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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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사막을 건넌 나비』, 박병수)과 ‘왕국’(『코르크 왕국』, 정연홍)에서 한 철을 보냈다. 이상한 게 사막에서 ‘나비’1) 를 만날 줄 몰랐다. 그곳에서 마주친 많은 새2) 와 벌레들3) 을 기억한다. 숱한 암호들이 오가고(시집에 실린 44편의 시) 나는 의아한 마음이 되어 그들이 뱉어내는 소리를 무작정 옮겨 적었다. ‘왕국’은 “코르크나무”(「코르크 왕국」)로 둘러싸여 있었고 “코르크 마개를 만들며 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무 아래 가득했다. 왕국을 지탱하는 건 “철근”(「허공 그림」)과 “시멘트”와 “쇠기둥”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대신 “컨베이어”(「Conveyor」)가 “삼백육십오일” 돌아가고 있었다. 왕국의 신민은 노동자였다. 두 시집에는 이상한 도치가 있다. ‘사막’은 아늑했고 ‘왕국’은 분주했다. 사막에 머물 동안 나는 자주 잠들어 있었다. 사막의 잠은 무거웠다.(「황무지」) ‘왕국’은 어떤가. 기이하게도 왕국의 “잠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정연홍, 「집의 뿌리3」, 『세상을 박음질하다』, 푸른사상, 2014)했다. 그곳은 달아나는 방식으로 존재했고(‘아프리카’ 연작) 왕국에는 정작 왕이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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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을 때4) 나는 매번 잠든다. 혹은 꾸벅꾸벅 존다. (졸음을 포함해) 잠은 밤의 일이고 밤은 글자를 무화시킨다. 시는 문자의 일인데 밤은 도무지 당신을 모르겠다는 듯 시를 이방인 취급한다. 덩달아 읽는 나도 이방인이 된다. 이방인의 속성 중 하나가 기웃거리기이다. 그는 낯선 언어를 해독할 수 없어 사전을 찾거나 귀동냥 한다. 둘 다 마땅치 않을 때 그럴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나는 잠으로 도피한다. 도피이되 더는 도피가 아닌 게, 그렇다, 『사막을 건넌 나비』(박병수)에서 나는 보고야 말았다. 무엇을? 시집이 거대한 한 편의 잠(의 기록)에 가깝다는 걸.5) 물론 말이 안 되지만 언구럭을 떨고 싶은 게 시집을 흘긋 보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돼버린 것인데, 가령 시인이 “죽음보다 깊은 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달콤한 칩거」)라고 말할 때 시를 쓰는 동안 그는 잠에 취해 있거나(「머큐리」) 또는 시를 쓰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반영월식」) 자문하듯 반복해 묻는다. “우리들은 몇 시에 잠이 들까”.(「인셉션-꿈의 시작」) “더디 오는 잠을 오래 청”(「빙궁」)한다고 잠이 올까. 하여, 그는 자주 “잠을 만들고 남은 조각으로 사다리를 만”(「황무지」)든다. “사다리”에 올라 바라본 밤이 하얗다. 시인의 눈에 세상은 온통 ‘밤’이고 ‘잠’이고 ‘꿈’만 같다. 꿈은 이야기인데 파편적이어서 차라리 “가루가 된 이야기”(「익사자」)에 가깝다. 그는 왜 이토록 밤과 잠과 꿈에 매여 있는 걸까.
