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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는 게 낫다.
-공화파 정치가,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ruri)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쟁이자,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1936년 로버트 카파 촬영.
2. 전쟁 이전
당시 스페인은 왕정의 무능과 정치적 부패 등으로 정세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스페인 제1공화정부터 스페인 내전 시점까지 무려 40여 차례의 쿠데타와 60여 차례의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군부는 심심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다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사회가 혼란하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알폰소 13세는 이 쿠데타로 집권한 리베라 장군을 승인했다.
리베라 정권은 이내 닥쳐온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진데다 리베라의 갖가지 실책으로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기득권층까지 리베라에게 등을 돌렸다. 리베라는 다시 군부에 지지를 호소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알폰소 13세는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총선 실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은 공화국이 된다. 이에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적 좌파정권이 출범했으나 기존의 기득권층인 지주들과 가톨릭 교회, 군이 중심이 된 보수파는 이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중 교회의 경우에는 보수파의 중심이 되었긴 했지만 당시 스페인 영토의 무려 3분의 1이 가톨릭 교회 소유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는 1837년의 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교구 소유의 토지를 대거 매각했고, 이때 가톨릭 교회가 매각한 대부분의 토지는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의 소유가 되었다. 1936년 시점에서 가톨릭교회라는 조직 자체는 몰라도 개별 성직자는 절대 부유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토지는 일반 지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각 지역의 성직자들은 내전 발발시 양측 진영에 소속되거나 중립을 지키는 등 가톨릭 자체의 의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다.
어쨋든 1932년까지 2400만 인구 중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를 소유했고, 2%까지 올라가면 전체 토지의 65%를 소유했다.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만 헥타르가 분배되었을 뿐이며 보수 세력과 중도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했던 스페인 군부 또한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에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상후르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했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되자 중도(급진공화당)와 우파들은 좌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했다. 급진당과 CEDA의 연합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닫게 되자 1936년 바야다레스 정권은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933년 총선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6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단결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및 디에고 바리오가 이끄는 공화주의 중도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사회주의 좌파가 인민전선을 결성했다. 우파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진 끝에 선거 결과 불과 15만 표차로 인민전선이 초박빙 승리를 거두었다.
1936년 선거의 선거 연합은 다음과 같다.
• 좌파 인민전선
◦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의 급진사회주의 성향의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 마누엘 아사냐의 온건사회주의 성향의 공화좌파(IR)
◦ 디에고 마르테니스 바리오의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공화연맹(UR)
◦ 호세 디아스의 스탈린주의 성향의 스페인 공산당(PCE)
◦ 안드레스 닌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POUM)
• 우파 국민전선
◦ 호세 마리아 힐 로블레스의 가톨릭 보수주의 성향의 스페인 자치 우익 연합(CEDA)
◦ 이하의 정당들은 전부 혹은 일부가 CEDA와 협력했다.
◾ 민주중도당(PCD/PCNR)의 일부 협력 분파
◾ 급진공화당(PRR)의 일부 협력 분파
◾ 진보공화당(PRP)의 일부 협력 분파
◾ 보수공화당(PRC)의 일부 협력 분파
◾ 자유민주공화당(PRLD)
◾ 농업당(PAE)
• 비동맹
◦ 알레한드르 레룩스의 시장자유주의 성향의 급진공화당
◦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의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진보공화당
◦ 미구엘 마우라의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보수공화당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팔랑헤주의(파시즘) 성향의 국민생디칼리즘 공세평의회 스페인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 de las JONS)
• CNT(전국 노동 연맹)등의 아나키스트들은 암묵적으로 인민전선과 그 이후 공화정부에 협력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다시 좌파정권이 등장하자 우파들은 공공연히 스페인에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면서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바예로의 사회주의노동당 역시 총선 패배 시 공공연하게 '인민전쟁을 통한 정권 탈환'을 해야 한다고 우파를 협박할 정도였으므로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았어도 내전 발발 가능성은 높았다.
이 점을 잘 아는 좌파정권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우파성향의 장군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멀리 추방했는데 이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추방된 곳은 카나리아 제도였다. 그러나 프랑코 파 군인들이 이미 영국을 통해 프랑코를 귀환시킬 비행기편을 구해 놓고, 독일을 통해 병사들을 운송할 수송기와 함선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쿠데타 발발 직후 프랑코와 당시 스페인 군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예병들이었던 아프리카 군단 47,000명은 신속하게 스페인 본토로 건너올 수 있었다.
