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7년 정유(1417) 6월 1일(을유) 양력 1417-07-14
17-06-01[03] 장례 제도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고 도참서를 불태우라고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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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제도를 의논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옛날에 천자(天子)는 7개월, 제후(諸侯)는 5개월, 대부(大夫)는 3개월, 사(士)는 1개월을 넘겨 장사 지냈는데, 지금은 혹 1년이 지나도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옛 제도에 매우 어긋난다. 또 가장(假葬)을 한다고 하면서 시신을 들판에 두고서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은 어느 아들, 어느 손자의 생일과 겹치고, 누구누구에게는 적호(的呼)가 된다.’라고 하면서 자손의 이해(利害)를 따진다. 자손이 많은 경우에는 혹 2년이나 3년이 지나도록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또한 많다. 만약 사는 1개월 만에, 대부는 3개월 만에 장사 지낸다면 상사(喪事)를 구비하지 못할까 이것이 또한 염려스럽다. 그런데 고려 말기에 삼일장(三日葬)을 지낸 자가 있었으니, 어찌 그 자손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가려서 장사를 지냈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삼일장은 옛 제도가 아니니, 5개월, 3개월, 1개월이 지난 뒤에 장사를 지내는 제도를 따르소서.”
하자, 이조 판서 박신(朴信)이 아뢰기를,
“음양가(陰陽家)가 제가(諸家)의 장례(葬禮)에 관한 서적을 모아 이론(異論)이 분분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속임을 당하고 미혹하게 하고 있습니다. 장례에 관한 서적을 모두 모아서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여금 그 대요(大要)를 추리게 하고 기타 괴이한 서적은 모두 없애 쓰지 말도록 하여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것을 막으소서.”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법과 제도를 새로 만들 때에는 모름지기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개정하지 않게 해야 하는데, 갑자기 법과 제도를 세우게 되면 필시 빨리 무너질 것이다. 경들은 예전에 장사 지내던 법에 의거하여 제도를 정해서 영구히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도모하라.”
하였다. 조말생(趙末生)이 예조의 장신(狀申)에 의거하여 대부는 3개월 만에, 사는 1개월 만에 장례를 지내는 제도에 대해 아뢰니, 주상이 말하기를,
“이는 실로 좋은 법이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박은(朴訔)이 아뢰기를,
“장례에 관한, 괴이한 서적을 불태워 버려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을 막으소서.”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서운관에 있는 괴서(怪書)는 모두 불살라 버릴 수 있으나 사사로이 소장하고 있는 괴서는 어찌 다 불살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세우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하자, 박은이 아뢰기를,
“사람들의 사사로운 연고는 다양하니, 서운관으로 하여금 통용할 수 있는 장삿날을 함께 의논하게 하고 만약 정한 달 안에 사정이 있으면, 연기하여 장례를 치르는 법을 아울러 논하게 한 다음에 괴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게 하소서.”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내가 서운관이 예전에 보관하고 있던 참서(讖書)를 모두 불살라 버리게 하였는데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제왕(帝王)의 행적을 두루 살펴보니, 참위(讖緯)의 설(說)을 논하는 자들은 모두 취하지 않았다. 술수(術數)로 말하면 수(數)에 기인하지만 참위와 같은 것은 허탄(許誕)한 데에서 비롯하니 실로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총명한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도 도참(圖讖)에 미혹되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비난하였는데, 이는 광무제가 도(道)를 순전(純全)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 참서에서 언급한, 목자(木子)와 주초(走肖)에 관한 설이 개국 초기에 있었는데,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호사가(好事家)가 지어낸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마침내 이 글을 따랐으니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정안군(靖安君)으로 있을 때에도 이 글을 믿지 않았고, 천도(遷都)하는 날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이 글을 깊이 믿고서 도읍을 모악(母岳)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나 혼자 믿지 않고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만약 참서를 불사르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를 밝게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살라 버리게 하는 것이 이씨(李氏) 사직(社稷)에는 필시 손해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원전】 2 집 171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주-D001] 적호(的呼) : 입관(入棺)이나 안장(安葬)을 할 때 그날 일진(日辰)과 상충(相沖)되는 사람을 기피하는 일이다. 상충되지 않는 것은 ‘정호(正呼)’라고 한다.
[주-D002] 이조 : 원문은 ‘吏書’이다. 《태종실록》 정족산본(鼎足山本)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書’를 ‘曹’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3] 목자(木子)와 …… 설 : 목자는 ‘이(李)’의 파자(破字)로 이성계(李成桂)를 말하고 주초는 ‘조(趙)’의 파자로 조준(趙浚)을 말한다. 조선 초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의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그 글에 “목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하였으며 조준이 이성계를 도와 건국할 것이라고 하였다. 《太祖實錄 1年 7月 17日, 2年 7月 26日》
[주-D004] 마침내 …… 따랐으니 : 원문은 ‘竟從是書’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권4 〈태종조(太宗朝)2〉에는 ‘書’ 뒤에 ‘遂上受寶籙之曲’이 더 있다. 이는 정도전이 지리산의 석벽 속에서 얻은 글을 따라서 〈수보록(受寶籙)〉을 지어 올렸다는 사실을 부연한 것이다. 《太祖實錄 1年 7月 17日, 2年 7月 26日》
[주-D005] 모악(母岳) : 무악(毋岳)으로 모(母)와 무(毋)는 통용하는 글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李睟光)은 부아암(負兒巖)이 아이가 집을 나가는 형상이기 때문에 이 산을 모악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 漢城府》
예조가 대부와 사의 장례 제도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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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가 대부(大夫)는 3개월이 지난 뒤에 장사를 치르고 사(士)는 1개월이 지난 뒤에 장사를 지내는 제도를 올렸다. 그 내용에,
“옛날에 대부는 3개월이 지나 장사를 지내고, 사는 1개월이 지나 장사를 지냈으니, 이는 성인(聖人)께서 만드신 지극히 공명정대한 제도로 《육전(六典)》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날 장사 지내는 자가 대부분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를 받아 조심하느라 혹 1년이 다 되도록 끌기도 하니 매우 법도에 어긋납니다. 이제부터는 대부나 사를 이미 빈소(殯所)에 안치하였으면, 그 자손은 즉시 기한으로 삼은 달 안에 장삿날을 본조(本曹)에 보고하게 하고 예장(禮葬), 증시(贈諡), 치부(致賻)의 은전(恩典)을 내려야 할 자는 본조가 보고하여 각 관사에 관문(關文)을 보내게 하소서. 기한으로 삼은 달을 넘겨서 장삿날과 묏자리를 택하거나 장삿날을 본조에 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상주(喪主) 및 택일한 자, 묏자리를 잡은 자를 모두 교지(敎旨)를 따르지 않은 죄로 논하되 어쩔 수 없는 큰 사정이 있는 자는 여기서 제외하도록 하소서.”
하니, 주상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171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육전(六典) : 태종 13년(1413)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정, 보완하여 《원육전(元六典)》, 《원전》이라고 하였으며 태종이 즉위한 이래로 반포한 교지(敎旨)와 조례(條例)를 모아 《속육전(續六典)》을 편찬하였다. 《太祖實錄 6年 12月 26日》 《太宗實錄 13年 2月 30日》
일성록 > 정조 > 정조 10년 병오 > 1월 22일 > 최종정보
○ 행 부사직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수성하는 계책으로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로는 관서와 관북 두 변방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서로(西路)로 말한다면 관서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인후(咽喉)에 해당되는데 동선(洞仙)과 극성(棘城) 두 길뿐입니다. 동선은 산과 고개가 겹겹이 막고 있어 실로 천험(天險)의 요지인 데다 또 성을 쌓아서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기 때문에 적병이 돌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성은 산맥이 중간에 끊기어 아래로 평지를 이루고 이곳을 지나서 동쪽으로는 옆으로 서봉(瑞鳳)의 들이 나오고 험한 고개 하나 없이 곧바로 경사에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 때에 동선을 놓아두고 극성으로 길을 잡아서 거침없이 곧바로 나왔던 것이니 그 요해로는 이보다 큰 곳이 없습니다.
석년(昔年)에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의 건의로 산산 첨사(蒜山僉使)를 극성과 정방(正方) 사이에 설치하였는데 참으로 심오한 계책이었지만 위치가 평야이고 규모는 처음 창설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 겸영장(兼營將)으로 승격하였으나 이졸이 적고 물력이 형편없으며 또 견고한 성책(城柵)이 없으니 어떻게 수어의 공을 이루도록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이 지역은 옛날 고려 때의 석성(石城)과 토성의 터가 있는데 동서의 길이가 3000여 보(步)에 불과하지만 오른쪽에는 중첩된 산이 있고 왼쪽에는 포구가 있으니, 만약 옛 성터를 그대로 따라서 그 흙과 돌을 사용한다면 일은 절반의 힘만 들이고도 그 공은 배나 되어서 동선과 함께 큰 방어처가 되어 직서(直西) 한 지역에 중문(重門)을 다는 것과 같은 견고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량을 더 지급하고 인민을 모으는 일 등은 차례로 두서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북변으로 말하면, 후주(厚州)의 옛 읍이 삼수(三水)ㆍ갑산(甲山)과 철폐한 사군(四郡) 사이에 있는데 들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척박한 삼수ㆍ갑산과 다르고, 지대가 낮고 서리가 늦어서 몹시 추운 삼수ㆍ갑산과 다르니 참으로 살 만한 좋은 땅입니다.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관찰사로 있을 때에 직접 가서 살피고 소장을 올려 건의해서 마침내 무산(茂山)과 함께 읍진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사군을 점차 회복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무산은 그대로 큰 부(府)가 되어 전야가 날로 개척되고 인민이 날로 모여들어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해마다 곡식이 잘 여물어 창고가 가득 차서 육진(六鎭)의 여러 읍들이 모두 이곳의 곡식으로 먹고사니 그 이익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후주는 진을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국경을 넘어간 일이 발생하여 갑자기 철폐하였기 때문에 곡식 종자와 채소 뿌리가 아직까지 저 혼자 무성히 자라니 북쪽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그 지세가 막혀 있는 큰 고개가 없어 두만강 밖에서 곧바로 함흥(咸興)으로 통하여 실로 서북 양계(兩界)의 관문이므로 결코 빈 땅으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연해의 전함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인데 배를 정박한 포구가 막힌 곳이 10곳 중에 7, 8곳이나 되어 한 달 안에 조수를 타고 뜰 수 있는 때가 몇 차례에 불과하니, 급할 때에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배가 썩는 것이 전적으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물길을 뚫는 것이 실로 급무이니 이것으로 각 도의 수곤(水閫)에게 분부하여 영과 읍진의 포구를 막론하고 전함이 있는 포구 중에 만약 막힌 곳이 있으면 즉시 파내어 배가 드나드는 길을 열게 하되, 만약 각 진의 사역에 동원할 역량이 일시에 모두 거행하기 어려우면 수곤에서 편비를 보내 상세히 적간하고 그 완급에 따라 차례로 거행하며, 거행할 때에 들어가는 진졸(鎭卒) 외에 도에 넘치게 차출하여 쓰거나 부당하게 침학하는 폐단을 일체 엄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북우후(北虞候)를 변통하는 일은 오직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고 신구 당상에 관계가 없습니다. 차견할 때에 신구 당상을 막론하고 반드시 지망이 조금 나은 사람으로 매우 신중히 가려서 내려보내고,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고 형편없는 사람을 구차하게 충원한다면 해당 전관은 연석에서 아뢰어 논책한다는 뜻으로 정식을 삼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포구를 파는 일은, 여러 수곤 중에 파낼 곳이 있고 이전대로 사용할 곳이 있는데 어찌 분명하게 적시하여 회계하지 않는 것인가. 이번 회계는 이 일 저 일을 막론하고 종결짓는 것만을 위주로 하여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면치 못하였다. 한 달이 넘도록 보았으면서 어찌 이렇게 허술하게 한단 말인가. 경들은 추고하겠다. 말단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
“각 도의 포구 중에 막혀서 물길을 뚫어야 할 곳도 있고 물이 깊어서 이전대로 사용해야 할 곳이 있는데 일전의 회계에서 흐리멍덩하게 뒤섞어서 말이 분명하지 못하여 칙교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신들은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느 영읍이 조수에 따라 배가 뜨기도 하고 움직이지 못하기도 하여 배가 빨리 썩고, 어느 진의 포구가 갯벌이나 모래에 막혀 있어서 급히 물길을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 즉시 각 도의 수곤에 관문을 보내 물어서 사세의 편리 여부와 역부(役夫)의 다소를 일체 이치를 따져 보고하게 하고 보고가 올라온 뒤에 다시 구별하여 분부해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조 10년 병오(1786) 1월 22일(정묘)
10-01-22[01]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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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총관(副摠管) 유진항(柳鎭恒)의 소회(所懷)에,
“신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보고 들은 것도 적어 시정(時政)의 잘잘못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의 완급에 대해 평소 강구해 본 것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억측해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이 5년 동안 북로(北路)에 두 번이나 다녀왔으므로 관액(關阨)의 형편과 군민(軍民)의 고충에 대해서 대략 마음속으로 깊이 헤아려 본 것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인정문(仁政門)에 납시어 구언하시는 날에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감히 이렇게 몇 조목 진달합니다.
첫째, 북관(北關)은 평소 언제 변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역으로 불리는데, 영읍의 군제가 대부분 문란합니다. 정묘년(1747, 영조23)에 절목(節目)을 개정한 뒤로 세월이 조금 오래되자 폐단이 예전과 같게 되어 향인의 서속(庶屬)들은 함부로 유학(幼學)이라 칭하여 소속된 바가 없고, 장교의 자제들은 군역에 끼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반드시 모두 면하려고만 합니다. 근년 이래로 세속의 풍조가 점차 천박해져서 활쏘기나 말 타기를 익히는 사람은 향리에서 천하게 여기고 이름이 군안에 편재된 사람은 족당이 수치스러워하니, 마병이나 보병을 막론하고 모두가 쇠잔하고 나약하여 쓸모없는 자들뿐이고 원래의 정원이 대부분 채워지지 않고 비어 빈 장부만 끼고 있는 형편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이와 같이 허술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조금이라도 바로잡고자 한다면 정묘년의 군제를 거듭 밝혀 향인의 서속이나 출신(出身), 군함(軍銜), 장교의 자손은 모두 절목에 의거하여 각기 상당하는 임역(任役)에 차출하고, 그 나머지 양정(良丁)으로서 장교로 모속(冒屬)하였거나 교생(校生)이라 가칭하는 자는 모두 조사해 내어 군안에 편성해 넣어야 할 것이니, 그러면 각 읍의 군정이 점차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본도의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편의를 상세히 강구하게 함으로써 군정을 정비하고 민폐를 없앨 방도로 삼으소서.