‘사막’에서 시 쓰기
- 박병수, 『사막을 건넌 나비』, 2020, 창연
고개를 돌리니 광안리 해변에 그가 서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 사진이 7월 6일, 오후 4시 38분을 가리킨다. 해무가 잔뜩 낀 광안리백사장이 거대한 봉분처럼 보였다. 횟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6) 시집 앞에서 말문을 잃고 “실어증”(「유리물고기」)을 어쩌지 못해 다시 찾아 왔다고, 당신의 시 속에서 밤은 왜 이토록 어둡고 꿈은 왜 그리 하얀 것인지, 밤과 꿈 사이에 끼인 잠은 당신에게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었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는 이곳에 쓸 수 없다. 그 이야기들은, 결국, 시집을 경유해야 하리라. 나는 「빙궁(氷宮)」을 오독했다. 그 이야기는 써도 될 것 같다. 그가
더디 오는 잠을 오래 청하면 방안 가득 불씨들
숨을 오래 참으면 무성해진 얼음나무
그 숲을 걸어가면 무덤 속의 빈 공간들, 나는
참아왔던 입김을 입술이 터져라 뱉어내며
이제 그만 이글루 이글루의 천장을 장식할
불빛에 대해서 고민하지
눈송이를 쓰고 눈송이를 신고 그럴싸한 걸음으로
달의 불을 밝히면 불이 붙은 눈송이가
지붕에서 마당으로 밤새 떨어지겠지 이글루
이글루의 얼음벽을 흔들면서 도착한 대설주의보,
빛바랜 벽지를 걷어내고
텅 빈 벽에 모닥불을 그려야겠다. 그러나 이글루,
이글루에는 벽지가 없지 이글루, 빙궁에는
불의 뼈, 불의 사슬자국이 있지
- 박병수 「빙궁(氷宮)」 부분
라고 쓸 때 “빙궁”은 얼음궁전이 아니다. 이것은 장치지만 아날로지가 아니고 의미가 탈구된 너무 슬픈 시적 유비이다. “빙궁”이 얼음궁전이 아닌 콘테이너박스라면 어떡하겠는가.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들은 몇 시에 잠이 들까”. 그것은 실제상황이었다. “발라먹은 불의 뼈..이글루..산발한 머리카락..불씨..화염..무성해진 얼음나무..눈송이..얼음벽..모닥불..불의 사슬자국..” 산발적으로 의미를 흐트러뜨리던 몇몇 시어들이 광안리에서 시인을 만나고난 후 또렷해졌다. “더디 오는 잠을 오래 청”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없는 “불씨들” 때문이었다. “무성해진 얼음나무” 역시 아날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에였다. 알겠다. 허옇게 벽에 달라붙은 수증기를 향해 그가 “참아왔던 입김을 입술이 터져라 뱉어”낼 때, 그가 한때 머문 “빙궁”이 “조각난 날개로 가설된 행궁”(「개미집」)이었음을..
에필로그
반월호수에서 이 글을 쓴다. 당신은 여전히 “꿈속에 거주하고”(「자각몽」) 나는 “꿈밖을 들쳐 메고 (당신의) 꿈속을 방문한다”. 박병수, 당신의 “이름을 펼치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내게 “여행은 어떤 풍경도 들어있지 않은 당신의 감은 눈을 방문하는 것이다”.
2.
정연홍의 시 안에서 “철과 산소가 만나면 산화된다”(「어떤 기록」): 산화되는 시. “해머”(「해머의 리듬」)는 “바람을 가르”며 “바람을 뚫고 나”오고 “모터의 동력”(「하늘 나무」)은 “나무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뚫고 나오는 시/밀어 올리는 시. “톱”(「톱의 자세」)은 어떤가. 톱은 “무엇이든 물어뜯”는다: 물어뜯는 시. “용접봉”(「손오봉」)이 지나간 자리를 보라. “놀랍게도 대지가 봉합되어 버린다”: 봉합되는 시. 그런가 하면 “밸브를 열자 호스 속에서 뱀이 나”(「Black Fire」)오고 “철판 혹은 합판으로 공간을 포장하자/ 건물이라는 이름의 피조물이 그려진다”(「허공 그림」): “혀를 날름거리”는 시/건축물로서의 시.
보라! 여기 정연홍이 만든 “공구라는 이름의 사물이 있다”.(「공구들1」) 시인의 상상 세계 안에서 ‘공구들’은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사물이 된다”.(「먼지」) 정연홍의 ‘공구들’이 “가면을 쓰고 자꾸 변신한다”. “볼트를 조이거나 풀”(「공구들1」)면 “몽키스패너”가, “파이프를 풀거나 조이”면 “파이프렌치”가, “전선 피복을 벗기거나 자르”면 “와이어스트리퍼”가 튀어나온다. 그가 고백한다: “공구를 잡으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공구들2」) “공구를 쥐는 순간 타이머가 작동”된다. 이어지는 고백의 완결: “제작(製作)을 통해 능력자가 될 수 있고 위대한 창조자가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인의 책상 위에서는 “새로운 공구가 만들어지고”(「공구들1」) 그의 부름을 받은 “공구들이 작업 준비를 하고 있다”.(「공구들2」) (시인의) 작업장에 “고요한 긴장이 흐른다”.
