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城)의 역사
우리 나라는 옛부터“성곽의 나라”라 할만큼 수많은 성터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높은 산에는 석성이 있고 낮은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서는 역사의 이끼가 낀 읍성의 성벽들을 만날 수 가 있다.
유사이래 930여 차례나 외침을 당하면서도 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호국 의지로 뭉친 선조들의 지혜로 축성한 성곽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을 지켜왔던 그 유적들은 오랜 세월 동안 훼손 방치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성곽은 언제부터 축성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록에 전해진다. 초기에는 나무기둥을 엮어 만든 목책성 이었으며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다.
인력과 경비가 많이 드는 본격적인 석축의 성곽은 3세기 이후에 등장했다. 석축 산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축성하였고 성벽은 산꼭대기에서 계곡으로 연결, 계곡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망대를 세웠다.
고려는 수많은 외침 때문에 석성 보다는 토성을 많이 쌓았다. 특히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방에 읍성을 축성했다.
우리 나라 성곽의 특징은 성주 일가족을 위해 쌓은 외국의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사시 인근의 백성들까지 성안으로 들어와 민, 관, 군이 함께 결사 항전하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인 동시에 고건축적 조형미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유산이다. 하잘것없이 보이는 성의 흔적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사적이며 문화재라는 것을 인식하여 보존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충북 단양의 "온달성"은 남한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산성으로 보고 있다. 남한강 상류 절벽을 끼고 해발 400m의 산 정상에 수직으로 쌓아 올린 온달산성 성벽의 휘어지는 곡선부분은 고구려 조형미의 극치라고 평가 받는다.
온달 성곽
해돋이로 유명한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성흥산성 사랑 나무
백제의 성곽 중 금강과 황산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여군 임천의“성흥산성”은 성벽 겉면만 석축하고 안쪽은 호를 파고 흙으로 쌓아 올렸다. 백제의 뛰어난 축성술을 보여준다.
성흔 산성
신라의 대표적인 성곽은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이다.
이 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 당시 전초기지로 삼았던 성이다. 성벽 높이가 최대 20m에 달하는 거대한 성으로 신라 성곽의 백미요, 한국산성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손꼽는다.
삼년산성(三年山城)-
신라시대 대표 산성으로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교되며
'한국의 대표적인 산성', '신라인들의 예지가 번쩍이는 곳',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초기지로 이용했던 역사적 의미' 뿐 아니라 고건축학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산성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꼽는다면 한국은 삼년산성을 꼽을 정도로 국내외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수원화성(水原華城, 경기도 수원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발전된 모양으로 축성한 수원화성은 성곽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우아하고 섬세해 한국성곽의 꽃으로 평가받았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국, 내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금성산성(金城山城, 전남 담양군 금성면 산성리)
삼국시대부터 축성된 이산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근세에는 동학군들이 이곳을 지키는 관군들과 혈전을 벌였다.
산성 축조에 대해서는 1410년(태종 10), 1597년(선조 30), 1610년(광해 2), 1653년(효종 4)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804척이며, 성 안에 9곳의 샘과 제사처인 신사(神祠)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혹은 신라말 고려초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237년(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이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이들은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
보문산성(寶文山城, 대전 중구 대사동)
대전 광역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은 대전의 중심 보문산 산정상부에 백제말기 축성한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조령산성( 조령(鳥嶺), 문경새재, 경북 문경군 문경읍)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이라 하지만 세상에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재는 새나 넘나들 수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졌고, 초점은 풀이 우거진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조령 산성
독용산성(경북성주군 금봉리)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산성, 독용산성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에 위치한 독용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인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 2.5m, 폭 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500년전 성산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 관찰사 정중휘가 개축하여, 동서남북 7개 포루,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있었으며, 동서군량고가 있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다. 군기고(軍器庫, 일제시 유물발굴)에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별장1, 승장1, 호병44호로서 산성을 방어하였다 한다. 성주군에서는 1997년부터 성곽을 복원할 계획을 세워, 훼손된 성곽의 일부와 아치만이 남아 있던 동문을 보수하여 원형으로 복원하였으며, 성내에 관아터, 사지가 산재하고 있다.
< 독용산성의 역사적 기록 >
독용산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이원정(李元楨)이 1677년에 편찬한 《경산지(京山誌)》를 통해 나타난다. 그 책에 따르면 합천과 거창의 군사가 배속되었고, 성 안에는 3개의 계곡, 객사, 군기고 등등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정중휘가 개축할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문지(東門址), 서문지, 남문지, 북문지, 동암문지(東暗門址), 서문암지, 남문암지, 수구문지(水溝門址), 동치성(東雉城), 서치성, 객사지, 군기고지, 안국사지와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비석 5기가 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에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에 공사를 마쳤다.