둘째, 북병영(北兵營)의 번군(番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3000여 명의 군졸이 관북(關北)의 10개 읍에 흩어져 있어 수백 리 길을 식량을 싸 들고 왕래하게 되는데, 한겨울에는 추위에 얼어 죽을까 하는 근심이 있고 큰 흉년에도 탈(頉)로 인정하여 입번을 제해 주는 예가 없습니다. 한번 편재되어 들어가면 나올 수 없어 아들에게 전해지고 손자에게까지 이어지니, 그 치우친 고통이 실로 불쌍합니다. 전후의 수신이 매번 변통하기를 어렵게 여겨 그대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민폐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어찌 바로잡아 고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한결같이 통영(統營)의 삼질(三秩)의 역에 대해 급대하는 예에 의거하여 각 읍 소재 3012명의 군졸에 대해 모두 입번을 제해 주고 각기 1필씩의 포를 거두어 본영 근처의 거주민에게 급대하여 입번하게 한다면 필시 소속되기를 바라는 부류가 많을 것이어서 먼 지역의 번군이 왕래하는 폐단을 영구히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과 수신에게 분부하여 즉시 장문하여 변통하게 하도록 하소서.
셋째, 단천부(端川府)는 마천령(磨天嶺)과 마운령(磨雲嶺)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위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 북관 아홉 곳의 관액의 하나인 마천령을 지킨다면 실로 한 명이 관문을 지키더라도 만 명이 열지 못하는 형세가 될 것이고, 설혹 잃게 되더라도 물러나 마운령을 지키면 될 것이니, 천혜의 험준한 관방(關防)으로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지름길과 샛길도 모두 이곳에서 나가게 되니, 남관과 북관의 요충지라 할 만합니다. 지금 단천부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길주(吉州)와 서로 표리가 되어 성세가 호응하도록 한다면 이 길의 울타리가 영구히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품처하게 하소서.
넷째, 북병사(北兵使)가 종성(鍾城)의 행영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처음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을 때 남아서 번호(藩胡)를 막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경에 경계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여전히 예전 규례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매우 의의가 없습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우려스러운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면, 행영이 두만강(豆滿江)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데, 강이 얼어붙은 뒤 뜻밖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열읍의 군병이 미처 소집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서 결박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또 지형이 낮고 큰 고개가 앞에 있으니, 결코 병영을 설치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사세와 형편으로 논할 때 이미 우려스러운 점이 많고, 변정(邊政)의 득실은 북병사의 이주 여부와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행영을 영구히 없애고 우후(虞候)를 별도로 두어 진수(鎭守)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남병사(南兵使)가 갑산의 행영에 패장 한 명만을 보내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묘당에 하문하시고 재결하여 처리하소서.”
○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박광원(朴廣源)의 소회에,
“신이 임치진 첨사(臨淄鎭僉使)를 맡고 있을 때 삼가 그 지세와 형편을 살펴보니, 본진은 함평(咸平) 땅 해제면(海際面)에 있는데 서쪽으로는 험준한 칠산(七山)이 대양(大洋)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본래 진(鎭)을 설치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다만 수조(水操) 때가 되면 5척 배의 군졸이 100여 리 밖에 흩어져 있어 먼 데서 군역에 나오느라 매번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태평한 시기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급박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장차 어디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본진의 군졸 가운데 100여 리 밖 본현 땅에 사는 자는 본현으로 소속시키고, 본현의 군졸 가운데 본진 가까운 땅에 사는 자는 본진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본진의 성 안에 본현의 창(倉)이 있기 때문에 본현의 이졸들이 자주 왕래하는데, 적은 숫자의 진졸들이 이들을 접대하는 데 지치고 이들의 요구가 혹독하면 버텨 생활해 나가기 어려운 지경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이 차차 떠나가서 지금은 70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제면을 본진에 소속시키면 본창도 본진으로 이속하게 되어 진졸을 보존하는 방도가 될 듯합니다.”
○ 성균관 학정 차봉운(車鳳運)의 소회에,
“신은 지금 구언하시는 명을 받들고 감히 본도의 시폐로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평안도는 먼 서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이런 저런 경로로 전해지는 교화를 입기는 해도 오히려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긴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환곡으로 말씀드리면, 가을에 환곡을 상환받을 때 쇠잔한 백성들은 실곡(實穀)으로 수량을 채워 넣는데 이노(吏奴)들은 피곡(皮穀)으로 수량을 채워 놓고, 봄에 환곡을 분급할 때 알맹이가 있는 곡식은 모두 이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알맹이가 없는 곡식은 백성들이 모두 받아먹게 되니, 환정(還政) 가운데 이보다 더 균평하지 못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잡아 구제하는 방도는 따로 어사를 파견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어사가 한 번 지나가면 교활한 아전이라도 쫓겨나 굴복하고 간사한 백성이라도 두려워 그치고는 관장(官長)을 따르게 되어 묵은 폐단이 제거되고 새로운 교화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주 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상세히 살피게 하소서.”
○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박제가(朴齊家)의 소회에,
“신이 이번 달 17일에 삼가 비국(備局)의 통지를 받드니, 위로 경재(卿宰)로부터 아래로 시위하는 군병까지 온갖 직무를 맡은 신하들은 각기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되 감히 말하지 않는 바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왕업을 열어 계통을 이어 온 지 400년이 되었는데 정치와 교화가 밝고 융성하여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에 그 아름다움을 견줄 만하고,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0년이 되었는데 온갖 법도가 정비되었고 논의하고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성상께서 반드시 먼저 행하시어 실로 올릴 만한 말씀이 없으니, 꺼려 숨기고 두려워 피함이 있어서 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상께서 스스로 성신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재변을 만나 더욱 부지런하여 하찮은 신하에게까지 물으셨으니, 신이 우매하고 무지한 죄를 피하지 않고 대략 한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인데, 어떻게 하면 가난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면 중국(中國)과 통상하는 길뿐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사신 한 명을 급히 보내어 중국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전하되, ‘있는 것을 팔고 없는 것을 사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일본(日本), 유구(琉球), 안남(安南), 서양(西洋) 등이 모두 민중(閩中), 절강(浙江), 교지(交趾), 광동(廣東) 지역에서 교역할 수 있으니, 우리도 여러 외국과 같이 수로(水路)로 상인들을 교통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랍니다.’ 하면, 저들이 필시 아침에 청한 부탁을 바로 저녁에 허락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황당선(荒唐船)을 불러들여 길 안내자로 삼으면 됩니다. 황당선은 모두 광녕(廣寧) 각화도(覺化島)의 백성들이 법을 범하며 몰래 나오는 것으로, 항상 4월에 와서 방풍(防風)을 채취하고 8월에 돌아갑니다. 이미 금지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인하여 교역할 수 있는 시장을 열어 주고 뇌물을 넉넉히 주어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연해 여러 섬의 물길에 익숙한 백성들을 모집하여 관리의 영솔 아래 표문(票文)을 가지고 가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배는 장연(長淵)에 정박하게 하고, 금복(金復)과 해개(海蓋)의 물산은 선천(宣川)에서 교역하게 하고, 강남(江南)ㆍ절강ㆍ천주(泉州)ㆍ장주(漳州)의 재화는 은진(恩津)과 여산(礪山) 사이에 모이게 한다면 영남(嶺南)의 면화와 호남(湖南)의 모시, 서북(西北)의 삼베가 비단과 모직물로 바뀌고, 죽전(竹箭), 백추지(白硾紙), 낭미필(狼尾筆), 곤포(昆布 다시마), 복어(鰒魚) 등의 산물이 금, 은, 무소 뿔, 외뿔소 뿔, 병기, 갑옷, 약재 같은 것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배와 수레, 궁실, 기물의 이로움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천하의 도서를 유치하여 융통성 없는 유생과 세속적인 선비들의 편협하고 고집스럽고 잗단 견해를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우리나라는 스스로 예법과 교화를 확립하고 있으니, 비록 애써 청(淸)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기는 해도 본래의 의지는 아니다. 문자와 제도에 저촉되는 것이 많으니, 실로 이쪽에서 가서 누설하고 저쪽에서 와서 엿보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데, 신은 삼가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의 회계(會稽)에 억류되어 있을 때 밤낮으로 나라 사람들과 함께 모의한 것이 모두 오나라를 없애는 일이었으니, 급박한 상황이라고 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이 누설되지 않은 것은 나랏일을 의논한 자들이 적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큰일을 도모하는 자는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는다고 하니, 의심하고 주저해서야 무슨 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금이나 하는 박옥을 가공하고자 하여 공인(工人)을 이웃 나라에서 찾아오는데, 그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할까 두렵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중국의 흠천감(欽天監)에서 역(曆)을 만들고 있는 서양인들이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도에 정통하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진실로 맡겨서 관상감(觀象監)의 비용으로 그 사람을 초빙하여 근무하도록 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제들로 하여금 천문, 그 운행 궤도, 종률(鍾律 음률(音律)), 의기(儀器 과학 기구)의 도수(度數)와 농잠, 의약, 자연 재해, 기후 변화의 일을 배우게 하고, 아울러 기와와 벽돌의 제조 기술, 궁실과 성곽, 교량의 축조 기술, 동과 옥을 채굴하는 기술, 유리를 굽는 기술, 방어용 화포의 설치 기술, 관개의 용도로 물을 이용하는 법, 수레의 운행과 선적의 기술, 나무 채벌과 석재 운반 기술, 무거운 것을 먼 데까지 운반하는 기술을 배우게 한다면 몇 년 되지 않아 세상을 다스리는 데 꼭 필요한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불교(佛敎)를 받아들인 것이 오히려 천고에 누를 끼쳤다. 구라파(歐羅巴)는 중국과 구만리 떨어진 먼 곳에 있고 천주교라는 이교를 숭상하여 사람들이 자못 별다르다. 또 해외의 여러 오랑캐들과 통하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 무리 수십 명을 한집에서 지내게 한다면 필시 난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 그 사람들은 모두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멀리 떠나와 포교를 한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비록 그 종교가 천당과 지옥을 독실하게 믿어 불교와 차이가 없지만 그 후생의 도구는 또한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를 취하면서 한 가지를 금하는 것은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다만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여 불러도 오지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놀고먹는 자들이 나라의 큰 좀인데, 놀고먹는 자들이 날로 불어나는 것은 사족(士族)이 날로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무리가 나라에 두루 퍼져 있어 한 가닥 과거를 통해 벼슬하는 방도로는 다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들을 처리할 방도가 있어야 근거 없는 말들이 조작되지 않고 나라의 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수로와 육로로 교통하며 장사하는 일에 사족들이 입적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여, 혹 비용을 마련해서 빌려 주거나 점포를 설치하여 지내게 하거나 현직(顯職)에 발탁하여 권면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날로 이익을 좇도록 하여 놀고먹는 추세를 점차 없애고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열어 주어 그 호강한 권세를 없애도록 하소서. 이것이 또한 현재의 상황을 전환하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밝은 자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를 못 쓰게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재가 찾아보기 어려운데도 길러 낼 방도를 생각지 않고, 재용이 날로 고갈되는데도 통상에 힘쓸 방도를 생각지 않으면서 ‘세상이 나빠져서 백성이 가난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나라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직무를 보는 것이 더욱 대충이어서 관청에 있을 때에는 하속들에게 맡기고 국경을 나가서는 역관들에게 맡겨 둔 채 좌우에서 자신을 부축하게 하면서 ‘체모가 구차해서는 안 된다.’ 합니다. 이것은 사대부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의(疑)와 의(義)의 수풀 속에 갇혀 꼼짝 못하고 변려문(騈儷文)의 길에서 힘을 다 소진하고 나서는 천하의 책들을 묶어 둔 채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과문(科文)을 공부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않는 자도 있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않는 자도 있으며, 가까운 친척인데도 종처럼 대하는 자도 있고 머리가 허옇고 검버섯이 핀 노인인데도 머리 땋은 아이들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할아비 항렬이나 아비 항렬이어도 예를 표하지 않으면 그 손자나 조카가 어린데도 그 어른을 나무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기양양하게 천하를 깔보며 오랑캐로 여기면서 스스로는 예의이며 중화(中華)라고 하니, 이것은 습속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대부는 나라에서 만들어 준 것인데, 나라의 법이 사대부에게 시행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못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거는 인재를 모아 인재를 취하는 방법인데, 인재를 취하는 것이 과거로 말미암아 허물어진다면 스스로를 못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원을 세워 제향하는 것은 유교를 높이려는 것인데, 양역(良役)을 피하는 양정(良丁)들과 양조(釀造)의 금지를 무시하는 자들이 몰려드니, 스스로를 못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라에서 위의 네 가지 속이는 일과 세 가지 못 쓰게 만드는 일에 대한 말의 의미를 잘 따져서 유형에 따라 분석하여 잘못된 관행을 씻어 내고 미혹된 자들을 깨우쳐 준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반은 이루어진 셈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서는 이서(吏胥)들의 생각을 채용하며, 선비들이 광대놀음을 하고 남자들이 여인들의 습속을 따르는데도 고쳐지질 않고 있습니다. 속된 사람이 어진 사람보다 많으면 속된 사람이 이기고, 이서가 관장보다 많으면 이서가 이깁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서들의 생각을 채용한다.’고 한 것입니다. 처음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얼굴에 먹칠을 하고 뛰며 춤추는 것이 광대놀음이 아니겠으며, 몽고(蒙古) 복장을 하고 엄숙하게 집 안의 부엌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부인네 같은 습속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 가지 일이 꼭 다급히 해결해야 할 시무(時務)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사하게 서로 연관되어 풍기가 진작되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로 부디 습속에 얽매이지 않는 기특하고 범상치 않은 선비들을 거두어 등용해서 이서들의 기운을 싹 씻어 버리고, 광대놀음 같은 풍조를 없애 공손하고 겸양하는 풍속으로 바꾸며, 부인네 같은 습속을 버리고 예복을 입게 하소서. 그러면 또한 진작시키는 하나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그 근본을 맑게 하는 데 힘쓰지 그 말단을 다스리는 데 힘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은 간략하여도 이룬 공은 큽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하는데, 신이 보기에는 근본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는 실로 사치로 인하여 망한다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하여 쇠퇴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지 않아 나라에 비단 짜는 기계가 없으니 여인들의 일이 폐기되었고, 노래하고 악기 연주하는 것을 존숭하지 않아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부서져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시키지 않은 말을 타고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진흙 더미로 된 집에서 지내므로 공장(工匠)의 일과 목축, 도기 만드는 일, 야장(冶匠)의 일이 끊기다시피 되었습니다. 따라서 농민은 황폐해져 그 법을 잃었고 상인은 이익이 박하여 그 생업을 잃게 되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도와주지 못하니, 저 가난한 자에게 날마다 회초리를 치면서 사치를 하라고 해도 아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전정의 예를 행하는 곳에는 형편없는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있으며, 동궐(東闕 창덕궁)과 서궐(西闕 경희궁)의 문을 지키는 위사(衛士)들은 무명옷을 입고 새끼줄을 허리에 띠고 서 있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민간의 높게 세운 대문을 헐게 하고 시정잡배가 가죽신 신고 적삼을 입는 것을 적발하고 마졸(馬卒)이 귀마개 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니, 또한 말단적이지 않습니까. 어제(御製)를 받들어 서사(書寫)하는 사자관(寫字官)들에게는 육서(六書)를 한 달만 가르치면 잘못 쓰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또 그 글자 획이나 따로 바로잡으니, 저 잘못 쓰는 자들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하고 신은 또한 바로잡는 일을 이루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나라에 노력을 줄일 수 있을 만한 일이 많습니다.
