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큰 고모님의 장남인 고종 형님이 두 분 계신다. 큰 형님은 나보다 일곱살을
더 하시고 작은 형님은 세 살을 더하신다. 집이 가난하여 작은 형님은 일찍 혼자서 서울 친척집으로
알바이트로 나가서 지금까지 서울서 살고 계신다. 큰 고모님은 결혼 후에도 한동안 친정인
우리집에서 아들 딸과 함께 사셨는데 고모부가 왜정때 일본으로 돈 벌러 가셨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왕재 너머 평촌에 조그만 오두막을 사서 나가셨는데 나는 고모집에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땐가 학교에 갔다오니 어머니가 방안에서 동생을 낳고 계셨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웃에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책보따리를 방 안으로 던져 넣고는 부리나케 왕재 고개를 넘었다.
고모집에 들어가니 마침 고모님이 계셔서 "엄마가 동생을 낳고 있어요!" 했더니 하시던 일을 그만 두시고
곧바로 나를 따라 나서셔서 집으로 와 어머니 산후 일을 도와주셨다.
고종 큰 형님은 6.25 사변때 우리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셨는데 난리통에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이사를 평촌으로 가는 바람에 평촌학교로 갔다가 농사일이 바빠 도중에 그만 두었다가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가 다시 우리집으로 데려와 전에 다녔던 학교로 편입해서 졸업을 하셨다.
식구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중학교에 진학할 생각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논 두마지기 농삿일과 땔감
나무하기에도 바빴는데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치고 혼자 부산으로 내려와 건국상고를 졸업하셨다.
정식학교 교육이라곤 제대로 받아보시지 못하고 혼자서 독학을 하셨는데 한자능력시험 1급을 따셨다.
또 향교에 출입하면서 옛날 예법을 배워서 몇년전에는 종묘제례 행사에 초대를 받아 올라가시기도 하셨다.
부산에서는 충렬사 안에 있는 항교 모임에 작년까지 회장을 맡아 오셨다가 지난달 26일에 후임 회장한테
넘겨주셨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작년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 이란 글씨를 한지에 써서 보내오셨다.
금년들어 벌써 한 달이 휘딱 지나가고 오늘이 땅에서 봄기운이 솟는다는 입춘이다. 매화는 벌써 뜰에 활짝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