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동(靑石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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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동조(靑石洞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청석동은 본부의 서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천마산의 서쪽 가지와 성거산의 북쪽 가지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서 높은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다. 그래서 서관(西關 서도(西道), 곧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서울로 가는 대로(大路)가 단애(斷崖)를 따라 절벽과 이웃하면서 사람과 말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바 이처럼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이 20리나 된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의 두 입구가 모두 좁은데 그중 북쪽이 더욱 비좁아 두 단애(斷崖) 간의 간격이 불과 300보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천하에서 이곳이 가장 험한 곳이라고 일컬어져 오고 있는데 험난하기로 유명하다는 중국의 정형산(井陘山)도 이곳만큼 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의당 북쪽의 입구에다 관문(關門)을 하나 설치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단속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이곳을 지키도록 하되 송도(松都)의 절제(節制)를 받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 용현(龍峴)이 있는데 서쪽의 길이 평탄하고 넓어서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저 임진(臨津) 나루로 직접 통하게 되어 있다. 만약 이 길을 막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리 청석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혹시 행성(行城)을 쌓아 이곳을 지키도록 하거나 아니면 나무를 많이 심어 도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아야 할 것이다.”
대마도(對馬島)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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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남자의 말씨나 부녀자의 복장이 우리나라를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이 왜(倭)를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일본 사람들 또한 이들을 대하는 것이 자국(自國)의 내지민(內地民)들과는 다른 점이 있고, 이 땅에 사는 백성들도 일찍이 한 번도 자신들을 왜인이라고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호공(瓠公)이 이 섬의 사람으로서 신라에 와서 벼슬한 것을 보면 이곳이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실성왕(實聖王) 무신년(408) 조를 보면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軍營)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이곳이 본래 왜인에게 소속된 땅이었다고 한다면 군영을 두었다는 말이 굳이 신라의 역사 기록에 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조(我朝)의 태조 5년(1396)에 김사형(金士衡)과 남재(南在)를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였으며, 세종(世宗) 때에는 이종무(李從茂)를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세조(世祖) 때에는 교지를 선포하여 이들을 깨우치기를,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비 정무모의(貞茂慕義)가 정성을 바쳐 왔기 때문에 매양 그 신사(信使)를 접대하고 이를 두터이 위로해 주었고 상선(商船)의 왕래 또한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 따른 경상도(慶尙道) 지방의 미곡(米穀) 소모가 해마다 대략 수만 석가량이나 되는바, 이만하면 너희들에 대한 나의 마음씀이 참으로 할 만큼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응당 크게 병선(兵船)을 갖추어 섬을 포위하고 공격하겠다.” 하였다.
그 뒤 중종(中宗) 5년(1510)에 황형(黃衡)이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승첩(勝捷)으로 인하여 이 섬이 본래 우리나라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계속 진격하여 이를 점령해 버리려고 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備局)의 등록(謄錄)에 이르기를, “대마도는 머리가 부산(釜山)에 접해 있고 꼬리가 거제(巨濟) 등지를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에 바람의 정도에 따라서 영남에 배를 대기도 하고 호남에 배를 대기도 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고정된 장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임진년에 그들이 비로소 부산으로 배를 대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때부터 우리가 전적으로 부산을 왜적을 맞이하는 고정 장소로 삼게 되었다. 그러니 을묘년의 왜변 때에 녹도(鹿島)와 영암(靈巖)이 어떻게 남구(南寇)들의 돛을 내리는 장소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삼포왜란(三浦倭亂) : 중종 5년(1510)에 삼포(三浦)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居留民)들의 폭동 사건으로, 일명 경오(庚午)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난이 평정된 뒤 일본의 거류민들이 추방되고 일본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그 뒤 일본 족리막부(足利幕府)의 수교 요청에 따라 세종 때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고쳐서 새로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고 개항장의 수를 제포(薺浦) 1항(港)으로 제한하였다. 을묘년의 왜변 : 명종 10년(1555)에 왜구가 전라도 영암ㆍ강진ㆍ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이다. 임신조약 이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에 고통을 받던 왜구들이 이해 5월에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영암 등지에 침입하여 만행을 저질렀는데, 난이 평정된 뒤에 대마도주가 왜구의 목을 잘라서 보내는 등 사죄를 하면서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하여 왔으므로 세견선 5척을 늘려 주고 이를 계기로 비변사(備邊司)를 상설 기관으로 하게 되었다.
절영도(絶影島)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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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鄭澔)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수영(水營)과 부산(釜山)의 두 진(鎭) 앞에 절영도가 있는데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을 놓아 먹이고 있는바, 이곳은 수영과의 거리가 3, 4리 정도 되는 곳으로서 외면(外面)은 지극히 험하지만 그 안은 실로 토지가 비옥합니다. 그런데 왜선(倭船)이 부산을 향할 때에는 반드시 이 섬의 오른쪽을 경유하고 수영을 향할 때에는 반드시 이 섬의 왼쪽을 경유하게 되어 있으니 이곳은 실로 도적들이 들어오는 길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응당 목장을 철거하고 대신 진(鎭) 한 곳을 설치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선(兵船)을 비축하여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을 다독여 여기에서 농사를 짓게 하면서 뒷날의 위급한 일에 대비하게 한다면, 비록 적의 배 천 척이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그 형세가 이 섬을 버리고 다른 길을 경유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먼저 이 섬을 침입하여 점령해서 후환을 없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전진해서 수영이나 부산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 이들을 막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수영과 부산의 여러 진(鎭)의 전선(戰船)들이 군병들을 불러 모으고 기계(器械)들을 정리하여 안팎이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룬다면 반드시 적선(賊船)들이 종전과 같이 거칠 것 없이 휩쓸고 들어오는 변란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섬에 사는 백성들이 4, 5백 호가량 되므로 이는 곧 1천 명에 가까운 정병(精兵)들이 항상 섬 안에 주둔하고 있는 셈이고 그런 데다 사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 이들이 도망하여 흩어질 염려도 없고, 부모와 처자들이 모두 섬 안에 살고 있으므로 이들이 마음을 굳게 먹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탐라(耽羅)의 노정(路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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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탐라에 가려고 하는 자는, 나주(羅州)에서 길을 떠나면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를 거쳐서 영암(靈巖)의 대무지와도(大無只瓦島)와 해남의 어란량(於蘭梁)을 지나서 7일 밤낮을 가야 바야흐로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게 되며, 해남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를 따라 거요량(巨要梁)과 삼내도(三內島)를 거치게 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를 따라 고자(高子), 황이(黃伊), 노슬도(露瑟島), 삼내도를 지나게 되는데 모두 3일 밤낮을 가야 추자도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이들 세 곳은 배가 모두 추자도를 경유하게 되는데 다시 사서도(斜鼠島)와 대소(大小) 화탈도(火脫島)를 지나서 드디어 탐라의 애월포(涯月浦)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조천관(朝天館)과 화탈도와의 사이에서 양쪽 물이 서로 교류(交流)하여 파도가 매우 험하기 때문에 이곳을 왕래하는 자들이 곤란을 겪는다.” 하였다.
안흥진(安興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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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년(1675)에 비국(備局)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안흥(安興)은 그 지세가 바다로 40여 리나 삐죽이 나가 있어서 삼남(三南) 지방의 배들이 이곳을 경유하지 않고는 달리 통과할 어떤 길이 없고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루면 강도(江都)에 닿을 수가 있으니, 이는 곧 수로(水路)의 인후(咽喉)요 강도의 문호(門戶)입니다.
예전에 이곳이 포탄에 맞아서 성이 파괴되었는데 곧 첨사(僉使)의 거처였습니다. 그래서 계사년(1653, 효종4)에 진(鎭)을 새로 경영하게 되었는데 이후원(李厚源)이 차라리 구진(舊鎭)을 다시 수축(修築)하는 것이 낫겠다고 해서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0월에 끝마쳤습니다. 이곳은 지형이 높고 험해서 성은 작지만 견고하고 또한 밀물이 들어올 때는 바다를 이루고 썰물이 빠져나가면 육지가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적이 배를 타고 침공하더라도 썰물이 빠지고 육지가 드러나면 배가 여기에 걸릴 염려가 있고 육지를 따라서 싸움을 걸어오더라도 밀물이 밀려와서 결코 오래 버틸 수가 없는 형세이니, 적들과의 싸움이라고 해야 고작 한나절이면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이곳 성안에는 세 곳에 우물이 있고 성 밖에는 여러 곳에 우물이 있습니다.
