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18 이재은 (수정2)
1. 주연배우 합격
(1) 후, 들어갈까? 아냐. 그냥 갈까? 아냐 아냐 그래도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아니지. 아 어떡하지. 들어가? 말아? 아아아 몰라몰라 나도 모르겠다 어쩌지. 사당역 지하연습실 문 앞에서 몸을 문 쪽으로 돌렸다 다시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서성였다.
(2) 뮤지컬을 처음 만난 건, 대학생 때였다. 친구가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을 보러 가자 했다. 빗속에서 남자주인공이, 들고 있던 우산을 접고 빗속에서 춤추는 그 장면이 아직도 내 눈앞에서 생생하다. 몸 안 세포들이 다 하나하나 곤두서서 나를 찌르는 듯했다. 소름과 전율이 범벅되는 그런 느낌이라 해야하나. 사랑에 빠진 남자가 빗속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춤을 추고 있는데,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횡격막도 갑자기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순간 숨 쉬는 걸 잊은듯했다.
(3) <싱잉 인 더 레인>을 시작으로, 점점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한국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작품은 다 보고 싶었다. 그러나 뮤지컬 관람료는 대학생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가격이 조금 싼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친구랑 시간을 정해서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보게 되었다. 매번 친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고, 나만 보고 싶은 공연이 있기도 했다. 혼자 예매하니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편한 시간에 언제든 가서 볼 수 있었다. 더 좋은 건 취소된 자리 중에 앞자리에 있는 1개 좌석을 예매할 수도 있었다. 미친 듯이 공연을 보러 다녔다. 티켓북으로 정리해 두기 시작했는데, 어느 해에는 1년 동안 40편 넘게 공연을 보기도 했다.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비가 거의 티켓비로 충당되었다.
(4) 혼자 공연을 보러 다니는 시간은 행복했다. 객석에서 공연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무대 위 배우가 되어 있었다. 같이 울고 같이 웃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뛰고 황홀했다. 처음엔 혼자 심심하고 외롭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외롭기는커녕, 공연이 끝나고 그곳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엔돌핀이 꽉 차 가기 전보다 더 쌩쌩했다. 지쳤던 몸에 충전기를 꽂고 온몸 가득 충전한 느낌이었다.
(5)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 졸업을 준비할 무렵, 멘토 수업이 있었다. 멘토 프로그램은, 졸업 전에 미래 청사진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재학생 멘티들에게 멘토가 인생선배로 살아있는 삶의 지혜와 현장경험을 전해주는 수업이다. 그 중 나는 <뮤지컬의 세계로> 라는 멘토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문희경' 배우가 뮤지컬에 대한 수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희경 배우는 MBC 87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뮤지컬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당시 뮤지컬 <밑바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학과 친구들은 모두, 임용고사나 취업을 위한 멘토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뮤지컬을 선택한 교육학과 생은 나뿐이었다. 뮤지컬 배우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분이 우리 학교 선배님이라고 하니, 뮤지컬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6) 문희경 선생님 수업을 들으며, 함께 한 학생들과 뮤지컬 창작 작품을 만들었다. 대본을 쓰고, 노래를 선택하고, 무대 발표를 위해 함께 준비했다. 나의 첫 뮤지컬 공연이었다. 커튼콜 때 인사하며 박수를 받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뮤지컬에 대한 사랑은 더 커져만 갔다. 프로 배우가 되고 싶었다.
(7) 어떻게 하면 뮤지컬 배우를 할 수 있을까? 검색을 계속했고, 뮤지컬 아카데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조용히 몇 개의 오디션을 보러 갔다. 계속 떨어졌다. 프로가 되기에 내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디션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대 위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았다. 무대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 무대에 서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아마추어 뮤지컬 동호회 활동을 했다.
(8) 그날도 뮤지컬을 검색 하던 중, 우연히 네이버 카페의 공지글을 보았다. 아마추어 뮤지컬 동호회 에서 '맘마미아' 공연을 한다는 글이었다. 공개오디션을 본다고 했다. 읽자마자, 댓글에 바로 적었다.
-오디션 신청합니다/주연배우
동호회 공연의 오디션이었지만, 나는 주연배우가 되고 싶었다.
(9) 지하연습실 문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도 아닌데, 이렇게 주저하고만 있기는 싫었다. 이왕 왔고, 그냥 한번 들어가 보지 뭐. 들어가자.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열댓 명 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고, 내게로 모아진 시선에 어디를 봐야할 지 난감했다.
"오디션 보러 오셨나요?
"네."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오디션을 도와주는 분들도 있었고, 오디션을 보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0) 오디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준비해간 것은 뮤지컬 <렌트>의 ‘모린’ 역이었다. 모린은, 유쾌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양성애자이면서 거리행위 예술가, 이전에 맡았던 나의 역할이었다. 모린은 10분 동안 혼자 무대 중앙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원맨쇼를 한다. 헬멧을 들고 위아래 가죽 쟈켓과 가죽 바지를 입고 가죽 롱부츠를 신고 고개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들면서 찬란한 조명과 함께 당당하게 등장한다. 무반주 노래를 한다. 썬그라스를 끼고 랩도 한다. 중간중간 박자를 맞추기 위해, 드럼채를 흔든다. 누군가를 조롱하며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을 하고 이 행위예술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이 때 했던 공연의 한 장면을 오디션으로 준비했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 같은 노래를 매일 2시간 이상 연습했고, 보컬 레슨도 따로 받았다. 당당한 몸동작과 제스쳐를 위해, 거울을 보며, 어깨 각도, 다리 자세, 손동작을 허리에 번갈아 가며 올려보기도 하고, 허리 꼿꼿이 펴는 연습을 했다. 골반을 한쪽으로 내밀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폼나 보이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연구도 했다. 영상을 찍어서 스스로 모니터도 했다. 그때의 그 시간이 내 몸에 베여있었기 때문에, 오디션장에서 심사하는 분들에게 내 모습을 편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심사하는 분의 얼굴을 슬쩍 보니 놀란 것 같았다. 오디션 결과가 좋을 것 같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주연배우로 합격!
(11) 드디어 나는 주연배우가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내 꿈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갯짓을 하면 날아오를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난 날아오를 것이다. 그때까지 날개가 부러지도록 날갯짓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