 시를 직접 낭송하여 녹음된 테이프를 가져갈 수 있는 ‘시낭송체험실’을 비롯해 ‘손으로 느끼는 시’, ‘영상시화’, ‘시어검색’ 등의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정지용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상영한다. 그밖에 강좌·토론·세미나·문학동아리활동을 비롯해 관람객을 위한 설명회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 문학교실이 있다. 정지용 문학관 앞으로 동상과 물레방아 등의 조형물이 있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날씨도 맑고, 3월의 기온이 매우 포근하여 더욱 아름다운 문학탐방이다. 곳곳을 돌아보고 많이 배우고 떠나왔다.
* 대전 보문산 둘레길
옥천에서 육영수 생가와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보고 대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보문산으로 갔다. 보문산의 높이는 457.6m이고, 주봉은 시루봉이다. 시 중심부 남쪽에 솟은 산으로, 보물이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고 불리다가 보문산이 되었다거나, 나무꾼이 죽어가는 물고기를 살려줘서 얻은 은혜를 갚는 보물주머니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보문산의 짙푸는 녹음은 대전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대전광역시의 대표적인 녹음공원이자 도시자연공원으로, 여러 문화재와 함께 보문랜드, 푸푸랜드, 청년광장, 보문산공원(사정공원), 야외음악당, 전망대, 유희시설, 케이블카 등 휴식공간이 잘 갖추어져 있어 시민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또 골짜기마다 20여 곳의 약수터가 있고 시루봉 아래 고촉사에는 미륵상을 닮은 자연 암석이 있다. 산행코스는 시루봉길, 문필봉길, 산성길 등 10여 개가 있는데, 보문산 케이블카 광장에서 시작하여 전망대인 보운대과 보문산성을 거쳐 시루봉쪽으로 가다가 골짜기로 내려와 야외음악당과 송학사를 거쳐 케이블카 광장으로 내려오는 4.8km 코스가 흔히 이용된다. 사정공원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고촉사 뒤의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시루봉에 오른 다음 서쪽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다가 보문사지 갈림길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따라서 내려오는 4.3km 코스도 있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인 보문산성(대전기념물 9)이 있으며 성 안에 있는 장대루에서는 시가지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보문산성 동쪽 등산로 오른편 길가에는 높이 6m, 너비 6m 정도 되는 자연 상태의 바윗덩이 하단 중간에 마애여래좌상(대전유형문화재 19)이 새겨져 있고, 그밖에 고려시대의 절터인 보문사지(대전기념물 4)에는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된 보문사지 석조가 있다. 산자락에 있는 사정공원에는 축구장·롤러스케이트장·배구장·배드민턴장 등 체력단련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산 서쪽 안영동 유등천변에는 성씨별 시조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뿌리공원이 있다.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보문산 주변의 둘레길을 한바퀴 돌며 산책했다. 아직 새싹이 돋지 않아 고적하지만 그래도 산책 나온 시민들이 많다. 둘레길은 나무판으로 조성하여서 걷기에 아주 좋다. 우리 친구들은 유년의 동심으로 손잡고 신나게 걸으며 우정을 더욱 진하게 나누었다. 저녁 무렵 하산하여 대전역으로 와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