백령진(白翎鎭)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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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서쪽 대양(大洋) 가운데에 백령도(白翎島)라는 섬이 있는데 우리나라를 피곤하게 괴롭히는 해적(海賊)들이 이 섬에 숨어 지내면서 여기에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먹으며 순풍(順風)을 기다려서 비로소 내양(內洋)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해서(海西)에서 출발하여 서풍(西風)을 타고 들어오다가 남쪽으로 길을 바꾸어 충청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전라도로 들어가기도 하니, 이곳이 곧 해적들이 드나드는 문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섬을 한 바퀴 돌려면 사흘이 다 소요되고 이곳에 두 개의 항구가 있는데 여기에서 점포를 벌이고 소금을 구우니 그 용도가 무궁합니다. 토지가 지극히 비옥한 데다 섬이 중앙은 움푹 들어가고 주위는 높아서 만일 이곳에 돈대를 설치한다면 사방의 조망(眺望)이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는 강도(江都)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초도(椒島)를 마주하고 있으며 북쪽은 장산곶(長山串)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광암(廣巖)과 아랑(阿郞)이란 두 진(鎭)이 있는데 모두 겹겹으로 싸인 포구 안에 들어앉아 있어서 외양(外洋)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두 진을 합쳐서 대진(大鎭)을 만들어 다른 고을을 도와주되 당상(堂上)이 지휘하는 첨사진(僉使鎭)으로 만들어서 그 성위(聲威)를 떨치도록 하소서. 그리고 장연(長淵)의 오차포(吾叉浦)와 옹진(甕津)의 소강(所江) 등지가 이 섬과 가장 가까우니 이 중 한 곳에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서로 호응하도록 해서 비상시에 대비토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서해(西海)와 남해(南海)의 해로(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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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용산강(龍山江)에서 서쪽으로 통진(通津)의 유도(留島)에 이르기까지 그 거리가 백 리이며, 유도에서 남쪽으로 가면 갑곶진(甲串津)을 지나서 손돌목[孫石項]에 이르게 되는데 이 손돌목이 바로 강화부(江華府)의 손방(巽方 남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명 손석항(巽石項)이라고도 한다. 강화는 그 산맥이 손돌목에서 포구(浦口)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물밑은 석각(石角)이 울퉁불퉁하고 파도가 소용돌이쳐서 뱃길이 지극히 험하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약산(藥山)의 호도(虎島)를 끼고 가다가 오른쪽으로 덕진진(德津鎭)과 초지진(草芝鎭)을 끼고 지나서 다시 왼쪽으로 율도(栗島)와 영종도(永宗島)를 끼고 지나서 월미도(月尾島)에 이르게 되는데 유도에서 이 섬까지 이르는 거리가 130리이다. 그리고 무치도(茂致島)에서 이를 왼쪽으로 끼고 평신진(平薪鎭)까지 이르는 거리가 230리이고 이를 오른쪽으로 끼고 여방도(呂防島)까지 이르는 거리가 250리이며, 다시 왼쪽으로 안흥진(安興鎭)과 죽도(竹島)를 끼고 배미도(倍味島)에 이르는데 평신진에서 이 섬까지 이르는 거리가 450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군산진(群山鎭)에 이르는데 여방도에서 이곳까지 이르는 거리가 460리이다. 여기에서 다시 왼쪽으로 길을 잡아 배미도에서 조역도(鳥驛島)까지 이르는 길이 290리이고 군산진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주지도(注之島)까지 이르는 거리가 290리가 된다.
다시 왼쪽으로 길을 잡아 모래초(暮來草)를 지나 오른쪽으로 추자도(楸子島)를 안고 왼쪽으로 회령진(會寧鎭)을 끼고 전라 좌수영을 지나서 비포진(非浦鎭)까지 이르는 거리가 520리이고 왼쪽으로 통영(統營)의 선창소(船廠所)를 끼고 거제의 한산도(閑山島)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덕진(加德鎭)을 안고 왼쪽으로 길을 잡아서 명지도(鳴旨島)까지 이르는 길이 400여 리가 된다. 다시 오른쪽으로 절영도(絶影島)의 왜관(倭館)과 대마도를 끼고 왼쪽으로는 부산진(釜山鎭)을 끼고 북쪽으로 꺾어서 경상 좌수영과 기장(機張), 울산(蔚山), 장기(長鬐), 연일(延日) 등을 지나서 영동(嶺東)과 관북(關北) 지방에 이른다.
그리고 유도에서 교동(喬桐)에 이르고 연평도(延坪島)를 지나서 왼쪽으로 신미도(身彌島)를 끼고 가도(椵島)에 이르게 되는데 신미도에서 가도까지의 거리가 70리이다.
중국과 통하는 해로(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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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로 말하면 우리나라 땅에서 곧장 중국의 사명(四明)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바닷길이 멀고 아득한 데다 중간중간에 섬들이 가로막고 있고 또한 흑풍(黑風 폭풍(暴風))으로 파도가 심한 변고들이 있으니 잘 피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성강(禮成江)의 급수문(急水門)을 출발해서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면 비로소 편안히 도달했다고 말을 하는데 수십 일이 걸리지 않고는 이를 수가 없다.
송(宋)나라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 인종6)에 양응침(楊應忱)이 자청해서 고려에 사신을 왔었는데 그가 돌아갈 때에는 9월 계미일에 우리나라를 출발해서 무자일에 자기 나라 명주(明州)의 창국현(昌國縣)에 이르렀으니 겨우 6일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단공(端拱) 4년에 진청(陳請)이 고려에 사신을 왔었는데 산동반도 등주(登州)의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순풍을 타고 바다에 떠서 이틀 밤을 자는 동안에 벌써 황해도 옹진(甕津)의 어귀에 도착하였다. 육지에 오른 뒤에 160리를 걸어서 해주에 이르렀으며, 다시 백 리를 걸어서 염주(閻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걸어서 백주(白州)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다시 40리를 더 걸어서야 비로소 서울인 개성(開城)에 이를 수 있었다.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북 김제시 지역인 만경현(萬頃縣)에 있던 섬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조운(漕運)과 중국 무역선의 기항지(寄港地)로서 번영하였다. 단공(端拱) 4년 : 단공은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인데 그 기간이 988년에서 989년까지 2년간뿐이므로 4년이란 없다. 염주(閻州)에 …… 백주(白州) : 염주는 지금의 연백군(延白郡) 지역이고, 백주는 지금의 배천군(白川郡) 지역이다 연해(沿海)의 정관(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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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혜군(櫘郡) 가리저(加里渚)의 동쪽에 수군창(水軍倉)을 두었는데 혜군은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그 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뒤에 다시 혜산(櫘山)의 동쪽에 창고를 두고 그 이름을 숙관(稤館)이라 하였는데 당(唐)나라의 사개(使价)와 상고(商賈)들이 모두 이 관(館)에 들었으며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조공할 때도 이곳을 통해서 하였다. 풍천(豐川) 초도(椒島)의 광석산(廣石山) 밑에 당관(唐館)의 옛터가 남아 있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서 왕래하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 때에는 송(宋)나라의 서울이 변경(汴京)에 있었기 때문에 사행(使行)들이 등주(登州)로 가서 뭍으로 올랐다. 그래서 황제가 등주에 조칙을 내려서 관을 두고 이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보령현(保寧縣) 서쪽에 있는 고밀도(高密島)의 관은 중국의 사행(使行)들이 왕래하던 정관(亭館)이며, 송나라 흠종(欽宗)이 등극하였을 때 김부식(金富軾)이 하사(賀使)가 되어서 배를 탔던 곳에 모두 정관들이 있었는데 등주의 여러 곳들이 바로 이것이다. 해미(海美)의 안흥정(安興亭)과 홍주(洪州)의 잉분도(芿盆島), 인천 자연도(紫燕島)의 조천대(朝天臺), 송도(松都)의 벽란정(碧瀾亭) 등이 모두 옛날에 중국으로 사신을 떠나던 장소들이며, 대식(大食), 섬라(暹羅) 등 여러 나라들이 이곳을 통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원(元)나라 때는 제주(濟州)에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고 장사성(張士誠), 방국진(方國珍) 등이 해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는데 이들이 모두 제주를 경유하였다. 유구(琉球)의 사신이 순천(順天)에 와서 정박함에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답례를 하였는데, 이때는 제주의 오른쪽 바다를 지나서 통행하였다.