동이루(東二樓)를 처음 세울 때 지부(地部)에서 사람을 고용하면서 일당 300전(錢)에 30인을 썼는데, 기술도 없으면서 끼게 된 자들은 혹 그늘을 찾아다니며 낮잠을 잤습니다. 계사(計士)가 종이 10장이 필요하다고 고하면 낭관이 그 반을 깎아 버리고 나서 수결(手決)을 두면서 하는 말이 ‘계속 비용이 새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하니, 이것은 5장의 종이는 세세하게 따지면서 9000냥의 돈은 대번에 잃는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나라 재용의 근원에 대해 의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원(政院)이 호령할 때에는 2, 3십 명의 하례들이 팔을 맞잡고 발을 구르면서 외쳐 대어 소리가 몇 리 밖에까지 울리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백사(百司)에 위엄을 보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조(騎曹 병조)의 낭청은 채찍을 들고 있으면서 소리 내는 것을 금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나라의 법령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하나씩 손을 꼽아 가며 셀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 전체의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말이란 작은 일로도 큰일을 비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실로 부디 전하께서는 천근한 말이라도 잘 살피시는 총명함을 넓히시어, 점차적으로 일을 줄이시고 아무리 하찮은 재물이라도 절약하시고 정법(政法) 중에 서로 모순되는 것을 변통하소서. 그러면 그 근본을 맑게 하여 이룬 공이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크게 놀랄 만한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10년 정도 이렇게 시행한다면 온 나라의 전조(田租)는 줄어들게 되고 백관의 녹봉은 늘어나게 되며, 초가지붕에 거적문을 단 집이 화려한 누각을 갖춘 집으로 바뀔 것이며, 도보로 걷고 냇물 건너는 것을 걱정하던 자들이 건장한 말이 끄는 가벼운 수레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날 화기를 범하던 것이 상서를 불러오고, 지난날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못 쓰게 만들던 것이 얼음 녹듯 확 풀릴 것입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하고 경회루(慶會樓)를 중건하고 의정부와 육조의 예전 모습을 되살려 나라 안의 사대부들과 치소(徵招)ㆍ각소(角招)의 음악을 연주하며, 잠깐 수고하고 길이 편안하게 하여 우리 선왕의 전장(典章)을 이어받고 우리 원량(元良)에게 억만년토록 무궁할 터전을 물려주게 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만나기 어려운 것이 성주(聖主)이고 아껴야 할 것은 좋은 시기입니다. 지금 천하가 동쪽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서쪽 끝의 티베트〔藏地〕, 남쪽으로 자바 섬〔瓜哇〕, 북쪽으로 할하〔喀爾喀〕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니, 이는 지난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지금 같은 때 힘을 다하여 스스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을 때 더불어 걱정할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집사를 맡은 신하들이 태평 시절을 과장하여 꾸미기에 겨를이 없는 듯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세상을 경륜할 넓고 큰 학문을 품고 예악을 제정할 능력을 지니셨으니, 왕으로서의 강건한 뜻을 분발하신다면 장차 무슨 일인들 확립되지 않겠으며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조정에서 탄식을 발하며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시고, 주저하며 위축되어 하려고 하면서도 하지 않으신 지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장차 풍속을 그대로 따라 다스리고 미봉하여 대충 때우고 가면서 스스로 소강(小康) 상태에 편안해하실 것입니까. 한(漢)나라 신공(申公)의 말에, ‘잘 다스리는 것은 많은 말을 하는 데 달려 있지 않고 어떻게 힘써 행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행하신다면 근래의 상소문들이 모두 격언이 될 것이고, 행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뜰에 가득한 신하들이 갈수록 더욱 새로운 내용을 말씀드린다 해도 더욱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박일원(朴一源)의 소회에,
“신은 전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맡은 바 있어 일찍이 태묘악(太廟樂)과 사전(祀典)에 대해 삼가 생각하던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은 아악(雅樂)을 사단(社壇)과 황단(皇壇), 문묘(文廟)에 두루 쓰면서 유독 태묘에만은 쓰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생각건대, 우리 세종조 을사년(1425, 세종7)에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병오년(1426)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특별히 황종(黃鐘)을 만들어 악률을 바로잡게 하여 태묘의 제악으로 정하였습니다. 당상에서는 응종(應鐘)의 율을 쓰고 당하에서는 황종의 율을 써서 음이 올라가고 양이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여 만물이 무성해지는 뜻을 취한 것으로, 순 임금의 소악(韶樂)과 은나라 탕왕의 호악(濩樂)에 아름다움을 짝하였으니, 만세에 이르더라도 실로 따라서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릉(英陵 세종)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속악(俗樂)을 쓰게 되었으니, 이른바 속악은 곧 당(唐)나라의 이원(梨園) 음악입니다. 명황(明皇 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촉(蜀)에 행행한 시기에 특별히 신라(新羅)에서 문안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이원의 악부(樂部)를 하사하니 신라 왕이 영광스럽게 여겨 종묘(宗廟)에 올려 마침내 신라와 고려의 종묘악이 되었던 것인데, 장구(杖鼓)는 말갈(靺鞨)의 북이고, 필률(篳篥)은 오랑캐의 갈잎 피리이고, 해금(奚琴)은 해족(奚族)과 거란(契丹)의 거문고입니다. 당상에서 황종을 쓰고 당하에서도 황종을 써서 양뿐이고 음이 없어 오음(五音)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나라에 아악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아악이 있는데도 도리어 속악을 쓰는 것은 실로 밝은 시대의 흠되는 일입니다.
우리 선대왕께서 일찍이 장악원(掌樂院)을 이원으로 칭하는 것을 금하셨고, 이원이라는 이름마저도 금하셨으니 어찌 이원의 음악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때 조정 신하들이 속악이 곧 이원의 음악이라고 진달하지 않았으니, 즉시 바로잡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아악을 쓴다면 필시 선대의 뜻을 계승하려는 우리 성상의 훌륭하신 효심에 빛이 날 것입니다.
○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 이득필(李得泌)의 소회에,
“신이 본서에 재직하면서 삼가 경죄수(輕罪囚)에 대해서 관대하게 처결하여 풀어 주시는 명을 보면 번번이 매서운 추위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에 내리시어 성대한 성덕(聖德)이 옥에 갇힌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니, 보고 듣는 사람이 흠앙하고 감축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차가운 옥에 갇힌 죄수들이 매번 추운 계절을 만나면 그중 병이 든 부류는 죄과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나지도 않았는데 기한(飢寒)으로 죽을 염려가 있습니다. 온돌 1칸을 설치하여 매우 중한 사안에 관계된 죄인이 아닌 경우 혹시라도 병이 깊어 위태로울 걱정이 있으면 병을 구완하는 동안에는 잠깐 온돌을 설치한 칸에 들어가게 하고 병이 나아진 뒤에 도로 본 칸에 가두는 것이 천지와 같이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판당에게 가서 말하여 이치를 따져서 초기로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옥서 주부 이득필의 소회로 인하여 판당에게 가서 말하여 이치를 따져서 초기로 품처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형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이 ‘경죄수인 경우는 엄동을 만나 신병이 있으면 월령(月令) 수본(手本)에 의거하여 바로바로 보방(保放)하거나 또 서원(書員), 쇄장(鎖匠) 들이 수직하는 구들방에 내보내서 편히 치료받도록 하는데, 중죄수(重罪囚)는 대벽(大辟)에 해당하는 죄를 진 부류이니 철저히 조사하는 동안에 미결로 오래 갇혀서 자연 장기간 있게 됩니다. 옥중에 동간(東間), 서간(西間), 북간(北間)이 도합 11칸이므로 죄인 2, 3명씩 짝을 지어 각각 거처할 칸을 정하고 아래에 빈 섬을 깔고 옆에 또 흙을 바르면 토실(土室)과 다름이 없어 추위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구들을 설치한다면 세월이 조금 지난 뒤에는 반드시 병을 핑계 대고 옮겨 들어가는 자가 많아서 온돌 한 칸으로는 부족할 염려도 있을 것이고 또 땅을 파서 불을 때면 화재가 날 염려도 있으니 당초 온돌 1칸을 설치한 법의가 아닐 듯합니다. 추위와 더위를 만날 때마다 형구를 세척하고 감옥 안을 청소하는 것도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도리가 될 수 있으니 온돌 1칸을 설치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해조 당상이 논한 것이 일리가 없지 않으니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구들을 놓는 것은 본래 갑자기 논의하기 어렵고 추위를 막아서 병을 구료하는 일을 이렇게 대충대충 회계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하나로 결론을 지어 초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형구를 세척하고 감옥 안을 청소하는 것은 본래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상전(常典)이지만 추위를 막아서 병을 구료하는 일은 혜택을 실로 보장하기 어렵고, 골고루 미치지 못하는 병통이 있으니 본래 하나의 정식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여역이 한창 성할 때면 해조에서 초기하여 혜민서(惠民署)로 하여금 병세를 살피고 약을 지급하게 한 것도 행한 예가 있으니, 이것을 참조하여 적용하면 한겨울의 혹한에 양창(兩倉)으로 하여금 빈 섬을 제급하게 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옥관이 그때그때 직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으니 이러한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초기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 서유년(徐有秊)의 소회에,
“삼가 생각건대, 본서는 감옥을 지키는 곳으로 사체가 가볍지 않고 중합니다. 감옥이 견고한 연후에 죄수를 방수(防守)할 수 있기 때문에 수리하는 방도에 관계되는 것을 낱낱이 들어서 호조에 보고하여 그때그때 보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역(工役)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전의 것에 덧붙여 대충 수리하는 데 불과하여 자연 세월이 오래되면 버틸 수 없습니다. 이곳저곳이 쓰러지고 무너져서 방수가 허술하게 될 우려가 있고, 혹독한 추위와 더운 여름날 내리는 비에 죄수들이 얼거나 축축하게 젖는다는 탄식이 있으니 비록 작은 일이지만 관계되는 것은 적지 않습니다. 호조에 분부하여 해동하는 이때에 미쳐서 곳곳을 간심(看審)하게 하여 꺾어진 들보는 수리하고 무너진 담장은 완전하게 쌓아서 전처럼 허술하게 되는 폐단과 얼거나 물에 젖을 걱정이 없게 하는 것도 옥사의 체통을 중히 하고 죄수를 불쌍히 여겨 보살피는 방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제조에게 가서 의논하라.”
하였다.