선거 후에 무력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권고받은 CEDA의 힐 로블레스가 이를 거부한 후 군부는 팔랑헤당과 단독으로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이미 인민전선 정부에는 PSOE의 프리에토와 공산당의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아사냐와 총리 키로가를 비록한 정부 인사들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한편 팔랑헤가 공화정부가 창설한 좌파 성향 조직인 돌격 경찰대 장교 세리아 중위를 암살하자 돌격 경찰대원들은 분노해서 스페인혁신의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와 힐 로블레스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우파의 거두였던 칼보 소텔로를 암살한다. 군부는 이를 핑계로 7월 17일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10월의 교수 집행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라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ÁN!)
- 돌로레스 이바루리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1936년 7월 18일, 반란군은 몰라 장군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령 모로코 및 스페인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 반란파를 통칭해서 팔랑헤당 또는 국가주의(Nacionalista), 혹은 반란파(Bando sublevado)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자유민주주의가 연합한 공화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단일 정파는 아니었고 왕당파, 파시스트, 카롤리스타 등 여러 세력이 연합해 있었다. 물론 국민군내 대표적인 정당은 팔랑헤당이었다.
반란 자체는 수도인 마드리드 장악에 완전히 실패하는 등 성공적이지는 않았으나, 이걸 막을 공화군도 반란군에 참여한 것을 속인 반란군 지휘관에 의해 도시 밖으로 물러난 후 도시를 빼앗기는 등 마찬가지로 어수룩하게 행동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다른 당시 스페인 군사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한국처럼 특정 경계선에 병력이 모여 있는 게 아니고, 전국에 흩뿌려져서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수비대 병영이 있고 수비대 병력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에게는 딱히 대치하는 적성국이 없었기 때문이고, 한국사에서 굳이 비교할 상대를 찾으라면 일제시대에 동네마다 헌병 주재소가 있고 헌병이 주둔했던 모습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 때문에 주둔군 지휘관의 성향 및 병사와 주민들의 대응 방향에 따라 각 지역에서의 초기 성패가 갈린 것이다.
이런 초기 혼란은 양측 모두 실전경험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페인군은 1898년에 치른 미서전쟁 이후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립국이었고, 예외적으로 실전 경험을 보유한 부대는 에밀리오 몰라, 프랑코 등이 배속되었던 식민지 치안 유지를 위해 편성한 아프리카군뿐이다. 이들은 원주민 반란 진압 때문에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인 실전 경험이 있던 집단이다 보니 국가군의 초기 진공과 최종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하여간 양측의 허튼 짓으로 반란 자체는 실패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적어도 본토의 35% 정도가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혼란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반란군 지배지역과 공화군 지배지역이 섞여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결과를 생각해볼 때 공화국의 패배는 이 쿠데타 과정에서 이미 상당히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라고사, 세비야, 바다호스 등 내전 초기 국가군의 핵심 전략적 거점이었던 상당수 도시들에는 쿠데타 세력과 결사항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 계열 전투 노조원들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가 쿠데타 음모를 쿠데타 발발 이후 4일째까지 부인하고 또한 이에 대비하여 노조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라는 조언들을 모조리 씹고 있다가 결국 쿠데타군에게 (무기만 있었으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한 것처럼 소수였던) 쿠데타군을 밟아버릴 수 있었던 좌익 전투 노조원 수만 명의 목숨과 대도시 여럿만 내주고 말았다.
특히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 세비야'라 불릴 만큼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전국적으로도 제3의 도시였던 세비야를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케이포 데 야노에게 상실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단 세비야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가난한 소작농들이 인구의 대부분이라 좌경화가 강한 지방이었고, 해군을 여전히 공화파가 잡고 있으며 이 당시 항공 기술은 대규모의 병력 수송에 부적합했으니 이 세비야의 쿠데타만 잘 막았으면 스페인 내전의 남부 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안달루시아에서 깨적깨적 진군하는 국가군을 막느라 똑같이 낭비했던 전력을 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이었던 중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비야를 먹지 못하면 세비야에서 차타고 한 시간 거리 정도 밖에 안되는 당대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었던 카디스를 먹을 수 없고, 카디스가 없었다면 쿠데타 세력은 무슨 마법을 부려도 국가군의 핵심이었던 모로코 출신 아프리카 군단을 꾸역꾸역 스페인 본토로 실어나르지 못해 야전에서 공화파에 대해 우위를 점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으면 국가군은 뭔 짓을 해도 1939년 여름 이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때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면 우리가 잘 아는 나머지 유럽사의 흐름 때문에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프랑코 통치 아래 40년간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의 질과 외부의 지원, 장비, 내적 통합 면에서 국가군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공화국 정부는 이렇게 초반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자 전쟁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개전 초반 아무런 정신이나 통제력이 없었던 것은 공화파 정부나, 쿠데타 세력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조직력 면에서 후자가 딱 종이장 한장 차이로 나았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주제이다.