‘왕국’에서 시 쓰기
- 정연홍, 『코르크 왕국』, 2020, 파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사물이 되었다”란 표기는 식상하다. 하지만 그의 ‘공구들’이 “컨베이어”(「Conveyor」)에 실려 순환 배치될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이름을 얻고 변개(變改)에 이르는데 예컨대 “정지간을 싣고”(「푸드 트럭」) 달리는 “트럭”과 “농기계를 싣”고 달리는 “트럭”과 “이삿짐을 싣”고 달리는 “트럭”은 같은 트럭이되 시인이 고안한 시적 장치 ‘컨베이어’에 올라탄 이상 전혀 ‘다른 트럭’이 된다. 거슬러 올라가보자. 내가 주목한 변개하는 사물들의 목록 맨 위에 “비닐 봉다리”(「비닐 봉다리」)가 있다. “사자(死者)가 쓰는 갓이었다가 시궁창에 처박힌 오물이었다가 향기 나는 과일 주머니였다가 멀미를 받아 주는 시큼한 대야”로 기능한 “비닐 봉다리”는 형태면에서 “어떤 땐 검은색이었다가 어떤 땐 흰색이” 된다. 그것은 소문으로도 작용하는데 “누군 저걸 뒤집어쓰고 죽었다 하고 누군 저걸 쓰고 비를 피했다고 하고 누군 모종을 심을 때 챙겨 간다고 하고” 그런가 하면 “줄줄 새면 냄새나지만 하나 더 씌워 주면 감쪽같고// 깊이를 알 수 없어 수만의 사람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하고 수억의 검은 마음이 숨겨져 있다 하고 황금색 쇠붙이가 그 안으로 사라졌다 하고”.
예컨대 그런 식이다. ‘비닐 봉다리’는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사물이 된다”.(「먼지」) 물론 ‘비닐 봉다리’는 작업대 위 시인의 시적 공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고안한 ‘컨베이어’에 실릴 때 ‘비닐 봉다리’는 변개의 변개를 거듭해 놀라운 사물이 된다.7) “바람 속으로 비닐 봉다리가 날아오른다”.(「비닐 봉다리」) 비행 끝에 “비닐 봉다리”는 “먼지”(「먼지」)가 된다. “먼지가 온다/ 둘 셋.....이천네 개...구만 구천 개의 먼지가”. ‘먼지’는 어떤가. 시인의 시적 장치 ‘컨베이어’에 올라탄 ‘먼지’를 보라. “먼지는 나무가 된다/ 먼지는 고양이가 된다/ 먼지는 별이 된다// 먼지 구십억 개는 아버지가 된다/ 구십억 개×구십억 개는 산이 된다” 놀랍다. 변개는 무한하고 ‘컨베이어’는 돌고 돌아 “포토그라피”(「포토그라피」)로 향한다.
시인은 “저 얼굴이 아니다”라고 운을 떼며 작업대 위 새로운 사물을 맞이한다. 그러니까 “귀신의 그림자”였던 그것은 “애초에 세상에 없던 것”이고 “빛의 장난”이며 “가로등이 그린 그림”이고 “찍히지 않는 내면”, “영혼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포토그라피’라는 사물이 변개한다. 나는 그것을 본다. 다시, ‘컨베이어’가 돈다. ‘포토그라피’는 무엇인가. “누군가 나를 복사해 가도 표 나지 않는 서늘함/ 명암 뒤에 숨어 있는 기억/ 공간을 넘어 어디를 가도 나는 알 수 없는 것// 내 얼굴에 모자를 씌우고 점을 찍어도 알 수 없는 것/ 구름이 영원히 떠 있고 강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 누군가 영원히 죽어 있고 영원히 웃고 있는 것”, 하여, 그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캄캄한 창”인데 ‘컨베이어’ 종착지에 이르러 그것은 “죽어서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가 된다. 변개하는 ‘포토그라피’에게 끝이 있을까. 시인의 상상세계 안에서 하나의 사물은 다자(多者)가 된다. 무수해서 다자는 잡히지 않고 셀 수 없는 다자인데 이 모든 작동의 기저에 시인의 시적 장치 ‘컨베이어’가 있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다는 듯 “아직 쏘지 못한”(「화살」) “공구들”(「공구들2」) “열두 발이 내게 있다”(「화살」)라고 쓴다. 시인의 말이 그저 경이롭다. 시인의 작업대는 “2센티/ 3센티미터의 공간”(「노래하는 사구(沙丘)」)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허공에서 퍼져 나가는” 소리는 아득하다.
나는 아직 (정연홍의) ‘동물들’을 말하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지면은 너무 짧고 『코르크 왕국』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너무 많다.8) 시집 3부에 실린 ‘아프리카’ 연작 14편 역시, 계열 상 변개시(變改詩)로 부름직 하다. “공구들”처럼 ‘동물들’도 시인이 고안한 시적 장치 “컨베이어‘에 실리면 분화하면서 재배치되고 새로운 이름을 얻을 텐데 변개는 ‘아프리카’ 연작 마지막 편에 이르러 ’지역들‘로 만개한다.(「아프리카 14」) 아프리카 55개국이 시인의 ‘컨베이어’에 얹혀 자음 머릿소리 순으로 호명될 때 ‘왕국’의 신민들은 합창한다. “누가 저런/ 멋진”(「?」) “?”를 “만든 거야”!