해중(海中)의 군대(軍隊) 이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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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대의 이동은 모두 바다를 경유해서 요동(遼東)으로 나왔는데, 한(漢)의 팽오(彭吳)가 예맥(濊貊)과 조선(朝鮮)에 침입했을 때에 중국의 연제(燕齊)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騷動)이 일었다. 그리고 양복(楊僕)이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을 침공할 때에 발해(渤海)를 건너서 열구(列口)에 이르렀는데 이 열구란 한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장군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청천강(淸川江) 이남의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나라)는 유흔(劉昕)을 보내 침공해 왔고, 사마의(司馬懿 조위의 권신(權臣)으로 진(晉) 무제의 조부)는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이를 위해 등주(登州)에다 수입성(水入城)을 쌓았으며, 탁발위(拓跋魏 북위(北魏))는 백제를 침벌(侵伐)하였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 고구려 영양왕23)에 내호아(來護兒)가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와서 평양에 주둔하였으며, 당(唐)나라가 정관(貞觀) 18년(644, 보장왕3)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산동반도의 내주(萊州)에서 곧장 평양으로 왔는데 등주(登州)의 북쪽에 오호도(烏胡島)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용삭(龍朔) 1년(661, 부여 풍왕1)에 소열(蘇烈 소정방(蘇定方)을 말하는데, 열이 이름이고 정방이 자임)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에 등주의 성산(成山)에서 출발하여 인천의 덕적도(德積島)에 도착하였다. 이 성산의 동쪽 10리에 소석산(召石山)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진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려고 다리를 만들던 곳이라 한다.
원(元)나라는 범문호(范文虎)를 보내 흑산도(黑山島)의 수로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제주도의 남쪽 바다를 경유하여 일기도(一歧島)에서 고려의 군대와 만나서 왜(倭)를 정벌하였다. 선조 무술년(1598, 선조31) 왜적이 침략할 때에는 진린(陳璘)이 절강(浙江)의 군병을 동원하여 당진(唐津)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에 조칙을 내려서 우리나라를 돕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대로 말하면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서 월주(越州)의 땅을 경계로 삼았는데 이는 곧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도읍했던 곳이며, 또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을 경략(經略)하였는데 이는 곧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시중(侍中)에게 올린 글에 보면 백제도 일찍이 중국의 제로(齊魯) 지방을 침공하여 이를 뒤흔들어 놓은 일이 있다고 한다.
고려 고종(高宗) 임진년(1232, 고종19)에 정응경(鄭應卿)이 수군(水軍) 3천 명을 거느리고 용주포(龍州浦)를 출발하여 몽고의 요청에 호응했던 일이 있으며, 인조 18년(1640)에는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주사(舟師) 5천 명을 거느리고 열두 달치 식량을 준비해 가지고 안의(安義)의 바닷가에서 서로 회합한 적이 있다.
한(漢)의 …… 일었다 :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는 “팽오가(彭吳賈)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는데 연제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이 일었다.”고 되어 있는데, 기원전 128년에 위씨 조선(衛氏朝鮮)에 소속되어 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그가 관할하는 28만 구(口)를 이끌고 한(漢)에 귀부(歸附)한 것을 계기로 일시 이곳에 창해군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양복(楊僕)이 …… 이르렀는데 : 한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5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쳐 왕검성으로 들어왔는데, 열구는 곧 대동강의 어귀 또는 그 어귀에 있는 황해도 은율(殷栗) 지방을 가리킨다. 광무제(光武帝)가 …… 회복하였다 : 서기 23년에 낙랑군 지역의 토호(土豪)인 왕조(王調)가 일어나서 낙랑군의 태수인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 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일컬었는데, 그 뒤 이 반항 운동이 7년간을 끌다가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새로 파견한 낙랑 태수 왕준(王遵)과 이에 협력한 토착 한인(漢人) 세력들에 힘입어 서기 30년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 일이 있으며, 서기 37년에는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보낸 호동왕자(好童王子)에 의해 낙랑군이 습멸(襲滅)되었다가 그 뒤 44년에 역시 후한의 광무제가 해로(海路)로 보낸 군대에 의해 낙랑군이 또다시 살아나게 된 일이 있었다.《後漢書 卷76 循史列傳 王景》 《後漢書 卷1 光武帝紀》 《三國史記 大武神紀》 그러나 여기에서 이유원(李裕元)이 회복이란 뜻의 ‘복(復)’ 자를 쓴 것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 교빙(交聘)의 해로(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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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도(五島)가 대마도의 오른쪽에 있는데, 오도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三島)에 도착하여 밤을 지낸 다음 선산도(仙山島)를 지나기만 하면 곧장 고금도(古今島)의 가리포(加里浦) 등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동북풍을 얻어 타게 되면 연화도(蓮花島)와 욕지도(欲智島)의 두 섬 사이에 이르고 하룻밤이 지나면 곧장 남해(南海)의 미조(彌助)와 방답(防踏) 등지에 닿게 되는데, 이것이 곧 왜적들이 전라도 지방으로 침입하는 익숙한 길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의 뱃길이 매우 멀어서 아침에 떠나서 저녁에 도착할 수 없으므로 부득불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에서 밤을 보내어야 하며, 만약 바람이 거칠기라도 하면 또한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른바 연화도니 욕지도니 하는 섬들은 바로 경상도 우수영의 연대(煙臺)와 서로 탁 트여서 아무런 장애물 없이 서로 바라볼 수가 있는바 오고 가는 적의 배들을 하나하나 그 숫자까지 셀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도의 적들이 삼도와 선산도를 지나서 고금도를 범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들이닥치게 되지만 대마도의 적들이 연화도와 욕지도를 지나서 남해 등지를 침범할 경우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발각되는 것입니다.
다만 대마도의 적이 곧장 부산(釜山)으로 치닫게 될 경우 만약 정동풍(正東風)을 타게 되면 단숨에 부산에 이를 수가 있는데, 부산이 의지하여 형세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우수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수영은 대마도와 더불어 향배(向背)의 형세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바람의 순역(順逆) 또한 이를 따라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 지역은 적의 침입을 받는 문간이 되므로 응당 주사대장(舟師大將)을 부산에 설치하고 남는 군사를 나누어 주어서 견내량(見乃梁)의 어귀를 틀어막고 고금도의 전면에 웅거(雄據)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김세렴(金世濂)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좌수사(左水使)가 매양 3월에 부산에 입방(入防)할 때는 이를 일러 풍화(風和)라고 하고, 8월 이후에 입방할 때는 이를 일러 풍파(風罷)라고 합니다. 그런데 방어영이나 통제영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사흘 일정이 되는바 적들이 만약 순풍을 타고 오게 되면 이것이 우리 배에는 역풍(逆風)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7포(浦)가 부산에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중 4포가 수영(水營)으로 이입(移入)되어서 부산의 모양이 날로 초라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쪽 지역에 아무런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어떤 분쟁이라도 발생한다면 그때에는 나라가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적이 만약 동래로 진출하려고 한다면 필시 몰운대(沒雲臺)와 초량항(草梁項)을 경유하게 될 것이고 진주, 순천(順天), 흥양(興陽) 등지로 나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가덕도(加德島)의 앞바다를 거치게 될 것인바, 가덕도와 다대포(多大浦)에서 부산까지는 하루 일정이고 통영(統營)까지는 이틀 일정입니다. 그러므로 통제사는 바다에서 싸우고 병사(兵使)는 육지의 해안에서 싸우면서 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서 적이 뭍으로 오르지 못하도록 한다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펴보건대, 일본은 그 지형이 마치 ‘사람 인(人)’ 자와 같이 생겼는데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어서 동해와 남해의 두 바다가 모두 왜선(倭船)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동해쪽은 예로부터 변방의 근심이 없었다. 그리고 저들의 비전(肥前)과 살마(薩摩) 등의 주(州)는 우리나라의 호남과 영남의 남단(南端)과 마주 대하고 있으며, 그중에도 살마는 제주(濟州)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이곳은 파도가 매우 심하고 섬을 둘러싼 모든 곳이 석벽(石壁)을 이루고 있어서 배를 댈 수가 없으며, 다만 개천의 포구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가 있으나 이 또한 방보(防堡)가 매우 엄해서 범접하기가 역시 어려운 것이다.