○ 서부 도사(西部都事) 정가용(鄭可容)의 소회에,
“부관(部官)이 비록 사송을 한다고 해도 그 사송은 방내(坊內)의 불법을 관장하는 데 불과할 뿐인데 근래 소민이 큰 일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해당 부에 나아가 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추조(秋曹)와 경조(京兆)는 세 당상과 여러 낭관이 있어서 걸핏하면 시일을 낭비하는데 해부는 그렇지 않고 한 번 정소하면 즉시 처결해 주므로 송사하는 백성이 많은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근년 이래 잘못된 규례가 되어 버려서 제반의 송첩(訟牒)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게다가 부관들이 사양하여 상사(上司)로 넘기려고 하면 도리어 일을 기피한다는 비방을 받게 되므로 자신의 직무려니 하고 송사를 처결하지 않는 부관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대체를 자세히 따지면 추조와 경조의 낭관은 작은 송사라도 감히 제멋대로 처결하지 못하고 당상의 제사(題辭)를 기다렸는데, 부관은 상사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송사를 처결하니 아무리 잘못된 규례 때문이라 해도 크게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서부의 경우는 방내가 매우 넓어 오강(五江)까지 겸관하는데 송사를 좋아하는 백성들 때문에 하루도 한가하지 않습니다. 만일 경조에서 다시 분한(分限)을 정하여 엄하게 과조를 세우지 않는다면 해부에서 퇴각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경조윤에게 가서 의논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정가용의 소회로 인하여 경조윤에게 가서 의논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한성부 판윤 김종정이 ‘사송을 담당하는 아문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경조는 전택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형조는 노비를 전적으로 담당하도록 법전에 분정(分定)된 것은 본래 뜻이 있는 것인데, 하물며 부관이 송사를 처결하는 것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또 빚을 징수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수백 냥이 걸린 소송을 애초 상관(上官)에 보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단하는 것도 정도에 지나칩니다. 노비, 전택 및 100냥 이상이 걸린 소송은 모두 형조와 한성부에 돌리고 그 나머지 잡다한 송사는 부관으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상고해 보니, 부관은 관내 거주민이 범법한 일 등만을 관장한다고 되어 있으니 송사를 처결하는 것은 그들의 직책이 아닙니다. 전택, 노비, 빚을 징수하는 데 관한 송사는 크건 작건 간에 송사를 처결해서는 안 되고, 잡다한 송사를 부관에게 소속시키는 것 역시 관직을 침해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일절 금하여 막는 것이 실로 법의에 합당합니다. 판당이 복주한 말은 깊이 살피지 못한 듯하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판당의 헌의(獻議)는 반드시 헤아린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부관이 잡다한 송사를 담당하는 것이 과연 폐단이 없겠는가? 다시 해당 판당과 만나서 상의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김종정과 만나서 상의하니 ‘부관은 본래 사송관(詞訟官)이 아닌데 다만 옛 제도를 변통하여 사송하는 직임으로 만들었으니 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근래 송사를 처결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거의 제한이 없으니 이것을 금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약간의 잡다한 송사까지 일괄적으로 막는다면 사송하는 직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말한 잡다한 송사는 바로 직무로 소관하는 방내의 범범한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방내의 범법에 대해서도 어찌 얼마간의 쟁송할 거리가 없겠습니까. 이미 그 일을 주관하고 있는데 송사를 처결하지 못하게 한다면 당초 변통한 뜻이 아닐 듯싶으니 이러한 송사는 해부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더라도 특별한 폐단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부관은 바로 경조의 속관으로서 관내의 범법한 일만 관장한다고 하니 민간의 범법을 탐문하여 작은 일은 스스로 처결하고, 큰 일은 경조에 보고하는 데서 그치고, 송사하는 원고와 피고에게 승소와 패소를 판결해 준다는 의미는 아닐 듯합니다. 옛 제도를 조금 변통한 뒤로 비록 그들이 사송을 담당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공조가 애초 송사를 처결하는 아문이 아닌데 사송을 처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송사를 처결하는 일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은 실로 부관이 잘못된 전례를 이어받은 데서 비롯된 데 스스로 관직을 침해하는 데 귀결됩니다. 지금 만일 잡다한 송사를 처결하게 한다면 두 법사에서 애초 금패(禁牌)를 내주지 않는 자잘한 일 같은 경우에 소송하는 대로 처결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습니다만 이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움에 끌려 촉탁을 받을 것이고, 아울러 전택, 노비 등의 큰 송사에까지 미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양 법사 외에 또 다섯 개의 법사가 있게 됩니다. 사송관이 많으면 간사한 무리가 쟁송하는 폐단과 여항에서 곤욕을 치르는 폐해가 참으로 작지 않기 때문에 신들이 어제 계사에서 일절 막아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판당의 말이 이와 같더라도 그대로 시행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니 전에 복주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초기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선혜청 낭청 김성규(金聖規)의 소회에,
“조전(漕轉)은 나라의 대정(大政)인데 영남의 경우는 수천여 리를 항해하여 미 5, 6만 석을 운반해 오니 그 소임이 본래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 거행하는 것이 점점 해이해져서 취재(臭載)에 대한 걱정이 없는 해가 없었고, 특히 작년에 배 세 척이 치패(致敗)된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양호(兩湖)의 조선(漕船)은 해읍의 수령이나 이력과(履歷窠)인 첨사(僉使)로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을 삼기 때문에 십수 년 이래로 폐단이 없이 시행되었는데 영남의 영운차사원은 적량(赤梁), 구산(龜山), 제포(薺浦) 등의 변장이 모두 구근과(久勤窠)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미천하고 지위가 낮아서 그들의 명이 각 조선에 행해지지 못하고 항해할 때는 조졸(漕卒)이 마음대로 지체하고 번갈아 가며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데도 이른바 차사원이 금제하지 못하여 이렇게 패선(敗船)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는 영운차사원을 가려서 보내야 할 것이니 이번 세 진의 변장을 호서의 아산(牙山)과 호남의 법성포(法聖浦)ㆍ군산(群山)의 예처럼 특별히 가려서 차견하여 힘을 다하여 거행하게 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고 지난날의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감히 이처럼 진달합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말이 좋기는 하지만 함부로 고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 별군직 조심태(趙心泰)의 소회에,
“삼가 생각건대, 창성 부사(昌城府使)는 청북(淸北)의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압록강(鴨綠江) 변에 영(營)을 설치하고 한 줄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소관하는 7개 고을이 적들이 침입해 오는 길에 있으니 저들이 침입해 오는 것은 가깝고 빠르며 우리가 견제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긴요합니다. 때문에 옛날 병자년(1636, 인조14)의 변란에 먼저 소탕 당하였고 또 심하(深河)의 싸움에 이곳을 통하여 구원병을 보냈으니 심양(瀋陽)과 통하는 길이 만부(灣府)에 비해 조금 직선거리에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계획을 충분히 공고히 하였더라도 뒷날 효과를 보게 될지 기필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시 산만한 지역에 처해 성지(城池)와 호참(濠塹)을 이미 믿을 수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구성(龜城)은 삭주의 대로와 의주(義州)의 샛길에 위치하고 있으니 요해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강변으로부터는 모두 100여 리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의주는 대군이 변방을 진무하고 삭주는 변방의 걱정이 조금 덜하며, 또 안의(安義)와 식송(植松) 두 진은 중첩된 관문과 험한 계곡 사이에서 의지하여 지키는데, 구성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으로서 산성 하나를 전적으로 관장한다면 ---관서(關西) 7개 읍과 관북(關北) 6개 진 중에 강계(江界) 한 읍이 지세가 가장 뛰어나고 나머지는 믿을 만한 데가 없습니다 .관서는 강계 설한령(雪寒嶺)에서 철산(鐵山)의 운암산성(雲暗山城)까지인데 영애(嶺隘)는 가파른 절벽이고 계곡은 험난하며, 북로(北路)는 장백산(長白山)에서 경흥(慶興) 웅상령(雄尙嶺)까지인데 산등성이가 가로로 뻗어 나가고 깊은 골짜기가 험악합니다. 보잘것없는 지금의 병력으로 연변(沿邊) 일대에 포(鋪)를 설치하고 담장을 지키는 것은 쉽게 도모할 수가 없으니, 서북 강가의 탁 트인 지역을 막론하고 제방을 쌓고 해자를 파고 지(枳탱자), 극(棘가시), 유(楡느릅), 유(柳버들)를 많이 심어 빽빽하게 우거져서 조금도 빈틈없이 울타리를 이루게 한다면 어찌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몇 자 길이의 제언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고 토양에 알맞은 나무를 심는 것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 이렇게 해보는 것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또 연해(沿海)를 논하자면, 신이 작년에 호서(湖西)의 수곤(水閫)을 맡고 있을 때 주사(舟師)와 각 읍진의 형편을 상세히 살피니 선창(船滄)이 메워져 한 달에 7, 8일 혹은 4, 5일간은 배가 뜨지 못하고 해안가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장시간 배가 물 위에 떠 있었더라도 무디어진 모양새로는 필요할 때 쓰이기를 기필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와 같이 허술한 상태가 심한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이 재임한 것이 거의 10달인데 그동안에 살피고 신칙하여 막힌 곳을 준설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신이 실로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호서가 이와 같으니, 주사가 있는 여러 곳도 미루어서 알 만합니다. 메워진 정도에 따라 일제히 준설하게 하여 오랫동안 물 위에 떠 있게 하고, 만일 혹 선창이 애초에 잘못된 지형이면 비록 준설하게 하더라도 공력만 낭비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다시 적합한 곳을 찾아서 속히 이설(移設)할 방도를 도모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싶습니다.”
궁시(弓矢)는 바로 원거리의 적을 살상하는 무기로서 군기 중에 가장 긴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각궁(角弓)은 비록 평상시에 조금만 불에 닿거나 습기에 젖게 되면 결코 활시위를 걸어서 발사하지 못하며, 장마라도 겪게 되면 바로 무용지물이 되니 앞날을 염려하는 방법에 있어서 변통할 단서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외를 막론하고 영(營)ㆍ읍(邑)ㆍ진(鎭)의 별도로 마련하는 군기 중에 궁자(弓子)는 반드시 교자궁(交子弓)으로 만든 뒤에 진칠(眞漆)을 두껍게 입히면 물속에 빠져 며칠이 지나더라도 축축하게 젖어서 쓰지 못하게 될 염려는 조금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물력의 다과를 가지고 논해 보더라도 각궁 1장(張)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자궁에 비해 몇 배가 들어갈 뿐만이 아니니 이해로 헤아려 보면 취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각처에 별도로 마련하는 궁자는 반드시 교자궁으로 비치하고, 전일 비축해 둔 각궁 또한 점차 이것으로 바꾼 뒤에 간혹 칠을 발라서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병기가 되게 하는 것이 편의에 맞을 듯하다고 봅니다.
○ 선전관 이원겸(李元謙)의 소회에,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바로 우리와 저 나라의 지름길로서 북관 6진(鎭)에 비해 중요한 길목입니다. 그런데 갑산은 민호(民戶)가 4000호가 되어 관부(官府)의 모양새를 대략 이루었지만 삼수는 민호가 960호일 뿐인데 그중에 11곳의 진보(鎭堡)가 있어 본부까지 합치면 관부가 12곳입니다. 12곳 관장(官長)의 영송(迎送)과 늠록(廩祿)의 비용을 번번이 모두 900호에게 책응(策應)하니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소위 토산 초피(貂皮)와 삼(蔘)이 도리어 백성을 병들게 하는 큰 폐단의 근원이 되어 매번 추동(秋冬)의 공물을 진상할 철을 당하면 모두 허둥대며 원망하니 마치 하루도 보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선전관 유문식(柳文植)의 소회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太白山城)은 평산부(平山府)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저 나라와 통하는 대로변의 요충지에 있고 기전(畿甸)과 아주 가까우며 서남북(西南北)의 지세가 가파르고 동쪽은 강수를 끼고 있어 서쪽에서 오는 길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실로 하늘이 만들어 준 요해처로 위급할 때 믿을 만한 지형이기 때문에 임진년(1592, 선조25)과 병자년(1636, 인조14)에 계속해서 성을 지켰습니다.
삼척(三陟)의 진영은 대관령(大關嶺) 주변과 1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동남쪽으로 일본과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이 영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왜선이 대판성(大坂城)에서 정유년(1777, 정조1) 8월 25일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27일 삼척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그 날짜를 계산해 보니 이틀에 불과하였습니다. 본래 변란에 대처하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하지만 적선(賊船)이 만일 강릉(江陵) 앞바다를 따라 대관령으로 길을 잡으면 삼척 영장은 100여 리 밖에 있어 까마득히 모르니, 이것이 어찌 진영을 설치한 본의라고 하겠습니까.또 추지령(楸池嶺)은 회양(淮陽)과 통천(通川)의 경계에 있는데 그다지 높고 험준하지 않고 서쪽은 더욱 평이하여 북관으로 통하는 지름길입니다. 만일 불의의 사태가 있어서 철령(鐵嶺)을 지킨다면 적은 안변(安邊)과 흡곡(歙谷)에서 반드시 추지령 쪽의 길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추지령 안팎에는 이미 방수(防守)가 없고 게다가 진영과 멀리 떨어져 있어 실로 앞뒤에서 서로 구해 주지 못할 염려가 있습니다. 지금 만약 통천을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아서 안으로 회양과 응원하고 밖으로 진영과 함께 앞뒤에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는 것도 효력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척 진영의 일은, 대개 영동 9개 읍은 하나의 띠처럼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서 옛날 고려(高麗) 시대에 왜구의 우환이 자주 있었습니다. 9개 읍에 모두 성지(城址)가 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는데 지금 태평세월이 된 지 수백 년이 되자 안일에 빠져서 내버려 두는 것은 참으로 군정을 다스리는 법의가 아니니 바로잡는 방도를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진영을 삼척에 설치한 것은 고인(古人)도 의의가 있어서 그런 것인데 지금 강릉으로 이설하고자 하니 강릉 읍치(邑治)는 대관령과의 거리가 100여 리입니다. 비록 삼척보다는 약간 가깝지만 대동소이하니 이설하는 일을 갑자기 의논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강릉이 진영을 겸관하는 것도 굳이 거론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그만두소서. 오직 융정이 허술한 것은 삼남(三南)에 비하여 더욱 심하니 영장이 순행하여 살피는 법은 다시 구례(舊例)를 살피는 것이 편의할 듯하지만 다만 잔읍에 주전(廚傳)의 폐해만 끼칠 것이고 또 하속이 착취하는 단서를 열어서 허명만 있고 실효가 없으니 중간에 폐하여 두고 시행하지 않은 것은 필시 이에 연유하였을 것입니다.
또 추지령이 국방상의 중요한 지형인지는 신들이 아직 목격하지 못하여 그 형편을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지만 소회 중에 진달하여 논한 것으로 말한다면 통천(通川)을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아 회양 및 진영과 안팎에서 기각지세를 이루자고 한 것도 특별히 대단하게 경장하는 단서는 없으나 혹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조금의 힘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 여부를 깊이 헤아려 이치를 따져 장문하게 하고 장문이 올라온 뒤에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겸사복장 이한좌(李漢佐)의 소회에,
“군사(軍事)는 나라의 큰 정사이며 관방은 우환을 대비하는 중요한 일이니, 이 때문에 예전부터 우환이 없다 하여 융정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지 않고 경계할 일이 없다 하여 혹시라도 방수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승평한 지가 오래되어 군비(軍備)를 태만히 하였습니다. 태산과 반석같이 안정된 터전에 어찌 걱정거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뜻밖의 사태를 사전에 대비하는 것을 또한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영남(嶺南)에 거주하여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형편을 대략 알고 있고 게다가 연전에 충주 영장(忠州營將)을 맡았을 적에 또 깊이 헤아린 것이 있습니다.