4. 내전 진행
결국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송기를 지원받은 프랑코 휘하의 정예병력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진격하자 반란군이 지배하던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공화정부군은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지역까지 반란군에게 내주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전차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 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았다.
이로 인해 내전은 고착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코는 평소 상당히 굼뜨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의 공세가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공화군의 자폭이었다. 공화군은 선전의 목적으로 공세를 추진하였다.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된다.
4.1. 공화국의 상황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국은 사기는 높았으나 단결이 잘 되지 않았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은 타 지역과 달리 거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남부의 지원없이 반군과 전쟁을 치르다가 박살났다. 심지어 프랑코와 싸우는 도중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노선에 대한 견해 충돌로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는데, 이 사건은 공화군 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또 반란군 소속의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 이후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 간에 '우리들 가운데 제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그리고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간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바로 제5열이다!!' 였으니 이래서야...
또한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반란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 60%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국가헌병대 노릇을 하는 순찰 경찰대 70%이상이 반군 측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전쟁 발발 이전 스페인군이 비교적 약군이었다 한들 당장 군사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가 이리 확실하게 나니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심각한 군재 부족에 시달렸고, 의미 있는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본질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한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이 공화국 정부란 작자들은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국이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게 불가능하다는게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삽질성 과시용 공세를 한 번도 아니고,두 번도 아니고, 37년 중반부부터 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번이나 벌인 끝에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을 한 국가군이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갖다 바쳤다. 공화파가 선전하거나 이겼던 쿠데타 당시 바르셀로나 사수, 마드리드 방어전, 하라마 고속도로 회전, 과달라하라 전투 같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내전 초기 공화국의 실제 군사력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전투 노조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시, 마을에서 벌인 수비전이거나, 국가군의 의표나 혹은 이탈리아군과의 연계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어찌 잘 노려 거둔 경우였지, 일반적인 대규모 야전에서 공화국군은 끝까지 반란군을 상대로 열세를 극복하지 못 했다.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장기 농성전으로 들어갔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 실제로 38년 중순 발렌시아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해 국가군의 공세를 돈좌시킨 적도 있었던 만큼 그 실효성은 더 높았다.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을 미니 소련화하며 일당 독재를 밀어붙이려고 난리치던 때였다.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네그린과 공산당 쪽 지도부만 자기들끼리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비민주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공화파를 지원했던 소련의 태도 또한 문제가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는 싫기도 하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도와는 주되 최소한만 도와주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에초에 소련은 일국 사회주의 채제의 길로 들어서던 때로 스탈린은 인민전선을 도와주기가 껄그러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거기다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버렸고 그 지원 역시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이 고장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무기 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반란군 편에 선 이탈리아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국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사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장교가 하나도 없이 사병만 있다면 전투는 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당연할 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 지원을 받은 반란군이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이 맞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하지만 원체 전력이 빈약해서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4.2. 반란군의 상황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반란군을 운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장 반란군이라고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반란군을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만 해도 무솔리니식 좌파적 노동운동으로 시작해서 자본가 진영이나 좌우익 이딴 거 필요 없이 가톨릭 사회 가치관와 중세적 지방 자치가 이루어졌던 구시대로의 희귀를 원하는 카를리스타와 반목하고 있었고, 스페인 왕정 당시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직계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정통 왕당파 또한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 국가군의 지도부 또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화국을 원했던 반면, 카를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했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가군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빨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공화국군에 의해 사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 로블레스는 정치 투쟁에 관심이 없어 일찍이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퇴위한 알폰소 13세나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의 경우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가군의 지도자였던 호세 상후르호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몰라의 경우에는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수행능력이 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데다, 자기 군복을 너무 실어서 비행기 무게 조정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라이프 2차 대전에 실려있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엘 카우디요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거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밀리터리적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희생하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 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프랑코가 수작질한거라 주장할 근거는 없다.