조신(潮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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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석(潮汐)의 시각(時刻)에 대해서는 여양공(余襄公)의 설이 자세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면(四面)의 바다들이 중국쪽에서 보면 모두 하나의 동쪽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쪽 바다 중에서도 그 사방이 각각 서로 같지가 않은 것이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이르기를,
세 마리 토끼와 세 마리 용의 물이요 / 三兎三龍水
세 마리 뱀과 한 마리 말의 때로구나 / 三蛇一馬時
양이 세 마리에 원숭이가 또 두 마리이니 / 羊三猿亦二
달빛 없는 월말 월초에도 또한 이와 같아라 / 月黑復如斯
하였다.
이는 대저 밀물이 극도로 창만(漲滿)할 때가 매달 1일의 묘초(卯初), 2일의 묘중(卯中), 3일의 묘말(卯末)과 4일의 진초(辰初), 5일의 진중(辰中), 6일의 진말(辰末)과 7일의 사초(巳初), 8일의 사중(巳中), 9일의 사말(巳末)과 10일의 오중(午中)과 11일의 미초(未初), 12일의 미중(未中), 13일의 미말(未末)과 14일의 신시(申時) 상반(上半) 및 15일의 신시 하반(下半)이 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런데 밀물이 묘시(卯時)에 들어오면 썰물이 유시(酉時)에 나가고, 밀물이 진시(辰時)에 들어오면 썰물은 술시(戌時)에 나가게 되는바, 나머지는 모두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시(詩)는 곧 조강(祖江) 가에서 지은 것이니, 바로 조강 근처의 조석이 모두 이 시간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석(潮汐)이 호서(湖西)로 내려가면 경기(京畿)보다 조금 빨라지고, 호남은 호서보다도 조금 빨라지는데, 우리나라는 이처럼 서남 해상에서 조석이 발생하지만 영암(靈巖)의 갈두산(葛頭山) 동쪽에 이르면 차이가 생기고 영남의 김해에 이르면 더욱 미약해지게 되며, 그러다가 울산 이북의 동해쪽으로 가게 되면 드디어 완전히 없어지고 만다.
《해교지(海嶠志)》에, 조석은 달의 차고 기우는 데 따르는 것인바 합삭(合朔)이 지난 사흘에 월명(月明)이 나타나면 조수(潮水)가 장대해지고 보름이 지난 사흘에 월백(月魄)이 보이면 석수(汐水)가 미약해진다고 하였다. 해마다 중춘(仲春)에 그믐이 되어 물이 늘어나면 석수가 미약해지고 중추(仲秋)에 달이 밝고 강물이 줄어들면 조석이 배증(倍增)하였다가 대한(大寒)이 되면 감소하고 대서(大暑)가 되면 미약해지는데 이와 같이 음양의 소장(消長)이 그 시기를 잃지 않는바, 그러므로 조신(潮汛 조석(潮汐))은 곧 조신(潮信 조수의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매월 13일과 27일을 수기(水起)라고 하는데 이것이 대신(大汛)으로서 각각 7일씩이며, 5일과 20일을 하안(下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소신(小汛)으로서 또한 각각 7일씩이다. 그러나 날씨가 오래 맑으면 비록 대신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길지가 않다. 중국의 진강(鎭江)에서 대해(大海)까지가 500리인데 18일 진시에 조수가 이르며, 절강(浙江)에서 대해까지는 300리인데 18일 축시에 조수가 이른다. 조석의 크고 작음은 달의 변화를 따르는 것이니 달이 높으면 조석이 작고 달이 낮으면 조석이 크다.
고려 사람들의 논의에 의하면, 천지의 기운은 한순간이라도 멈추는 일이 없는바 그것이 소잔(消殘)하는 때는 곧 그것이 휴식하는 때로서, 이는 마치 음기(陰氣)가 생기기 시작하는 구괘(姤卦)의 5월과 양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복괘(復卦)의 11월을 따라서 건곤(乾坤)이 이에 호응하여 변화하는 것과 같이 바닷가의 조석 현상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자시(子時)와 오시(午時)가 각각 평형을 이루는 때가 되면 이것이 곧 조수가 지극히 성한 때이지만 이는 또한 바로 지극히 소잔하는 때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겨우 그 자시나 오시의 반을 지나게 되면 해중(海中)의 조석이 생기기 시작하는바 이와 같이 조석이 자시에 생겨서 오시에 극도에 이르고 오시에 생겨서 자시에 극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 생길 때는 매우 미약하고 그 오는 곳이 매우 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를 깨닫지 못하다가 묘시나 유시에 이르게 되면 그 이후부터 성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묘시나 유시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이것은 하루 가운데의 작은 건곤의 이치이며 하루 가운데의 작은 궁진(窮盡)과 회복(回復)의 순환이라고 한다.
그런데 살펴보면 포구나 항구로 들어오는 조석(潮汐)이 본래 먼 바깥의 대해(大海)로부터 시작해서 들어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물러가는 것 또한 먼 바깥의 대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대저 조석이 하루 동안에 두 번씩 들어오고 두 번씩 물러가고 하는데 그것이 만일 지극히 먼 곳으로부터 오고 가고 하는 것이라면 열두 시간 동안에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왕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썰물이 빠져나간 뒤에 바닷가에 드러나는 육지의 거리를 가지고 이를 계산해 본다고 하더라도 12, 3리 혹은 15리로서 그 들어왔다가 나가는 거리가 많아야 15리 정도에 불과하다. 대저 그것이 불과 얼마 안 되는 사이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으로서 그 속에서 서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그처럼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포구(浦口)의 조수가 밀려 들어오면서 해중(海中)의 조수는 이미 물러 나가고 해중의 조수가 밀려 들어오면서 포구의 조수는 이미 물러 나가는바, 이와 같이 포구의 물러 나가는 조수가 곧 해중의 밀려 들어오는 조수인 것이다. 그러다가 가로막히는 것이 있으면 더 이상 진퇴를 하지 못하고 잠시 머물면서 물머리를 돌렸다가 다시 포구를 향해 진입한다. 이처럼 조수가 밀려들 때면 바닷가의 게나 바다 동물들의 웅덩이에 물이 차서 넘치는데 그러다가 조수가 물러가고 나면 바다 동물들의 웅덩이에 찼던 물들이 차츰 졸아들어 말라 버린다. 그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샘에서도 이와 같은 조석의 현상이 가능하고 심지어 연적(硯滴)의 벼룻물에서도 이러한 조석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서쪽 바다의 연안이 수천 리가 되는데 삼토(三兎)와 삼룡(三龍)의 조수로 말하면 늦고 빠른 차이는 있지만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국의 절강(浙江)과 진강(鎭江)은 서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그 시간은 축시에서 진시까지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나며, 그리고 화주초(火州草)의 이동(以東)은 조수가 있고 그 이서(以西)는 조수가 없다. 그리고 제주(濟州)는 한쪽은 조수가 있으나 미약하고 한쪽은 조수가 없다.