4문과 16암문, 성가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해미읍성(충남 서산 해미읍)
사적 제116호.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 동문인 잠양루(岑陽樓)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
여주 파사성(驪州 婆娑城,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하동북방리고성산성(河東北芳里高城山城,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 이 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1770년대까지 성이 있었다고 하나 성으로서보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운동의 항일전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학혁명은 정월봉기·3월봉기·9월봉기로 분류되는데, 그 중 9월봉기는 일본의 부당한 국권침략에 대항한 민족의 위급을 구하고자 일어난 구국항쟁이다.
9월봉기에 있어서 진주의 동학농민군 5,000명은 고성산성에 석루를 쌓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이 가진 신식무기의 위력 앞에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당시의 일본군 보고서에 나타난 것만 해도 전사자가 186명에 달하고 퇴로에서 쓰러진 자, 부상자 등도 수십명이라고 한다. 광복 후 전라·충청·강원도 지역의 유적지는 사적지로 지정되거나 또는 기념비·위령탑 등이 건립되었으나 구국항일운동의 대격전지인 이곳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 고장 출신 민영봉(閔泳鳳, 당시 진주시립도서관장), 하도종(河度鍾) 등의 발기로 뜻있는 서부 경상남도 8개 시군의 인사 70여명이 1986년 6월 25일에 고성산성 항일전적지 보존회를 조직하여 향토사가 김범수(金梵秀)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진주 동학군의 위훈을 선양하고 전몰고혼을 위한 위령탑 건립, 전적지 정화보존 등의 사업을 추진하여 오던 중 동학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기념사업회가 1995년 3월 22일고성산전적지에 동학혁명위령탑을 세웠다. 탑은 화강암석조탑으로 높이 83m이고, 비문은 고정훈이 찬하였다.
남원교룡산성(南原蛟龍山城, 설인귀성(薛仁貴城),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둘레 3,120m.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 현재 문지(門址)·수구(水口)·옹성(甕城)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의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포곡식(包曲式) 산성이다.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쌓았다고도 하며, 설인귀성(薛仁貴城)이라고도 한다.
또한, 691년(신문왕 11)에 남원소경(南原小京)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 시대 말기에 백제가 축성하였다고 추측되기도 하나, 성 안에서는 오래된 유물이 채집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 1,125보(步)이고 군창(軍倉)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도 왜구에 대비한 입보피난처(入保避難處)로서 계속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승병장 처영(處英) 등이 수축하여 남원읍성과 함께 지키고자 하였던 곳이며, 그 뒤 계속 수축과 개축을 하면서 중요한 군사요새지로 유지되었음을 성 안에 남아 있는 기적비(紀蹟碑)들이 알려주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며, 동쪽 계곡부에 수구를 두고 옆에는 옹성을 갖춘 동문터가 남아 있다. 동문은 홍예(虹蜺 : 무지개모양의 문)를 이루었으나, 그 형식은 조선시대 후기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안에는 용천사(龍泉寺)가 있는데, 조선 시대 후기에는 승려들을 성곽수호에 기여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성에서는 윤4월에 부녀자들이 성밟기를 하는데, 성밟기를 하면 장수한다는 믿음이 있다.
각산산성(角山山城,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산40번지의 3필지)
삼천포항을 서남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각산의 8부능선에 길이 242m를 돌로 쌓은 석성이다.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각산의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옛 모습대로 남아있고, 서쪽 등성이에 각산산성이 남아있다.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성과 봉화대를 만들고, 줄항터에는 구라량영의 본거지를 두어 이곳을 지켰다. 고려 말에 사량도로 영을 옮기고 난 후, 이곳이 무방비상태로 되자 왜구가 침입하여 성에 불을 질르기도 했다.
그후 각산은 봉화대가 자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봉수는 남쪽으로 대방산, 서쪽으로 곤양의 우산봉수, 북쪽으로 사천 안점봉수와 연결되었다.
웅천왜성(熊川倭城, 경남 진해시 웅천 1동)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이 축성해 수비하던 곳으로 3개의 산봉우리를 감싸며 일본식 특유의 축법을 가미한 산성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 일명 남산왜성(南山倭城)이라고 한다. 웅천읍성으로부터 남쪽 1㎞ 지점, 해발 184m의 남산 기슭에서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까지 뻗은 석성으로 석재는 대부분 건축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반출되고, 지금은 산록과 산정 일부, 그리고 축대만 남아 있다.