두 영(嶺)의 방수가 허술한 것은 실로 조정이 미처 거행하지 못한 흠전(欠典)이 됩니다. 동래(東萊) 일로가 조령에 곧바로 이르니 그 어디보다도 가장 남북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곳이며, 죽령이 또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바로 긴밀하게 서로 의지하는 형세인데, 조령의 남쪽에는 단지 문경(聞慶)의 작은 진이 있고 죽령의 아래에는 풍기(豐基)의 쇠잔한 현이 있을 뿐이니 믿을 만하겠습니까. 더구나 충주는 바로 두 고개의 길이 서로 만나는 목을 누르는 곳으로, 동쪽으로는 험준한 관동과 연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양호(兩湖)의 형세를 제어하고 있으며, 또 한강의 상류를 점유하고 아울러 수륙의 요해처를 제어하니, 참으로 일대 관방이 되는 땅인데, 임진왜란 때에 탄금대(彈琴臺)의 패전은 바로 조령을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지리(地利)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졸렬한 장교와 잔약한 군졸은 조련하는 방도를 익히지 않고 형편없는 성가퀴는 굳게 지키기에 부족하니, 창졸간에 급박한 일이 생기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의당 충주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개수하여 두 고개가 서로 만나는 목을 제어하도록 한다면 관방의 요충이 되는 형세가 이보다 나은 곳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노진(金魯鎭)은 ‘본주(本州)가 상류에 위치하고 대령(大嶺)을 누르고 있어서 방어사를 설치하자는 의논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그 지세가 평이하여 싸울 수는 있지만 지킬 수는 없으니, 임진왜란 때에 이미 겪은 일로 말하더라도 탄금대의 패전이 바로 그 증거가 됩니다. 두 고개의 아래를 곧장 막는 풍기와 문경 같은 곳에 이미 방영(防營)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본읍에만 이렇게 신설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는 일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은 ‘충주에 방어사를 설치하자는 의논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번번이 여러 의논이 모순됨으로 인하여 저지되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만 지세가 방수하는 데에 불편하기 때문이지 곤궁한 시기에 소모적인 일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니, 그만두어야겠습니다.
○ 오위장 곽정후(郭禎垕)의 소회에,
“옛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신의 방조(傍祖)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가서 진주(晉州)를 구원할 때 병영이 남강(南江) 가에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수성장(守城將) 최경창(崔慶昌) 등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성은 조(趙)나라의 진양성(晉陽城)과 같아서 왜적이 필시 물길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놓을 것이다. 본주(本州)의 관아 뒤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의 뒤 봉우리가 험준하고 튼튼하니 이곳으로 진지(陣地)를 옮긴 뒤라야 위태롭게 되어 패전할 우환이 없을 것이다.’ 하고 거듭 경계한 뒤에 도로 화왕산성(火旺山城)의 본진(本陣)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절(死節)한 여러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고 듣지 않았는데 왜적이 물길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놓아 끝내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의 방조가 개연히 상통(傷痛)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신이 평소 그 지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비봉산이 성과의 거리가 6, 7백 보이고 형세는 조금 높으며 강수와 자못 떨어져 있습니다. 만약 이곳으로 성을 옮긴다면 지난날과 같은 우려가 조금도 없을 것이고 옮겨 축성하는 방도도 쉬울 것이니, 신은 이 성을 옮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기해년(1779, 정조3)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맡았을 적에 청석곡(靑石谷)을 삼가 살펴보니, 좌우로 산봉우리가 연이어 겹쳐 있고 그 사이로 좁은 길이 통해 있어 하늘이 깎은 듯이 험준한데, 그중 두석우(豆石隅)는 더욱 기험하여 두 산봉우리가 마주하며 우뚝 솟아 있고 서로의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만약 이 땅에 한 성을 높이 쌓으면 서로의 거리가 300보에 지나지 않아서 매우 쉽게 축성할 것입니다. 문(門) 하나를 설치하여 왕래를 통하게 하고 문 안에 10여 칸의 수직소(守直所)를 별도로 설치하여 청석곡 안의 군병으로 하여금 교대로 수직하게 하고 송도(松都)의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으로 하여금 번갈아 입직하게 한다면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1만 명의 사람들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그대는 홍의장군의 방손(傍孫)으로 청석곡의 형편을 진달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2개의 조목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양(晉陽)의 읍기(邑基)는 지세가 매우 낮아서 본관이 거처하는 곳이 되고, 촉석(矗石)의 형세는 자못 높아서 병사(兵使)가 거주하는 곳이 되는데, 남강을 굽어보고 암벽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 지세를 대체로 논하면 비록 앞은 높고 뒤는 낮다고 하지만 이른바 낮은 곳을 읍기에 비교해 보면 또한 높이가 몇 장(丈)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이 물길을 막았다가 성에 물을 터놓았다고 한 것은 혹 당시에 읍기에 먼저 물을 터놓았는데 이어 범람하여 촉석산성까지 침수된 것입니까? 산성의 후면이 비록 낮기는 하지만 읍기가 처한 곳은 넓으니, 넓은 곳에 물을 대면 형세상 퍼져 흩어질 터인데 퍼져 흩어지는 물이 몇 장 높이까지 차서 산성에 주입되는 것은 쉽사리 있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면 또한 옛날과 지금의 산성 터에 변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비봉산은 본읍의 진산(鎭山)으로, 그 형세가 비록 높지만 그 터는 매우 좁은데, 성지(城池)를 옮겨 수축한 뒤에는 3, 4개의 아문이 함께 들어와 지내는 데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지리가 영을 설치하는 데에 합당한지를 적확히 알 수 없으니, 성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이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석곡 중의 두석우에 축성하는 일은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이른바 두석우는 바로 수십 리 되는 청석곡에서 가장 험하고 좁은 곳입니다. 좌우로 산봉우리와 마주하고 우뚝 솟은 것이 수백 길〔仞〕이 되는데 석탄(石灘 바위 여울)이 그 중간을 관통하고 여울 옆의 석잔(石棧 돌로 만든 잔도(棧道))은 또한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다니거나 두 마리 말이 나란히 갈 수 없으니, 몇 길의 담과 한 겹의 문이 없다 하더라도 만약 뜻밖의 사태를 만나 나무들 사이에 병사를 배치하고서 안으로는 엄히 방수하고 밖으로는 성세(聲勢)를 가탁한다면 수만의 적들도 기세 좋게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수어(守禦)하는 자가 어떻게 책략을 잘 세우고 임기응변에 능한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평화스러운 때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화를 소모하는 것은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고, 이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말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망설인 것은 또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 두 사안은 모두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교하신 대로 장신에게 상의하였더니, 훈련대장 구선복은 명을 받들어 지방에 있어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고, 어영대장 이주국은 ‘촉영(矗營)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병사(兵使)를 거쳤으므로 그 형편을 익숙히 알고 있습니다. 남강이 촉영에 있어서 그 높이의 차이가 수십 장이 될 뿐만이 아니고 게다가 그 좌우도 모두 광야이니 이른바 물길을 터놓았다고 한 것은 무엇에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부가 비봉산 아래에 있으니 비봉산으로 성을 옮기자고 한 것은 대체로 본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약 뜻밖의 사태를 만나면 본관도 촉영 안으로 들어갈 것인데 어찌 굳이 비봉산을 나누어 지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석우에 축성하는 일로 말하면, 이러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미 천연적인 험준함이 있으니 방수하는 방도는 대비하여 방어하는 자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설령 10길이 되는 성이 있다 하더라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촉석산성을 옮겨 설치하는 일과 청석곡 중의 두석우에 축성하는 일은 신들이 어제 아뢸 때에 그 형세와 편리 여부를 상세히 논하였으니 거듭 진달할 필요가 없겠고, 지금 이 장신의 말도 다른 의견이 없으니 두 건의 사안은 모두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남의 요해지가 되는 재는 조령, 죽령, 추풍(秋風) 등 세 길이 있는데, 조령은 한 도의 가운데를 관통하여 마치 다섯 방향으로 통하는 대로와 같기 때문에 관방을 설치하여 뜻밖의 사태를 대비하도록 한 것이지 비단 임진왜란을 징계하여 그렇게 하였을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른바 관방이 유명무실해져서 군교와 군비가 거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것은 대체로 사력(事力)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고 보면, 지금 이 죽령의 도로는 막히고 형세는 험준하여 비록 조령과 서로 위아래로 있어서 방수하는 군비를 창설하고는 싶지만 힘에 부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령 근방의 옛 성이 버려진 지가 몇 년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종전부터 다시 수축하자는 말이 있었으나 묘당에서 어렵게 여겨서 착수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이렇게 헤아린 것은 필시 까닭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게다가 적군이 쳐들어오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을 버리고 험준한 길을 달려오지 않을 것이니, 저 높고 험한 죽령에 반드시 성을 수축하고자 한다면 낮고 평탄한 추풍과 같은 곳에는 유독 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성을 아울러 수축한다 하더라도 세 재의 호서와 영남 사이에 곁가지로 만나는 작은 길이 또한 많으니, 장차 관방(關防)으로 여기고 여기에도 성을 수축하자고 아울러 의논하겠습니까. 이미 설치한 요새는 추가하여 정비하더라도 되겠지만, 다른 곳에 새로 창설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 아닌 듯하니,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무겸(武兼) 김귀택(金貴澤)의 소회에,
“어리석은 신은 탐라(耽羅) 출신의 천신(賤臣)으로서 감히 탐라의 일로 조목조목 진달하겠습니다.
첫째, 탐라는 큰 산의 비탈로 이루어진 땅이고 대해 가운데 있는 곳이기 때문에 풍수의 재해가 많아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풍년이 든 적이 없고, 혹여 흉년을 만나면 번번이 이속하게 해 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각종의 토산물을 나리포(羅里舖)에 수납(輸納)할 때 영해(瀛海)를 건넌 뒤에 또 칠산(七山) 바다를 건넙니다. 이 두 바다는 모두 매우 험난해서 비록 영해를 순조롭게 건넜다 하더라도 칠산에서 치패(致敗)되기도 하므로 선척이 취재(臭載)되는 우환과 사람과 물건이 바다에 빠지는 일이 자주 있으니, 실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두 우려되는 일입니다. 만약 영산강(榮山江)을 통하여 나주(羅州)의 제민창(濟民倉)에 수납하도록 한다면 편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 무겸 오현충(吳顯忠)의 소회에,
“조령(鳥嶺) 일로(一路)는 바로 기호(畿湖)의 요충지인데, 조정이 별장(別將)을 설치하고 문경(聞慶)에 독진(獨鎭)을 설치하였으니, 그 험조한 곳을 방수하는 방도에 있어서 치밀하게 구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경의 경우에는 음관으로 차견하기 때문에 군비에 관한 융정에 있어서는 전혀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소홀한 일로서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문경과 함창(咸昌) 두 읍을 한 주(州)로 합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되, 재간이 있는 무신을 가려 보내서 교졸을 훈련하고 군비를 증강하게 한다면 실로 험조한 곳을 방비하는 방도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읍을 합치는 일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다.”
○ 무겸 노상추(盧尙樞)의 소회에,
“삼가 아룁니다. 산을 태워 밭을 개간하는 것은 곤궁한 백성이 이익을 얻는 한 가지 일입니다. 경상도로 말하면, 산악이 험준하고 온갖 천(川)이 합류하니, 땅이 낮고 밭이 좋은 곳은 모두 강변의 긴 갯벌과 산골짜기의 개간한 전야(田野)입니다. 낙동강(洛東江)의 수원(水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6, 7백 리를 흘러서 강변 일대가 모두 좋은 전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화전을 개간하도록 허락한 뒤로 을축년(1745, 영조21)에 두 차례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산골짜기가 무너져서 유사(流沙)가 크게 이르러 긴 강이 모두 수심이 얕아졌고, 갯벌이 쓸려 나가 양전(良田)이 모래로 덮여서 그 밭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거의 태반에 이르렀으며, 산골짜기의 개간한 전야는 천번(川反)되고 모래로 뒤덮여서 농사의 이익이 크게 줄었습니다. 그 후 을해년(1755, 영조31)ㆍ병자년(1756)ㆍ을유년(1765)ㆍ을미년(1775)에 큰 홍수가 났는데, 갯벌이 쓸려 가고 모래가 덮이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긴 강과 큰 내가 얕은 물로 바뀌어서 강의 상류와 하류에는 곧 깊은 못과 급한 여울이 없어져서 갯벌과 강의 높이가 같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사의 우환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혹여 하룻밤 동안 물이 주입되거나 하루낮 동안 폭우가 내리면 산골짜기의 개간한 전야와 강변의 갯밭이 한결같이 범람하는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서 쓸려 가고 모래로 뒤덮이니, 해마다 양전이 재결(災結)로 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산골 백성과 갯가 백성 중에 익사자가 생긴 집이 몇백 호(戶)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이니, 이것은 모두 산을 태워 전토를 개간한 까닭입니다. 천의 도랑은 수원이 복류(伏流)하여 관개의 이익을 잃었으니, 산을 태워 전토를 개간하는 이익을 갯벌의 양전에 비교하면 만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또 강변의 13개 읍이 조운할 때 혹여 반달 동안 가뭄이 있으면 모래를 파내어 배를 가게 하고 아이들도 맨몸으로 건너갈 정도이니, 앞으로의 우환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왜적을 제압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긴 강의 깊고 험함을 의뢰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긴 강의 험함을 조금도 믿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또한 식자들의 근심거리입니다. 게다가 여러 해를 계속해 산을 태워서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가망이 없어 백성으로 하여금 죽은 이를 장사 지내게 하는 도리 또한 이미 소홀해졌습니다. 이 몇 가지 일은 한 도의 큰 폐단입니다.