이와 같이 조수라는 것이 더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또 들어오는 시간이나 나가는 시간이 각각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동북의 바다 사해(沙海)가 하루에 한 번씩 조수가 드나든다거나 먼 외방의 지역들이 하루에 일곱 번씩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난다고 하는 것 또한 괴이하다고 할 것이 없다
묘시(卯時) 오전5시-7시 유시(酉時)오후5-7시 진시(辰時)오전 7-9시 술시(戌時)오후 7-9시
호남(湖南)의 산성(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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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이 쓴 《전라도산성도(全羅道山城圖)》의 후서(後敍)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이 무군사(撫軍司)의 당상(堂上)으로서 전라도 도내의 산성(山城)들을 둘러보았던바, 전주(全州), 순창(淳昌), 고산(高山), 고부(古阜), 보성(寶城) 등은 다만 옛날의 자취만 남아 있으며, 능성(綾城), 남평(南平), 순천(順天), 부유현(富有縣) 등은 천정(泉井)이 적은 까닭으로 정폐(停廢)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순천(順天)과 광주(光州)는 지금 비로소 그 터를 잡기는 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성을 쌓지 못하고 있고, 여산(礪山)은 비록 성을 수축(修築)하기는 하였으나 그 형세가 매우 평범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간혹 둘러본 것이라도 생략하고 다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중에서 담양(潭陽), 동복(同福), 나주(羅州), 강진(康津), 정읍(井邑), 남평(南平) 등지에 대해서만 그 형지(形止)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아울러 관심을 갖고 물어보고 들은 사항들을 여기에 덧붙여 적었습니다. 산성의 설치에 대해서는 전일의 역사에 그에 대한 기록들이 보이지 않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군현에는 곳곳마다 다들 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모두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아서 그 성세(城勢)가 험준(險峻)하므로, 우리측에서 이를 지키는 데 굳이 옹청(甕聽)이나 풍선(風扇)을 설치할 필요가 없고 노대(弩臺)나 노대(露臺)를 건설할 필요가 없으며, 지삽(地澁)이나 추제(搊蹄)를 팔 필요가 없고 암문(暗門)이나 당거(撞車)를 만들 필요가 없는바, 적들이 운제(雲梯)나 비루(飛樓)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평지에서 성을 지키는 경우와 비교를 한다면 그 효과가 만 배나 될 것입니다.
지금 이들 여섯 고을의 성 중에서 요해처(要害處)로 말한다면 교룡(蛟龍)이 제일이고 금성(錦城)이 그다음이며, 입암(笠巖), 금성(金城), 옹성(甕城), 수인(修因)이 그다음이 됩니다. 그런데 교룡산성(蛟龍山城)은 두 남도(南道)의 병목을 걸터타고 앉아서 삼로(三路)가 서로 통하는 요충을 제압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거대한 도적이라고 하더라도 기필코 감히 경솔하게 내지(內地)로 침입하여 우리의 후미(後尾)가 밟히게 되는 우환을 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 체찰사(體察使)의 직분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남원(南原)의 교룡산성은 그 산세가 어떤 조종(祖宗)이 없이 그냥 들판에 우뚝 치솟아서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북쪽의 것을 밀덕(密德)이라 하고 남쪽의 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는바, 이들 산을 덮어서 성을 만들었으며 그 성이 모두 석축(石築)으로 이루어져서 우리 태조께서 일찍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과 싸워서 이를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
동복의 옹성(甕城)은 돌길이 이를 감아 돌아서 겨우 사람이 통할 수 있는바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천험(天險)의 성이라 하겠습니다.
담양의 금성(金城)은 산등성마루로 길이 나서 수없이 구부러지는 실 같은 길이 6, 7리를 꾸불꾸불 돌아나가는바 이는 참으로 형세의 땅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주(羅州)의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삼면(三面)이 모두 험준한 데다 네 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북쪽의 것을 정녕(定寧)이라 하고 남쪽의 것을 다복(多福)이라 하며 서쪽의 것을 오도(悟道)라 하고 동쪽의 것을 노적(露積)이라 하는데, 정녕이 주봉(主峯)이 되고 동서남의 세 봉우리가 그 앞에서 공읍(拱揖)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동북 두 봉우리의 지맥(支脈)들이 이를 감싸 안고 있는데 그 성 마을이 가히 군사를 감추어 둘 만한 곳입니다.
강진의 수인산성(修因山城)은 험하고 좁은 산길이 빙 둘러 있고 지세가 협착하며, 동문(東門) 밖에는 한 봉우리가 벽처럼 치솟아 있는데 이를 물희봉(勿喜峯)이라고 합니다. 또 단강(斷岡)이 있는데 네 모서리가 마치 칼로 자른 듯해서 쉽게 기어오를 수가 없습니다. 정읍의 입암산성(笠巖山城)은 산세가 고준(高峻)하고 산정(山頂)이 가운데가 우묵하니 함몰하여 사방이 둘리고 중앙이 널찍한데 이와 같은 지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았는바 그것이 마치 마소의 여물통과 같이 생겼으며, 붕상(棚上)에다 누각(樓閣)을 세워서 바깥에서 이를 쳐다보면 그것이 은은하면서도 엄숙해서 그 내부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형이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기로 말하면 이 성이 금성(金城)에 미치지 못하지만 형세로 말하면 그보다도 우월합니다.”
숙종 31년(1705)에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남원의 교룡산성은 요충지(要衝地)에 위치한 성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옛 신하 권율(權慄)이 도원수로 있으면서 비로소 여기에 성을 쌓았는바 이 성이 바로 읍성(邑城)과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의 문집을 얻어 보았더니 교룡산성이 삼남(三南) 지방의 요해처(要害處)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믿을 만하였기에 신이 이곳에 재임할 때 이를 수축(修築)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체직되어 돌아온 뒤에 들으니 이미 축성(築城)을 마쳤다고 하니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남평(南平) : 남원(南原)의 잘못인 것 같다. 이 뒤의 설명에서 이들 여섯 고을 중 다른 다섯 고을에 대한 성들은 나오는데 남평에 대한 것만 나오지 않으며 그 대신 남원의 교룡산성이 거듭 나오기 때문이다.
옹청(甕聽) : 성 밑 같은 데를 뚫고 들어오는 적의 지하도 굴착을 감청(監聽)하던 장치이다.
풍선(風扇) : 풍선거(風扇車)를 가리킨다. 석회(石灰)를 날리거나 화구(火毬)의 연기를 뿜어서 적을 공격하던 병기의 일종이다.
지삽(地澁) : 쇠나 나무 같은 것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서 강물의 얕은 곳에 설치하여 적의 인마(人馬)의 도강(渡江)을 방해하던 장치이다.
추제(搊蹄) : 올무 같은 것을 설치해서 적의 인마의 진행을 방해하던 장치인 듯하다.
암문(暗門) : 성 밖의 적에 대한 불시의 습격을 위하여 성문에 뚫어 두었던 비밀 출입구를 일컫는다.
당거(撞車) : 성의 공격이나 또는 방어에 사용하던 병기(兵器)로서, 충차(衝車)를 일컫는다.
비루(飛樓) : 성채의 공격에 사용하던 누거(樓車)를 일컫는다.
동복군읍지(同福郡邑誌)》(1899년 간행)
산천(山川)
백아산(白鵝山) : 현(縣)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부(潭陽府) 옥천산(玉泉山)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옥과현(玉果縣)의 경계인 현서현(懸西峴)을 지나쳐 온다.
옹성산(瓮城山) : 현의 북쪽에 있다. 백아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곡성현(谷城縣)의 경계인 송현(松峴)을 지나쳐 온다. 모양이 큰 옹(甕)과 같아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모후산(母后山) : 본래 이름은 나복(蘿 )이다. 현 동쪽 15리에 있다. 송현에서 남쪽으로 순천부(順天府)의 경계인 운알령(雲 嶺)을 지나쳐 온다.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수려하다. 고려 공민왕(恭愍王:1351∼1374)이 난(亂)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는데, 그 덕(德)이 모후(母后)와 같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안양산(安陽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담양부(潭陽府) 옥천산(玉泉山)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창평현(昌平縣)을 거치고 또 남으로 광주목(光州牧)의 경계인 서석산(瑞石山)의 장불령(長佛嶺)을 지나쳐 온다.
경산(景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안양산(安陽山) 남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어 화순현(和順縣)과 경계를 접한다.
구봉산(九峰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경산(景山)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화순현(和順縣)의 경계인 주로현(周路峴)에 이른다. 봉우리가 9개가 있기 때문에 구봉산이라 한다.
천운산(天雲山) : 현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구봉산(九峰山)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능주목(綾州牧) 경계에 이르며, 서쪽으로 화순의 경계와 접한다.
천봉산(天鳳山)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천운산(天雲山)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능주(綾州)의 경계인 저점(猪岾)에 이르며, 또 동쪽으로 보성군(寶城郡)과의 경계인 일알령(日 嶺)에 이른다.