이곳의 지형은 제포만(薺浦灣)과 안골만(安骨灣) 사이에 반도처럼 돌출한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면서 북쪽으로는 웅포만(熊浦灣)을 바라보고 있으며 육로는 물론 해로로 안골포·마산·가덕도·거제도와 연락이 용이하여 왜군이 본국으로 철군할 경우에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대개 2m 정도이다.
대형 면석(面石)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 사이에는 작은 괴석을 채우고 지면에서 70。 가량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의 구조는 일본식으로 복잡하게 축조되어 있는데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점차 그 아래 산기슭을 따라 제1외곽(外廓), 제2외곽을 질서 있게 배치하고 있다.
넓이는 약 5,000평이며, 성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3∼8m에 이르고, 사용된 석재는 현무암과 청석이 대부분인데 가장 큰돌은 1.5×1.5×2.0m나 되는 것도 있다. 또한 해안의 선박과 연락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통로가 있으며 양 측면에는 외호(外壕)가 남아 있다.
이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남해안에 축조한 18개 왜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하였던 곳이다.
『고적조사자료』 에는 1592년(선조 25) 가토(加藤淸正)가 쌓은 성이라고 하였으나 원래는 웅포성(熊浦城)이라고 하여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성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개축하여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세스페데스(Cespedes, G.)신부가 이곳에 와서 활동하다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그 동안 증개축이 없었으므로 인접한 안골포·가덕도·거제도에 있는 왜성과 함께 16세기 왜성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칠곡가산산성(漆谷架山山城,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칠곡 가산산성은 지정면적 19만4,742㎡, 높이 901m에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600m에 이르는 내성, 중성, 외성을 축조하였다. 현재 사문지(四門址)와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성문) 그리고 수구문(水口門),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내성, 중성, 외성은 시대에 따라 따로 축성되었다. 내성이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장계로 처음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외성이 1700년(숙종 26)에 완성되고, 중성이 1741년(영조 17)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장계가 윤허됨에 따라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710보(步)이고 1,887첩(堞)이 설치되었으며, 동·서·북문의 삼문과 8개소의 암문이 설치되었다. 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가 설치되고 군위(軍威), 의흥(義興), 하양(河陽), 신녕(新寧) 지방이 이에 예속되었다.
외성은 1700년(숙종 26)에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754보이고 1,890첩이 설치되었으며, 성문은 남쪽에만 있고 북·동·남쪽에 3개의 암문이 설치되었다. 중성은 관찰사 정익하가 1741년(영조 17)에 쌓았는데, 역시 석성으로 둘레는 602보이고, 402첩의 여장을 두었으며 중성문을 설치하였다. 이 때 객사와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산성은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성이라 할 수 있다.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사진(四鎭)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松林寺)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터가 많이 있다.
그러나 1960년 초의 폭우로 남문의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가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 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며 가파르다가 내성 동문에 이르면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 위에 세우는 망루인 문루는 없고 홍예문이 남았는데, 그 양식이 특수하다. 즉 앞쪽으로만 홍예를 틀고 안쪽으로는 판석을 건너지른 미석(眉石 : 성의 맨 아래에 성벽 바깥으로 내밀게 깐 얇은 돌) 모양으로 되어 있다. 다른 홍예문도 같은 모습이나, 외성의 남문만은 보통 홍예문의 법식을 따랐다.
남보루(南堡樓)는 성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데, 이곳을 보호하기 위하여 따로 성벽을 현대의 교통호(交通壕)처럼 설비하였다.
용두돗대 (龍頭墩臺, 경기도 강화군)
공산성(公山城, 충남 공주시 산성동. 백제시대)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쌍수산성으로불린다.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계곡을 둘러 쌓은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때부터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축조되었다.
축성 시기는 백제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것으로 짐작된다.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거쳐서 현재까지 이른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1,810m, 토축 약 390m이다. 상단의 너비는 약70cm 정도이다.
토축 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깊이 2m 정도의 호가 형성되어 있다. 성내에는영은사·광복루·쌍수정과 비석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
부산진포절도 보물 391호(釜山鎭포, 1760년 제작)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항전하는 관군의 그림으로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을 맞아 격전을 벌이는 부산진성의 그림이다.
동래우포 절도-일본군 침략때 동래 항전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