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장작
내가 어린 시절인 1950 년대에는 일반 서민들에게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서 김장과 장작을 준비하는 것이 큰 행사였다.
우리 집은 형제애가 유별나신 아버님이 작은 아버님과 이웃하여 함께 지내시는 바람에 애들만 종형제까지 모두 12명이나 되며 홀로 되신 할머님을 모시는 전형적인 대 가족이었다.
6.25 전쟁 중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유복자를 키우시는 먼 친척 되는
아주머니가 아들 교육 관계로 우리 집에 객식구로 와 계시는데 그분고향이 김포인데 김창 철이 되면 그곳에서 배추와 무를 밭떼기로 사서
김장을 담그곤 했다. 보통 트럭으로 한 차를 가득 싣고 오면 대략 배추가 600포기 내외이고 무가 7-8 가마 정도가 된다.
이처럼 어머어마한 양의 김장을 담그려면 온 식구들이 4-5 일은 매달려서 밤늦은 시각까지 씨름을 해야 했다.
뒤 마당 우물의 펌프로 물을 퍼 올려 배추와 무를 씻고 여자들은 배추를 소금에 저리고 무를 채 썰어 배추 소를 준비하고 한편 남자들은
뒤 곁에 땅을 파서 김칫독을 묻는데 그 크기가 그 당시 내 키 보다 더 컷다. 이렇게 김치 광을 만들면 긴 막대기 세 개로 지주 대를 세우고 가마대기로 둘레를 감싸서 추위에 김치가 얼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준비한 김장은 겨울 내내 우리 대식구가 반찬으로 먹고 늦은 봄 까지 김치 지게를 해서 먹곤 했다. 그 때문인가 나는 지금 까지도 신 김치를 잘 먹는 편이다.
요즈음에야 비닐하우스 덕에 한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으니 김장을 많이 담글 필요가 없지만 그 당시는 경제사정도 팍팍하고 겨울에 채소을 구할 수도 없으니 이처럼 김장을 많이
담그어서 겨울을 나는 것이 필요 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김장을 통해 온 가족이 함께 힘을 합하여 일하는 동안에
가족애가 돈독해지지 않았나 싶다. 나는 우물물을 퍼 올리는 펌프질을 내 사촌 동생과 함께 했는데 그날 저녁에 내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어머님이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빨간약(옥도정기)을 발라 주었던 기억이 난다.
먹거리로 김장이 끝나면 다음은 땔감이다. 전기나 석탄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주로 장작을 단으로 묶어 시장에서 팔았는데 겨울철에는 이나마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가을에 산판에서 벌목한 나무를 한 트럭
사면 그 당시에는 장작을 패러 다니는 전문가가 있었는데 보통 2인 일조로 한분은 긴 통나무를 톱질하여 장작 크기로 자르고 한분은 도끼로 통나무를 쪼개는 것이다. 어머님이 다칠까봐 도끼질 하는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하였지만 도끼질 할 때 마다 통나무가 여차없이 쪼개지는 것이 신기하여 멀지기 떨어져서 정신없이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이렇게 장작이 모두 쪼개지면 우리 형제들은 한 아름 씩 안고 부엌에 딸린 광에 차곡차곡 재어 놓았다.
이 처럼 김장과 장작은 나의 어린 시절에는 집안의 큰 행사로 그 당시
나에게는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일을 했다는데 대한 자부심도 느꼈었던 것 같다.
이제 김장도 장작도 필요가 없는 현대에 사는 어린이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