이존천(梨存川) : 백아산(白鵝山)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나와 일대를 돌고 남으로 굽이굽이 흐른다. 별명(別名)이 있는데, 즉 물염연(勿染淵), 창랑연(滄浪淵), 적벽연(赤壁淵), 고소연(姑蘇淵), 봉황연(鳳凰淵), 별학연(別鶴淵)으로 칭한다. 혹은 깊고 혹은 얕으며, 보성군(寶城郡)의 죽천(竹川)으로 합해진다.
누정(樓亭)
응취루(凝翠樓) :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이다. 성화(成化) 갑오(甲午 : 1474)에 현감 유의(柳誼)가 세웠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현감 황진(黃進)이 이곳에 올라 군사를 모았다. 임억령(林億齡)의 시(詩)에
재덕 없는 벼슬아치 낯뜨거운 이 몸
강남고을 찾아들어 구름 속에 누웠노라
주먹보다 큰 동산의 밤은 노모께 드리고
한 자 넘는 개울 물고기 임금님께 진상코자
숲이 깊어 황혼에 산도깨비가 나오고
궁벽한 강가에는 낮에도 원숭이 소리 들린다
성남에 사는 최대처(崔大處)가 이따금 찾아와
해학과 취한 웃음 항상 듣고 즐기노라
라고 하였다.
물염정(勿染亭)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송정순(宋挺筍)이 건립하여 외손인 나무송(羅茂松)에게 전해 주었다. 나무송(羅茂松)의 시에
두어칸 작은 집 동쪽 언덕에 지었으니
문 앞은 경관 좋아 사안 도연명의 고을이라
강 비가 밤에 오니 고깃배는 젖었는데
아침 골짜기 구름 걷히니 산봉우리 높아라
아이들은 낙엽 모아 붉은 밤을 굽고
아내는 국화 따다 술에 띄우네
일찍이 숲 속이 이다지 즐거운 줄 알았다면
어찌하여 고된 벼슬살이 매달렸 으랴
라고 하였다.
형승(形勝)
적벽(赤壁) : 옹성(甕城)의 서쪽 기슭에 있으며 돌의 색깔이 약간 붉다. 벼랑이 천변(川邊)에 서 있는 데, 높이가 수 백장이나 된다. 임진년에 현감 황진(黃進)이 적벽 아래 모래 언덕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물염석벽(勿染石壁) : 송정순(宋挺筍)의 정자가 물가에 있는데, 석벽(石壁)이 병풍처럼 한 면에 도열해 있다.]
방리(坊里)
읍내면(邑內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사방(四方) 10리로, 23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내남면(內南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남쪽 30리에 있는데, 18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외남면(外南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14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내서면(內西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서쪽 21리에 있는데, 11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외서면(外西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서북쪽 30리에 있는데, 10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내북면(內北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북쪽 30리에 있는데, 13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외북면(外北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북쪽 40리에 있는데, 15마을을 나누어 두었다.
호구(戶口)
1,346호, 인구 4,644명, 남자 2,496명, 여자 2,148명 104개마을 1마을당45명 1집당3.5명 1마을전체13집정도 를가지고 마을을이루고 성을쌓고하는가 농사를위주로하는곳에 노동력은필수 집수와인구수 도 엇박자 교열을얼마나했는지
조령성(鳥嶺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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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聞慶)의 조령성은 숙종 34년(1708)에 돌로 쌓은 것인데 세 곳에 성이 있다. 그중 하나는 영마루에 있는데 호서와 영남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하나는 응암(鷹巖)에 있는데 이를 일러 중성(中城)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이곳에는 군량미 창고가 있다. 이들 세 성이 모두 대로(大路)로 통하고 있는데 영마루에 있는 성을 조령관(鳥嶺關)이라 하고 중성을 조동관(鳥東關)이라 하고 초곡에 있는 성을 주흘관(主屹關)이라 하는바 수구문(水口門)과 홍예문(虹霓門)을 두었다.
통영(統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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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년(1629)에 홍호(洪鎬)가 상소하기를, “통영은 그 자량(資糧)과 기계(器械)가 제진(諸鎭) 중에 으뜸임에도 성책(城柵)이 없어서 적이 만약 병력을 숨긴 채 기습해 오면 성이 내부로부터 무너져 버릴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원(昌原)은 바로 수륙 교통의 요지로서 일본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응당 서둘러서 통영에 성책을 설치하고, 병영(兵營)은 옛날의 창원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20년(1642)에 조정이 남쪽의 문제로 걱정할 때에 홍호가 통영에 성을 쌓자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경상 감사 임담(林墰)이 아뢰기를, “고(故) 명신(名臣)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한준겸(韓浚謙) 등이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도(閑山島)의 전진(前津)에서 파수(把守)한 일로 인하여 이미 이를 조치해서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함부로 뒤흔들어서 바꿀 수는 없고 또 수장(水將)을 편의에 따라 육지로 올라오도록 해서 그에게 요행(僥倖)의 길을 열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응당 통영에 종사관(從事官)을 다시 설치해서 그로 하여금 제압하게 하소서.” 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다.
관동(關東)의 요충(要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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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地理誌)에 이르기를, “대관령(大關嶺)은 강릉(江陵)의 서쪽 40리에 있다. 이것이 함경도의 검산(劍山) 분수령(分水嶺)에서 시작하여 본도(本道)로 들어와서 철령(鐵嶺)과 추지령(楸池嶺) 및 금강산(金剛山)이 되고, 또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미시파령(彌時坡嶺), 설악산(雪嶽山), 소동라령(所冬羅嶺),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여기에 와서 이 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재가 천 리에 뻗쳐 있어서 옛날에 이곳에 관소(關所)를 두고 목책(木柵)을 설치했는데 강릉 지역의 여러 고을들을 관동(關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철령 위에 철관(鐵關)이 있는데 고려 때에 이곳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 이름을 철관이라 하였으며, 좌우로 산줄기를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지금 그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하였다.
이곡(李穀)의 《동유록(東遊錄)》에 이르기를, “철령은 우리나라 동쪽의 요해처(要害處)인데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만 사람이 이를 열지 못한다’ 한 것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의 진관(鎭管)이 충주(忠州)와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회양(淮陽)은 이 길의 요충지에 처해 있어서 안으로는 양주(楊州)와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고 밖으로는 철관(鐵關)을 가로막고 있으며, 강릉(江陵)은 지금 바닷가의 고을로서 동해(東海)를 방비하고 있다.” 하였다.
삼방영(三防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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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英宗) 7년(1731)에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삼방령(三防嶺)은 거의 백 리에 가까운 긴 골짜기로서 일찍이 이곳을 왕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드디어 주막(酒幕)이 들어서게 되고 그 잔도(棧道)가 보수되자 개인 여행객이나 장사치들이 질러가는 빠른 길을 취택해서 철령(鐵嶺)을 버리고 이 길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방(關防)의 일로 말하면 이와 같이 갈림길이 있는 것은 참으로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으니, 청컨대 주막을 철거하고 그 길을 폐하여 없애 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울릉도(鬱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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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울진현(蔚珍縣) 동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본의 은기주(隱岐州)와 서로 가깝다. 섬에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하늘에 우뚝 치솟아 있는데 그중 남쪽의 봉우리가 조금 낮다. 날씨가 맑으면 산 위의 나무들이나 산기슭의 모래톱이 역력히 바라다보이며 바람이 순조로우면 이틀이면 너끈히 이 섬에 도착할 수 있다.
땅이 사방 백 리인데 시호(柴胡), 고본(藁本), 석남(石楠), 등초(藤草) 같은 각종 향기로운 초목들이 생산되며 아름드리 노죽(蘆竹)이 허다한데 노실(蘆實)과 도핵(桃核) 중에 큰 것은 술잔을 만들 만한 것도 있다.
산에 올라가면 고양이가 있는데 그 크기가 개만 한 것이 있고 쥐가 고양이만큼이나 크다. 바다에는 큰 짐승이 있는바 마치 소처럼 생겼으나 눈이 빨갛고 뿔은 없으며 떼를 지어서 바닷가에 누워 있다가 혼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해코지를 하지만 사람들이 많으면 바다로 달아나 버리는데, 이름을 가지(可之)라고 한다.