힐 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상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반란군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 등이 팔랑헤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당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버렸다. 뒤집어 보면 팔랑헤나 카를리스타나 프랑코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채 배신당한 셈. 공화파와 국가군의 내부적 단결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는, 공화파는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당이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갔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에 따라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 등 다른 정파들과 타협을 하든, 뒷통수를 치든 하는 식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갈등을 해소해야 했던 반면, 프랑코의 경우 애초에 민주주의의 탈을 쓰지 않았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정적들이 모두 죽었으면 그 세력들을 자기가 알아서 흡수하고 일부 팔랑헤 급진파 같이 말 안 듣는 애들은 콱 찍어 누르면 될 일이었다.
더불어 후술하듯 독일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이 쏟았던 반란군에 대한 지원 역시 소련에 비하면 상당히 컸다. 새로운 사실을 여기에 쓰자면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잘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1930년대 파시즘의 세계적 연승에 두려워하던 전 세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1936년 7월 쿠데타를 막음으로써 만주에서 독일, 에티오피아에서 루마니아까지 국제 파시즘 세력의 연승 행렬을 막은듯 보였던 민주 스페인에 열광적인 심적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되는 정신적, 문화적 연대 정도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개인, 잘해봐야 정당 차원에서 직접 가서 싸우다 죽는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입때까지만 하더라도 파시스트들보다 중남미와 말과 문화가 직통으로 연결된 남유럽 지중해의 소련이 탄생하는 걸 더 두려워했던 열강 정부들은 쿠데타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국내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걸 방조함으로써 프랑코와 파시스트들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 공화정부군과 반란군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공화정부군은 수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군이 프랑코 휘하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민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고 원래는 일시적 '쿠데타'였어야 할 충돌이 장기적인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버린다고 후안 야구에는 심각한 걱정을 표했고, 공화국 대통령 아사나는 반대로 "주요 공업 지대, 대도시는 다 우리편에 있는데 저들(쿠데타군)이 어찌 전쟁을 지속한단 말인가?"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국가인 포르투갈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는 데 반해 공화파는 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분명 공화국이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합법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가득 받은 셈이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4.3.1. 공화파에 대한 지원
스페인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심지어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버렸다.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초기에만 해도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보수당 내각의 영국의 적극적인 반대와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라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반란군을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다. 영국과 미국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반란군에게만 유리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집권 보수당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쇼들보다 소련산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운반한 비행기를 제공해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군을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반란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
미국 또한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 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텍사스의 석유 재벌들과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낸 반면,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 여단에 투신한 미국인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
결국 공화파를 지원한 유일한 강대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라 독재정권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었다. 그 외에는 구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뿐이었다.
대부분의 지원은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및 전투요원, 고문관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공짜가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 또한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최근의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 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이 또한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주었다. 공화파 출신 피난민들을 대거 받아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으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허나 다 좋은데 막상 전쟁에 도움이 안 되면 뭐해...
결국 1939년,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페인 공화국을 돕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말했으나, 때는 이미...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파시스트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었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있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사기를 보여주었다.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로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 또한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있는 일화 또한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 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는다.
훗날 공산 불가리아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 또한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 된 에른스트 탈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 이들은 후에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 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는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은 그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 부대 출신자들을 만나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쑤들과 이제 와서 서로 동지할 수 없다 노발대발했던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놀리의 이름을 딴 코놀리 전열 (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전선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이다.
4.4. 게르니카 폭격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독일군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이 폭격이 의도적인 학살이었나 아니었나는 논란이 팽팽하다.
4.4.1.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폭격 목표는 민간인이 아니라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독일공군 선도기들이 다리를 못 맞추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 때문에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이었다는 것이다.
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물론 민간인이 사는 곳 옆까지 전장을 확대시켜 빌미를 제공한 공화군도 정당하다거나 잘한 건 아니다. 참고
4.4.2.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사건 서술을 보면
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거라고 주장한 이들은 콘도르 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
2. 다양한 종류의 폭탄이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데 필요한가?)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있었던 상황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저지, 교란이 주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여담으로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서방세계의 인종차별적 경향 때문에 관심을 못 받은 감이 있다.
4.5. 내전의 종결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리면서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역에서의 결정적인 공화군의 뻘짓 공세에 힘입어 마드리드가 포함된 스페인 본토 중앙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군은 정부가 반란군에 밀려서 프랑스로 도망간 후 사실상 정부가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해 공화정부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의 승리 직전에 있던 프랑코가 협상따위를 제대로 응할 리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공화파는 1939년 4월 1일 프랑코에게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완전히 패망했다.