○ 무겸 서윤재(徐潤載)의 소회에,
“무릇 농민이 크게 의뢰하는 것은 수리(水利)만 한 것이 없으니, 각 도의 각 읍에 있는 제언(堤堰)과 관개(灌漑) 시설이 무엇인들 국가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 제언과 관개 시설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황폐해졌으나 보수하지 않은 데가 매우 많습니다. 3년마다 적간(摘奸)하는 규례가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고 해마다 제방을 보수하는 도리가 소홀해져서 거행되지 않으니, 물이 비축되지 않으면 가뭄이 쉬이 재해가 됩니다. 한번 양호(兩湖) 지방으로 말해 보면, 제방의 규모가 커서 옛날에는 한 지방을 크게 이롭게 하던 것 중에서 황폐해진 것이 열에 대여섯은 되는데, 그 공역(工役)을 계산해 보면 그 비용이 처음 수축하였을 때 들어간 비용의 만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수축하여 이익을 얻기에 적합한 곳에 나아가 다시 1000경(頃)의 제방을 쌓는다면 만세토록 누릴 수 있는 이익이 될 것이니, 영읍을 각별히 신칙하여 그 형편을 살피고 그 공역을 헤아려서 법대로 수축하도록 해 주소서.
농사라는 것은, 김매는 것은 비록 사람에게 달려 있기는 하지만 깊이 밭 가는 것은 전적으로 소에게 의뢰합니다. 근래 재역(災疫)이 없어서 자연히 소가 번식하였을 텐데도 소 값은 예전보다 갑절이나 되어서 마을에 소를 기르는 자가 드무니, 이것은 필시 경외(京外)에서 사사로이 도축하는 것이 곳곳에서 낭자하게 벌어지는 데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죄를 자초하니, 구전(舊典)을 거듭 밝혀서 각별히 통렬하게 금지한다면 농사를 힘쓰는 정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무겸 김택화(金宅和)의 소회에,
“조령(鳥嶺)과 팔령(八嶺 팔량령(八良嶺))은 영남과 호남의 목이 되는 곳인데, 팔령에는 단지 운봉(雲峯)의 토포영(討捕營)이 있을 뿐이고, 조령의 경우에는 비록 문경(聞慶)의 진관(鎭管)이 있기는 하지만 설시한 것이 매우 허술하니, 험지(險地)에 웅거하여 요충지를 지키는 방도로서 뜻밖의 변고를 대비하는 방책에 매우 어긋납니다. 비록 천연적인 험지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수비하지 않으면 험지가 될 수가 없고, 비록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서 미리 염려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변고에 응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문경과 운봉에 각각 방영(防營)을 설치함으로써 요충지를 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보건대, 웅천(熊川)ㆍ창원(昌原)ㆍ김해(金海) 3개 읍의 사이에 갈판동(葛坂洞)이 있는데, 산 위에 들판이 열려 있어 주위가 마치 하늘이 토성(土城)을 지은 것과 같고, 또 자연적으로 솟아 나오는 3개의 샘이 있어서 크게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비할 데 없이 토질이 비옥하니, 이것은 천연적인 험지로 왜적을 방어하는 제일의 요충지입니다. 산세가 험절하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 있는데 그 위는 훤히 트여서 대마도(對馬島)의 왜선이 왕래하는 것을 굽어보기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매우 쉽습니다. 만약 산성을 설치한다면 실로 험지에 웅거하여 요충지를 지키는 일대의 웅진(雄鎭)이 될 수 있고, 인하여 기경한다면 모두 좋은 전답이 될 수 있어서 이익을 내는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설치하는 문제를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 부장 김상원(金尙源)의 소회에,
“전(傳)에 이르기를,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다.’ 하였는데, 만약 농부가 없다면 비록 사부(士夫), 공장(工匠), 상인(商人)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 농사를 짓고 아홉 사람이 먹으며, 한 사람이 베를 짜고 아홉 사람이 옷을 입는다면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추위가 없기를 구한다 한들 형세상 그렇게 되기 어려우니, 이것은 농부는 적고 하는 일 없이 노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간향(奸鄕)과 활리(猾吏)의 족속과 함부로 충위(忠衛)라 칭하는 사람들 및 잡다한 명색의 사람들은 사부의 사업을 일삼지 않으면서도 공장과 상인이 되는 것은 부끄럽게 여겨서 하는 일이 없는데, 반드시 간향과 활리의 힘을 끼고서 우매하고 미천한 백성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청탁하고 미봉하는 등의 일로 위협하여 뇌물을 마구 받아 냄으로써 입고 먹는 데 들어가는 밑천으로 삼으니, 이처럼 무엄하게 백성의 재력을 갈취합니다.
저 불쌍한 농부는 1년 내내 부지런히 애써서 수확하는 곡물이 많게는 2, 3십 포가 되고 적게는 5, 6석이 되는데, 위로는 정공(正供)과 영읍의 수용이 있고 아래로는 폐할 수 없는 신역과 사채가 있어서 이른바 농사짓는 데에 들어가는 씨앗과 식량을 대기에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런데 또 족징(族徵)과 이징(里徵)이 있고 관례(官隷)의 침탈이 있어서 오늘은 관정(官庭)에 붙잡혀 들어가고 내일은 이임(里任)에게 머리를 끌려 다니니, 백성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저 하는 일 없이 노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불쑥 나와서 환곡을 납부하는 데 돕는 밑천이라 하거나 추운 겨울을 지내고 해를 넘기는 밑천이라 하면서 농작물을 마당으로 들일 때 억지로 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수확한 뒤에는 백성이 아직 공곡(公穀)을 납부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무리에게 먼저 지급합니다.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이 무리가 앙심을 품고 간향ㆍ활리와 체결하여 후일에 보복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대체로 수십 호의 마을에서 토반(土班)ㆍ충위ㆍ간향ㆍ활리의 족속 및 잡다한 명색 등의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 무리를 제외하면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은 5, 6호에 불과한데, 군역ㆍ군보(軍保) 등의 역을 모두 이들에게 책임 지우고 제반의 연호잡역(烟戶雜役)도 이들에게 책임 지우니, 이들이 한 가구에 4, 5가지로 중첩된 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주해 떠돌아다녀 정공을 거두어들이기 어렵고, 군정(軍丁)도 충당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에 백성을 잡아 가두고 채찍질을 가하는 일과 황구와 백골에게 징포하는 일이 자연히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어찌 밝은 성상이 계신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혹자는 이르기를, ‘사람은 불어나고 토지는 협소하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사람들이 굶주린다.’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불어나더라도 각각 자신의 노동을 통해 먹고 토지가 협소하더라도 묵어서 거칠어진 땅을 모두 기경한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런데 묵은땅을 기경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무릇 산 위에 주인이 없는 진전(陳田)을 가경(加耕)한 것은 기경한 대로 수세하되 집복(執卜)하기를 응당 6등급으로 거행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간향과 활리의 무리가 매양 1등급으로 집복하고, 비록 다시 진폐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미 기경한 것으로 징세하니, 이것은 백골에게 징포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두려워하여 기경하지 않으니, 토지가 어찌 넓어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 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군정으로 충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번하게 함으로써 농부로 하여금 밭 갈고 김매는 일에 전력하게 한다면 하는 일 없이 노는 무리들이 군역을 기피하여 반드시 모두 귀농할 것이고, 만약 귀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농부의 신역을 나눌 수 있고 백골과 황구에게 징포하는 일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소는 농사를 짓는 데에 가장 긴요한 것이고, 비단옷은 복식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농사에 소가 없으면 때를 놓치기가 쉽고 복식은 비단옷이 아니면 가볍고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소를 수시로 도살해서는 안 되고, 비단옷을 사람들마다 착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국법에 소를 도살하고 비단옷을 입는 데 대한 금령이 있는데, 근래에는 법령이 허술해져서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몰래 도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낭자하게 매매되고 있습니다. 비단옷을 착용하는 폐단은 이보다 더욱 심한 점이 있습니다.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조금 부유한 자들은 모두 착용하면서도 경계하거나 삼가는 법이 없으니, 사치하는 풍조가 이에 극에 달했습니다. 비록 귀하고 연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거칠고 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저 교만한 무리들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니, 물화의 값이 오르고 백성의 먹을거리가 곤란하게 된 것은 또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값이 10냥에 불과하던 소가 지금은 30냥에 가깝고, 옛날에는 값이 3, 4냥에 불과하던 비단이 지금은 7, 8냥에 가깝습니다. 농가에서는 소가 없어서 제때를 놓친 경우가 많고, 노인들은 모두 비단옷이 없어서 착용하지 못하니, 신은 일찍이 이 일에 대해 개탄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소를 도살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되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형률을 적용하고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속전(贖錢)은 결코 받아서는 안 되니, 만약 속전을 받으면 한편으로는 속전을 바치고 한편으로는 소를 도살함으로써 속전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챙길 것이니 그 버릇이 더욱 통탄스러울 것입니다. 비단옷을 입는 습속의 경우 범인으로서 나이가 50살 이하인 사람들을 또한 엄하게 금지한다면 의식에 절도가 있어서 민생을 구제하는 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수문장(守門將) 강도감(姜道瑊)의 소회에,
“삼가 생각건대, 관북(關北)의 10개 주(州)는 관남(關南)과 매우 달라서 전화(錢貨)가 통행되지 않고 생업이 매우 어려우므로, 얼마 안 되는 식량 이외에는 일상적으로 쓰는 온갖 물건을 대부분 수천 리 밖에서 마련합니다. 이 때문에 포필(布疋), 다리〔髢髻〕, 초서(貂鼠), 녹비(鹿皮), 호마(胡馬) 등의 물품을 간신히 모아서 영외에서 매매하는 것은 형세상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도처에 금하는 바가 있습니다. 한번 마천령(磨天嶺)을 넘으면 곡구(谷口), 덕산(德山), 함흥(咸興), 초원(草原), 영흥(永興), 고원(高遠), 철관(鐵關), 원산(元山), 남산(南山), 고산(高山) 등 10곳으로부터 모두 금소(禁所)가 있어서 감고(監考)가 관장하여 금물(禁物)을 핑계 대면서 붙잡아 두고 수검(搜檢)함으로써 여러 날 동안 구류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참(站)마다 소요되는 비용이 그 수효가 매우 많아서 폐단을 이룹니다. 지난 계묘년(1783, 정조7)에 흉년이 들자, 상께서 민정을 깊이 살피시고 특별히 금물을 수검하는 것을 완화하도록 하여 북민(北民)이 은택을 입었는데, 수년 사이에 연로에서 침책(侵責)하는 것이 또다시 이전과 같게 되었습니다. 만약 금물을 통행시키기 어렵다고 한다면 군문에서 타는 것은 모두 호마이며, 경사(京師)에서 입는 것은 모두 북포(北布)이며, 천한 비복까지도 모두 북계(北髻)를 이고 있으니, 금단하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똑같이 변지(邊地)인데 서관(西關)의 경우에는 만상(灣上)의 온갖 물화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금단하지 않고, 북도(北道)의 경우에는 이미 청시(淸市)를 열었는데도 청시에서 매매하는 물종에 대해서만 유독 금법을 시행하여 행로(行路)의 폐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대의 말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옛 제도를 가벼이 고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
“우모(牛毛 우뭇가사리)와 표고(蔈古 표고버섯) 두 물종은 모두 제주의 토산물이기 때문에 공물을 바치는 의리로써 공헌(貢獻)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애당초 값을 지급하는 공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표고라는 물종은 소선(素膳)을 위한 공상으로 쓰임새가 매우 긴요한데, 곳곳마다 모두 있는 물건이 아니고 오직 제주에서 생산되는 것이 많습니다. 바다를 건너오느라 부패한다는 말의 경우는 본시의 원역이 이롭게 여기는 것이 별지정에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 금군 장동원(張東源)의 소회에,
“삼가 아룁니다. 사치를 숭상하는 폐단이 아주 큰 잘못된 풍습이 되어 버려 직업이 존귀하든 천하든 사람이 늙든 젊든 간에 겨울에는 비단옷을 입고 여름에는 모시옷이나 얇은 비단옷을 입으며 심지어 여항의 장사치와 공사(公私)의 천한 종들도 모두 사치스러운 것을 높이 쳐 베옷이나 무명옷을 입으면 수치스럽고 천하다고 여깁니다. 경외에서 이를 본뜨다 보니 설혹 이런 일을 그르다고 생각하고 이런 습속을 싫어하는 자가 있더라도 시속(時俗)에 젖어 속으로는 그르다고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인정하여 어쩔 수 없이 따릅니다. 이런 풍습으로 말미암아 폐해가 외읍의 백성들에게 미치는데, 그 폐단이란, 문관ㆍ무관ㆍ음관 할 것 없이 초사할 때부터 수령이 될 때까지 비록 재산이 없더라도 화려한 복식과 사치한 생활을 재산 있는 자와 같게 하려고 하고 기필코 남보다 못하지 않게 하려고 마음을 먹어 한 해 빚을 내고 두 해 빚을 내다 보니 5, 6년간에 무수한 빚이 쌓이므로 수령이 되어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할 겨를 없이 빚을 갚는 데에만 마음이 쏠려 청렴하려고 해도 청렴함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염치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욕에 이끌리는 폐단은 날로 늘어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이는 모두 사치를 숭상하여 무절제한 소치입니다. 시전(市廛) 상인들과 천한 종들이 비단옷과 모시옷을 입는 풍습을 금하소서.
○ 금군 김낙해(金樂海)의 소회에
무릇 성을 쌓는 것은 뜻밖의 변고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충주(忠州) 지역은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을 넘어가는 길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니 실로 영남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첩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어 단지 윤곽만 남아 있으니 변고를 미리 대비하는 도리로 볼 때 한시가 급합니다. 다시 수축하소서.”