에필로그
나는 『코르크 왕국』 이후 시인의 “공정”(「자전과 공정」)이 궁금하다. ‘컨베이어’에 오른 이상 이 “싸움”(「군중 속의 고독」)은 “넘어지고 쓰러져야만 끝나는 싸움” 아닌가.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기우인 게 그는 이미 “전열을 가다듬었고” 시인의 작업대 위 ‘공구들’은 여전히 “팽팽하”(「사소한 하루」)다.
약력 지하철 노동자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78 숭실대입구역 고객상담실
우편번호 07040
1) 「사막을 건넌 나비」, 「나비문신」
2) 「열흘」, 「부엉이와의 동행일지」, 「저문 강」, 「머큐리」, 「반영월식」, 「일곱 난쟁이와 나타샤」, 「황무지」, 「귀환」, 「낡은 액자」, 「달콤한 칩거」, 「절지새」, 「경계의 술사들」, 「감나무통신」
3) 「식음하는 당신을 식음하는」, 「사막을 건넌 나비」, 「황무지」, 「개미집」, 「탈무드의 어원을 떠올릴 때」, 「애벌레」, 「유리물고기」, 「자각몽」, 「붉은 눈」
4) 시를 읽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과문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내 주위에 시를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념상 읽는 행위를 이해하는 일로 간주할 경우 시는 오해와 전복과 위반과 억측의 연속이다. 연갈이 앞에서 행이 얼띤 표정을 짓는다. 덜거덕거리는 문장들. 잦은 행갈이 탓이다. 독자들에게 연갈이/행갈이는 난데없다. 벌레처럼 톡톡 튀는 단어들은 어떤가.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그러니 졸거나 잠들 수밖에.
5) 『사막을 건넌 나비』는 잠의 기록에 가깝다. 수록작 44편 가운데 16편이 잠의 휘장 아래 있다. 용어를 달리해 환상, 상상, 악몽, 비몽, 회상으로 대치했을 뿐 나머지 편도 거의 잠에 잇닿아 있다.(「부엉이와의 동행일지」, 「사막을 건넌 나비」, 「인셉션」, 「머큐리」, 「반영월식」, 「빙궁(氷宮)」, 「황무지」, 「귀환」, 「유리물고기」, 「익사자」, 「자각몽」, 「붉은 눈」, 「달콤한 칩거」, 「손잡이」, 「짜부예차카 이야기」, 「경계의 술사들」)
6) 지나고 나니 에피소드로 남았지만 나는 그날 『코르크 왕국』(정연홍)을 잃어버렸다. 광안리 횟집에서 나와 정연홍 시인을 만나기 위해 일광 가는 택시에 올랐는데 시집이 보이지 않더라. 다시 광안리로 돌아가 횟집과 골목과 광민지구대와 카드회사와 택시기사님을 탐문했지만 사라진 시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분실인지 도난인지 알 수 없는 그래서 그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골목을 서성거리는데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사막을 건넌 나비」)오더라. “돌아서서 한참 동안 바라”본 기억이 난다. 훗날 추억할까. 그건 그렇고 시집을 가득 메운 메모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7) 이수명의 ‘물류창고’ 연작이 떠오른다.(『물류창고』, 문학과지성사, 2018) 이수명의 ‘물류창고’ 연작은 ‘변이’(의미)와 ‘유희’(언어)란 쌍륜(雙輪)이 큰 축을 이뤄 연작을 끌고나간다. ‘변이’(이수명) 곁에 ‘변개’(정연홍)가 있다. 이수명이 ‘변이’를 통해 사물들 ‘낯설게-보기’를 시도할 때 정연홍은 ‘변개’로 사물들 ‘새롭게-보기’에 도전한다.
8) 시집에 (언급된 순으로) 얼룩말, 원숭이, 하이에나, 악어, 기린, 전갈, 사자, 누우, 독수리, 블랙맘바, 버펄로, 영양, 도마뱀, 파리, 뱀, 지렁이, 말똥구리, 치타, 들개, 자칼, 까마귀, 코요테, 재규어, 아나콘다, 카피바라, 펭귄, 들소, 쇠똥구리, 타조, 코끼리가 등장한다. ㅡ글쓴이, 이정현 <사진작가,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