5. 결과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한 만큼, 쿠데타 직후 부터 국가군은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전사자가 11만(반란군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지역의 암살이나 처형 13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 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가군은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 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 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처남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 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 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 또한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 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아닌 하인리히 힘러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 남은 자들의 운명 또한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망명자의 수는 약 50만으로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가 함락되자 프랑코와 히틀러 사이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 되어 총살 당하거나, 아니면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도 살아 남은 망명자들은 그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2차 대전에 휩싸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 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 기갑여단 산하의 9 중대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 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환호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 된 전차들 위에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하며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며 파리에 들어오는 관경을 보게 되었다.
멕시코나 다른 중남미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를 세워서 1975년 스페인 민주 정권이 성립 될때까지 저항했으며, 또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빨치산들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 저리 파란만장했다.
또한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 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동안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반란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가군과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 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콘키스타를 본 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 부터 스페인을 정화 하는 것'이었던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대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쳐 죽인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반란군에서는 붙잡은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는 주로 가톨릭 교회를 상대로 자행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 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 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가군 편으로 서서 국가군 점령지에서 자행 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특히 카를리스타 세력의 민병대였던 '레케테'는 "한 손에는 수류탄, 한 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스페인 내전 종결 까지 7,000명 가량의 가톨릭 사제들이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반란 초기에 집중된 이 성직자 학살은 안 그래도 좌익 공화국을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과 미국의 여론이 확실하게 스페인 공화국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다. 정부가 무분별한 학살을 중단시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착된 인상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이는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실컷 죽이고 있었던 국가군이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래로 스페인 내전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 중인데, 요한 바오로 2세 때 459위, 베네딕토 16세 때 527위, 프란치스코 때는 2019년 1월 기준 889위가 복자품에 오를 정도로 복자가 된 순교자의 숫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유명한 큰 실수는 톨레도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서 국가군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 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 라고 협박했는데,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그리스도 만세!"라고 외치고 당당하게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했던 것이다. 사실 아들은 한 달 후 국민군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지만,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 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 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 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 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안 그래도 스페인 내전 초기 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을 고발하는 기사가 특히 많았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든 셈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의 확실한 차이점은 (일단 숫자는 둘째 치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국가군 점령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 에밀리오 몰라와 같은 수뇌부들이 나서서 매일 라디오에서 "오늘은 빨갱이 1,000명을 죽였다. 내일은 빨갱이년 1,000명을 겁탈할테다! Detroit Madrid City"는 식으로 학살을 조장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 지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학살과 '청소'를 지속하여 폭력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국가군에서도 팔랑헤 좌파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것 때문에 사망 플래그를 찍었고,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 동안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옥에 갇혀야 했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과 피난민등을 통해 들은 국가군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까바예로 총리, 돌레스 이바루리, 인달레시오 프레이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 할 것으로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국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 되면서 막무가내 식의 인민 재판은 사그라들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대숙청 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고문+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각종 팀킬행위로 인한 만행들은 여전했다.
그래도 괜히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 마저도 나중에나마 뒷북 치며 "공화국을 도와야 했었다." 라고 후회하며,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 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후반까지 국제 사회의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 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또 그게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등) 게르니카, 카탈로니아 찬가 등 스페인 내전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인"들의 참전이 전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낭만적인 환상과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왔을 뿐 실제 전투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가 앙드레 말로는 한 무리의 폭격기를 동반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공화파 지휘관에 의하면 말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작가, 화가, 사진사, 여자, 어린이 등으로 다양했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는 이런 작자들을 데려와서 각종 비용을 청구하고 사기나 쳐서 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이런 전쟁터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사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등장한다.
