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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묵상글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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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동문서답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 언제라는 답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뜻이 되겠지요
사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도 복음을 믿는다는 것도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은
아직 회개한 사람이 아니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요.
달리 말하면 회개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회개를 해야 하는 거지요.
사실 회개에는 여러 회개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회개와 영적인 회개가 있고,
인간적인 회개에도 마음이나 습관을 바꾸는 개인적인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나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바꾸는 관계적 회개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회개만도 우리에게 벅차기에 이 회개를 위해서도 낑낑대니
이 회개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회개 곧 하느님 나라의 회개가 궁극적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깨어있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나라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회개라고도 할 수 있고,
영적인 감각 또는 하느님 나라 감각이 깨어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으면
아들에게 깨어있는 어머니가 아들의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도
아들이 곁에 있음을 알아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아챕니다.
호렙산의 엘리야에게처럼 바람결에 실려 오는 하느님 나라,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내려오는 하느님 나라,
새벽 실안개처럼 우리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하느님 나라를 느낍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지인이 보내오는 문자 하나도 그저 문자가 아니라
사랑이 온 것이요 하느님이 오신 것으로 느낍니다.
문득 가을을 느끼듯
우리 가운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제라도 문득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성찰을 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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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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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있으면 천국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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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는 명동 계성여고가 있던 자리에 ‘명동밥집’을 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밥집입니다. 기업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온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멀리서 기꺼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며느리가 봉사하러 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 봉사하면서 가족들이 더욱 화목해졌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도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대학동에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남이섬으로 가을 소풍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친구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가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단한 바위 위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와 사랑이 단단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겨자씨와 같던 하느님 나라는 갈릴래아를 넘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1784년 한국의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신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고, 124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본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기쁘게 본당 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충남 태안의 천수만에서 가족캠프를 하였고, 베론 성지로 기차 성지순례를 하였고,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 순례를 하였고, 멀리 안동까지 연도를 하러 갔었습니다. 저보다 더 성당의 물품을 아끼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매주 교우들을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성당에 오셔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서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분,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던 분, 본당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시던 분, 기도로서 제게 힘을 주시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아닐까요? 겸손의 계란, 희생의 계란, 십자가의 계란, 나눔의 계란은 단단한 바위에 희망의 꽃, 믿음의 꽃, 사랑의 꽃이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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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홀로 간직하기 힘들기에 사람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인가 채우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1) 물건으로 채우기: ‘제대로 된 옷이 없어.’ 식으로 ‘~제대로’에 꽂혀서 필요하지 않은 쓰레기들을 집안으로 들입니다. 쇼핑센터와 백화점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충동구매를 시전하여 카드값을 보고 현타를 맞는다고 하지요.
2) 사람을 채우기: 아는 언니, 동생, 선배, 후배 등 모두 소환해서 “내가 쏜다”를 외치며 사람들과 섞여 신나게 놀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함은 더 커집니다.
3) 새로운 모임 가기: 아는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아 새로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친해지려고 애쓰고 돈과 시간을 쓰고 허망하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4) 먹는 거로 채우기: 고독이 밀려올 때 허전함을 먹으며 채웁니다. 고독의 먹이가 음식이 아님을 알아차릴 때 이미 자신은 뚱보가 되어 있습니다.
5) 일과 공부로 채우기: 외로움을 느끼기 싫어 엄청 바쁘게 지냅니다. 일중독, 공부, 강의 중독으로 시간에 쫓겨 다니다 결국 몸이 상하고 나서야 더 큰 고독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런 것으로 과연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외로움은 따뜻한 위로로 채워집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만 옆에 있어도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의 존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마음을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큰 관심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정치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 기대는 더 간절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권이 반드시 재건되리라는 성경의 예언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와서 해방되어야 자기들의 텅 빈 마음이 채워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관점을 전해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으로 굉장한 팡파르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온다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을 주님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텅 빈 마음을 세상의 것으로만 채우려고 해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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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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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행복은 선택, 천국을 삽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꿈의 실현인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가 성인입니다.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나라는 성인을 통해 실현됩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하느님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 즐겨 묵상하는 행복기도 한 연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만추의 아름다움입니다. 어제는 청담동 성당 신자들 네분이 생전 처음 수도원의 저를 찾았습니다. 강론을 통해 소개된 요셉수도원이, 또 제가 보고 싶었다 합니다. 지상천국을 찾았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기도문도 나눠드린후 함께 기도도 바쳤고, 천연 배즙도 나눴고, 사진도 찍었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사람이 아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더라도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책임을 다하며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언제 도래할지 모를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각자 삶의 자리에서 정주하며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일상의 시련이나 고통을 잘 겪어내라는 말씀입니다. 빛만 선호할 것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일상의 어둔 그림자도 큰 사랑으로 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습니다. 하느님 꿈의 실현이 성인들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을 살았던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연속되는 시련과 고난중에도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성인들이었고 죽어야 휴식이었습니다. 시궁창에서 피어난 연꽃들처럼, 시련과 고통의 삶의 자리에서 고고히 피어난 하느님 꿈의 실현인 꽃같은 성인들이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대 레오 교황이 그런 분입니다. 극도로 혼란했던 중세초 야만족으로부터 로마를 구한, 교회를 구한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인 성 대 레오 교황입니다. 참 고맙고 자랑스러운 성 대 레오 교황에 대해 소개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교황 베네딕도16세)로 가톨릭의 제45대 성인 교황으로 재위 기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을 넘어서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로 거론된다.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지혜롭고 용감한 성 대 레오 교황은 두 번이나 로마를 구해냈다. 당시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후 서 로마 제국은 사방에서 봉기하는 외세의 침공앞에 속수무책 당할 뿐이었다. 레오 교황이 반달족의 가이세리코와 맺은 합의 내용이다.
1.그리스도교 교회와 관련 시설,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2.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3.포로를 고문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로마는 그 옛날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에게 두 번이나 구원을 받은 셈이 된다. 이로인해 로마 시민들은 레오 교황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성 대 레오 교황은 173편의 서간들과 100여편의 강론을 남겼다. 그가 저술한 문헌들은 신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라틴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시되고 있으며, 특히 서간은 그레고리오 대 교황 이전까지 가장 방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대부분 강론이 전해져 내려오는 유일한 교황으로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특히 그의 문체는 레오 문체라고 불리며, 수세기 동안 교회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레오 교황처럼 예술같은 서간을 쓰거나 강론한 교황은 그리고리오 대 교황이 나타나기 전까지 150년 동안은 없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치세를 요약하면, 그가 집필한 서간들과 강론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황의 수위권 확고화와 그에 따른 교황권의 강화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황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요약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가지 이단 사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을 확보했으며 대외적으로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가 되었던, 당시 서방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운 성 대 교황 레오이기에 많은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참으로 위기에 처했던 로마와 교회를 구해낸 하느님의 결정적 섭리의 선물 같은 성 대 교황 레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은 바로 이런 성인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필레몬서에서 바오로가 오네시모스의 선처를 바라는 서간은 얼마나 겸손하고 아름다우며 사랑과 진정성이 넘치는 지요! 바오로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꿈은 활짝 피어나 실현됨을 봅니다.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 보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해 주십시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너무 진정성 넘치는 아름다운 서간이라 필사하는 마음으로, 바오로와 깊이 일치하고픈 마음에 인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을수록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성 바오로, 성 대 교황레오입니다.
믿는 이들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꿈이 실현되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니고 있는 각자 고유의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꿈을 실현시키며 성인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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