○ 금군 한성모(韓聖謨)의 소회에,
“강도(江都)는 면적이 220여 리로 동서로 40리이고 남북으로 70리인데 큰 산들이 간간이 있고 큰 바다를 앞에 격하고 있어 지세로 논하면 참으로 이른바 철옹성 같은 곳이고, 군정(軍政)과 민호로 논하면 민호는 1만여 호이고 보졸은 100여 개의 초(哨)가 있으며 군량은 1만여 석이고 전답은 4100여 결(結)이 됩니다. 비록 손바닥만 한 일개 작은 섬이라고는 하나 부유한 데다 병사들이 강하여 성을 지키는 데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어 참으로 한 사람이 앞에서 막으면 만 사람이 당해 내지 못하는 격이라 할 만하니, 비록 성곽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키는 데 적임자를 얻으면 날아 넘어오지 않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는데 게다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까지 있으니 어찌 튼튼하고도 튼튼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외성을 해마다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다 보니 수성소(守城所) 재력이 외성에 다 들어가는데, 성을 보수하는 공역은 재력을 소진시킬 뿐만 아니라 곧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외성의 공역을 정지하고 성의 옛터를 따라 형극(荊棘)을 심어 성처럼 만든다면 조정에서는 해마다 재력을 소비하는 폐단이 없고 백성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에 힘쓸 수 있을 터이니, 강도의 폐막을 없애고 재력을 쌓는 방도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 금군 이언신(李彦藎)의 소회에
변경을 방비하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면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영(營)도 있고 진(鎭)도 있는데, 진에는 배를 두고 배에는 군졸을 두는 것이 오래된 제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병기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 궁시(弓矢)는 망가져 쓸 수 없고 총은 화약이 습기에 젖어 잘 터지지 않거나 더러 연환(鉛丸)이 총구에 맞지 않기도 하고 검과 창은 날카롭지가 않으며 기타 병기는 일일이 매거할 수도 없으니, 이것들을 어찌 전시에 대적하는 데 쓸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이는 임진년과 병자년 이후로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형식적으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지 요사이의 수령과 변장의 허물이 아닙니다. 전부터 수령과 변장 또한 병기가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혹여 죄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려워 감히 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 금군 최덕우(崔德禹)의 소회에,
“신은 강촌(江村)에서 생장하여 강민(江民)의 폐단을 익히 알므로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바를 성상께 진달해 보겠습니다. 연강(沿江)의 폐막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빙어잡이배를 한곳에 정박시키기 위해 쟁송하는 일입니다. 한곳에 정박하게 하는 것은 사(私)이고 한 사람이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이며 여러 곳에 정박하게 하는 것은 공(公)이고 모든 백성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각 읍의 선척들은 모두 원래 정해 놓은 주인이 있는데, 이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어물을 사는 자들이므로 각처의 원래 주인을 버리고 강제로 한곳에 정박하게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간세(奸細)한 자가 주인이 정해진 물건을 빼앗아 끝없는 욕심을 채울 생각에 법사(法司)에 무소(誣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심지어 격고(擊鼓)하여 상언(上言)하기까지 하면서 지금껏 30여 년 동안 이를 능사로 여겨 일삼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연강의 백성들이 송사에 응하느라 고달파 대부분 흩어져 버려 보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형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곳에 정박하게 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소서.
둘째는 빙계(氷契)에서 얼음을 도고(都庫)하는 것입니다. 빙고(氷庫)가 많으면 얼음 값이 싸지고 빙고가 적으면 얼음 값이 비싸집니다. 종전에 강 상류와 하류에 설치한 빙고가 거의 30곳에 달했는데도 부족할까 염려하였는데, 이번에 여러 빙고를 일체 금단하고 계(契)에서 운영하는 것 중에서 단지 여덟 곳의 빙고만을 남겼으니 전에 비하면 5분의 1이라 할 만합니다. 5분의 1로 줄어든 빙고에 저장한 양으로 5배의 수요에 대다 보니 얼음 값은 자연 크게 뛸 것인데, 얼음 값이 비싸지면 뱃사람들이 틀림없이 얼음을 많이 싣고 다닐 수 없어 생선이 문드러질 것이고 육전(肉廛) 상인 또한 항상 얼음에 재어 놓을 수 없어서 고기가 부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성 안의 사람들은 장차 생선과 고기를 맛보지 못할 것이고 강 주변의 백성들 또한 모두 생계를 꾸려 갈 직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 계인(契人)들은 강민들의 부역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핑계 거리로 삼습니다. 대저 팔강(八江)의 백성들이 얼음 3정(丁)을 뜨는 부역은 대단히 수월하였는데, 현재는 얼음을 뜨는 수고는 면제되었으나 도리어 방내(坊內)에서 하는 부역이 생겼습니다. 방역(坊役)이란 종묘와 사직, 각궁(各宮)과 원(園)의 눈을 쓸어 내고 잡초를 뽑아 없애고 도로와 교량에 대해 보토(補土)하고 모래 둑을 쌓는 일 따위인데 얼음을 뜨는 일에 비해 열 배나 많습니다. 강교(江郊)의 빈한한 백성들이 부역을 다니기 위해 10리를 오간다면 하루치 벌이를 잃을 것이고 하루치 벌이를 잃으면 3일 치 먹을거리를 잃게 될 것이니, 백성을 위해 부역을 면제해 주는 혜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안 백성들은 방역을 지고 강민들은 빙역(氷役)을 지는 것이 본래 오래된 법식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예전대로 하소서.
셋째는 강민들이 쟁송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것을 모른 채 부지런히 이끗을 좇아 오직 적은 돈도 반드시 차지하려고 다툴 줄만 알아서 일이 크건 작건 간에 걸핏하면 관(官)에 호소하다 보니 절로 급박해져 후풍(厚風)을 해치고, 온종일 법정에는 쟁송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고 때도 없이 여항에는 관차(官差)가 계속 나와 이로 인해 공사(公私)가 어느 때보다도 술렁거립니다. 대개 도성 안은 삼사(三司)의 당상과 낭청이 법에 따라 분쟁을 가라앉히고 외방의 향읍은 팔도의 수재(守宰)들이 교화를 펴서 다스리므로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는데, 이 팔강은 서울 지역도 아니고 지방도 아니어서 도맡아 다스리는 곳이 없다 보니 이런 쟁송의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연전에 다행스럽게도 각 계(契)의 존위(尊位)를 차출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이 일이 오로지 진휼할 빈호(貧戶)를 뽑기 위해서이지만 도리어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조치보다 효과가 큽니다. 차후로 만약 쟁송할 만한 일이 있으면 시비와 잘잘못을 먼저 존위에게 고한 다음 마을 전체의 공의(公議)를 따라 말미에 소견을 첨부한 것을 받아야만 비로소 법사(法司)에 가서 정소(呈訴)할 수 있게 한다면 간사하고 교활한 짓들을 절로 그만둘 것이고 사송(詞訟)도 절로 뜸해질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것저것 하느라 시골구석을 두루 돌아다니며 살펴본 적이 많았는데, 또한 외방의 폐막을 성상께 진달해 보겠습니다. 김포(金浦)와 고양(高陽)의 접경에 예부터 위어소(葦魚所)가 있어 사옹원의 관장(官長) 및 이례(吏隷)가 궐에서 나와 당도하면 공상(供上)하기 위해 그물을 던져 위어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잘못된 규례로서 지나가는 어선을 뒤져 고기를 찾아낸 다음 어선마다 2미(尾)의 생선을 거두고 1승(升)의 미(米)를 주던 예가 있었는데 방식이 오래되다 보니 폐단이 생겨 지금은 아예 미를 지급하지 않은 채 도리어 많은 수를 착취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 금하지 않는다면 말류의 폐단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진(鎭)을 설치하고 군졸을 배치하는 것은 곧 국방을 튼튼히 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해서(海西)의 영하(嶺下) 7개의 진은 현재 예전만 못하여 부대에 편제되어 있는 군졸들의 태반이 더러는 100리 밖에 있거나 더러는 수백 리 밖에 흩어져 있다 보니 한번 불러 모아 점명(點名)하려고 해도 실행하는 데 여러 날이 걸립니다. 생각건대, 한번 북을 울리면 모이고 한번 징을 울리면 흩어지는 법 및 10리마다 경계를 정하고 그 지역 군졸을 각 진에 획부(劃付)하여 군제(軍制)를 철저히 하고 관방(關防)을 엄중히 하려 한 본의가 지금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거나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걷는 것은 자고로 있어 온 폐단이라 더러 하루아침에 바로잡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폐단은 전적으로 세초(歲抄)할 때 한정(閑丁)이 부족한 데 빌미하는데 세초할 때 한정이 부족한 것은 건실한 정장들의 자리가 비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방곡(坊曲)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꾀를 내어 머리를 깎고 산에 숨었다가 그대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경우가 있고 군읍의 권세가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하는 짓을 일삼아 군교(軍校)가 되거나 이서(吏胥)에 차정되어 함부로 긴요하지 않은 데 소속되는 경우 또한 매우 많으니 세초할 때 한정이 어찌 넉넉히 남아 있겠습니까. 세초할 때 한정이 넉넉히 남아 있지 않다 보니 하려고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거나 죽은 자에게 군포를 걷는 폐단이 일어나고 맙니다. 만일 관례(官隷)에 함부로 소속된 경우는 일체 빼내고 헛되이 산문(山門)에 귀의한 경우는 모두 그러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이 부류들이 절로 한정이 될 것인데, 한정이 조금이라도 늘게 된다면 이 폐단은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환미(還米)를 징족(徵族)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주 가까운 일가붙이나 이웃에게 징구(徵求)하는 것은 그래도 간혹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만, 아, 저 촌외(寸外)의 친척을 끌어다가 지친(至親)이라 하고 나란히 있는 이웃을 억지로 한집에 산다고 우겨서 법에 걸린 것보다도 심하게 사람을 가두어 곡식을 내게 하고 태(笞)를 치며 독촉하므로 호소할 데 없는 힘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올해는 소를 팔고 다음 해에는 밭을 팔면서 불쌍한 생애를 이러다가 마치는데, 더러 집안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다른 도(道)로 피하여 셋방살이를 하거나 더러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도회에서 더부살이를 합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한심해집니다. 지금 이를 바로잡을 계책으로는 그나마 등급을 두어 나눔으로써 효과를 보는 것이 있습니다. 징족을 할 때 대상에 한계가 없지 않을 것이니 동성(同姓)과 이성 중에서 일정 촌수를 한정하여 징구할지 말지를 규식으로 정하고 그런 뒤에 이 한계를 어기는 경우는 드러나는 대로 논죄한다면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빙어잡이배에 대한 일은 경조(京兆)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빙계에 대한 일은 해고(該庫)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강민들의 쟁송 문제는 사송을 담당하는 아문으로 하여금 술렁거리지 않게끔 하고 차후로 금단하는 것이 좋겠고, 존위 운운한 것은 별도로 아무런 폐단도 생기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주원(廚院)에 대한 일은 해원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군정(軍丁)에 대한 일과 족징에 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중외에 각별히 신칙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한성부 판윤 김종정(金鍾正)이 ‘어선이 정박해서는 안 될 곳이 없고 빙어를 판매한 이익에 강민들이 의지하고 있는데, 을해(1755, 영조31) 연간에 합정리(合井里)에 사는 정수(鄭燧)란 자가 감히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에 한곳에 정박하도록 하는 일을 처음 벌여 연강(沿江) 백성들과 쟁송하였고 격고하여 상언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 문안(文案)이 쌓여 더미를 이루었는데 판결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임진년(1772)의 연품(筵稟) 및 을미년(1775)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모두 각처의 어선들은 각 강에 흩어져 정박하도록 정탈(定奪)한 바 있었으며 임인년(1782, 정조6) 2월에 또 정수의 격쟁(擊錚)으로 인해 본부(本府)에서 회계(回啓)했을 때 임진년과 을미년에 정탈한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근래 과연 어떻게 행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 일을 알고 있는 위아래의 연강 백성들을 불러 물었더니, 모두 다행히 성상의 은혜를 입고 각처에 흩어져 정박할 수 있어 백성들이 고르게 이익을 보아 달리 폐단이 없는데 오직 정수 한 사람만 매번 한곳에 정박하게 하려는 의도로 떠들썩하게 정소(呈訴)하므로 연강의 백성들이 송사에 응하느라 고달파 편안히 살 수가 없으니 이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곳에 정박하는 폐단은 중간에 이미 바로잡아 혁파하였으니 지금 논할 것이 없고, 강민들이 걱정하는 바는 오직 정수가 누차 송사를 일으키는 데 있습니다. 조정에서 그동안 이와 같이 엄하고 분명하게 처분을 내렸으니, 정수가 만약 차후로 다시 법사(法司)에 정소하거나 궁방(宮房)에 촉탁하고 외람되이 성상께 상언하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법사에 넘겨 엄히 형추(刑推)한 다음 정배하도록 통지하여 시행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어선들이 각처에 흩어져 정박한 뒤로 이익이 고르게 돌아가고 폐단이 혁파되었는데 정수란 자가 생선의 이익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데 불만을 품어 법사에 정소하거나 궁방에 촉탁함으로써 강민들로 하여금 그와 맞상대하느라 고달프게 하고 비용을 많이 낭비하게 하였으니 그의 심술을 따져 보면 극히 교활하고 가증스럽습니다. 신 조시준(趙時俊)이 형조를 맡고 있었을 때 이 일과 관련한 송사로 인하여 정수를 조사하고 치죄하였는데도 끝내 잘못을 고칠 줄 모르니, 차후로 혹여 다시 소란을 일으키면 한결같이 경조의 판윤이 논한 대로 엄히 징계하도록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이전에 지은 죄가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우니 어찌 다시 정소한 뒤라야 처벌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이치를 따져 초기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수의 종전 죄범에 대해 아직껏 해당 형률을 시행치 않은 것은 너무 관대히 처분한 잘못이 있으니 그를 징치함에 굳이 뒤미처 치죄한다는 것에 구애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그의 격쟁으로 인하여 해조에서 형률을 살펴 엄히 감처할 것을 청하자 장(杖)을 친 다음 배소(配所)로 보내라고 비답을 내리셨고 곧이어 나라의 경사로 인해 특명으로 용서하였으니, 지금에 와 새로 범한 것이 별로 없는데 이전의 죄범으로 인해 감처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전에 복계(覆啓)한 대로 혹여 다시 소란을 피우면 엄히 징계하도록 형조와 한성부 두 곳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경들의 말이 참으로 좋으니, 이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빙고 제조(氷庫提調) 정창성(鄭昌聖)이 ‘이번에 금군 최덕우가 진달한 소회는 곧 빙계(氷契)를 신설한 폐단에 대한 것인데, 생선이 문드러지고 고기가 부패할 것이라는 둥 강민의 방역(坊役)이 전날보다 심해졌다는 둥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과연 그가 말한 바와 같다면 빙계를 운영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어물전의 생선과 현방(懸房)의 고기가 문드러지고 부패하여 생업을 잃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얼음이 떨어졌다고 괴로움을 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니 무망(誣罔)하는 말임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계사년(1773, 영조49)에 선대왕(先大王)께서 강민들이 얼음 값을 마련하느라 고생하므로 특별히 내빙고의 얼음을 반으로 줄이라고 하교하셨고, 계묘년(1783, 정조7)에는 빙속(氷屬)과 부례(部隷)들이 민호에 얼음 값을 가렴(加斂)하므로 누차 칙교를 내리셨으며, 이 계(契)를 운영하고부터 강민들은 장빙(藏氷)하는 때가 되어도 대부분 편안히 지낼 수 있고 간혹 성안에서 눈을 쓰는 등의 잡역에 동원되더라도 경조에서는 한 차례씩 돌아가며 하도록 정해 놓았습니다. 때문에 예전에는 3, 4전(錢)을 거두어 빙정(氷丁)에게 내고도 간혹 부례들의 침탈을 면치 못하였는데 지금은 성안에 부역하러 오가는 데 쓰는 것이 많아야 2, 3전에 불과하여 고헐(苦歇)과 득실이 본디 현격히 다르니, 이 말은 더더욱 무망하는 것입니다. 어물전과 육전(肉廛) 및 강변의 뭇 백성이 원통하다고 하소연하지 않는데 유독 일개 최가(崔哥)가 대신 호소한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적으로 얼음을 판매하는 것은 본래 법으로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연강에 사는, 전에 현직(顯職)을 지낸 자나 반호(班戶) 중에 모리(牟利)하는 데 익숙한 자가 법을 어긴 채 사적으로 얼음을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빙계가 운영된 이후로 이익을 독점하지 못하고 또 값을 마구 올리지도 못하게 되자 온갖 계교를 써서 빙계를 기필코 망치려 하여 엄중한 법을 무시하고서 여기저기 청탁을 하고 심지어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지시하여 때로는 격고하게 하고 때로는 발괄하게 하여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민간의 풍습이 무너져 버린 것이 참으로 극히 한심하며 사정(私情)을 따라 아뢴 말은 받아들여 심리할 것이 못 됩니다.’ 하였습니다.