이 섬은 본래 우산국(于山國)이었는데 신라가 이들이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도적질을 할까 염려되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쓸어서 데리고 나온 뒤 이곳을 빈 땅으로 남겨 두었다. 그 뒤 고려 현종 임술년(1022, 현종13)에 도민(島民)들이 여진(女眞)의 노략질을 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를 피해 도망왔으므로 이들을 예주(禮州)에 살게 하고 호적에 편입해 주었으며, 덕종 임신년(1032, 덕종1)에는 도주(島主)가 아들 부어잉다(夫於仍多)를 보내어서 조공을 왔다. 인종 기미년(1139, 인종17)에는 명주도(溟州道)의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이 섬에 들어가서 과핵(果核)과 목엽(木葉) 등 이상한 것들을 채취해 와서 바쳤다.
그 뒤 의종 기묘년(1159, 의종13)에 명주 감창(溟州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이를 가서 보게 하고 다시 복현(復縣)시키려고 하였는데, 그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에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가 1만여 보(步)이고 서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 5천여 보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여 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이 있던 자리 일곱 군데가 있었는데 깨어진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더러 석불(石佛), 석탑(石塔), 철종(鐵鍾) 같은 것도 있으나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니, 마침내 이에 대한 논의가 중지되고 말았다. 그 뒤에 최충헌(崔忠獻)이, 이 섬이 토양이 기름지고 진귀(珍貴)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서 본군(本郡)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 섬에 채우려고 하였으나 여러 차례 풍랑에 밀려서 돌아오고 말았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태종(太宗)이 바닷가의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 도망하여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거듭 삼척(三陟)의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로 삼아서 이들을 쇄출(刷出)해 왔다. 세종 20년(1438)에는 고을 사람 남호(南顥)를 보내어 수백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도망자들을 수색해서 김환(金丸) 등 70여 인을 모조리 잡아가지고 돌아오니 드디어 이곳이 공지(空地)가 되고 말았다. 성종 2년(1471)에는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대죽(大竹)과 대복어(大鰒魚) 등을 채취해 왔다.
광해군 7년(1615)에는 왜인(倭人)들이 배 두 척을 보내와서 의죽도(礒竹島)의 모양과 형세를 탐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동래 부사 박경업(朴慶業)을 시켜서 답서를 보내기를, “본래의 분의를 망각하고 외람되게도 국경을 넘어와서 남의 땅을 엿본다는 것은 이웃 나라로서 우호의 도리가 아니다. 이른바 의죽도라고 하는 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울릉도로서 지금은 비록 폐기(廢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찌 남의 나라 사람들이 불법으로 점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숙종 19년(1693)에 왜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물론 울릉도가 귀국의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임진년 이후에 일본인들이 점거했다는 것은 귀국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하니, 수역(首譯) 박재흥(朴再興)이 말하기를, “임진년의 난병(亂兵)들이 점거했던 곳은 비단 울릉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봉유설》의 말은 인용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였다. 그 뒤 28년(1702)에 삼척 영장 이준명(李浚明)이 이 섬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이에 대한 도형(圖形)과 자단향(紫檀香), 청죽(靑竹), 석간주(石間朱), 어피(魚皮) 등의 물건을 바쳤다.
강화부(江華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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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燕尾亭)은 월곶진(月串鎭)에 있는데 예전에는 무장(武將) 황형(黃衡)의 별장(別莊)이었다가 지금은 진(鎭)에 속하게 되었는바 영종 갑자년(1744, 영조20)에 유수 김시혁(金始㷜)이 이를 다시 짓고 그 기문을 썼다. 정자의 동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이름을 유한(留漢)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강물이 남쪽으로는 갑곶진(甲串鎭)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승천포(昇天浦)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이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는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기 때문에 그 이름을 연미정이라고 한 것이다.
강선루(降仙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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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루는 성천부(成川府)의 객관 서쪽 비류강(沸流江)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편액은 명나라 한림학사 미만종(米萬鍾)의 글씨이다. 모두 2백여 칸이 되는데 누관(樓觀)의 장대함이나 강산(江山)의 수려함은 중국에도 비교할 만한 것이 드물다. 숙종 정유년(1717, 숙종43) 이후에 중건하고 영종(英宗) 때에 또다시 중건하였다.
북계(北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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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지(東京志)》에 이르기를, “신라 때에 국도(國都)의 북방이 비어서 허(虛)하다 하여 여자들이 머리 뒤에 결계(結髻)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북계(北髻 쪽 찐 머리)라 하였는바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백제는 부인들의 옷이 도포와 비슷하였는데 소매가 약간 컸다. 미혼으로 집에 있는 자는 변발(編髮)을 하여 이를 머리 뒤에다 틀어 감았는데 한 가닥을 늘어뜨려 장식을 하였으며, 출가한 자는 이를 나누어서 두 가닥으로 하였다.” 하였다.
동경지(東京志) : 편자 미상의 경주(慶州) 읍지(邑誌)인데, 1669년에 경주 부윤으로 부임한 민주면(閔周冕)이 향중(鄕中) 인사 이채(李採) 등과 함께 증보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라 하였으며, 1933년에 최준(崔浚)이 최남선(崔南善)ㆍ정인보(鄭寅普) 등의 자문을 받아 다시 보완하여 《동경통지(東京通志)》라 하였다.
산악(山嶽), 해양(海洋), 천독(川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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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으로 말하면 남쪽에는 남원(南原)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중앙에는 도성(都城)에 삼각산(三角山)이 있고, 서쪽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송악산(松嶽山)이 있고, 북쪽에는 정평(定平)에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 해양으로 말하면 양양(襄陽)에 동해(東海)가 있고, 나주(羅州)에 남해(南海)가 있고, 풍천(豐川)에 서해(西海)가 있다.
○ 천독으로 말하면 남쪽에는 공주(公州)에 웅진(熊津)이 있고 양산(梁山)에 가야진(伽倻津)이 있으며, 중앙에는 도성의 남쪽에 한강(漢江)이 있고, 서쪽에는 장단(長湍)에 덕진(德津)이 있고 평양(平壤)에 평양강(平壤江)이 있고 의주(義州)에 압록강(鴨綠江)이 있으며, 북쪽에는 경원(慶源)에 두만강(豆滿江)이 있다
명산(名山)과 대천(大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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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는 원주(原州)에 치악산(雉嶽山)이 있고, 남쪽에는 공주(公州)에 계룡산(鷄龍山)이 있고 단양(丹陽)에 죽령(竹嶺)이 있고 울산(蔚山)에 궁불산(弓佛山)이 있고 문경(聞慶)에 주흘산(主屹山)이 있고 나주(羅州)에 금성산(錦城山)이 있으며, 중앙에는 도성 안 남쪽에 목멱산(木覓山)이 있고, 서쪽에는 장단(長湍)에 오관산(五冠山)이 있고 해주(海州)에 우이산(牛耳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적성(積城)에 감악산(紺嶽山)이 있고 회양(淮陽)에 의관령(義館嶺)이 있다.
큰 하천으로는 남쪽으로 충주(忠州)에 양진명소(楊津溟所)가 있고 양주(楊州)에 양진(楊津 지금의 광나루)이 있으며, 서쪽으로 장연(長淵)에 장산곶(長山串)이 있고 안악(安岳)에 아사진 송곶(阿斯津松串)이 있고 안주(安州)에 청천강(淸川江)이 있고 평양에 구진익수(九津溺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회양에 덕진명소(德津溟所)가 있고 영흥(永興)에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몽암집 제4권 / 기(記) 바다 유람기〔浮海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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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1756, 영조32) 5월 임오일에 이윤지(李胤之 이윤영(李胤永))와 바다 유람을 떠났는데 그의 아우 이건지(李健之 이운영(李運永))와 종제 이구지(李懼之 이희영(李喜永))가 함께하였다. 양화나루를 건너 웅월촌(熊月村)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성령(星嶺)에 오르니 서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저녁에 인천(仁川)에서 묵었다.