그래도 군사적 인프라가 막장이었으며 그나마 아프리카 식민지 군단 같이 믿음직한 제대로 된 전투 부대 자체가 없었던 공화국 입장에서 국제 여단의 개입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았다. 실제로 마드리드 또한 1936년 후반기에 들어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국립 대학교 캠퍼스에서 건물 하나, 방 하나 두고 치열하게 싸울 만큼 함락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이 때 국가군의 총공세를 막아 내고 결국 마드리드 포위를 풀어 낸게 방금 도착한 따끈 따끈한 국제여단 병사들이었다. 국제 여단원들 중에서는 1차 대전이나 전간기의 자잘한 분쟁에 참가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고, 전시 경험이 없더라도 사기와 투지 하나는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만 하더라도 제 11 국제 여단은 무려 하루만에 30%의 전력을 상실하면서도 결국 국립 대학교를 비롯한 마드리드 시내를 사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1938년 하순쯤 되자 누가 봐도 공화국의 패전이 확실시 되어 국제 여단원들은 이탈리아, 독일 같이 돌아갈 고향이 아예 사라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려 보내졌다. 이 중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 여단원들은 자국내 여론이 공화국에 대해 동정적이라 국제 파시즘에 대항한 최초의 투사들로 환영 받았던 반면, 미국이나 스위스, 아일랜드 대원들은 자국의 중립 노선을 위반했다고 당국에게 붙들려 가는 등의 수모를 당했다. 아예 돌아가자마자 감방에 끌려가거나 총살 당하지 않을 조국 자체가 없었던 이탈리아나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병사들 같은 경우 전사하거나 프랑코 정권에게 잡혀 '조국'의 처절한 방기 속에 옥사하지 않고 프랑스로 탈출했던 경우 스페인 현지인 출신 망명객들과 똑같이 난민 수용 캠프에 억류 당했거나,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에서 투쟁을 지속하다 노르웨이 전역 같은 사지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지며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한편, 독일은 이 전쟁에서 Ju87, Hs 123 급강하 폭격기, Bf 109, 1호 전차와 Pak 36, 88mm 대공포 등 신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1호 전차의 부실함 등) 여기서 얻은 실전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데 참고하여 이후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의 병기가 그럭저럭 활약하자 자만하여 이 전쟁의 교훈을 군대 개량에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차전은 그럭저럭 교훈을 얻었는데, 이 시절 전차들은 전차 자체의 성능도 그저 그렇고, 통신 기술이나 운용 교리도 미숙해 집단 운용은 개판이고 소규모로 보병대에게 붙어 지원해주는게 훨씬 효율적이였다. 전차 자체도 무장이 대전차전이 아닌 대보병전이나 지원에 좋았고. 이때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교리에 따라 전차들을 집중편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 '이게 아니구나.' 싶어 전차사단을 해체하고 보병사단에 부속부대로 붙여준다. 그러다 독일군이 전차를 대규모로 집중 운용하며 연합군을 발라버리자 '아, 그때 그렇게 한게 맞구나.' 하며 다시 전차들을 집중시켰지만 제대로 되기도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된다. 물론 초반부 발린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여기 참가했던 인력을 모조리 날려먹어 그 경험을 잘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전쟁의 결과에 자만했던 점은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때 독일이 좀 이상한 짓을 하긴 했는데, 헤르만 괴링은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 팔아먹은 것. 사족으로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 대전 독일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요셉 벨첸스(Josef Veltjens) . 게다가 이탈리아는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독일은 스페인 광산의 채굴권을 착실하게 뜯어간 것도 나중에 스페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게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다. 아이러니한게, 이 때 동부전선에 파견된 의용군의 상당수는 구 공화파 인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연좌제를 피하고, 수감된 공화파 인사들의 처우와 형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참전한 것. 물론 이런 점을 악용해서 프랑코 정권이 반강제적으로 자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타기라는 의견이 주류였으나,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무기, 물자 이외에 북-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거의 전부를 달라고 했다)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후일담으로 내전 당시에 소련과 달리 깽판치지 않으면서 그나마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멕시코는 스페인 공화국이 망한 이후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반-프랑코주의자/공화주의자였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뉘엘도 스페인 내전 이후 멕시코로 넘어가 커리어를 이어간 케이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스페인 내전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인 내전 | ||
시기 | ||
장소 | 스페인 전역 | |
원인 | 1933년 총선 이후 극심한 좌우대립. | |
교전 및 지원단체 | ||
지휘관 | 마누엘 아사냐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호세 히랄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후안 네그린 로페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훌리안 베스테이로 유이스 콤파니스 비센테 로호 유치 호세 미아하 후안 모데스토 후안 에르난데스 사라비아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메흐메트 셰후 | 호세 상후르호 에밀리오 몰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미겔 카바네야스 |
병력 | 보병 450,000 명 전투기 350 대 대포 200 문 | 보병 600,000 명 전투기 600 대 대포 290 문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스페인 국민군의 승리 | |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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