전에는 강 주변에 사사로이 얼음을 판매하는 곳이 없는 데가 없어 허다한 어선과 육전들이 대부분 여기서 가져다 썼는데 빙계가 설치된 이후로 여러 곳에서 사사로이 얼음을 판매하던 것을 엄히 금하여 막고 단지 계(契)에서 운영하는 여덟 빙고만을 남겨 빙계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가격이 급등하는 폐단과 어육이 부패할 걱정을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일 금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사사로이 여기저기서 얼음을 마구 판매하도록 한다면 계인(契人)들이 이익을 깡그리 잃게 될 것이니, 양화(楊花) 위 지역만 금하게 하고 합정리 밑으로는 모두 금하지 말도록 한다면 얼음이 점차 귀하게 되지 않을 것이고 빙계에 이익 되는 바가 있어 강민들도 억울하다고 할 단서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시행하도록 해고(該庫)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본사(本司)가 회계에서 말한 것과 제조가 말한 것이 다소 다른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으니 다시 제조와 상의하여 결론을 낸 뒤에 초기로 품처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해고의 제조 정창성이 ‘전에 장빙하기 위해 허다한 강민들을 동원했던 것을 계인 수십 인으로 하여금 대가 없이 담당하게 하였으니, 계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법으로 정하지 않은 사적인 판매가 금지되어 빙계의 얼음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번에 비국은 회계에서 합정리 밑으로는 금하지 말도록 하자고 운운하였는데, 사적으로 얼음을 판매하는 반호는 모두 합정리 강변 이하에 있는바 이 지역에서 금하지 말도록 하는 것은 곧 판매를 허락하는 것이니 이른바 빙계에서 얼음을 판매하는 것은 가만 두어도 절로 결딴이 나고 말 것입니다. 만일 빙계를 혁파하고 사적인 판매를 허락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강 주변에서 사적으로 얼음을 판매하고 있는 반호를 죄다 선정하여 빙계 소속 백성들이 했던 예를 그대로 준용하여 국역(國役)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정이나 백성이나 둘 다 매우 온편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전면적인 시행을 어렵게 여기는 까닭은 오로지 빙고 8개와 30개는 그 수효가 현격히 다른데 어선이나 육전에서는 이전처럼 얼음을 사서 쓸 것이므로 형세상 틀림없이 계인들이 얼음 값을 마구 올려 이익을 독점하고 빙어는 부패하여 그 값이 크게 뛰어 경외(京外)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니 사적으로 판매하는 자들의 일거리가 끊긴다거나 얼음을 져 나르는 자들이 이익을 잃는 문제는 신경 쓸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제조는 이 문제에 대해 끝내 폐단을 바로잡을 방안은 말하지 않은 채 단지 계인들이, 강민들이 지던 부역을 대신 맡고 있다는 이유로 그저 일절 금하려고 하여 신들과 끝내 의견 일치를 보기 어려우므로 실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화 위 지역 중에 사적으로 얼음을 판매하는 곳이 8, 9군데를 밑돌지 않으니 이곳에 한해 금지하도록 한다면 계인들이 충분히 이익을 볼 것입니다. 전에 복계한 대로 합정리 밑으로는 모두 금하지 말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차후에 다시 도로 운영할 수 있도록 청한다면 그때 과연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우선 다시 충분히 상의하여 차대(次對)할 때 품처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옹원 도제조 서명선(徐命善)이 ‘협선(挾船)을 타고 다니면서 생선을 사들이는 것은 본디 어살을 설치한 뒤로 전해 오는 규례인데 잡은 고기를 찾아 모을 때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지 않고 값을 치를 때 더러 도중에 돈이 없어져 버리는 문제가 있어 강변의 어부들이 매번 이 문제를 본원에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가을에 절목을 만들어 허다한 폐단들을 조목마다 낱낱이 조사한 뒤 어부들을 모아 놓고 일일이 효유하였는데 어부들이 다들 폐단을 바로잡는 방책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미처 이를 준행하기 전에 갑자기 이런 소회를 진달한 것은 아마도 작년에 변통한 것을 들어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기를 잡을 시기가 머지않으니 한결같이 새로 만든 절목대로 유념해 거행함으로써 조금도 폐해를 끼치지 말도록 다시금 해당 어관(漁官)을 신칙하는 것이 적절하고 옳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미(米)를 주고 생선을 사들이는 규례는 전에는 폐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바로잡았고 절목을 상세히 갖추어 강민들이 편하다고 하는바 최덕우가 진달한 소회는 아마도 미처 들어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듯합니다. 바로잡아 고치려는 초기에는 단단히 일러 둔 것 같더라도 조금 오래 지나고 나면 쉽사리 해이해지기 마련이니, 한결같이 새로 만든 절목대로 준행하도록 엄히 신칙함으로써 실효를 거두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폐단의 시정 조건에 대한 절목의 조어(措語)를 해원(該院)에 물어 다시 초기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본원의 절목을 가져다 살펴보니, 첫째는 협선의 사공과 격군들이 여러 해 폐해를 끼쳐 그동안 빙어잡이배의 뱃사람들이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 폐단의 근원은 대개 신원이 확실치 않은 부류가 매년 도모하여 차첩(差帖)을 얻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고 패악을 부리느라 못하는 짓이 없는 데 있으니 차후로는 협선의 사공과 격군들의 차출과 관련하여 각사에서 표지(標紙)를 발급하는 것을 정지하는 일이고, 둘째는 협선의 격군은 이 일을 맡은 천호 어부(千戶漁夫)로 하여금 각별히 골라 정하게 하여 이전대로 2명이 수행하는 것으로 하되 반드시 어부 중에 착실하여 합당한 자를 정하고 하는 일 없는 잡인은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는 일이고, 셋째는 천호 어부들이 협선을 타고 일을 거행할 때 혹여 어선에 폐해를 끼쳐 규정 외로 함부로 침범하거나 혹은 일을 태만히 하여 생선을 사들이는 일이 낭패를 보면 그 경중에 따라 낱낱이 징치하되 아주 심한 경우는 어부의 본호(本戶)를 영구히 제태(除汰)하는 일이고, 넷째는 전에 협선이 폐단을 일으킨 것은 늘 어살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거나 으슥하고 외진 강의 갯가였으므로 어관이 금단할 방법이 없어 그들의 행악이 해마다 늘어나니 차후로는 협선을 타는 천호 어부는 신곡(薪谷)과 행주(杏州) 근처에서만 생선을 사들이고 절대로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고, 다섯째는 협선의 사공과 격군들이 돌아가며 생선을 사들일 때 교활한 무리들이 그들이 순번을 바꾸는 틈을 타 협선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대며 어물을 속여 빼앗는 경우가 더러 있고, 왕래하는 뱃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이 바뀌어 헛갈리고 진위(眞僞)를 알지 못해 생선 팔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 차후로는 생선을 사들이는 천호 어부를 차송(差送)할 때 몇 두(斗)의 값으로 몇 마리의 생선을 사 오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고 관인(官印)을 찍은 패자(牌子)를 작성하여 발급함으로써 빙고(憑考)할 수 있도록 하고 사 온 뒤에는 어느 지역 어느 배에서 무슨 생선을 몇 마리 사 왔다는 내용으로 일일이 패자에 주(註)를 달고 뱃사람들이 값을 받아 갔는지의 여부 또한 현록(懸錄)하게 함으로써 관(官)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고, 여섯째는 빙어잡이배가 오갈 때 협선의 사공과 격군들이 혹여 예전처럼 농간을 부려 계방(契房)이라고 하면서 중간에서 돈을 요구하거나 큰 생선을 찾는다며 배 전체를 뒤지는 등의 거폐(巨弊)가 하나라도 있으면 빙어잡이배의 뱃사람들은 즉시 관에 고하여 그들을 징치하고 뱃사람들도 혹여 생선 파는 것을 꾀를 부려 피하는 폐단이 있으면 협선의 천호 어부가 붙잡아서 관전에 고하여 각별히 징치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조건들은 실로 상세히 갖추어져 있고 어부들도 한목소리로 편하다고 하니 해원에 분부하여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비답하기를,
“절목이 매우 상세하니 초기한 대로 시행하라.”
○ 금군 신대창(辛大昌)의 소회에,
“용산(龍山)과 서강(西江)은 곧 팔강(八江)의 들머리여서 국초(國初)부터 용산에는 군자감(軍資監)을 두고 서강에는 광흥창(廣興倉)을 두었는데 거주하는 백성이 매우 적어 수호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성을 모집하여 옮겨 살도록 하였으나 살아갈 길이 막막하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진념하여 두 창고의 주변에 싸전을 설치하라고 명하여 생계를 넉넉히 꾸려 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용산은 중간에 가게 터 앞에서 살옥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전인(廛人)들이 뜻밖에 닥칠지 모를 침해를 잠시 피하기 위해 임시로 마포(麻浦)에 가게를 옮겨 설치하였는데 살옥이 미처 해결되기 전에 한두 달 동안 보내다가 그 이후로 그대로 눌러앉아 지금까지 본래 터로 다시 옮기지 않았습니다. 용산에 사는 백성과 부근 마을에 사는 백성이 4, 5천호(戶)를 다 채우고 조석으로 마포의 시장에서 매식(買食)을 하고 있는데, 용산에서 마포까지는 혹 4, 5리 떨어져 있거나 혹 10리나 떨어져 있는 데다 중간에 큰 고개가 가로막고 있어서 봄여름에 장마로 물이 불어난 때나 가을 겨울에 빙설로 길이 덮인 때에는 길이 막혀서 앉은 채 굶주리는 자가 반이나 되니, 백성의 폐막이 되는 것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마포와 용산에 각각 시장을 설치한다면 참으로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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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평〔女眞坪〕 [DCI]ITKC_BT_1550A_0040_000_0070_2021_001_XML DCI복사
교리 이명연이 외직으로 단천(端川)의 이동 만호(梨洞萬戶)에 보임되었다가 돌아온 뒤 나에게 말하였다.
“본진(단천진)에서 북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은룡덕(隱龍德) 봉대(烽臺)가 나오는데 북방 풍속에 산꼭대기를 ‘덕(德)’이라고 합니다. 봉대에 오르면 멀리 여진평(女眞坪)이 보이고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북쪽으로는 무산(茂山)과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갑산(甲山)과 접하며 둘레는 700리라고 합니다. 서북쪽 3, 4십 리쯤에 어떤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빙 두른 것이 성과 같았습니다. 성안에는 백탑(白塔)이 촘촘하게 있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진졸(鎭卒)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이름이 무엇인가?’
‘만탑(萬塔)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과 탑은 필시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가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너는 이 여진평을 거닌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살펴보건대 여진평을 사서의 지리지에서 상고해 보니 아마도 고구려 동명왕이 도읍한 졸본천(卒本川)인 듯하다. 만탑은 아마도 《위서》에서 말한 흘승골성이고, 졸본은 솔빈(率賓)이다. 내가 《발해고》를 지으면서 삼수와 갑산 등지를 솔빈부로 비정했었다. 이것을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당서》에서는 솔빈마(率賓馬)라고 했는데, 삼수와 갑산 골짝 안에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이 부분을 상당한 결점이라 여겼는데, 이제야 갑산과 단천 사이에 여진평이 있고 단천에서는 좋은 말이 생산되는 줄을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하나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진평은 옛날에 야인들의 소굴이었다. 이동(梨洞), 쌍청(雙靑), 황토기(黃土岐) 등의 진은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야인이 없어 여러 진장이 텅 빈 여진평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매우 무의미하다. 게다가 그 땅을 버려둔 채 경작하지도 않고 가축을 기르지도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 이 교리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진에 있을 때 유람하면서 들판 중앙을 이리 떼가 질주해 가는 것을 보기도 했고, 영양(麢羊)이 절벽에 뿔을 걸고 잠자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촌락은 영성한 데다가 여러 진장에게 가렴주구를 당하기 때문에 곤궁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었고, 또 사냥할 줄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인용 한국 고전종합db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