계미일 낮에 인천 고을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해구(海口)에 도착하니 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밀물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아서 잠시 바위 가에서 서성거렸다. 바위에는 굴 껍데기가 많이 붙어 있었는데, 벌집처럼 많은 구멍들이 있었다. 해안 북쪽에는 옛날 제물포(濟物浦)의 진영이 있었는데 부서진 기와와 폐허가 된 성가퀴에 초목이 무성하였다.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니 바다에 섬들이 점처럼 이어져 있고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밀물이 들어와 바위가 반쯤 잠기자 뱃사공이 배에 오르라고 하였다. 이때에 하늘에는 미풍조차 없고 바다에는 물결 한 조각도 일지 않으니 하늘과 바다가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여 마치 거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배를 타고 10여 리를 가서 자연도(紫煙島)에 정박하였다. 백운산(白雲山)이 그 북쪽에 있고 월미도(月尾島)가 포구 뒤쪽에 보이는데 그 남쪽을 지나가면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거의 서로 들릴 만큼 가깝다. 땅은 비옥하고 백성은 많으며 산천이 환히 트여 집을 짓고 살 만하다. 국가에서 이곳에 영종방영(永宗防營)을 설치하여 교화(喬華)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문 위에 누(樓)가 있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이름을 태평루(太平樓)라고 하였다. 태평루에 올라가니 저녁 하늘은 어둑어둑하고 가는 비가 파도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밤에 마을에 있는 민가에서 묵고 용류도(龍流島)로 가는 길을 물으니 서남쪽으로 20리를 가라고 하였다. 삼목포(杉木浦)에 이르니 포구가 안팎으로 조수(潮水)를 받아서 밀물이 들어오면 물이 차서 바다가 되고 썰물이 빠지면 겨우 소를 타고 포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갯벌의 깊이가 한 자가 넘고 그 길이는 10리나 되었다. 섬사람들이 전하기를 “구십구포(九十九浦)인데 소를 타고 가면 열 걸음에 아홉 번 넘어진다. 조금 기다리면 밀물이 또 들어올 것이니 수로(水路)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라고 하였다.
갑신일 아침에 태평루 아래에서 배를 띄워 이른 조수를 타고 서쪽으로 가니,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뜨는 해를 보지 못하였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가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와 윤지가 일어나서 뱃전에 서니 길게 불어오는 바람이 소매를 스치고 푸른 물결이 허공에 솟아올랐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아득하여 경쇠를 치던 양(襄)의 유풍(遺風)이 생각났다. 한참 있으니 가슴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보니 마니산(摩尼山) 등 여러 산이 반쯤 물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붓끝이 뾰족하게 드러난 것 같고 손가락을 나란히 세워 놓은 것 같았으며, 또 큰 눈이 천지에 가득 쌓였는데 몇 개의 새벽별이 꺼지지 않고 깜박거리는 것 같았다. 윤지가 나에게 부채를 달라고 하더니 신기루와 낙조(落照)를 그리고는 “오늘 날이 흐려 이 두 가지를 잃었으니 붓으로 보충해야겠네.” 하였다. 뱃길로 약 3, 4십 리를 가서 팔산도(八山島)를 지나 남쪽으로 가니 갑자기 안개가 옅게 일어서 햇빛이 안개 사이로 새어 나오는데 앞에 몇 송이의 연꽃이 점차 구름을 걷고 나오는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물으니, 바로 용류도라고 하였다. 푸른 절벽과 붉은 해안이 영롱하고 명윤(明潤)하고 섬 주위를 띠 두른 것 같은 백사장이 그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파도 가운데 꽂아 놓은 것처럼 우뚝 솟아 깎아 놓은 듯 기이하게 가파른 것은 여기암(女妓巖)이라고 하는데 무위도(無爲島) 등 여러 섬과 어울려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옆으로 기울어지고 끊어졌다 이어지며 원근의 형세가 다른 것이 마치 무희(舞姬)의 소매가 허공에 펼쳐져 꺾였다 돌아서 합쳐지고 구부러져서 서로 감싸는 것 같았다. 윤지가 말하기를 “육지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이런 기이한 광경을 보지 못할 테니, 그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 멀리서 보는 것에 비해 어떠할지 모르겠네.”라고 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기이한 광경에 대해 떠들고 있는데 물이 이미 빠져서 마침내 배를 세우고 밀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멀리 있는 배를 보니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마치 머리카락 하나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 같더니 홀연히 또 날아가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풍(狂風)이 홀연히 일어나고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득 메워 눈 깜작할 사이에 용류도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뱃사공이 말하기를 “역풍이 불어서 조수를 가르고 나아갈 수 없으니 자연도로 돌아가 정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힌 것은 인력으로 조물주의 조화를 빼앗은 것인가?” 하니, 윤지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기를 “그 또한 우연일 뿐이네.” 하였다. 마침내 돛을 올리고 배를 돌리니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고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옷과 갓이 기름으로 목욕한 것 같았으며 돛 밖은 한 걸음도 보이지 않고 배가 나는 듯이 가고 있는 것만 느껴졌다. 넓은 바다를 나는 듯이 달리니 마치 꿈속에서 구덩이에 떨어지는데 사방에는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뱃사공은 앉아서 손을 모으고 배가 가는 대로 맡기고 있는데 하늘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마침내 큰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리니 밤기운은 싸늘하고 마음은 서글퍼져 편치 않았다. 윤지가 좋은 향 몇 개를 꺼내서 불을 붙여 비린내를 없앴다.
한밤중에 갑자기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는데 우렛소리가 하늘을 울리니 파도가 물러나 피하는 것 같았고, 번갯불이 파도를 비추어 고래와 교룡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 눈을 감고 한참 있으니, 천지가 개벽하기 전의 혼돈한 모습이 이러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갑자기 공중에서 은은하게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지나가던 배가 비 때문에 멈춰 있거나 혹은 섬마을이 가까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뱃사공이 큰 소리로 사람이 있는지 묻고 이곳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이렇게 서너 번 소리쳤지만 적막하기만 할 뿐 끝내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물귀신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날아가는 새소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소리도 없는데 단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서로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었다.
5경이 되자 바람이 더욱 거세지면서 밀물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소리와 기세가 빠르고 사나워서 만 마리의 말이 내달리는 듯하고 창칼이 부딪치는 듯하였는데, 배는 크지만 아무 힘이 없어 키질하고 절구질하듯 출렁거려 소라 껍데기와 다름이 없었다. 윤지가 행낭에서 거울을 꺼내서 비춰 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원래 빠져 죽는 법은 없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죽는 것은 참으로 명이 있는 것이니, 한번 배를 타고 곧바로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에 이르러 천하의 장관을 모두 구경한다면 나쁜 일이 아니지.” 하고 마침내 등불을 켜고 시를 지으며 하늘이 밝아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 편이 나올 때마다 나와 윤지가 뱃전을 두드리며 길게 읊으니 그 소리가 바다의 파도 위에 가득하였다. 만약 하백(河伯)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어찌 빙그레 웃으며 “이자들은 어리석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먼동이 틀 무렵에 갑자기 한 조각 푸른 섬이 홀연히 보이기에 자세히 보니 월미도의 행궁(行宮)이었다. 다시 돛을 달고 곧바로 10여 리를 내려가 다시 제물포 진영 앞에 배를 대고 포구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병술일에 기탄(岐灘)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자연도(紫煙島) : 영종도(永宗島)의 옛 이름이다.
경쇠를 치던 양(襄) : 양은 노(魯)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은거한 악관(樂官)이다. 공자가 “소사(少師) 양(陽)과 경쇠를 치던 양(襄)은 해도(海島)로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몽오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와 있기 때문에 해도로 들어간 양을 생각한 것이다. 《論語 微子》
형산(衡山)에 …… 것인가 : 안개가 걷혀 승경이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형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하는 산이다. 한유(韓愈)가 형산에서 지은 시에 “구름 뿜고 안개 뿌려 산허리를 감추니, 절정이 있은들 누가 다 볼 수 있으랴.……잠깐 사이에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뭇 봉우리 솟아나, 우러러보니 우뚝이 푸른 허공을 떠받치고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몽오가 현재 바다 가운데에서 해무(海霧)에 갇혀 있으므로 기도를 해서 걷히기를 빌면 걷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昌黎先生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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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이런 글을 찾아서 올리는 정성과 노력이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